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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현대노동사의 산 증인, 김영곤 씨 | ||||||
스물넷에 시작한 노동운동가의 삶 27년 고향 당진 “환영철강 환경문제 반드시 해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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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대에서 ‘노동의 역사’ 강의하며 5년 넘게 천막농성 겨울바람이 매섭다. 아무리 옷깃을 여미어도 코끝이 떨어져 나갈 것 같은 추위를 막을 길이 없다. 그는 아내와 함께 대학강사의 교원지위회복과 대학교육정상화를 위해 국회 앞에서 천막생활을 하고 있다. 그는 고대면 슬항리에 진행된 관광농원 허가 취소와 환영철강 환경오염 대책 마련을 요구하고 있다. 평일엔 서울 국회 앞에서, 주말이면 고향 당진에서 그는 매일 길 위에 선다.
노동운동가로서의 삶 “고대초등학교를 다니다 5학년때 서울로 유학을 갔어요. 7남매중 셋째였어요. 아버님의 뜻이었죠. 고려대 경제학과에 입학해 대학생활을 시작하면서 학생운동을 하게 됐어요. 60년대말, 70년대 초의 일이죠.” 그의 대학생활은 독재정권이 들어선 1972년 유신 직전이었다. 학생운동에 가담했다는 이유로 학교에서 재적을 당한 그는 공장에 들어갔다. 생계를 위한 근로의 목적도 있었지만 그보다 당시 노동자들의 삶 속에서 노동운동가로 살아가는 선배들의 영향이 더 컸다. 그가 노동운동가로서의 삶을 결심하고 공장으로 들어갈 무렵, 구로동에서 전태일이 ‘노동자는 기계가 아니다’며 분신자살하는 사건이 벌어졌고 그 사건은 김씨의 노동운동에 불씨를 지폈다. 교수를 도와 전국노동자 여론조사를 하며 보았던 노동현장도 큰 몫을 했다. “공장 노동자들은 하루 16시간씩 일을 했어요. 기숙사도 없고 그나마 있어도 닭장같은 곳이죠. 임금도 터무니없고요. 사람이 기계였던 거죠.” 김 씨는 구로동부터 인천공단까지 페인트, 기계가공, 냉동기 기사로 일하며 노조를 결성하고 노동자의 권리를 찾는 운동을 해나갔다. 그의 나이 스물넷의 일이다. “81년에 인천대우중공업에서 노조를 결성해 사무장을 맡았어요. 그리곤 회사에서 짤렸죠. 다시 안산에 내려가 일진 주식회사라는 곳에 입사했지만 3년 뒤 봄에 임금인상 농성을 하다 회사에서 짤리고 수배자가 됐어요. 87년 6월 항쟁 때는 경기남부, 서울지역에서 군사정권의 장기집권에 맞서 민주항쟁을 벌였어요. 안산노동자권익투쟁위와 수원노동상담소 경기남부 연합 부회장도 함께 했고요.”
현장을 책으로, 강의로 옮겨온 16년 90년대에 들어서도 그는 삼성전자 노동조합 결성과 전국노동조합협의회 결성을 도왔다. 92년에는 노동자 대중운동을 토대로 새롭게 결성된 자주적 노동운동단체들의 전국적인 상설 공동투쟁체인 전국노동운동단체협의회 의장을 맡기도 했다. 그러던 중 김 씨는 1997년 20여년의 노동운동가 생활을 접었다. “97년에 민주노총이 생기면서 노동사회운동이 노동조합과 정치권이라는 두 축을 중심으로 나뉘었어요. 그런 이유들로 당초의 노동운동이 변화됐고 저도 노동운동을 그만두었죠. 그리고 곧바로 책 집필에 들어갔어요. 책은 왜 노동운동이 변화됐는지 그동안의 노동운동 역사는 어떠했는지에 대한 이야기였죠.” 꼬박 8년 4개월이 걸렸다. 27년이란 세월동안 현장에서 잔뼈가 굵은 한국 노동운동계의 산증인인 그가 현장에서 체득한 것들을 한 권의 책으로 집약하는 데 걸린 시간이다. 2005년 그는 <한국노동사와 미래>라는 책을 발간했다. 책이 발간되자 고려대 한 교수가 강의를 제안해 왔고 2005년 9월부터 지금까지 그는 모교 강단에서 ‘노동의 역사’, ‘노동의 미래’라는 두 과목을 학생들에게 가르치고 있다. 그는 학생들에게 무엇보다도 “나의 노동만이 아니라 남의 노동도 중요하다, 노동은 단순히 임노동만이 아니라 의식주, 교육, 건강, 민주주의, 생태환경 등 모든 것들에 필요한 서비스, 유통 소비 과정이 노동”이라고 가르친다. 특히 “CEO가 되더라도 약자를 지배하려 하지 않고 약자가 되더라도 지배당하지 않는 제국주의, 소극적 자본주의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강조한다. 평생을 노동운동을 하며 살다, 이제는 현장에서 깨달은 것들을 후세에 전하는 교육자로서의 삶을 시작한 김영곤 씨. 이제 힘든 길 위에서 온전히 내려올 법도 한데 그는 오늘도 여전히 길 위다. 대학강사의 교권지위 회복이 학생들에게는 학습권을 학부모들에게는 교육권을 보장하는 일이라 여기기 때문이다. 그는 오랜 천막농성으로 가진 것을 모두 내어 놓아 어려워진 생계에 서울 생활을 청산하고 아내와 함께 지난해 봄 고향에 내려왔다. 하지만 고향에서도 부당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었다. 환경오염과 고향 주민들이 관련된 일들이었다. 그는 주저하지 않고 선두에 섰다. 고향 시골마을에서 일어난 일이지만, 그는 잘못된 것을 바로 고쳐나가는 일이 결국에는 당진 전체, 한국 전체를 바꿀 중요한 시발점이 되리라 생각한다. 그는 “환영철강 환경문제와 내부조사 건은 지역 전반에 영향을 미치는 중요한 일로 주민들과 함께 반드시 해결할 것”이라고 말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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