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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가 빈, 집에 아드님.
장손의 귀향에도
종갓집은 되려 허허롭다.
아버지, 권 헌조가 없는
권 헌조, 그가 없는
아드님 동재,
고택 송석헌.
- 송석헌, 두번째 방문 ; 2010년 9월 17일 오후 2시
이듬해 봄, 홀연히
동재님의 부고가 전해졌다.
왜? 물론, 병색이 완연하셨다. 하지만, 왜..
아버지 권 헌조 옹이 돌아가시고 백일도 지나지 않았다.
- 2010년 12월 13일, 향년 83세 권 헌조 별세.
- 2011년 3월, 장남 권 동재 별세.
- 송석헌, 네번째 방문 ; 2012년 12월 8일 오후 4시
고택 송석헌과 노인 권헌조 이야기, 아버지의 집
또는 집과 노인 그들과 권산의 이야기는
2010년 7월 8일, 첫 방문으로 열었고
그해 12월 16일, 권옹의 장례로 끝맺었다.
원형의 송석헌과 마지막 선비 권헌조의
마지막 6개월 간을 기록한 권산의 사진과 글은
올해 2012년 11월 25일, 도서출판 반비에서
사진 에세이집으로 엮었다.
'노인에 대한 같은 기억으로.'
그래, 할아버지..
쓰라리다. 명백히.
맘에 들어 오셨던 거다.
늙음이 멋지다는 느낌으로 상쾌했던,
늙음이 속절없는 건 아니구나 싶던.
인간도 나무처럼 나이들 수 있구나,
세상에 나무처럼 아름다울 수 있다니.
- 아버지의 집 ; 첫번째 방문, 노인과 집은 하나였다.
' 언덕길을 거의 다 올라서서, 다시 노인은 숨을 고르셨다.'
' 부모님과 조상님들의 산소가 있는 집 뒤의 산.
하루 전, 노인이 오른 언덕길이 참 정갈하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이 아침에 주관적인 해석으로 명확한 이유를 알았다.
그 길은 오직 하나의 목적만을 위한 길이었다.
그 길에는 잡념도 공상도 없었다.'
' 다시 내려선다.
..
노인과 집은,
하나였다. '
이른 5시 41분, 안동 권씨 성의 그이들.
촬영은 어디까지나 목적과 쓰임을 둔 기록이었다.
방문 전날 7월 7일, 한통의 전화가 있었다.
담날 이후면 한 고택의 원형이 사라진다고,
전면적인 보수 공사를 하루 앞두고서
원형을 반드시 기록해둬야 한다고
애초에 당신이 스틸을 담당하기로 했다고.
시놉 스텝에도 당신 이름이 나와있지 않냐고,
- 정작 당사자 권산은 모르고 있었으나 -
KBS 일요스페샬 고택, 송석헌 촬영에
엉겁결, 찍사?로 반강제된 셈이다.
' 마루를 올라 방으로 드셨다. 5시 55분.'
독특하다 못해 아스라한,
그 집이 송석헌이었다.
어른의 신 앞에서 아릿해져
정갈히 해드리고 싶었지만.
그러나 주제넘은 일일지도 몰랐다.
안주인의 부재가 하염없다.
그녀,가 보셨다면 슬피 우셨으리라.
그이, 보송보송 정갈한 이부자리와 의복은,
언제, 언제 그만이신가. 멀쩡한 기세도
병색이 들고도 남을 침소가 아닌가.
' 1953년 조부 권종도가 돌아가시다. 조부는 젊어서부터 퇴계문집을 교정할 수 있는 유일한 학자로
꼽힐 만큼 영남 지역에서 이름이 높은 학자였다. 이런 조부에게서 글과 예를 배운 권헌조 역시
덕망이 높아 배움을 구하러 오는 제자들이 많았다. '
- 안동 권씨 검교공파 사복재 6대손 동애 권헌조 연보 중에서 -
권산의 기록은, 필사적이리만큼 집요했고
마치, 다시는 없을 한 인연과의 찰나를 알아차리기라도 한듯
한 호흡도 쉬이 내지 않았다.
이미 정해진 이끌림이었다.
부름과 응함, 인연들의
선택과 결정이었다.
'햇볕으로 나섰다'
' 이제 곧 이 집은 일단 원형을 잃게 될 것이다.
사람이 사는 집을, 그것도 300년을 이어서 살고 있는 집을
수리하는 일은 당연한 것이다.
그러나 불과 100년 전의 수리와
지금의 수리는 의미와 결과가 다를 것이다. '
'나는 턱없는 욕심을 내고 있었다.
채용신이 그린 간재 艮齋 전우 田愚의 초상화를 생각했다.
전신사조 傳神寫照 '
채용신의 전신사조를 흠모한다.
그의 초상화 기법은, 그의 인물은
오늘도 '생존'한다.
어디까지 청명해야 심오해야 광활해야 종이 한장에
생을, 온전히, 누려놓을 수 있는가.
붓과 물감이 아닌 빛과 어둠의 기호로
권 옹을 영원히 생존시키려는
전신사조로서의 진심.
묵음,에 가까운 현장음을 담느라
권산의 셔터음마저 곤혹스러웠다.
팔순 노인과 삼백년 집의 숨을 기록하는
작업은 오롯한 고요로부터다.
'방으로 드셨다.
최근에는 이렇게 누워 계신 시간이 대부분이다.
금년 남은 시간 동안 계속될 공사로 인한
소음 속에서 노인은 어떻게 생활할 수 있을까?'
촬영을 마치고 침소에 드신 모습에서 덜컥 겁이 났다.
참으로 힘드신게다. 혹, 이미 너무 아프신 건 아닌지. 문제는
집수리가 아니라 당장에 할아버지의 몸수리가 아닌가.
이층 높이로 돋우어, 테라스?까지 있는
삼백살 집이라니.. 이런 곳에서
안주인은 어떤 살림을 사셨을까.
내부 방앗간 시설?까지 보였다.
입구에 세워진 송석헌 안내문을 참고해 보자면
송석헌 松石軒
중요 민속자료 제 249호
소재지 : 경상북도 봉화군 봉화읍 석평리 320번지
이 건물은 동암 권이번 (1678 ~ 1763) 선생의 아들인
권명신 (1706 ~ 1778)에게 지어 준 살림집이다.
선돌마을 입구에 자리잡은 이 집은 경사진 지반을 이용하여
ㅁ자형 정침과 영풍루, 선암재, 방앗간, 대문, 사당 등 7동으로 구성된
영남지방 사대부 저택의 면모를 고루 갖추고 있는 가옥이다.
무엇보다 내게 가장 아름다운 곳은
길다란 난간으로 이어진 사뿐사뿐 부엌.
부엌 안으론 ㅁ자형 안채로 닫힌 듯 은밀한데
부엌 밖으론 개방형이니 환기와 빛이 참으로 좋을 것이다.
공중에 떠있는 부엌이라니, 너무나 로망이다. *.*
차마 살림을 세세히 살펴볼 얼굴은 없어 틈새로만 슬쩍.
활달히 넓직하고 빛이 아예 부드러워 아, 안주인께서
살림재미가 깊으셨겠다 싶었다. 옆방은 일종의
식당방이니 내부로도 물론, 통하리라.
기간으로 보자면 이미 시작되었을 수리이나 여튼 담날로부터
그리고 완공은 분명 이듬해로 넘어갈 것이다. 그때까지,
제발이지 할아버지가 건강하시길, 무탈하시길 빌며
첫번째 송석헌 길을 가졌다.
- 아버지의 집 ; 두번째 방문, 아름다운 뼈
- 집수리와 몸수리
2010년 9월 16일 오후 네시.
''전화상으로 확인한 네가지 촬영 미션이 있다.
역시 우선 순위는 공사 중인 집을 촬영하는 것이다.'
이개월 후 방송국으로부터 권산은 단독 촬영을 의뢰받고
두번째 길을 나섰다. 마침 할아버지는 보수 중인 집을 떠나시어
요양차 병원에 계신다 들었다. 맘이 놓였다. 적어도,
방치되지는 않으시리라. 이부자리도, 식사도..
할머니가 계셨을 ㅁ자 안.
쓰레기가 걷고 드러난 섬세한 골격의 안채는
나즈막한 툇청이 자상하고 뒷문과 창은 생긋 생긋 온화하며
시원스레 이어진 와이드형 구조는 바람이 부드럽고
빛도 은은히 화사하였으리라, 이제는 더이상
누추하지 않아, 차라리, 다행이었다.
' 헛소리라고 해도 촬영을 하는 동안 나름으로
작업 전체를 관통하는 미학이 있었다.
집은 세월의 흔적을 간직하고 있었다.
11월만 되어도 벽 작업을 하지 못할 것이다.
기온이 내려가면 흙을 붙이기 어렵다.
송석헌의 보수 공사가 약속된 일정을 지킬 수 없는 결정적인 근거다.
공사 자체는 예산으로 진행하는 일이니 일만 제대로 한다면
별 문제는 없지만 집 밖으로 나가 계신 어르신의 불편이 길어질 것이다.
송석헌은 '아름다운 뼈다귀'였다.'
권산은 한시간 정도 촬영을 하였고
그의 말마따나 '뼈다귀 속을 헤집는' 날것의 기록 이었다.
이제 할아버지를 뵙기로 했다. 봉화읍으로.
'9월 16일 6시 무렵. 봉화읍 해성병원.
'혜성병원'을 검색해서 내비게이션에 나타나지 않았다.
봉화와 나의 내비게이션 검색은 궁합이 아닌 모양이었다.
해성병원이었다. 군립병원이었다. 병원은 낡고 정갈했다.
3층 노인요양원에 권헌조 어르신이 계셨다.
병실로 들어서자 담배 냄새가 났다.
" 여기서도 피우세요. "
" 답답해."
우리를 진심 반겨주심이 또렷하였다.
안색도 2개월 전과는 비할 바 없이 맑아 비로서 맘이 놓였다.
다시 또, 보고 싶었다. 할아버지..
' 잠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문병을 오시는 분들이 계신지,
종종 있다고 하신다.
불편한 곳은 어디신지,
빨리 집으로 가고 싶으시단다.
이내 누우신다.
이야기를 나누면 쉽게 피곤해지고 어지럽다고 하신다.
하지만 상황만 허락한다면 대화를 즐기는 분이다.
노인의 권위를 전혀 앞세우지 않으시는 분이라
나 역시 노인과의 대화가 즐겁다. '
자리에 드신 할아버지를 보고
봉화읍에서 하루를 묵었다.
담날은 그이 세 번째 미션인 봉화장 촬영.
시골에서 젤로 재미난 구경 중에 하나가 5일장이 아닌가,
구례장도 제법 크다 칭송인데 과연, 봉화장은?
' 동쪽으로 산을 넘어서면 동해다.
울진으로 통한다.
해산물도 풍부해 보였다.
북부 경북에서 많이 생산되는 사과가 많다.
사과는 9월 중순이 넘어서면 장이 아니더라도,
읍내에서 아침마다 경매 시장이 열린다고 했다.'
' 복숭아도 옛날의 그 나무가 남아 있는지
짙은 향의 작은 놈ㅇ 간혹 보였다.
개복숭아라고 불렀는데....
장은 풍성했지만 사러 나온 사람보다
팔러 나온 사람이 더 많아 보였다. '
' 다시 봉화읍 해성병원.
장터 촬영을 끝내고 병원으로 갔다.
지난 밤의 어르신 사진이 너무 어두운 듯했고
식사하시는 모습을 담고 싶기도 했다.
역시 앉아 계셨고 역시 담배 냄새가 났다.'
늘 한결같은 할아버지의 손.
몸 중앙에 가지런히 모우고 부드럽게 엮어 두신다.
그와 같은 공경심이란, 손의 표정.
' 병원비도 부담스럽다고 하신다.
진지 드신 후 병원을 빠져나왔다.
" 다음에 뵙겠습니다." 말씀드렸지만 언제가 될지 기약할 수 없다.
현재로서는 내 인생에서 만난 가장 인상적인 노인이다.
주장하지 않는 노인.
좌중을 말의 '양'이 아닌 '질'로 집중시킬 수 있는.
마지막 미션을 위해 다시 송석헌으로 이동했다.'
'권동재 權東載,
권헌조 옹의 큰 아드님이시다.
카메라에 특히 비협조적인 이 어르신을 촬영하는 일은
아무래도 나에겐 출발 전부터 부담스러운 일이었다.
그래서 가능하면 촬영 팀이 봉화로 내려오는 날
KBS 라는 방패를 앞세우는 방법이 용이할 듯했다.
특이하게도 스틸을 사용하는 프로그램이다 보니
촬영당하는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같은 장면을 두 번 겪는 것이다.
다시 인사를 드렸다.
35대이시니 나에겐 할아버지뻘이 되신다.
이런 경우 같은 집안임을 내세우는 것이 조금 유리하다.
"할아버님, 저하고 산소에 한 번만 올라가시지요."
권산이 동재 할아버님을^^ 모시는 사이에
나는, 그분이 동물 애호가란 생각을 하고 있었다.
첫번째 방문에서도 뒤란의 토끼장 겸 닭장이 인상적이었는데
사람이 기거해도 좋으리만큼 넓직하고 쾌적하였다.
동물들의 몸 상태도 단정하였으며 별 근심이 없어보였다.
정문을 들어섰을 때도
젤 먼저 눈여겼던 것이 강아지 집으로
이중,삼중으로 감싸다 못해
멋들어진 강쥐 전용 그늘막이라든가,
강아지와 객을 동시에 배려한 듯
대문을 바로 보지 않게 아이 집을 옆으로 돌려 잡았다거나
비가 새거나 튀어 가지도 않도록 철판 지붕에 기와판 고정,
쑤욱 앞으로 내어놓은 특수?제작 비닐막까지-
송석헌 사람들의 세심한 손길 안엔 역시
할아버지를 꼭 닮은 조그맣고 고요한 강아지,,
객들은 개의치 않고 그저 물끄러미
동물들만, 담배만.
이와 같은 마음결이란..
' 지난 7월 9일,
어르신이 오르셨던 동선을 염두에 두었다.
그때 포커스를 생각하면서 촬영했다.
동일한 상황에 놓인 두 인물의 비교라기보다 데자뷔에 가까웠다.
생김, 몸짓, 스타일 모두 그러하다.'
' 다르지만 같은 사람의 뒷모습을,
같은 길에서,
나는
뒤쫓고 있었다.'
' 권헌조 옹이 병원에 계신 동안 권헌조 옹의 발걸음마다 풀이 올라왔다.
그 흔적은 명확했고 파릇했다.
계시건 계시지 않건 권헌조 옹의 흔적은 또렷했다.'
'집을 수리하는 동안은 봉화에 계실 모양이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주로 내가 질문을 던졌고
마지못해 그가 답했다. 쉽게 접근하기 힘든 분위기였는데
막상 대화를 나누어보니 말씀이 명확하고 막힘이 없다.
..
나의 혀는 단지 사진을 위한 것이었다.
나의 진정성이 얼마나 투여되는 것인지 스스로 가늠하지 못한다.
역광에 투영된 그의 무게는 새털처럼 가벼웠고 내 마음은 무거웠다.'
' "그곳에도 고택이 하나 있지? "
내가 살고 있는 구례를 말씀하시는 것이다.
" 예. 운조루라고 큰 고택이 있습니다. "
" 옛날에는 참 많이 돌아다녔는데........"
" 구례로 한 번 오십시오. 모시겠습니다. "
" 이제 힘들어....... "
그의 모든 말은 끝이 흐렸다.
그의 어깨에 송석헌이 내려앉아 있었다.'
' 그 오후로 나는 봉화를 떠났다.
부석사를 바라고 올라갔다.
촬영 팀은 추석까지 촬영을 결정학 봉화에 남았다.
이번 촬영도 역시 힘들었다.
역시 물리적 이유만은 아닌 듯하다. '
어느 때보다 권산은 방전되었고, 그렇다 못해 소진되었다.
우리도 휴가란걸 가보자 부석사까지 왔는데 갈수록 침울한 것이다.
내 느낌이 맞다면 분명, 그에게
어떤 감정이 회오리치는 듯 했다.
그렇다면 그는, 그 한복판을
오직 홀로 부대끼며 지나고 있으리라.
'돌아와서 며칠 지나지 않아 두 차례의 촬영 사진을
정리하고 보정해서 보내주어야 했다.
사진을 만지는 동안 나는 여전히 봉화 송석헌 속에 존재하고 있었다.
현장에서 나는 겉돌고 있었는데 사진 속 송석헌에는 내가 있었다.
단순히 풍경을 찍는 일이 아닌, 내 사진이 주문에 의해 만들어진다는
드문 경험 때문도 아닌, 이유를 알 수 없는 다른 그 무엇이
나의 마음을 힘들게 했다. 어느 여름의 힘겨운 촬영은
나에게 단순한 하나의 일이었을까.
내가 다시 송석헌을 찾게 되는 날이 있을까.
왜 우리는, 무엇인가를 그리워하는 것일까.
나는 부지불식간에 송석헌을 그리워하고 있었다. '
그로부터 3개월이 흐르고
우리는 할아버지의 부고를 들었다.
마지막 가시는 길까지 그가 기록하게 되었다.
원래 12월 12일 방송 예정이었으나 차후로 연기되었다.
그러나 프로그램은 이미 편집이 끝난 상태라서
스틸 몇 장을 덧붙이기로 한 것이다.
그 길은 동행하지 않았다.
이틀 후 새벽, 얼음눈길을 달려 돌아온 그는 유령처럼
퀭하였고 다시금 방전되었고 숨도 없이 잠에 들었다.
그 모든 기록과 사진의 원형은 다음과 같다.
할아버지를 첨 뵈러 갔던 날은 삼십도는 되어서
권산이 사진을 찍는 동안 그늘 아래로 도망하였다.
차문을 열어놓고 맨발 하여 갖고 온 몇 권의 책을 읽는데
플러그를 뽑은 사람들,에 나오는 몇 몇 이들의 삶.
그들은 비주류로 그래서 세상의 주된 흐름에서 자유롭고
스스로 선택한 삶의 방식을 누구보다 존중하고 또한 즐기고 있었다.
한마디로 온갖 기기묘묘한 세상사에도 자신이 하고자 하는 일을,
때로는 해야하는 일을 매순간 다해갈 뿐이었다. 또한, 때로는
세상일이 자신의 생각과 다를 때 그저 침묵하지도 않았다.
텍스트를 펴내어 생각을 알리고 나누고 연대하였다.
자체 어떤 상업적 메카니즘도 허용하지 않았다.
사고파는 것, 반대하지 않는다. 특히 사는거, 나 좋아한다. 하하
하지만, 가치와 의도, 만큼엔 개입되지 않았으면 한다.
여튼, 이런저런 생각이 깊어가는데
나무아래 바람이 참으로 시원하다 더위를 식히는데
그래도 나도 휴가구나 하는데
나비,가 왔다.
' 무겁지도 심각하지도 않은 유학자.
포장이나 가식이 없는 노인.
자신의 삶이 스스로 당연한 자연인.'
칭송이 자자한 학자이나 농사와 집안살림도 도맡으셨으며
연로하신 부친을 봉양하느라 봉화장까지 나무짐을 몇 채나 하여,
반찬거리를 장만해 오셨다 들었다. 또한 그 와중에도 학문을
갈고 닦길 즐기시니 한학 교수나 전공자들이 받은 가치는,
도무지 헤아릴 수 없다,한다.
팔순 노인의 소멸,에
젊디젊은 제자 한분은 아깝다, 우셨다.
그래, 오늘 젊은 우리에게도
이와같은 노인이 늙음이 있는가.
없다면, 아무리 둘러봐도
보이지 않는다면..
그렇다고 해서, 앞날이
어둡기만한건 아니다.
나부터 내가 바라는 사람이 되어가면 된다.
권헌조처럼 나무같이 아름다운 늙음.
길이 없으면 나부터 길을 만들고 그조차 힘들면
나라도 한걸음 딛을 길이 되면 된다. 그렇게 또
우리는, 한걸음이라도 나아갈 수 있을테니까.
할아버지를 더이상 뵙진 못하지만 괜찮다.
나의 삶에 그리고 권산의 이야기로 '생존'하신다.
그리고 여기 우리 시간 속에.
할아버지와의 만남에 홀연히 나타나
나비의 춤을 추다 돌아간 전령마저
전할 수 있어서.., 그지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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