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10.6.(목) 이제 아침저녁으로 쌀쌀한 걸 보니 가을이 깊어감을 느낀다. 올가을에 내 생전 처음으로 도전해 본 일이 있으니 도토리 줍기다. 집 앞에 자연스러우면서 멋있는 호수가 있어 한 20년째 틈만 나면 나가서 산책을 즐기곤 한다. 한 2주 전부터 사람들이 도토리 줍는 모습이 보이길래, 처음에는 별 관심 없이 돌다가 어느 날 나가보니 산책하는 큰길에 큼직한 도토리가 몇 개 떨어져 있는 것을 보고는 저렇게 줍는 사람에게는 선물이 되겠다 싶어서 허리 굽혀 줍기 시작하니 금방 한 줌이 되었다. 몇 걸음 가다가 도토리 줍는 아주머니를 만나 “도토리 주우세요? 여기 도토리 있어요.” 하면서 건네니 고맙다고 하시면서 기쁘게 받으셨다. 그날 이후로 산책을 나가면 자연스레 눈에 띄는 도토리를 주워서 한 웅큼되면 주우시는 분들에게 건네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금요일 저녁에 나가서 산책을 하다가 호수에서 만나서 알게 된 70대 할머니를 만나서 함께 산책을 하게 되었다. 작년 가을인가 벤치에 앉아 있었는데 자연스레 말씀을 걸어서 알게 된 분인데 깊이 알지는 못해도 첫인상이 긍정적이고 박식하신 분이셨는데 올여름 어느 날 호수에서 만나게 되었을 때 하시는 말씀이 올해 산책을 하다가 발을 삐끗해서 다리가 좀 아프시다고 하며 그간 아파서 못 나오기도 하고 좀 고생을 하셨다고 하는데 그러고 보니 그새 좀 늙으신 것 같아 마음이 좀 아팠다. 자녀들은 다 성공하여 외지에 나가 산다는데 결혼을 안한 노처녀와 노총각이라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라는 말씀도 하셨다. 그래서 저는 요며칠 도토리를 주워서 남을 주니 좋아하더라는 얘기도 했다. 그랬더니 두 손을 마주하며 두 웅큼 모양을 하시면서 이 정도만 주워도 집에서 충분히 묵 한 모 정도는 쑤어 먹을 수 있다고 하시면서 집에서 묵 만드는 법을 자세히 알려주셨다. 가만 들어보니 그럼 조금만 주워서 집에서 묵을 써 먹어볼까 하는 생각이 스멀 올라왔다.ㅎ 다음날부터는 3일 연휴라 ‘이런 때는 어디 가봐야 다 사람 많을테고 집에서 진정 푹 쉬면서 휴식을 취해야겠다.’ 생각한 터여서 자연스레 호수를 나가게 됐고 도토리를 줍기 시작했다. 아무 준비도 없이 나가 두 주먹이 되니 더 주울 수가 없게 되어 카페에 들어가 봉지를 하나 얻어서 담고 본격적으로 줍는데, 이미 남들이 몇 번씩 주워간 길이고 주변 숲에는 뱀이 무서워 안 들어가고 큰길에서만 주우려니 간혹 도토리가 한 개씩 보였다.
아무 생각 없이 주울 때는 잘만 보여 금방 한 웅큼이 채워져서 남에게 건네곤 했는데, 봉지를 들고 내것을 만들려니 잘 보이지도 않고 눈에 힘이 들어가기 시작했다. “역시 욕심 없이 사는 게 자연스럽게 훨씬 행운이 눈에 잘 띄고, 내 것으로 욕심을 내서 주우니 잘 보이지도 않고 힘들구나...” 느꼈다.
그런데 한가지 기분 좋은 것도 있었다. 그간 한 일주일 동안 내가 주워서 준 분들보다 3일간 주울 때 주워서 나에게 준 분들이 훨씬 많다는 것이다. 물론 나는 한 웅큼 채워서 드렸지만 내가 봉지를 들고 도토리 줍는 모습을 보고 지나가던 분들이 “도토리 주워요? 여기 있어요.”. “여기 도토리요”, “저 밑에 도토리 많아요.” 하면서 1~2개, 또는 주머니에서 한웅큼씩 꺼내 주시던 분들의 수가 훨씬 더 많았다는 점이다. ‘아직 세상은 살 만하구나, 정이 많으신 분들이 내 주위에 이렇게 많구나.’ 생각이 들면서 기분이 좋아졌다. |
또한, 연휴 3일동안 도토리를 주우면서 어렸을 때 추억도 떠올랐다. 직장 생활을 하시던 아버지께서 일요일이 되면 우리는 자고 있을 때 새벽부터 엄마와 두 분이 배낭을 메고 나가셔서 오전 내에 돌어오시곤 했다. 아마도 두 분이 도토리를 주우러 배낭을 메고 어디 산이라도 찾아가서 배낭 한 가득씩 주워 오시곤 했던 것 같다. 그러면 엄마는 방앗간에 가지고 가셔서 도토리를 가루로 내와서 가을, 겨우내 집에서 맛있게 묵을 쑤어 우리들에게 주시곤 했다. “어때, 묵 잘 쒀졌지?”, “맛있지?”, “묵이 아주 잘 쒀져서 차지고 끊어지지도 않는다.”, “많이들 먹어라.” 참 많이 말씀하셨던 것 같은데 댓구는 마지못해 “응응” 했던 것 같다. 사실 어렸을 때 입맛에는 도토리묵은 하나도 맛이 없었다. 달지도 않고 씹는 맛도 없고 왠지 아무맛도 안 나는 심심한 젤리 같았으니 어린 내 입맛에는 별로였다. 묵이 잘 쒀졌다고 신나하는 어머니에게 맞장구를 쳐주거나 진심 맛있다는 말을 못 전해 드린 것 같다.ㅠㅠ 딱 연휴 3일동안 주운 도토리 몇알이 지금 우리집 아파트 베란다에 신문을 짝 펴고 딱 2쪽 안에 빼곡이 널려 있다. 며칠 말려서 이번 주말에 남편에게 겉껍질을 까달라고 해서 인자하신 아주머니께서 알려 주신대로 믹서에 갈아서 묵을 쒀보려고 한다. 망치면 그만이고, 잘 쒀지면 한접시 썰어서 7-8년 전에 아버지를 여의서 혼자 사시는 어머니를 찾아서 대접을 해 보련다. 아마도 그러면 또 어머니는 “너 어째 이렇게 묵을 잘 썼니?”, “신기하다.” 등등 말씀을 많이 하실거다. 그럼 그때 꼭 말하리라. “엄마,. 어렸을 때 엄마가 집에서 쑤어주던 도토리묵이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묵이었더라구. 커서 나가서 사 먹어보니 뚝뚝 끊어져서 집지도 못하겠던데, 엄마가 쒀 준 묵은 얼마나 차진지 내가 어렸을 때 꼬지처럼 젓가락에 꽂아서 간장을 찍어 먹었다니까.호호호... 그때 엄마가 해 준 묵이 정말 맛있었어”
반 백년을 살았어도 아직도 철이 없어서 다른 형제들은 다 외지에 나가 살다 보니 나에게만 의지하시는 엄마가 때론 버겁기도 하고 힘들기도 하지만 엄마 건강하시고 오래오래 사세요.
참, 도토리 줍기의 한 가지 단점이 있었다. 딱 3일만 주워보자하고 주웠는데 그 다음날 거울을 보고 깜짝 놀랐다. 왼쪽 눈이 실핏줄이 터져 빨갛게 되어 헐크처럼 보였다. 생전 나물 한번 안 뜯어보고 도토리나 밤 한번 안 주워 본 내가 3일간 도토리 줍느라 눈이 많이 피곤했었나 보다.ㅋ 도토리 묵이 잘 쑤워져야 할텐데...ㅎㅎ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