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의 동산 / 곽주현
아파트를 나와 차를 타고 나섰다. 어질어질한 도심을 벗어난다. 차창으로 들어오는 바람이 제법 시원하다. 머리가 개운해진다. 벌써 남평읍 다리를 지난다. 그 밑으로 흐르는 물살이 제법 세차다. 지석강이다(영산강 지류). 물길 저 아래에 작은 산이 보인다. 멀리서 보니 큰 화분 하나가 물 위에 둥실 떠 있는 것 같다. 강물과 어우러져 우뚝 서 있는 모습이 도드라져 보인다. 추억이 많은 내 고향 뒷동산이다.
고향 마을에 닿았다. 농사를 짓고 있어 자주 온다. 특별히 할 일이 있는 건 아니다. 비가 많이 내린 뒷날은 농작물 피해가 없는지 살피려고 꼭 와 본다. 엊그제 심어놓은 무, 배추가 웃자라서 약해 보인다. 어서 그들에게 고운 햇살이 듬뿍 내려앉으면 좋겠다. 잎채소는 햇빛에 민감해서 날씨가 좋으면 곧 생기를 되찾는다. 농장을 둘러보다가 대추나무 앞에 발을 멈추었다. 벌써 붉은 열매가 수두룩이 땅에 떨어졌다. 왕 대추라는 이름답게 탁구공만큼 크다. 줍고 따서 모으니 한 바구니다. 잘 익은 놈을 한 알 골라 먹어본다. 꿀맛이다. 그 악천후를 용케 잘 이겨냈다.
그러고 나니 흐렸던 하늘이 파랗게 드러났다. 어디서 ‘꾸우 꾹, 꾸우 꾹’하는 소리가 들린다. 아마 산비둘기가 뒷동산에서 친구를 부르나 보다. 한 번 올라가 볼까. 천천히 발길을 옮긴다. 농장에서 올라와 강둑을 따라 걸으면 10분 안에 닿을 수 있다. 동산에 오르는 입구가 거칠다. 나무가 우거져 처음 온 사람은 찾기도 어려울 것 같다. 이곳을 오르는 사람이 거의 없는 듯하다. 하기야 나도 지난봄에 와보고 발걸음을 못 했다.
계단을 다 오르면 쾌 넓은 뜰이 나타난다. 작은 운동장만 하다. 어렸을 때는 거의 날마다 이곳에서 놀았다. 공을 자주 찼다. 그때는 축구공이 귀했다. 지푸라기를 뭉쳐 헌 옷으로 감싸서 둥글게 만들었다. 그것도 좋다고 이쪽에서 저쪽으로 방방 뛰며 몰고 다녔다. 골대는 뉘 집에서 막대를 가져와서 세우고 새끼줄로 이었다. 내 편이 한 골 넣으면 함께 내달리면서 크게 소리를 질렀다. 어떤 날은 우리가 싸움하는 줄 알고 어른들이 급히 올라오기도 했다. 지금도 그 환호성이 귀에 쟁쟁하다. 저쪽 숲에서 그 시절의 친구들이 튀어나와 ‘애들아, 가위바위보 해서 편 가르자.’라고 말할 것만 같다.
특히 여름이 되면 이곳에 아이들이 많이 모였다. 특별한 곤충 때문에 그랬다. 많이 잡으려고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올라오는 녀석도 있었다. 그때는 풍뎅이가 그렇게 많았다. 상수리나무 줄기에서 흘러내리는 수액을 먹으려고 머리를 처박고 서로 엉겨 붙었다. 몸 빛깔이 대부분 검은색이고 어쩌다 초록색도 한 마리씩 보였다. 놀거리가 별로 없었던 우리는 풍뎅이를 놀잇감으로 잡아 몹쓸 짓을 했다. 몸통을 실로 묶어 누구 것이 더 멀리 날아가나 내기했다. 다리의 중간 마디를 자르고, 머리를 살짝 비틀어 몸통을 뒤집어 눕히고 땅을 두드린다. 그러면 날개를 펴고 제자리에서 빙빙 돌았다. 그 모양이 우스워서 손뼉을 치며 깔깔거렸다. 싸움을 붙이기도 하고 빨리 기어 가는 시합도 시켰다. 지금 눈높이로 보면 잔인한 놀이었지만 그때는 별다른 생각 없이 그렇게 놀았다. 요새 같으면 부모님에게 크게 혼났을 것이다.
넓은 뜰 가장자리에 느티나무가 한 그루 서 있다. 두 팔로 안아 봤다. 손이 닿지 않는다. 유치원 다니는 내 손자 몸통만 했는데 많이 자랐다. 뒤쪽에 손바닥만 한 구멍이 나 있다. 그 푸르던 잎새도 빛이 바래가고 있다. 벌써 늙은 나무가 되어 가나 보다. 외지에 있다가 집에 다니러 오면 혼자서 동산에 곧잘 왔다. 이 나무를 껴안고 세상살이의 이런저런 어려움을 말하고 나면 속이 좀 후련했다. 큰 나무에 기대거나 안고 있으면 마음이 한결 편해진다는 것을 그때 알았다.
그곳은 어른의 놀이터가 되기도 했다. 봄에 모심기를 끝내고 한가해지면 화전놀이를 했다. 진달래꽃으로 부침개를 만들고 꽃술도 담아 먹고 마셨다. 농악 장단에 맞추어 춤추고 노래했다. 그날만은 마을 사람 모두가 한마음이 되었다. 정월 대보름에는 줄다리기를 했다. 위, 아랫마을로 편을 나누어 힘을 겨루었다. 아이들은 위험하다고 끼어들지 말라고 했지만, 몰래 줄 끝에 붙어 힘을 보탰다. 이영차, 이영차 소리가 마을로 내려오면 집을 지키는 개들이 한꺼번에 짖어서 온 동네가 들썩들썩했다.
운동장 같은 평지에서 위로 올라가면 작은 바위가 있다. 동산에 오면 곧잘 거기에 앉아 있곤 했다. 강물이 굽이쳐 흐르는 모습을 잘 볼 수 있어서 그랬다. 아래가 낭떠러지고 물과 맞닿아 있어 아슬아슬하다. 위험하고 호젓한 곳이어서 여기까지 오는 사람은 드물었다. 상현달이 어스름하게 뜬 어느 날 밤이었다. 그곳에서 이 생각 저 생각하면서 달빛에 반짝이는 강물을 응시하고 있었다. 저만치에서 인기척이 나더니 도란도란 속삭이는 소리가 들렸다. 남녀 한 쌍이 꼭 끌어안고 밀담을 나누고 있는 모습이 숲사이로 희미하게 보였다. 옆집에 사는 누나의 목소리가 바람에 실려 왔다. 남자는 다른 마을 총각인 듯 알아차릴 수 없었다. 연인들의 이야기는 길게 이어졌다. 자리를 뜰 수가 없어 숨을 죽이고 줄곧 앉아 있어야만 했다. 늦가을이라 밤공기가 꽤 쌀쌀했다. 덜덜 떨면서 몇 시간 동안 벌 아닌 벌을 받았다. 그 비밀을 지금껏 꼭꼭 숨겨두고 있다.
그 바위에 앉아 주변을 둘러본다. 아무도 없다. 그때나 지금이나 강물은 햇살에 반짝이며 느리게 흘러가고 있다. 그런 일이 있었냐는 듯.
첫댓글 우와. 그림같은 고향 마을이네요.
하하하. 선생님 정말 입이 무거우시군요.
역시!
자주 갈 수 있는 고향이라 좋으시겠어요. 강물과 비밀을 나누셨네요. 제가 봤으면 벌써 바람따라 퍼졌을텐데요.
선생님 글을 읽고 있으면 아름다워요. 가슴이 뭉클해져요. 그 시절 친구들이 "얘들아 가위바위보해서 편 가르자." 그 소리가 제 마음에도 들려요. 내 친구인 듯 그리워져요.
히히! 그 뒷이야기가 궁금하네요.
고향을 늘 찾을 수 있으니 얼마나 좋아요.
부럽습니다.
풍뎅이 머리를 비툴어 돌게한 것을 선생님도 하셨군요.
지금 생각하니 잔인한 짓인데
그때는 재미로 했으니 풍뎅이가 얼마나 고통스러웠을까요?
개구진 선생님도, 남의 비밀을 조심히 지겨준 선생님도 글 속에 다 있네요. 재밌게 잘 읽었습니다.
그러고 보니 그렇게 많던 풍뎅이가 요즈음은 보이지 않아요. 젊은이들 배려하느라 덜덜 떨며 숨어 있는 모습을 상상하며 웃었습니다.
하하하! 비밀의 동산, 글 잘 읽었습니다.
하하!
동화를 한 편 읽은 듯 마음이 따뜻해져 옵니다.
선생님의 유려한 글 솜씨로 아름다운 글이 탄생했네요.
잘 읽었습니다.
지석강 유원지 솔밭에서 나주사는 친구와 도시락 싸들고 놀러갔었던 기억 납니다. 어릴때의 추억 재미나게 읽었어요.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