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도 영화 볼 줄 아는 여자야 / 솔향
지난 12월, 영화 <서울의 봄>이 누적 관객 천만 진입 직전이라고 떠들썩했다. 어서 내가 그 숫자를 채워줘야겠다 싶어서 사춘기 막내딸, 남편과 셋이서 보러 가기로 했다. 출발해야 하는데 아이는 아직도 잠옷 바람이다. “빨리 준비해. 세 시 영화니까 집에서 두 시 반에는 나가야 해. 10분 남았어!” 아직도 꾸물거리는 아이에게 목소리를 높였다. “나 정치 영화 싫은데.” 갑자기 뚱딴지 같은 소리를 한다. “어제는 같이 간다고 했잖아. 갑자기 왜 그래? 예매도 다 해 놨어.” 으이그, 속이 뒤집힌다. 뭔가에 수가 틀려 있는 아이랑 실랑이하고 있는데 엄마가 방문을 열고 가만히 한마디 했다. “영화 보러 가냐? 초원이랑 다 같이 가면 나도 보고 싶은디…….”
1초쯤 정적이 흘렀다. 당황스럽다. 시간이 느릿느릿 흐르는 경험을 해 본 적 있는가? 10초 같은 1초 동안 머릿속에 여러 생각이 오갔다. 엄마도 영화를 보고 싶었구나. 가끔 외식이나 여행에 모시고 가기는 하지만 왜 같이 영화관에 갈 생각은 한 번도 못 했지? 어렵지 않은 일인데. 당연한 듯이 ‘다녀오겠습니다.’ 인사만 하고 나갔다. 1년에 한두 번이지만 엄마 빼고 가족과 영화관 나들이했던 게 떠올랐다. 머리를 한 대 얻어맞는 것 같다는 기분이 뭔지 알 것 같았다.
엄마는 큰애와 둘째도 가까이 살면서 돌봐 주었는데 생각지도 않던 늦둥이 막내가 태어나면서부터는 아예 우리 집에 들어와 살고 있다. 막내가 올해 중학교에 입학하니 벌써 13년이 지났고, 그녀도 일흔다섯이 되었다. 가끔 우리끼리 살고 싶기도 하고, 엄마도 이 꼴 저 꼴 안 보고 혼자가 더 편하겠다 싶기도 하지만 ‘아이들도 다 크고 이제 엄마는 필요 없으니 그만 엄마 집으로 들어가세요.’ 이럴 수는 없는 노릇이다. 사실 그녀를 부양한다고 볼 수도 없다. 지금도 집안일을 도와주고 있어 게으른 나는 편하게 직장에 다니고 있다. 그녀도 생활비 아끼고 용돈도 정당하고 마음 편하게 받으니 상부상조하는 악어와 악어새 같은 관계라고 해야 할까?
그녀는 속상한 것을 잘 표현하지 않고 잔소리도 거의 하지 않는다. 인품이 그렇기도 하지만 아무래도 딸과 사위의 눈치가 보여서일 것이다. 그게 가끔 애잔하지만 사람 참 안 바뀐다. 난 엄마랑 손 붙잡고 나란히 걷는다던가 다정하게 이야기 들어 주는 살가운 딸은 아니다. 남동생 셋과 자라서인지 무뚝뚝한 편인 데다 밖에서 체력을 소진하고 들어오면 입을 다물고 무표정이 된다. 그런 내게 서운해하는 걸 알면서도 아이 셋과 싸우느라 지쳤는지 엄마까지 살뜰히 챙길 여유가 없었다. 아니다. 다 핑계다. 엄마는 힘든 나를 돕는 사람쯤으로 여겼나 보다.
처음으로 엄마와 영화를 감상하고 그녀의 평을 들으며 반성 좀 했다. 엄마도 영화 볼 줄 안다. 낭만과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하루를 사니, 예술을 느끼니 어쩌니 하며 내 삶을 가꾸려는 허영만 가득했지 더 늦기 전에 엄마에게도 조금 나누려는 생각을 못 했다. 기독교 방송이나 종편 정치 프로그램을 자주 보지만 걸러 듣고 비판하며 제대로 된 생각을 하는 진보적인 그녀다. 미안해서 오랜만에 목포에 찾아오는 연극 <친정엄마와 2박 3일>을 브이아이피(VIP) 좌석으로 예매했다. 둘이 보면 어색해서 딸들 것까지 네 장. 연신 비싸다고는 해도 휴대폰에 대고 남동생에게 자랑하는 그녀의 목소리가 들떴다. 둘러보니 관객석에 나이 지긋한 분들이 많다.
우리 나이로든 윤석열 나이로든 쉰이 넘었다. 언제까지 철없이 살 수는 없다. 여전히 쑥스럽지만 올해부터는 조금씩 바뀌어야지. ‘엄마, 미안해요. 젊은 시절을 자식 위해 다 바쳤는데 나이 들어 쪼그라들고 서럽다고 느끼지 않게 잘할게요. 앞으로 영화관에는 자주 모시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