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행복하다 / 박선애
“선생님, 계속 읽으니까 책도 재미있어요. 앞부분을 제대로 읽지 않은 것이 후회돼요.” 정호가 옆으로 오더니 웅얼웅얼 혼잣소리처럼 한다. 나는 단순해서 이런 말 한 마디에 금방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 된다. 정호는 학교에서는 친구들과 노는 것에, 집에서는 온라인 게임에 집중하는 아이다. 어려서부터 아빠를 따라다니며 해온 배드민턴 치는 것을 좋아한다. 선수가 되고 싶다고 하지만 그에 맞는 훈련 계획이 없는 걸로 봐서 희망사항 수준인 것 같다. 책을 읽는 것과는 거리가 아주 멀다. 스스로 책 읽으러 도서관에 온 적은 한 번도 없다. 독서 시간에도 책을 펴 놓고 있지만 눈길은 딴 데로 향하고 있다가 지켜보고 있는 내 눈과 마주치면 당황한다. 시간이 지나면 몸을 비틀며 힘들어한다. 다섯 줄 감상문도 줄거리만 대충 쓴다. 그런 정호가 친구 따라 참가한 독서 캠프에서 책 읽기의 재미를 경험했다는 것이 기쁘고 뿌듯하다.
2학기가 되자 아이들은 겨울 방학에는 독서 캠프 언제 하냐고 묻는다. 특히 여름에 코로나에 걸려 참가하지 못한 소연이는, 처음에 병원 갔을 때 바로 코로나 검사해 줬으면 할 수 있었을 텐데 감기라고 했다가 며칠 후에 검사하게 한 의사를 두고두고 원망하며 겨울 방학에는 꼭 해야 한다고 조른다. 여름 방학 때 했던 ‘1박 2일 책 읽기’를 생각했던 것보다 더 좋아했다. 새롭고 신나는 프로그램을 준비해서 진행한 것도 아니고 그저 같은 책 한 권을 다 같이 소리 내어 읽고 부담스럽지 않은 수준에서 생각을 나눈 것밖에 없는데 아이들이 즐겁게 기억해 줘서 고마웠다. 그러나 겨울에 찬 바닥에서 재운다는 것은 엄두가 안 났다. 3일간 낮 시간만 하자고 했더니 1초도 생각하지 않고 “잠자려고 하는데요.”라고 반발한다. “뭣이라고, 독서 캠프를 책 읽으려고 하는 게 아니고 자려고 한다고? 나 안 해.”라고 큰 소리로 삐친 척해 보지만 저들 마음을 왜 모르겠는가. 친구들과 같이 밥 먹고 놀고 자는 것이 더 좋아서 하는 것을. 나는 그것을 이용해서 책 한 권 읽히고, 그러다가 책의 재미를 맛보게 하고, 끝까지 읽고 나서 뿌듯함을 느껴 보게 하면 된다.
1월 9일, 1박 3일 독서 캠프를 시작했다. 여름에는 창문이 많고 넓은 도서관에서 했지만 더 따뜻한 곳을 찾아 교실로 옮겼다. 먼저 온 아이들과 서로 얼굴을 볼 수 있게 책상을 놓고 가운데는 요가 매트를 깔아 방처럼 만들었다. 여름 방학 때는 열세 명이 했는데 이번에는 스무 명이 나왔다. 여름에 남학생은 지훈이와 태우 두 명뿐이었는데 이번에는 여섯 명이나 된다. 학원 수업 때문에 못 한다고 안타까워하던 태우는 학원 끝나자마자 와서 점심시간부터는 같이 했다. 참 대단한 애들이다.
이번에 읽을 책은 권정생의 『몽실 언니』이다. 여름에 했던 것처럼 한 쪽씩 큰 소리로 돌아가며 읽었다. 낭독의 효과를 역설하는 사람도 있지만 나는 애들을 믿지 못해서 한다. 각자 읽으라고 하면 대충 넘기고 다 읽었다고 하거나 집중하지 못하는 아이가 있다. 더듬거나 틀리면 놀리고 웃으며 재미있어 한다. 읽으면서 모르는 낱말, 마음에 드는 문장이 있거나 질문이 필요한 곳에는 메모지를 붙여 표시한다. 40~50분 읽고 쉬는 시간이 되면 표시한 것을 미리 나눠 준 활동지에 쓰는 아이도 몇 명 있지만 대부분 간식을 먹으며 신나게 논다. 점심은 입맛에 맞춰 두 곳으로 나눠 가 푸짐하게 먹였다. 오후에도 같은 방법으로 다섯 시까지 읽고 집으로 갔다.
둘째 날, 아이들은 이불 보따리를 들고 왔다. 어제처럼 오전을 보내고 점심 먹고 와서 한 시간쯤 지나니 마지막 페이지를 넘길 수 있었다. 300여 쪽의 두꺼운 책을 끝까지 읽었다. 이틀 동안에 책 한 권을 다 읽은 자신이 대견해서 감탄하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린다. 표시했던 내용을 활동지에 정리했다. 몰라서 표시했던 낱말의 뜻을 휴대폰으로 찾아 적고, 인상 깊은 문장과 그렇게 생각한 이유도 썼다. 나라면 어떻게 했을까 생각해서 정리했다. 인물을 관찰하여 묘사하고 감상문 쓰기까지 마치고 나니 다섯 시가 넘었다. 아이들이 기다리던 시간이다. 미리 모둠을 정하여 계획해서 점심 먹고 오면서 장을 봤다. 음식 재료를 스스로 고르고 나는 학교 카드로 계산만 해 줬다. 기술 가정실은 시설이 좋다. 아이들은 모둠별로 김치볶음밥, 떡볶이, 부대찌개, 참치 마요네즈 덮밥, 파스타 등을 만들었다. 해린이는 남학생들을 조수로 부리면서 파스타를 식당에서 파는 것처럼 보기 좋고 맛있게 만들었다. 해린이가 가장 돋보이는 시간이었다. 모둠별로 설거지와 뒷정리까지 알아서 한다.
교실로 와서 활동지에 적은 내용을 돌아가며 이야기했다. 이해하지 못했던 것을 질문하면 다른 친구들이 대답하고 같이 생각해 본다. 작은 활동이지만 책을 더 깊이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아 보람 있었다. 다음 순서는 영화 보기다. 내 나름대로 추천도 받고 신중하게 골랐는데 아이들은 영화보다 친구들과 이야기하며 간식 먹는 데 더 집중한다. 영화가 끝나니 11시 가까이 되었다. 처음에는 교실에서 마피아 게임을 하더니, 나중에는 술래잡기를 하러 이 밤중에 운동장에 나가겠다고 한다. 안 된다고 했더니 2,3층 복도에서 할 수 있게 해 달라고 한다. 계단에서 다칠까 봐 2층으로 제한했다. 금방 잡혀서 재미없다고 하면서도 밤새 뛰어다닐 기세다. 놔두면 끝날 것 같지가 않아 한 시 반까지로 시간을 정해 주었다가 억지로 눕혔다. 책상으로 칸막이를 만들어 남학생 여섯 명의 작은 방을 만들어 주었더니 아늑하니 게임방 하면 좋겠다고 같이 게임하게 허락해 달라고 조른다. 큰 인심 쓰는 척 30분을 허용했더니 신나게 하고 시간 지켜서 휴대전화를 내놓는다. 잠이 안 온다고 소곤거리던 여학생들은 다 잠이 든 듯 조용하다. 남학생들은 정호만 자고, 다섯 명은 뭐가 그리 재밌는지 계속 이야기하면서 웃고 잠들 줄을 모른다. 남학생과 여학생 사이에 자리를 펴고 누워서 그만 놀고 잠 좀 자라고 사정하던 나도 세 시 이후는 기억하지 못한다.
다음 날은 잠이 부족하니 다들 비실비실하게 시작했다. 아침을 간단히 먹고 마무리 활동을 해야 하는데 늘어져서 의욕이 없다. 얼른 하고 좋아하는 피구 경기를 하자고 달래서 독서 캠프를 하고 난 소감을 써서 돌아가며 이야기를 나눴다. 아이들 나름대로 유익하고 재미있는 활동으로 여긴 것 같아 기뻤다.
책 읽기의 여러 가지 좋은 점을 말하지 않더라도, 책의 재미를 안다면 언제 어디서든 책 한 권만으로도 따분하지 않고, 행복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내가 만나는 아이들이 책 읽는 재미를 경험하고 가방에 책 한 권 담고 다니다가 틈나면 꺼내 읽을 수 있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이 있다. 억지로라도 읽다 보면 언젠가는 어느 부분에서 흥미를 느끼는 순간이 올 것이라는 믿음으로 ‘책 읽자’를 입에 달고 산다. 그래서 아침 독서, 점심시간 도서관에서 20분 책 읽기 등을 하지만 애들이 따라주지 않는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여학생들은 책 읽는 것이 좋아서든 친구들과 하룻밤을 보내고 싶어서든 스스로 선택했는데 남학생의 참가 동기를 들으면 우습다. 한민이와 지훈이는 모두 해야 되는 줄 알고 신청했다. 대륜이는 캠프 며칠 전에 다른 일로 전화했더니 심심해서 초등학교 운동장에서 놀고 있다고 해서 권했다. 정호는 친구들이 한다고 하니까 두어 시간 늦게 따라왔다. 동기야 어쨌든 같이 하고, 끝나고 나서는 처음으로 이틀 만에 책 한 권 다 읽었다고 기뻐하고, 책이 재밌다고 말해 주는 아이들이 있어서 나는 행복하다.
첫댓글 겨울에 독서 캠프를 하다니 열정이 대단합니다. 그렇게 많은 학생들과 숙식을 같이 하면 안전, 생활 지도 등
많은 어려움이 있을 텐데도 그런 캠프를 하셨네요. 애들은 두고 두고 좋은 추억으로 남겠어요.
<몽실 언니> 책 재밌게 읽었던 게 기억납니다. 저도 경험해 보고 싶은 독서캠프네요.
한창 놀기 좋아하는 중학생 스무 명씩이나 데리고 1박 2일 독서 캠프를 하다니요 감히 엄두도 내기 어려운 일입니다. 아이들에게는 평생 기억에 남겠어요. 진짜 독서 교육을 하고 계시네요.
어릴 때는 정말 먹고 노는 게 최고인 것 같아요. 저도 어릴 때 학교에서 간식 먹고, 음식 만들어 먹고 했던 게 가장 기억에 오래 남아요. 그리고 피구요.
멋진 선생님 이십니다. 학생들에게 몸으로 기억되게 끔 해 주시고. 두고 두고 기억에 남을 것 같습니다. <몽실 언니>
와, 이런 활동을 하시다니요?
정말 선생님은 참스승입니다.
그 복잡하고, 어렵고, 힘든 일을 사서 하시다니요.
선생님과 사제로 만난 아이들은 복 받은 아이들이 분명하네요.
우리 딸도 박 선생님 같은 선생님을 만났으면 좋겠네요. 문해력이 떨어지는 딸을 보면 안타까워요. 책을 많이 읽게 하고 싶은데, 쉽게 되지 않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