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계양산에 얽힌 전설과 사화(史話)
이희환 (박사. 인하대 한국학연구소)
전설에 의하면 계양산은 멀리서 떠서 흘러들어왔다고도 하다고도 하고, 또는 바다에서 떠 올라왔다고도 한다. 고려 때 부평부사를 지낸 이규보가 지은 <망해지>에 부평을 보고 삼면개수라 하였는데, 이는 계양산 정상에 올라 사방을 바라보면 한강과 서해에 둘러싸이고 오로지 남쪽만 육지로 연결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옛날 부평의 넓은 들은 황무지로 해수와 민물이 혼합되어 조수가 드나드는 잡초 무성한 간사지로 한강물이 계양산 북쪽 줄기를 둥글게 휘어감아 바다로 이어졌으니 이 산이 마치 물위에 떠 있는 것같이 보였을 것이다. 또 일설에는 강화의 마니산의 반쪽이 갈라져서 떠돌아 왔다고 하여 마니산을 형산이라 하고 안남산(계양산)을 아우산이라 일컫기도 한다. 그리고 한발이 심할 때에는 이 산에서 기우제를 지냈다고 한다.
한편 계양산의 ‘징맹이 고개’를 중심으로 동서로 쌓은 성이 있었으니 이름하여 중심성이다. 이 성은 부평부사 박희방이 고종 3년 3월에 일어났던 병인양요 이후 인천만과 강화도를 방비하기 위해서 고종 7년에 쌓은 성이다. 여기에 박희방은 고종 20년 이 성을 쌓은 사적을 새긴 비석을 세웠다. 이것이 중심성의 사적비이다. 그런데 이 비석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허무맹랑한 설화가 전해오고 있다. 이 비석은 서곶 북쪽 몇 동네에서 멀리 바라다 보였다. 그리고 이 비석이 서 있는 것을 바라본 양갓집 며느리는 이상하게도 바람이 나서 놀아난다는 미신이 나돌았다. 그래서 이를 막기 위해 누구인지는 몰라도 비석을 몰래 쓰러뜨려 버렸다. 그런데 며칠 뒤에 누군가가 이 비석을 본래대로 다시 세워 놓았다. 이처럼 세워 놓으면 다시 쓰러뜨리고, 쓰러뜨리면 다시 세우곤 했다 한다. 이렇게 수십 차례나 되풀이하다가 해방 후 이 비석은 인천시립박물관에 이관되었는데, 6·25동란 때 아깝게도 전화를 입어 없어지고 말았다고 한다.
임진왜란을 당하여 계양산의 얽힌 사화도 기억할만하다. 1592년 5월 19일 부평에 침입한 소서행장이 이끄는 일본군은 부천의 원미산(遠美山) 장대봉(將垈峯)에서 항거하는 선거이(宣居怡)장군을 물리치고 그 날로 부평읍(계산동)에 침입하여 계양산성을 수축하여 이곳을 근거지로 삼았다. 그런데 이때의 부평부사 남유(南瑜)는 겁에 질려 싸우지도 않고 도망쳐 피신만 하였다. 계양산성을 근거지로 한 일본군의 일부는 5월 20일 인천으로 진격하였으나 부평 출신인 김민선(金敏善) 인천부사가 만반의 방어태세를 갖추어 안대평(安垈坪)에서 일본군을 격퇴시켰다. 지금의 간석역 앞으로 이곳 하천에 다리가 생기니 일본군이 패전하여 흩어진 곳이라 하여 왜산교(倭散橋)라 불러왔다. 일본군의 수차에 걸친 침공에 문학산성을 사수한 김민선 부사의 넋을 기리는 안관당(安官堂)이 문학산성 안에 있었으나 지금은 그 흔적을 찾을 수 없게 되었다.
한편 계양산성에 집결한 일본군은 일부 수비군만 남기고 북진하여 5월 23일에 김포, 5월 24일에 통진, 5월 27일에 개성의 일본군과 합류하였다. 이 때 계양산성의 잔류 일본수비군의 노략질이 극심하여 부평의 백성들은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부평부읍지」 광무판에 “부평향교의 병화를 막고자 교생(校生) 박무영(朴茂榮), 박대충(朴大忠), 이언복(李彦馥) 등 3인이 성전위판(聖殿位版)을 구출하여 계양산 암굴에 숨겨두었다가 난이 평정된 후에 환안하였다. 임진왜란 당시 인근의 여러 향교가 위판이 소실되어 난 후 모두 부평향교의 위판을 본받아 봉안하였다”고 한다. 이 사실이 조정에 알려지자 선조(宣祖)는 이 세 사람의 공을 가상히 여겨 참봉(參奉)을 제수하고 그 자손들까지 부역을 면제해 주었다고 한다.
한편 부평부사였던 남유는 그 해 9월 경기감사의 장계로 파직 당하였다가 뒤에 나주목사로 복직된 후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과거 계양산성을 버리고 피난 갔던 것에 죄책감을 느껴 자진하여 이순신을 도와 싸우다가 노량대첩 때 이순신과 함께 전사하였다. 선조 25년 남유의 후임으로 부임한 기훈(奇薰)도 역시 일본군에 대항할 구상은 아니 하고 도망쳐 숨어 다녔음이 뒤에 밝혀져 선조 27년(1594) 12월11일 사간원의 장계로 파직됐는데 그 죄책감을 느껴 자살하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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