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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고학 추론도 못하는 마고문명과 흑피옥 왜 컬렉션을 합니까?
소스 : 동북아역사문물연구원
흑피옥기에 연보 한 권을 편찬하는 것은 좀 이른 것 같습니다, 연보를 편찬하는 것은 종종 그 후의 일입니다.흑피옥기는 아직 과학적으로 발굴되지도 않았고, 아기가 태어나지도 않았는데 연보를 편찬하는 것이 우스운 일이 아닐까요?
흑피옥기는 일찍이 세상에 등장했습니다. 그것은 아마도 우리가 알고 있는 선사시대 유물보다 훨씬 이전입니다. 어떤 사람은 홍산문화의 유물이라고 하고, 또 어떤 사람은 초원원원문명의 기억이라고 합니다.
서울대학교에서 C14로 시험한 년은 15,000년 전입니다.
이런 오래된 것은 연보를 만들어야 우리 조상들에게 떳떳하고 우리 문명에 떳할 수 있습니다.
흑피옥기의 연보는 흑피옥기 자체가 아니라 흑피옥기가 등장한 후 각양각색의 사람과 사물에 관한 이야기를 읽는 것이 분명 재미있을 것입니다.
1980년대에는 베이징과 상하이의 아직 기후가 형성되지 않은 수집 시장에 크고 작은 검은 석조 조각이 조용히 등장했으며 일부는 한 손에 몇 개 넣을 수 있고 일부는 20cm가 넘고 검은 껍질이 있거나 밝거나 대마 모양이지만 일반적으로 표면에서 점이나 조각 모양의 결정이 발견됩니다.
호기심에 일부 수집가들은 값싸고 모양이 이상한 이 검은 석조 조각을 좋아하여 작은 것은 손에 들고 놀고 큰 것은 책상에 놓고 감상합니다.
이 수집 애호가들 중 북경에는 백악, 주진 등이 있고 상해에는 한련국, 전익중, 천일민 등이 있으며, 훗날 흑피옥기 수집에 일정한 영향을 끼친 애호가들이 있는데, 이때도 서로 알지 못하며, 각자 놀기만 할 뿐 같은 취미와 미적 정취만 가지고 있어 그들이 이전에 보지 못했던 흑피옥조 석물에 깊은 관심을 가지게 되어, 속속 국내 흑피옥조 수집가가 되었습니다.
1980년대에 중국은 개방되었고 많은 외국인들이 사업과 투자를 하면서 중국의 우수한 문화에 감탄하고 고대 중국 문물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중국의 고대 문물을 수집하기 시작했습니다.80년대 말 김희용이라는 한국인도 중국에서 흑피옥기를 찾기 시작했습니다.
찾기 쉽기 때문에 내몽골의 목축민과 농민들은 손에 든 흑피옥기를 전국 각지의 수집시장으로 보내기 시작했는데,
이들은 대부분 퉁랴오 지역 출신이거나 퉁랴오 지역 출신이라고 주장했는데, 당시 퉁랴오는 이미 지급시였지만, 퉁랴오 지역 전체를 철리무맹이라고 불렀습니다.
그 중에는 우리가 이미 소개한 샤오리 형제, 취공과 콧수염이 있습니다,
물론 더 많은 알려지지 않았거나 이름을 남기지 않으려는 친구들도 끊임없이 각지의 수집 시장에 흑피옥기를 공급하고 있습니다.
1980년대의 흑피옥기는 시장에서 전혀 가격을 매길 수 없었고, 내몽골에서 북경, 심지어 상해까지 공급자는 힘에 의지하여 일반석에 앉았고, 초원의 사막에서 주워온 검은 돌을 팔 수 있다는 것은 이러한 순박한 목축민과 농민들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정품이 없으면 가짜가 오겠습니까?초기의 흑피옥기는 빼어난 기량과 원시적인 분위기를 풍기며 혜안만의 마니아들을 사로잡았습니다.
백악, 주진, 전익중, 한련국, 천일민을 정복한...…。
1980년대와 1990년대에 흑피석 조각은 내몽골 초원과 다싱안링산에서 조용히 발견되어 베이징과 상하이에서 완전히 개방되지 않은 수집 시장으로 조용히 옮겨졌고 마침내 수집 애호가들의 집으로 조용히 들어갔습니다.
이것들은 현재 흑피옥기의 조각상으로 인정받고 있으며 점차 수집가들의 사랑을 받으며 점점 더 많은 인기를 얻고 있습니다.
컬렉션은 컬렉터뿐만 아니라 컬렉터뿐만 아니라 컬렉터 인품에 대한 사랑으로 컬렉터 링의 집합과 분리는 컬렉터 업계에서 매우 일반적이고 정상적인 현상입니다.
소위 '유유상종, 사람유상종'은 수집 업계에서 가장 좋은 주제이며 흑피옥기와의 인연으로 인해 많은 수집 이야기가 있습니다.
마침내 1990년대 한련국과 천이민은 시장에서 신석기시대 옥기에 대한 토론으로 친구가 되었고, 마침내 우명은 주진에게 옥기 감상을 배우기 시작했으며, 전익중과 한련국은 상하이 유화조각원에서 함께 일하면서 오랫동안 예술적 분위기에 젖어 원본 조각에 대한 독특한 깨달음을 얻었고, 백악 선생은 경성에서 묵묵히 흑피옥기를 소장하고 있었고, 김희용 선생은 중국 각지를 찾아 헤매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에 이 수집가들은 모두 흑피옥기를 홍산옥기로 수집했습니다.
처음에 이 수집가들은 모두 흑피옥기를 퉁랴오 지역의 유물로 수집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 흑피옥기의 연보를 만들 때, 홍산옥기의 소장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점차 흑피옥기를 좋아하는 수집가가 점차 많아지고 있으며, 베이징 친구, 상하이 친구, 내몽골 친구, 랴오닝 친구, 심지어 신장과 윈난에도 흑피옥기 수집가가 있습니다.
장이핑(張一平), 야오정(姚政), 쑨친스(孫钦石), 잉웨이다(應伟達), 장판(張帆) 등이 모두 흑피옥기 수집 대열에 합류하여 행렬은 점차 확대되었지만 연결고리는 여전히 흐트러져 있으며, 흑피옥기 수집가들의 총애는 단지 총애에 불과합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백악 선생은 이러한 원시 고물의 경위를 생각하고, 전익중, 한련국, 천일민, 천앵도 이러한 검은 가죽 조각의 원인과 결과에 대해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생각은 중국 학자들이 최초로 흑피옥기에 대한 이성적인 사고를 하는 것입니다.
그들의 연구는 후에 흑피옥기의 최초의 학술적 성과가 되었습니다.
흑피옥기의 출처를 찾아 헤매던 김희용의 끈질긴 노력으로 흑피옥기는 통요에서 나왔다는 굴레에서 벗어나 매장지를 찾게 된 것.
21세기에 들어서면서 흑피옥기에 대한 이야기가 많아지고 흑피옥기에 대한 논쟁이 많아졌으며 흑피옥기에 대한 연구 결과도 많아졌습니다.
2001년 1월 '중국 컬렉션' 창간호에서 바이웨 선생은 '홍산 문화 옥기의 참과 거짓'이라는 글을 발표하여 옥매, 옥룡형패, 옥다람쥐, 옥조형패, 옥조패 등 흑피옥기에 대해 '검정색 또는 황색 껍질 아래서 많이 나타난다'는 판단을 내렸는데, 이는 바이웨 선생이 흑피옥기에 대한 이해가 모든 옥기 수집가와 연구자보다 앞서 있음을 보여줍니다.
2001년 9월 12일, 바이웨 선생은 '중국문물보'에 '원조 흑피옥기의 진위 및 초정'을 발표했습니다.이 기사는 처음으로 수집계와 고고학계에서 '원조 흑피옥기'라는 이름을 제안했으며, 그 이후로 새로운 선사 옥기가 명명되었습니다.
이 글에서 바이웨 선생은 주로 이런 옥기의 재질 문제를 토론했습니다.
2002년 4월 '상하이공예미술' 2002년 2호에서 천이민과 천잉은 '현조생상'이라는 글을 발표하여 흑피옥기 '정돈룡옥조기'에 대한 문화적 의미를 논의했지만, 이 글은 당시의 역사적 조건에 국한되어 흑피옥기의 관점을 명확히 제시하지 못한 채 '옥기표피, 얼룩덜룩한 진색은 수천 년의 세월의 침윤이며 여전히 이 옥기의 광채를 감출 수 없습니다.
노란색 옥 코끼리는 수천 년 전의 신비를 드러내고 그 신비를 찾도록 우리를 매료시킬 것입니다.”
2002년 10월 '상하이 공예미술' 2002년 4호에서 천이민과 천잉은 '통령신기-귀신의 얼굴의 공예와 기능'이라는 글을 발표했는데, 이 글에서는 여러 흑피옥기 가면의 공예와 기능에 대해 피상적인 학문적 탐구를 했지만 흑피옥기의 껍질은 '검정색으로 스며들어 돌처럼 거칠지만 불빛으로 치면 가장자리가 약간 얇으면 빛이 투과되어 갈색 옥이 드러납니다.”
2003년 1월, '상하이 공예 미술' 2003년호에서 천이민과 천잉은 '대홍독수리-사막의 자랑'이라는 글을 발표했으며 이 글에는 두 개의 검은 피부 옥독수리가 게재되었습니다.
2003년 4월 '상하이 공예미술' 2003년 2호에서 천이민과 천잉은 '홍산문화태양신상'이라는 글을 발표했으며 이 글에서는 4개의 흑피옥기태양신상을 발표했습니다.
2003년 10월, 하오펑량은 천이민, 첸이중, 한롄궈와 함께 첫 번째 훙산 문화 여행을 시작했고, 하오펑량과 흑피옥기의 진위 여부에 대해 논의했습니다.이후 하오펑량은 관련 인터넷에 '홍산고옥'과 '홍산옥기 수집 및 감상'을 '약서'라고 칭했습니다.
당시 류궈창 선생의 발굴 유적지를 둘러보고 바이티강 선생과 샤오궈톈 선생을 만났고, 세 사람은 좋은 친구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천이민 선생과 샤오궈톈 선생은 함께 일했던 미담도 맺었습니다.
이 기간 동안 천이민 선생은 바레인 유키 박물관의 우란 여사에게도 흑피옥기에 대해 배웠고, 우란 여사는 천이민 선생에게 바레인 유키 박물관에 수집된 3개의 흑피옥기가 소장되어 있다고 분명히 말했습니다.
2003년 가을, 천이민은 상하이 박물관 고고학과 장밍화 선생과 흑피옥기 문제를 논의했고, 장밍화 선생은 흑피옥기의 존재를 부정하기 시작했고, 천이민 선생은 장밍화 선생 앞에서 흑피옥기의 표면을 구경했습니다.
한 달 후, 두 사람은 다시 그 자리에서 논의했고, 흑피옥기 표면에 흰색이 나타나 함께 흰색을 지웠고, 잠시 후 두 사람은 다시 흰 표면을 보았습니다.
장명화 선생은 "붉은 카멜레온.
2003년 12월, 첸이중과 한롄궈는 "홍산고옥"이라는 책을 출판했습니다. 그 중 제10장은 "원시 예술의 진기한 꽃과 화훼-흑피옥 조각의 비밀"입니다. 흑피옥기의 발견, 연구 및 예술에 대해 논의하고 흑피옥기의 예술적 탐구를 비교적 체계적으로 전개했습니다.
2004년 4월 천이민과 천잉은 '홍산옥기 수집 및 감상'이라는 책을 출판했는데, 이 책은 흑피옥기의 문제를 구체적으로 논의한 여러 장을 나열했으며, 흑피옥기의 감정 문제를 제시할 뿐만 아니라 지금까지 비교적 포괄적이고 학술적인 차원에서 흑피옥기의 문화적 함의를 논의한 저서입니다.
2004년 10월, 류융셩과 왕창장은 일부 흑피옥기를 발표한 '홍산 문화 고옥 연구'라는 책을 출판했습니다.
2004년 중순, 쉬창은 상하이로 천이민 선생을 방문했습니다. 천이민 선생이 근무하는 호텔에서 천이민, 첸이중, 한롄궈는 쉬창의 소장품을 보고 쉬창의 홍산옥기에 대해 자신의 견해를 밝혔습니다.
동시에 상하이의 수집가들은 거의 30cm의 옥구운 모양의 패물을 꺼내 쉬창에게 구경시켜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그 후 많은 홍산옥기 애호가들이 상하이에서 천이민 선생, 한롄궈 선생, 첸익중 선생을 방문했으며, 그 중에는 황강진 선생, 심기 선생, 하오펑량 선생 등 홍산옥기 수집계의 저명한 인사들이 적지 않았습니다.
말레이시아의 장예보(張野波) 선생과 저명한 사회학자 류다린(劉達林) 선생이 데려온 미국인 손님도 상하이(上海)와 세 사람이 토론하고 교류했습니다.
2004년 10월, 한롄궈, 첸이중, 천이민은 다시 북쪽으로 여행을 떠났고, 그들은 퉁랴오, 진저우, 선양으로 가서 퉁랴오의 목축민들과 농민들과 홍산옥기와 흑피옥기의 발견지에 대해 논의하고 쉬창, 류둥칭, 황강태 선생과 교류했습니다.
쉬창의 '청우당'에서 그가 소장하고 있는 홍산옥기와 원청화 도자기를 둘러보고 세 사람의 공통된 의견을 발표했는데, 아마도 이러한 견해는 쉬창의 마음에 풀리지 않는 매듭이 되었을 것입니다.
천이민 선생은 쉬창 선생에게 그의 저서를 선물했고 쉬창은 세 사람이 함께 읽을 수 있도록 그의 저서 '홍산 문화 고옥 에센스'를 선물했습니다.
세 사람은 황강태가 소장하고 있는 수많은 홍산옥기를 관람하고 흑피옥기 문제도 교류했습니다.황강태 선생은 자신이 소장하고 있는 백피옥기의 문제에서 신석기 시대 옥기의 다양성에 대해 이야기하고 흑피옥기의 객관적인 존재를 지지했습니다.
2006년 7월 7일, 바이차오와 아창이라는 ID의 저자는 '홍산 문화 고옥 수집 클럽' 웹사이트에 '홍산 문화 흑피옥' 및 '위조 폭로'라는 글을 게시했습니다.
2006년 8월, 천이민은 2006년 중국 신화학 국제 심포지엄에서 천잉과 함께 '홍산옥기의 신화학적 사고'를 발표했습니다.
2006년 8월 18일, 베이징 사회과학원 연구원 첸광페이(钱光培)는 인터넷에 '홍산옥기 연구의 바람직한 돌파구'라는 글을 발표하여 천이민과 천잉(陳莺)이 공저한 '홍산옥기의 수집과 감상'이라는 책을 읽은 소감을 밝혔습니다.
2007년 1월, 바오웨 선생은 신화출판사에서 '옥해주진'이라는 책을 출판했는데, 이 책에는 바오웨 선생과 그의 동생 바오핑 선생이 소장하고 있는 고옥 300점이 수록되어 있으며, 그 중 100점 이상의 홍산과 룽산 고옥이 처음 출시되었으며 대부분이 희귀한 희귀품입니다.
도판 외에도 이 책의 논술 섹션에서는 '홍산 문화 옥기의 진위', '원조 흑피 옥기의 진위 및 초기 탐색', '흑피 원조 옥기' 및 '홍산 문화 옥기에 대한 몇 가지 문제' 등 4편의 논술을 발표했습니다.
2007년 2월 2일, 천이민과 천잉은 '문회독서주간보'에 '홍산문화옥기 감상'이라는 글을 발표했는데, 그 중 하나는 '흑피옥기' 문제를 전문적으로 다루고 있습니다.
2007년 6월 8일 전남과학대학교 동북아문화연구소 '고대유랑유물연구회' 논문집 '공동연구기념특집호-직립하지 않은 인간이 만든 제1차 인류문명-초고대 문명시대의 흑피옥 조각상'을 출간한 정재건 선생과 진일민, 전익중, 한련국, 상하이박물관의 부연구원이 함께 흑피옥기의 인류학적 가치를 탐구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상하이 관련 경매업계와 학교의 정균이, 한루이웬, 왕팡도 동석했습니다.
신화미통은 2007년 8월 24일 흑피옥 무덤군, 베일을 벗다라는 제목의 통신에서 소정 김희용이라는 한국인이 16년에 걸쳐 중국 네이멍구 대초원 지하에 잠자고 있던 거대한 왕국의 베일을 벗기고 있습니다.
중국에서 가장 오래된 문명의 성대는 도대체 언제, 어디에서 기원했습니까
?만리장성, 병마용에 이은 중국 고대 문명의 놀라운 발견입니다."이 기사는 빠르게 각종 사이트에 퍼나르고 있습니다.
2007-9-620:10:17 '중국 츠펑 문화 네트워크'는 '홍산 문화 흑피옥'과 '위조 폭로'라는 글을 리트윗했습니다.
2007년 11월 5일, 장이핑은 베이징에서 상하이로 달려가 천이민 선생과 흑피옥기 문제를 논의했습니다.천이민 선생은 첸익중, 한롄궈 선생과 함께 장이핑 선생의 소장품을 보고 감탄하며 만장일치로 그의 소장품을 인정했습니다.
2008년 2월 14일 한윤명 선생은 칼럼에서 '전문가가 붉은 산의 흑피옥을 부정한다'는 제목의 장명화 선생의 글 일부를 리트윗했습니다.
2008년 3월, 천이민 선생은 장이핑 선생의 집을 방문했고 그의 소장품에 매료되었습니다.천이민(陈逸民) 선생과 야오정(姚政) 선생은 만나 흑피옥기(黑皮玉器)의 첫 번째 큰 사업의 완전한 상황을 이해했습니다.
2008년, 장이핑 선생은 두 번이나 쉬창 선생의 골동품 가게에 가서 감정을 했고, 처음 가져간 흑피옥기는 가짜로 판명되어 증명서를 발급받았고, 수개월 후, 같은 소장품은 겉껍질을 벗겼기 때문에 보기 드문 진품으로 판명되어 증명서를 발급받았습니다.
2008년 하반기 국가문물국 단제상 국장에게 편지를 보내 흑피옥기의 출토 상황, 소장가의 소장량, 상하이 베이징 등의 연구 상황, 김희용의 발굴 과정 등에 대해 국가 차원에서 흑피옥기를 중시해 줄 것을 당부했습니다.
2008년 11월, 국가문물국 판공실은 2008년 11월 4일, 흑피옥기가 전문가들에게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는 객관적 사실을 설명하고, 김희용 선생에게 흑피옥기가 출토된 정확한 장소를 알려달라는 서한을 백악 선생에게 보냈습니다.
2008년 12월 국가문물국의 태도를 알게 된 김희용은 네이멍구 후얼하오터에 가서 왕다팡(王大方) 문화부문장을 만나 흑피옥기(黑皮玉器) 문제를 논의했습니다.
김희용 선생은 발견한 정확한 주소를 내몽골 관계자에게 알려주었습니다.
내몽골 관련 방면은 즉시 해당 지역에 대하여 필요한 보호 조치를 취합니다
2009年1月31日 한국 최대 일간지인 조선일보는 내몽골 측의 조치 여부를 물은 뒤 2009년 1월 31일자로 '흑피옥기의 비밀'이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김희용 선생의 사진과 흑피옥기의 사진을 실었습니다.
2009년 3월 7일, 아이디 "고안 손님" 상하이 사회 과학보의 "중국 수집가 포럼"에서: 1월 31일 한국 "조선 일보"는 전면 지면에 한 한국 문화 연구자의 도문을 발표, 세계에서 가장 먼저 홍산 문화 저장고를 발견, 내몽골 모처에서!!!
2009년 3월 13일, 베이징 일보는 부록에 '흑피옥: 먼 옛날의 부르짖음'을 발표했으며 저자는 자오웨이이며 장이핑 선생의 흑피옥 도구 수집 상황을 소개했습니다.
2009년 6월 5일, 베이징 일보 부록은 '박삭미리흑피옥'이라는 기사를 다시 발표했습니다.
2009년 《문물천지》 6호는 장이핑 선생의 흑피옥기 수집 상황을 보도했을 뿐만 아니라, 잡지는 본지의 마이윈 기자의 '나의 "붉은 산"이라는 글을 발표했는데, 한 단락을 다운로드하여 매우 흥미로웠습니다.
어떤 소장 친구가 흑피옥을 가지고 한 고옥 감정기관에 가서 조사를 요청했는데, 이 기관은 텔레비전 매체를 빌려 빠르게 인기를 얻은 수집가가 설립한 것인데, 이 유명한 수집가 겸 전문가는 힐끗 쳐다보더니, 분명 '아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친구는 이에 불복하고 집에 돌아와 고경도 도구로 검은 껍질과 옥 외부의 검은 껍질을 갈고 오랜 시간을 들여 검은 껍질을 긁어냈습니다.
유명한 수집가이자 전문가를 초청하여 태도를 180도 돌변하여 '대개문의 고옥 부티크, 매우 희귀합니다'라고 말했습니다.돈을 세어 본 후, 선뜻 증서에 서명했습니다.같은 검은 피옥 조각인데, '어두워지기 전'과 '어두워지기 후'는 하늘과 땅 차이입니다.”
김희용 선생은 2009년 3월 상하이에서 천이민 선생, 첸익중 한롄궈(連國), 잉웨이다(應伟達), 장판(張帆), 쑨친스(孫钦石) 선생을 만났습니다.
2009년 6월 어느 날 김희용 선생이 베이징에 나타납니다.
중국 문물국에서 김희용선생에게 내몽골 흑피옥 발굴지 조사를 제안 했으나 ..... 결과적
으로 흑피옥 발굴지는 없었습니다 고고학 발굴이 없는 유물이 있습니까? 고고학은 과학
입니다 발굴과 과학 그리고 추론으로 역사를 찾아가는 것 입니다
중국 컬렉터들은 흑피옥을 버리고 한국은 흑피옥 대국이 되었습니다 이상하고 괴기한
형상이 우리들 동북 민족 입니까 여쭙니다 물론 흑피옥기의 0.01%는 앞으로도 연구를
해야 합니다 그러나 모방되고 가짜를 우리들 조상과 구석기시대를 마고문명으로 명칭
하고 지지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우리들 컬렉터와 동북역사 연구가들은 생각해야 합니다
흑피옥으로 가장 이득을 누가 가지고 가고 있습니까 판매자 아니겠습니까 컬렉션은 기
본적으로 학습이고 고고학 기초 상식이 있어야 보물을 찾을수 있습니다
김희용선생의 보물사냥꾼의 도전도 필요합니다 역사의 진실을 찾으려고 노력을 하신
것에 후배로써 존경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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