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통신
바꿈, 장시(場市)가 열리던 설악산 소간령 마장터 이야기
<마장터, 참 독특한 이름과 사람들>
설악산 마장(馬場)터는 참 독특한 이름을 가지고 있습니다. 마장이라 하여 경마장이나 말을 놓아 기르는 목장이 아니지요. 말 등에 물건을 싣고 와서 교환하던 장시가 열리던 장소입니다. 물론 모든 물건이 말 등에 실려 옮겨지진 않았지요. 개인적으로 지게에 지고 온 사람도 있고, 객주의 요청으로 바지게에 물건을 지고 온 선질꾼도 있을 테고요. 보부상도 있었겠지요. 그중에 가장 많은 장사꾼은 아마도 말을 활용한 말꾼이겠지요. 그래서 이곳 장터를 마장터라 했습니다. 마꾼[말꾼]이 있었으니 말을 먹이고 돈을 받는 마방(馬房)도 있었을 테고요. 말꾼이 물건을 싣고 와서 장시를 여니 마장이라 했습니다.
마장터는 그 이름도 독특하지만, 장소도 독특합니다. 바로 설악산 속에 있으니까요. 설악산 속에 시장이 열렸다고 하면, 다들 의아할 겁니다. 설악산은 지금처럼 그냥 산이 아니었습니다. 국립공원이 되어 산으로만 관리하기 전에는 설악산 속에 사람들이 사는 마을이 많았거든요. 화전을 하는 농민들도 있었고요. 산적들도 있었고요. 산 고개를 넘는 길모퉁이에는 주막도 많았습니다. 어디 그뿐인가요. 산판하는 목상들, 그리고 목공예를 만들어 파는 목공예가들도 있고요. 그리고 삼을 캐는 심마니들은 항상 산속에 기거했지요. 물론 지금처럼 절간이 있었으니 스님들도 많았겠지요. 그러니 산속에 사람이 산다는 자체는 당연한 일이지요.
마장터의 위치가 궁금하지요. 마장터는 대간령(大間嶺)과 소간령(小間嶺) 사이에 있는 마을입니다. 설악산 북쪽의 신선봉(1,204m)과 마산(1,052m) 사이에 있는 영(嶺)이라 하여 ‘새이령[사이령]’이라 부르기도 하고요. 진부령과 미시령 사이에 있는 영이라 하여 ‘새이령’이라 부르기도 합니다. 사이령은 한자로 사이 간(間)자와 재 영(嶺)자를 써서 간령(間嶺)이라 합니다. 설악산을 기점으로 두 개의 사이령이 있는데, 고성 쪽 영이 더 커서 대간령이고, 인제 쪽 영이 조금 작아서 소간령이라 했습니다. 이 영이 동서의 통로가 된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산속에 마을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산속에 널찍한 농토가 있고, 그곳에 마을이 형성되어 있었지요. 둘째는 물길이 양쪽으로 흘러 오솔길을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바로 인제쪽의 북천과 고성쪽의 문암천입니다. 무엇보다 마장터가 생긴 이유는 고성 방면에서는 상인들이 대간령을 넘어오고요. 인제 방면에서는 상인들이 소간령을 넘어 마장터로 모여들었기 때문입니다. 진부령과 미시령 국도가 뚫리기 전에는 동서를 잇는 주요 교통로로 쓰였습니다.
<장시, 시장, 인간 삶의 풍요조건>
“우리 조선은 배가 외국과 통하지 못하고, 수레가 국내에 두루 다니지 못하는 까닭으로 백물(百物)이 안 안에서 생겨서 곧 이 안에서 사라져 버리곤 하지 않어.”(박지원의 <허생전>에서)
이 말은 허생이 어떻게 5년 동안에 걸쳐 만 냥으로 백만 냥을 벌었느냐는 변부자의 질문에 답한 말입니다. 도로와 수로가 막혀서 서로 통하지 않는 폐단을 이야기했지요.
정말 그랬습니다. 걸어서 간령을 넘어야 했던 사정을 잘 설명해 주는 말입니다. 교역과 무역의 중요성이 절실했던 사실이 간령에 상설로 설치됐던 장시였지요. 마장터 땅이 약 5~6만 평이나 되었으니 아무리 산속이지만 장시가 열릴 수 있을 정도로 넓었지요. 장시가 열릴 수 있는 천혜의 조건을 갖추었습니다. 고성에서는 인제까지 가지 않아도 곡물류를 구할 수 있고, 인제쪽에서도 고성까지 가지 않아도 어염을 구할 수 있었습니다. 영동과 영서의 물건을 서로 바꾸기에는 안성맞춤의 장소였지요. 영동과 영서의 중간 교통로로 작용한 셈입니다. 서로 필요한 물건을 구할 수 있고, 풍요로운 삶을 누릴 수 있었습니다.
마장터에서 열리는 장시가 하도 커서 주막집이 여럿 있었고요. 주막에서 손님들에게 술을 대기 위해 마장터에서 따로 술을 제조해 주막에 대는 양조장(釀造場)이 있었다고도 합니다. 마장터 양조장이 얼마나 컸으며, 활성화 됐는지 알 수 있습니다. 이 마장터 장시는 1975년 설악산 화전정리(火田整理)를 하기까지는 장시가 형성됐다고 합니다.
아직도 화전을 할 때 살았던 귀틀집 가옥 몇 채가 남아 있습니다. 두어 집에는 사람이 살고 있습니다. 마장터의 역사를 전해주는 민속과 역사 전승자이지요.
<문물(文物)의 전달자 장돌뱅이, 바지게 선질꾼의 애환>
‘바꿈’이란 말 들어보셨나요. 물물교환(物物交換)을 우리 말로 ‘바꿈’이라 했습니다. 인제에서 장돌뱅이들이 쓰던 말입니다. 참 정겨운 느낌이 듭니다. 물건을 돈 주고 사는 게 아니라, 다른 물건으로 바꾸었습니다. 그렇게 바꾼 물건을 가져와서 되팔거나 소비하였지요.
바꿈을 주로 하던 사람들은 ‘바지게 선질꾼’이란 독특한 짐꾼이었습니다. 바지게 선질꾼은 ‘바지게’와 ‘선질꾼’으로 나누어 설명해야 합니다. 바지게를 진 선질꾼이란 합성어이기 때문입니다. 바지게는 일반 지게에 있는 지게 목발이 없습니다. 그리고 지게뿔 위에 작대기를 세우고 ‘지게 바’를 묶어 짐을 많이 싣도록 만든 지게입니다. ‘지게 바’(지게 밧줄)를 길게 하여 짐을 묶는다고 해서 바지게라 했습니다. 이렇게 지게를 만든 원인은 산길 옆에 있는 숲에 지게 목발이 걸려 넘어지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고요. 또 짐을 빨리 나르기 위해 지게를 작대기에 고여 놓고 쉬지 않고, 서서 쉬었다가 가기 위함이었지요. 그래서 서서 쉬어가는 ‘길꾼’이라 해서 ‘선질꾼’이라 했답니다. ‘질꾼’은 ‘길꾼’으로 자신들이 다니는 산길에 능숙한 사람입니다. 이들이 지는 짐의 무게는 보통 쌀 한 가마니, 또는 고등어 50손에 소금 한 가마니였다고 합니다. 산길에 짐을 지고 다니기가 힘들어서 한창 힘을 쓰는 16~40살 정도가 선질꾼으로 활동했다고 합니다.
바지게 선질꾼보다 고급스런 짐꾼은 마꾼이었지요. 마꾼은 말등에 짐을 싣고 물건을 옮기는 짐꾼입니다. 말은 ‘덕굴레’로 치장을 하고, 짐을 싣는데 선질꾼보다 약 3배 정도 더 옮길 수 있었습니다. 가는 곳마다 주막에서 말을 먹여주는 마방(馬房)이 있어서 마꾼이 형성될 수 있었습니다. 마꾼은 주막에서 마방 값만 받고 주인은 그냥 머물 수 있었다고 합니다. 마꾼은 운반력이 좋아서 수입이 선질꾼에 비해 많았지요. 그래서 주막에서는 색시를 두고 호객행위를 했는데요. 마꾼은 ‘오입속’이란 말이 있을 정도였답니다.
선질꾼과 마꾼은 자체적으로 물건을 사고 옮기며 장사를 하기도 했지만, 대개 상인 고용자였습니다. 고용 상인을 물산객주라 불렀는데요. 선질꾼과 마꾼은 객주의 부탁으로 물건을 옮기는 일을 했습니다. 물건을 옮겨주면 얼마씩 품값을 받았지요. 이때 객주가 불러서 부탁하는데 이를 ‘부름’이라 불렀습니다. 객주는 사람을 두고, 가가호호 방문해서 팔든가, 시장에서 물건을 팔아 이익을 남겼습니다.
선질꾼과 마꾼은 신작로(新作路)가 생기고, 신작로로 우마차가 다니고 자동차가 다니면서 없어졌습니다.(이만철, 「인제산림산업사연구: 바지게선질꾼 민속사」,인제민속사, 인제문화원, 2004, 참고.)
<무곡보부상, 팽자나무거리>
“이상 어물을 곡물과 바꾸는 규정은 지금 폐한다.(以上貿穀之規 今廢, 이상무곡지규 금폐)”
이 말은 대전통편<어염>조에 나오는 말입니다. 상인들이 값의 차익을 노려 곡식을 사들이거나 관아에서 곡식을 사들이는 행위를 무곡(貿穀)이라 했지요. 무곡은 대부분 보부상이 했다고 하는데요.
고성군 거진읍 송정리와 송강리 사이에는 팽자나무거리가 있었습니다. 팽자나무가 무척 커서 팽자나무거리라 불렀을 겁니다. 그런데 2009년 제가 민속 조사를 할 때, 이 지역 사람들의 제보와 한국지명총람(1967)에 의하면, 이 거리에는 옛날 무곡보부상을 검문하는 검문소가 있었다고 합니다. 아마도 나라에서 보부상들을 대상으로 물건의 이동을 제한하고 세금을 부과했던 모양입니다. 이들은 곡식을 사려고 인제와 수동면 쪽으로 다녔습니다. 당시 검사대상은 어(漁), 염(鹽), 목물(木物), 철(鐵) 등의 식품과 물건이었으며, 이곳 바다에서 나는 생선을 저린 고기와 식염을 등에 지고 가서 곡식과 바꾸는 행상을 했습니다. 팽자나무거리가 그 통로였다고 봅니다. 지금은 팽자나무가 없어지고, 밭이 되었지요.
무곡보부상의 행적과 마장터의 장시가 꼭 맞아떨어지는 현실입니다. 얼마나 많은 물건을 지고 갔으면 고을의 관아에서 상인들의 물건을 검문했을까요. 마장터의 주막에서 손님들을 대상으로 술을 팔기 위해 양조장이 따로 섰다는 말이 실감납니다.
<사람과 사람의 만남, 그리고 신의 보살핌>
“서낭님, 산신님, 이번 행차는 무사히 다녀올 수 있도록 해 주십시오. 호환도 면하고 사고도 없게 하여 주시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
상인들은 길을 떠날 때 고사를 지내기도 하지만, 영 넘어갈 때는 응차 그곳에 있는 서낭당에 무사고를 빌었습니다. 먼 길 가면서 영마루 서낭에 안전한 행로를 비는 행위는 우리의 아름다운 미풍양속이었지요. 그래서 큰 산길 영마루에는 서낭당이 있었고요. 산신당도 있었지요.
간령의 영마루도 예외가 아니었어요. 커다란 나무와 돌무더기로 대변되는 서낭당 말입니다. 나무는 하늘의 신께 소원이 닿기를 바라는 신수(神樹)이고요. 돌무더기는 딱딱한 돌처럼 간절한 믿음의 표현 아닐까요. 거석문화(巨石文化)가 유달리 발달한 우리나라 사람들의 마음이 서낭당 돌무더기에 담겨 있습니다. 소간령에는 아직도 영마루서낭당이 있고요. 산신당이 있습니다. 마장터에 살고있는 정노인은 그 정성이 대단했습니다.(문화통신, 2024, 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