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석양(우리 집에 가서 재밌게 놀자)/윌리엄 포크너 우은희
화자 퀜틴은 제이슨의 9살난 장남으로 15년전 낸시의 일을 적고 있다. 흑인 여성인 낸시가 남편의 위협으로 인해 극심한 공포를 겪는다. 몇 쪽 안되는 분량의 글이지만 곧 죽을 것 같은 공포를 실제같이 느끼게 된다. 어떤 영상보다도 더 생생하다. 아무에게도 무엇에게도 도움을 받지 못하는 현실에서 더글로리의 ‘문동은’을 보는 것 같다.
낸시는 은행 직원에 침례교 집사였던 백인 양반 스토벌에게 미납된 성매매 비용을 받아내기 위해 싸웠다. 다른 남편들처럼 빨래감을 날라다 준다거나 하지 않는 것으로 보아서 이전에도 친절하지 않았던 남편 지저스는 낸시의 임신 이후에 폭력성을 더 드러냈던 것 같다.
이가 빠진 곳이 조금 꺼진 낸시의 얼굴은 슬프면서도 거만한 데가 있었다고 묘사되고 있다. 슬프면서 거만한 얼굴이 상상이 되었다. 슬픔은 자연스럽게 드러나는 얼굴이고, 자기를 보호하며, 자기 존엄성을 잃지 않으려고 애쓰다 보면 그 애씀이 너무 넘쳐서 거만함으로 비쳐질 수 있다.
바위 같기도 하고 풍선 같기도 한 보따리를 머리에 이고 한치 흔들림없이 걷는 모습, 때로는 무릎으로 기면서도 보따리를 떨어뜨리지 않는 모습이 9살 어린이의 눈을 빌어 길게 묘사하고 있다. 바위와 풍선은 극과 극인데, 머리에 인 그 빨래 짐이 바위 같을 때도 있고 풍선처럼 가볍게 느껴질 때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제이슨 가족을 위해 밥을 해주던 딜지가 병으로 나오지 못하자, 한동안 제이슨은 낸시에게 아침밥을 부탁했다. 아이들을 보내서 낸시를 데려오곤 했다. 낸시의 남편 지저스와 마주치지 않도록 제이슨은 그의 아이들에게 그녀의 집에서 좀 떨어진 곳에서 낸시에게 말을 전달하도록 시킨다.
아이들은 낸시가 나올 때까지 낸시의 집의 문에 돌멩이를 던졌다. 마치 동물원 우리 앞에서 쉬기 위해 들어간 동물들을 깨우듯이 나뭇가지며 먹이나 돌을 던지는 장면이 연상되었다. 언어로 하는 소통 대신.
혼자 밤길을 걸어 집으로 가는 것도, 집에서 혼자 머무는 것도, 어둠도 두려워하는 낸시를 매번 데려다줄 수 없게 되어 짚으로 만든 요를 만들어 제이슨 집 한켠에서 기거하게 되는데, 결국 그곳에 지저스가 왔다. 진짜로 온 것인지, 낸시의 환상 속에서 왔던 것인지 알 수가 없다. 정말로 온 것이든 환상 속에서 온 것이든 둘다 같은 크기의 공포일 것이다.
‘하느님은 아셔, 하느님은 아시고 말고’ 이 혼잣말이 슬펐다. 보이지도 않고 만져지지도 않는 하나님 말고는 알아주는 이가 없다.
낸시가 커피를 마시는 장면 묘사도 마음에 와 닿았다. ‘팔꿈치를 무릎에 대고...’, ‘커피잔을 두 손으로 감싸 쥐고...’ 팔꿈치를 무릎에 대기 위해서 몸을 앞으로 기울여야 한다. 머리는 앞으로 쏟아질 것 같을 것이다. 눈길은 바닥을 향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낸시가 자주 낸 ‘그 소리’, 말 이전의 말일 것이다. 말보다 먼저 나오는 소리.
나에게 클라이막스는 ‘우리 집에 가서 더 재밌게 놀자’이다.
‘하나님은 아시지’만, ‘하나님은 다 아시고 말고’ 이지만, 어둔 밤, 지저스에 대한 공포를 같이 겪어줄 체온이 없으시다. 너무 자주 하나님은 너무 멀리 계시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마음으로 어린 세 아이가 동행해 주기를 바라며 아이들을 꾀는 낸시가 가엾다. 혼자 사는 여성들에게 남자 신발을 몇 켤레 갖다 두고, 남자 옷을 건조대에 걸어 두라고 말하는 이들이 있다. 그렇듯이 낸시는 집으로 돌아가는 어둔 길, 자기가 혼자가 아니고, 여러 사람이 자기와 동행해 주는 것처럼 하기 위해 큰소리로 말하며, 있지도 않는 제이슨씨를 불러가며 말한다.
아는 옛날얘기가 있을 리 없는 낸시는 급하게 이야기를 지어 아이들을 붙잡아 두려 하지만 재미있는 이야기가 나올 턱이 없다. ‘여왕은 나쁜 사람이 숨어 있는 도랑으로 걸어 갔단다..’ 여왕과 도랑이라니. 빨리 자기 집으로 가서 빗장을 잠그려면 도랑을 건너야 하니까.
왜 집에 가서 빗장을 잠그려는 건가요.
침대 밑의 망가진 냄비, 타버린 팝콘, 램프 심지 연기, 보채는 아이들, 낸시의 얼굴에 흐르는 물.
자네가 원하는 게 뭔가.
모르겠어요. 아무것도 할 수 없어요. 다만 피하는 것밖에는요. 하지만 그것도 결국 소용없을테죠. 저한테 속해 있는 것 같아요. 제가 받아야 할 거라면 받아야죠.
모두가 가버리면 전 사라질 거에요.
그녀는 조용히 말했고, 그녀의 얼굴의 그녀의 두손처럼 평온해 보였다.
우리는 불 앞에 앉아 있는 낸시를 두고 오두막에서 나왔다.
지칠대로 지쳐서 문을 열어 놓은 채 불 앞에 앉아 있는 낸시의 모습은 더이상 보이지 않았다.
‘난 다만 지쳤어요. 난 다만 검둥이일 뿐이에요. 하지만 그건 내 잘못이 아니거든요.’
어린 제이슨의 반복어, ‘지저스 아저씨는 검둥이예요.’ ‘딜지 아줌마도 검둥이래요.’ ‘난 검둥이가 아니에요.’ ‘난 검둥이 아니예요, 그렇죠 딜지 아줌마?’ 제이슨은 제이슨대로 그 나름의 불안과 공포를 느꼈다.
지금은 덜 하지만 어려서는 겁이 더 많았어서 밤에 불을 켜놓고 자야 된다거나, 집에서 떨어져 있던 변소에 갈 때는 남동생을 데리고 간다거나 했었다. 불안과 외로움이 보통 같이 다니고 한가지 해결책이 이 두 가지 불안과 외로움을 동시에 해결해 주기도 한다. 낸시의 안절부절, 한시도 마음을 내려 놓지 못하는 상태가 너무 이해가 되었다. 두려워했던 일이 정말 닥쳤을 때, 그 어린애들이 위험에서 그녀를 얼마나 어떻게 지켜줄 수 있을까. 도와 줄 이가 하나도 없어서, 간절하고 다급하게 어린 삼남매에게 같이 있어달라고 매달리는 모습이 너무 안타깝다. 사람들은 혼자 보다는 어린아기를 업고만 가도 마음이 든든함을 느끼거나 개와 고양이와만 있어도 마음이 놓이기도 하니까. 100년하고도 수십년이 훨씬 지난 지금도 여전히 속수무책으로 혼자 남겨져 실제인지 망상인지 공포에 갇힌 사람들을 생각한다.
‘모두가 가 버리면 전 사라질 거예요.’
고향 예산에서 개척교회를 시작하였을 때 주로 동네 아이들이 교회에 나왔다. 전도를 하지 않았는데도 예배당이 만만했는지 편안하게 느껴졌는지 첫해에 약 15-20명 이상의 아이들의 들고 나고 했다. 아이들은 교회가 처음이고 아이들 자체가 원래 그렇듯이 어지간히 떠들고 장난치고 했다. 하루는 아이들의 떠드는 소리가 일제히 나를 향해 형체는 없지만 물리적 실체로 나를 공격해 오는 것 같았는데, 함께 예배드려 주시던 부모님도 도저히 견디지 못하고 예배 중간에 일어나 나가시려고 일어나셨다. 그때 나는 강대상 옆에 무릎이 풀려 주저 앉았고 부모님을 향해 소리를 냈었다. 으으으, 말이 되어 나오기 전의 소리, 번역하자면 가지 마세요, 나와 있어 주세요. 모두가 가 버리면 전 사라질 거예요.
전체, 맥락을 보지 않고 가끔 단어 하나, 문장 하나에 꽂힌다. 대화로 치면 말꼬리 잡고 늘어지는 면이 있다. 그래서 몇 마디의 문장에 꽂혀 반성하고 다짐하였다.
하나님은 아시지만 도움을 요청할 대상은 아이밖에 없는 누군가의 현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