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10월31일 중근세관,선사고고관,유물정리.유물카드 봉사자님들과 같이
정읍,태인 고현동 향약을 찾아서 답사를 떠나다.
-중간휴게소 천안-논산간 고속국도상의 정안휴게소에서-
호남제일정, 피향정,보물 제 289호
披香亭- 연꽃 향기가 정자에 기득히 퍼져 나가는 곳 -
신라 50대 定康王(886~887)때 태산 태수 최치원(857~?)이 이 정자를 거닐며 풍월을 읊었다고 한다
피향정앞에서 설명해 주실 이효종학예사를 윤용희학예사가 소개해 주고 있다
下蓮池위의 亭子와 나무
披香亭重修詩
연등천정과 피향정 현판
下蓮池에서 본 정자와 멀리 피향정이 보인다. 아래 설명대로 上蓮池는 없어졌다
郡守洪侯範植愛民善政碑
홍범식(1871~1910)이 1907년 융희1년에 태인군수일 때의 선정을 기념하는 비.
홍범식은 적극적으로 의병을 보호했고 1910년 금산군수 재직시 한일합병 소식을 듣고
자결했다.
태인(泰仁)
현감신잠선정비(縣監申潛善政碑)
이 비는 명종4년(1549) 金元,白三龜 등 태인 유림이 발의해서 세워졌다.
비문에는 태인 현감 신잠이 번잡한 행정을 간결하게 하고 학교를 세우는 등
유교적인 선정을 하였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비문의 글은 益山에 은퇴하고 있던
전 대제학 蘇世讓(1486~1562)이 지었다.
이효종학예사의 설명을 듣고 계시는 봉사자님들
移路碑
고종8년(1871) 풍수지리설에 의해 국도를 옮긴 것을 기념하여 만든 비석이다.
태인 현감 金寅根(1867~1871 재임)이 주민의 요청에 따라 비문을 지었다.
이로비 비문(일부)
治之西有大路 路之南有島山 山形如島嶼 收藏地氣 卽水下妙鍵也 然路在山腰 橫連大野
類若斷其脉泄其氣 此術家所忌 術亦不可不信也 邑中諸老詢謀 而告余曰 環島而移路
補脉而植林 庶可以邑宇包焉 風氣藏焉 久爲居人之所齎願也
"읍치의 서쪽에 큰 길이 있는데, 그 길의 남쪽에는 섬 모양의 산이 있다.산의 모양이 섬을 닮아
땅의 기운을 감추고 있으니, 바로 물 밑의 기묘한 자물쇠가 있는 형국이다.그러나 길은 산허리에
있어 큰 들을 가로지르고 있다. 마치 그 맥이 끊어져 기운이 빠져나가는 것 같은 형국이다.
이는 풍수지리술에서 꺼리는 것이고 풍수지리술도 믿지 않을 수 없다. 고을 여러 노인들이 의견을
모아 나에게 이르기를 '섬을 돌아 길을 옮기고 맥을 보충하여 나무를 심으면 거의 읍내를 감싸 안고
풍기를 감출 수 있을 것입니다.오랫동안 주민들이 바라던 바입니다.' 라고 하였다."
비석 뒷면에는 길을 옮기는데 함께 한 태인현 사람들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監官前萬戶李魯植 千摠朴致龍 執事蔡濟權 色吏宋龍學...
만화루(萬化樓)
태인향교의 정문으로 '공자의 도로 만물이 교화된다'는 말에서 따온 것이다.
대성전에는 공자의 위패를 가운데 모시고 맹자,주자와 신라의 설총을 비롯한
우리나라 유학자 18분의 위패도 모셨다.단종왕비 송씨,영조의 생모 숙빈 최씨가
이 지역 출신이다.그래서 왕비나 정승 등이 태어난 고을에 만화루를 세웠다고 한다.
만화루 현판 글씨는 정조18년(1794)에 태인 현감 趙恒鎭의 글씨이다.
만화루 앞의 홍살문(紅箭門)
泰仁 東軒
조선시대 태인 고을의 수령이 업무를 보던 청사
淸寧軒 이란 현판은 고을을 편안하게 잘 다스린다는 뜻이다
증자헌대부예조판서행사간원정언치사불우헌정공지묘
불우헌 정극인선생(1401~1481)은 사간원 정언 즉 정6품관으로 벼슬을 그만 두었는데(致仕)
정2품 자헌대부 예조판서까지 증 했다
안창렬 관장님께서 不憂軒 丁克仁 선생의 생애와 고을의 풍수지리등, 道康 金氏,礪山 宋氏,
靈光 丁氏,慶州 鄭氏,淸道 金氏의 애증과 더불어 살기, 최초의 가사 賞春曲을 完誦하시면서
열심히 봉사자님들을 위하여 설명해 주셨다. 감사합니다
贈貞夫人九皐林氏墓(증정부인구고인씨묘)
정극인 선생의 부인으로 정극인 보다 15년전에 돌아가셔서 묘가 위에 있다
당시에는 묘자리 상하관계를 그렇게 엄격하지 않았었다 한다.
정극인은 경기도 광주 豆毛浦(지금의 서울시 옥수동)에서 태어나 세종11년에 생원시에 급제하여
20년간 머물다가 처 九皐 林氏의 고향인 이 곳 古縣洞에 낙향하여 이 곳 양반자제를 가르치며
유교적인 기풍을 뿌리내렸다.성종 6년(1475)에 고현동에 洞會를 조직하고 鄕飮酒禮를 시행하고
이웃사람과 화목하게 지내는 규약을 만들었다.-洞約과 洞案(洞院혹은 洞員의 名簿)-
정극인 내외분 묘소 전경
왜 홍살문에 홍살이 이렇게 많은가? 22개나 된다.보통 10 내지 14개인데...
絃歌樓
絃樂器(거문고,가야금,비파 등 줄을 켜서 소리를 내는 악기)와 어울려서 노래를
부르던 누각으로 무성서원의 정문 外三門이다
이효종학예사가 안창렬선생님을 소개하고 있다
武城書院의 연혁(沿革)
井邑市 七寶面 무성리 500번지, 사적 제 166호
서원은 조선시대 교육과 선현에 대한 享祠를 행하던 私學 교육기관으로
무성서원의 근원은 泰山祠에 둔다. 최치원이 태산군수로 오시어 소요하던 月延 流觴의
자취와 현기의 유풍을 같이 추모하고자 태산사를 세우고 선생을 향사했다.
여기에 또 조선조 중종때 申潛이 태인현감으로 오시어 교화에 힘쓰니 古縣사람들은
生祠堂을 세워 그의 업적을 기리었다.
丁克仁이 이 고장에 들어와 呂氏鄕約에 기대어 고현동약을 만들고 남학당을 새워 이 곳
제자들을 교육시키니 여기에 벌써 선현향사와 후진교육이라는 서원을 다 한 것이다.
원래 태산사는 月延臺에 있었는데 1483년 정극인이 창립한 향학당이 있는 자리 곧 현
무성서원자리로 옮겨왔다. 정극인에 이어 宋世琳이 구실을 착실히 다했고 鄭彦忠,金若默,
金灌 등 인물을 배출시켰다.태산사와 생사당이 서원으로 바뀐 것은 광해 7년(1615)이고
그 뒤 정극인 등 이 곳 출신들을 배향하여 숙종 22년(1696) 무성서원으로 사액서원이 되었다.
고종 5년(1868) 서원 철폐령에도 살아 남은 47개 서원 가운데 하나이다.
武城書院絃歌樓記
삼가 일찌기 공부자를 뵈옵고(謹嘗觀孔夫子)...를 읽어 보며
무성서원 강당 앞마당에 쌓인 은행잎
무성서원 강당에 걸린 柱聯
文藝時習 詩書禮樂 (문예를 때때로 익히니 시.서.예.악이요)
德業日新 孝悌忠和 (덕업을 날로 새롭게 하니 효.제.충.화로다)
勸規交恤 藍田故約 (권.규.교.휼의 향약을 따르니 남전의 옛 향약이구나)
揖讓進退 杏亶遺敎 (절하고 사양하며 물러나고 나아가니 공자의 가르침이구나)
勸規交恤은 德業相勸,過失相規,禮俗相交,患難相恤을 이름이다.
藍田은 여씨향약을 만든 북송의 呂大鈞,呂大忠 사형제의 고향 남전을 말한다.
남전은 중국 陝西省 동남쪽 美玉이 많이 나는 名山
주련위의 연꽃 표시는 송나라 周敦頤(주돈이)의 "愛蓮說"에서 보이드시 선비들은 연꽃을 사랑했다
出淤泥而不染 灌淸漣而不妖 中通外直 不蔓不枝 香遠益淸
'진흙에 나서 물들지 않고 맑은 물결에 씻기면서도 요염하지 않고 가운데는 통하고 밖은 곧으며
덩굴도 없고 가지도 없으며 향은 멀리 가면서도 더욱 맑아진다'
즉 연꽃은 군자에 비유된다.
무성서원의 內三門
내삼문의 주련
聖朝額恩 (성조 숙종임금께서 사액의 은전을 주시고)
士林首善 (사림의 으뜸이라)
은행잎이 가득한 태산사 앞 마당에서
태산사의 주인 孤雲 崔致遠
현가루를 바라보며
武城書院廟庭碑
賜額 무성서원
肅宗 22년(1696) 丙子年 十一月 日에 사액한 무성서원의 편액
講修齋- 원생 기숙사
丙午(1906)倡義紀蹟碑
현가루 외삼문앞 석비들
閒亭
칠보면 무성리 성황산 아래
중종 때 고현동 사람 金若晦가 낙향하여 머문 곳 현액은 석촌 윤용구가 썼다.
김약회는 중종 8년(1513) 진사시에 합격하고 李滉,金麟厚, 李恒과 더불어 사귀었다.
송산사
정조 12년(1788)에 세워 金大立,김응빈, 김정,김감,송치중,김급을 모신 사당
답사후기유감
태인 고현동 답사중 피향정,신잠선정비.이로비.향교,동헌,정극인묘소,무성서원,한정,필양사,
송산사의 1편 답사후기를 마칩니다. 이어서 2편을 올리겠습니다
그동안 읽고 보시느랴 수고 많았습니다.
답사후기 자료는 2009년 11월에 역사관 특별전 '태인 고현동 향약' 도록에서 인용했습니다.
감사합니다.
2011년 11월3일
사진 편집 및 글
권진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