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주 불회사 대웅전(羅州 佛會寺 大雄殿) 보물 제1310호
나주 불회사 대웅전은 상량문 및 건축수법 등으로 볼 때 1799년(정조 23년) 중건된 정면 3칸, 측면 3칸의 장식성이 돋보이는 조선후기의 화려한 다포집이다.
자연석 기단위에 세워진 팔작지붕 건물로 정면에는 모두 궁창판이 있는 4분합의 빗살문인데 한국전쟁 이전에는 꽃살문으로 장식 되어 있었다. 기둥을 받치고 있는 초석은 덤벙주초로 비교적 큰 편이며 그 위에 세워진 기둥은 민흘림 수법을 보여주고 있다.
기둥 위에는 다포계의 일반적인 수법을 따라 창방과 평방이 놓이고 전·후면의 각 주칸에는 외3출목, 내4출목 포작을 2조씩, 양측면에는 1조씩 배치하였는데 외부살미의 끝은 심하게 휘어져 올라가 있고 내부에서는 화려한 연봉형으로 마감하였다. 또한 정면 어칸에는 용머리 장식의 안초공을 사용하여 용두는 외부로 힘차게 빠져나왔고 그 꼬리는 내부로 힘차게 뻗었다.
건물의 양측면 중앙에서는 건물내부로 2개의 충량을 걸어 그 머리를 용두로 장식하여 대량에 걸치었는데 이러한 결구법은 조선중기 이후에 나타나는 일반적인 수법이다. 건물의 내부천장은 빗천장과 우물천장을 혼용하였는데 빗천장에는 물고기, 연화문 등을 매우 정교하게 조각하여 달았다.
건물 기둥 위 창방 위에 평방을 돌리고 그 위에 공포를 짜 올려 다포계(多包系)의 일반적인 수법을 따른 것으로 보이나 가운데 칸의 양 기둥사이로 두 마리의 용을 조각한 점이 특이하다. 즉, 용두를 밖으로 나오게 하고 그 꼬리를 건물 안쪽 대들보 밑에 끼어 넣은 수법, 양쪽 대들보 사이로 상호 중앙을 향해 마주 보도록 또 다른 두 마리의 용을 목각으로 조각한 수법, 건물 내부에 연꽃봉오리 등으로 화려하게 장식한 기법은 부안 내소사 대웅보전(보물 제291호) 등 변산반도를 중심으로 한 사찰과 건축수법에 있어서 그 맥을 같이 하고 있다.
이와 같이 나주 불회사 대웅전은 조선후기 건립 당시의 면모를 잘 간직하고 있는 중요한 건물로 역사적 의의와 함께 학술적 가치가 있다.




나주 철천리 마애칠불상(羅州 鐵川里 磨崖七佛像) 보물 제461호
4각에 가까운 원추형의 바위 표면에 불상을 조각한 독특한 형태의 작품이다.
바위 꼭대기에는 동자상(童子像)이 있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없어졌다. 동쪽면에는 좌상 1구가 있고, 북쪽면에도 좌상 1구가 합장하고 있다. 남쪽면에는 표현수법이 비슷한 4구의 입상이 있으며, 서쪽면에는 원래 2구의 불상이 있었는데 일제시대에 광부들이 1구를 떼어갔다고 전해진다.
이들 불상은 모두 세부표현이 거의 같다. 민머리 위에 높게 솟은 상투 모양의 머리(육계)를 가지고 있으며 얼굴은 길쭉하다. 신체는 길고 굴곡이 없이 밋밋하며 경직된 자세와 간략하게 표현된 옷주름의 처리 등에서 형식화된 모습이 보인다. 불상의 발 아래에는 돌출부분을 마련하여 대좌(臺座)를 대신하고 있다.
비록 불상의 표현수법에서는 고려 석불상에 흔히 나타나고 있는 형식화된 모습이 보이지만 독특한 겉모습과 사방불적(四方佛的) 특징이 표현되고 있어 귀중한 자료로 평가된다.





나주 철천리 석조여래입상(羅州 鐵川里 石造如來立像) 보물 제462호
전체 높이가 5.38m나 되는 커다란 불상으로 하나의 돌에 불신과 부처의 몸 전체에서 나오는 빛을 형상화한 광배(光背)가 조각되어 있다.
민머리 위에는 상투 모양의 머리(육계)가 큼직하게 표현되었고, 얼굴은 사각형으로 양감이 풍부하다. 목에는 3개의 주름인 삼도(三道)가 뚜렷하고, 양 어깨를 감싸고 입은 옷에는 발목까지 늘어진 U자형의 옷주름이 표현되어 있다. 두 팔은 두꺼운 옷자락 때문에 양 손만이 드러나 있는데 오른손은 손바닥을 밖으로 하여 내리고, 왼손은 위로 향하고 있는 모습이다. 광배는 배(舟) 모양이며, 머리광배와 몸광배로 구분되는데, 머리광배 안에는 연꽃무늬를 새기고 몸광배에는 구름무늬를 새겨 넣었다.
살찐 얼굴이라든지 비정상적으로 표현된 신체의 모습, 그리고 형식화된 옷주름 등에서 고려 초기 유행하던 불상임을 알 수 있다. 이 불상은 특히 남원 용담사지 석불입상(보물 제42호)과 크기와 양식이 비슷한 작품이다.

[문화재청 자료]

나주 만봉리석조여래입상(羅州 萬峰里石造如來立像)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64호
하나의 화강암을 끝이 뾰족하게 다듬어 부처의 몸에서 나오는 빛을 형상화한 광배(光背)를 만들고, 그 위에 여래입상을 돋을새김한 것이다.
둥근 얼굴에 살짝 감은 눈, 잔잔한 미소를 띤 입, 길게 늘어진 귀에서 원만한 인상을 풍기고 있다. 옷은 양 어깨에 걸쳐서 입고 있는데, U자형의 옷주름이 무릎까지 이어지고 있다. 오른손은 가슴까지 들어 손바닥이 밖을 향하고 손가락이 위로 향하고 있으며, 왼손은 손가락이 아래로 향하고 있다. 둥근 어깨와 양감있는 가슴, 잘록한 허리의 굴곡 등에서 통일신라시대 불상의 사실적인 모습이 나타난다.
이 불상은 통일신라시대 불상 양식의 전통을 따르고 있는 고려시대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나주 북망문 밖 삼층석탑(羅州 北望門 밖 三層石塔) 보물 제50호
원래 나주 북문 밖에 있던 것을 1915년 옛 나주 군청 내로 옮겼다가 2006년 심향사 경내 미륵전 앞으로 다시 옮겨 놓은 탑으로, 상 ·하 2기단(基壇) 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세운 일반적인 모습이다.
기단에는 면마다 기둥 모양의 조각을 두었는데, 아래기단에는 모서리에만 두고, 윗기단에는 모서리와 가운데에 각각 조각을 하였다. 탑신은 몸돌과 지붕돌을 각각 한 돌로 구성하였는데, 위층으로 갈수록 몸돌의 비율이 줄어들어 전체적으로 날렵한 느낌을 준다. 몸돌에는 모서리마다 기둥 모양을 본떠 새겼다. 지붕돌은 두꺼운데, 밑면마다 3단의 받침을 두었고, 윗면은 지붕돌의 처마끝에 이르러 살짝 들려 있는 모습을 하고 있다. 머리장식으로는 노반(露盤:머리장식받침)과 복발(覆鉢:엎어놓은 그릇모양의 장식)만이 남아있다.
전체적으로 풍화가 심하고 뛰어난 작품은 아니지만 단정한 품위를 잃지 않았고 각 부의 비례도 아름답다. 양식으로 보아 고려 후기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된다.



나주 완사천(羅州浣紗泉) 태조왕건과 장화왕후의 첫 만남이 이뤄진 애뜻한 샘터
완사천은 나주시청 정면 300여m 국도변에 위치하고 있다. 나주시 청사를 현 위치로 옮길 때 이곳 주변의 택지조성을 실시하면서 원래 지반에서 약 6~7m 지면이 높아졌다. 완사천은 원래 조그마한 옹달샘으로 쪽박에 물을 떠먹는 규모였으나 이곳에 택지조성을 하면서 샘주위를 정비하여 직경 1.5m의 원형의 샘으로 만들었다. 이 샘물은 아무리 가뭄이 들어도 물이 마르지 않는다고 한다.
완사천은 고려 태조와 관련된 유적이다. 즉, 태조 왕건은 고려를 건국하기 전 이곳 나주를 몇차례 내려오는데 903~914년 사이 10여년 동안 네차례나 된다. 왕건은 이곳 완사천에서 당시 17세의 장화왕후를 만나 인연을 맺고 제2대 혜종을 낳는다. 한편 이곳 완사천 일대에는 흥룡사와 헤종사란 사당이 있었다고 전해지고 잇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흥룡사는 금강진(현 완사천 일대) 북쪽에 있는데, 태조 왕건이 장화왕후와 인연을 맺을때 장화왕후의 오씨가문이 대대로 살았던 터로, 혜종을 낳은 인연으로 건찰된 것이라 한다.
한편 혜종사도 역시 『신증동국여지승람』에 「혜종사재흥룡사중주인지금사지(惠宗祠在興龍寺中州人至今祀之)」라 조선 중기까지 혜종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모셔온 곳이다. 이러한 인연으로 하여 뒷날 이곳을 흥룡동이라 부르기도 했다. 고려말부터 조선말까지 나주의 향리들이 기록한 관청일기인 ""금성일기"" 또는 ""나주호장일기""에 세종11년(1429) 정월 이안관 전판서 운관사 장득수(張得修)가 혜종의 소상과 진영을 옥교자에 모시고 2월 6일 역참을 통해서 서울로 떠났다는 기록으로 보아 이때 혜종사가 훼철된 것으로 보인다.
이 완사천은 나주(지방호족세력)와 왕건이 고려를 건국하는 과정에서 인연을 맺는 시발점이 되었으며, 또 이로 인하여 혜종을 낳았던 배경이 되고 있는 유적으로 이후 나주를 어향(御鄕)이라고 부르는 계기가 된 것이다.



나주목 관아와 향교 (羅州牧 官衙와 鄕校) 사적 제483호
나주는 삼국시대 때부터 농업이 발달한 지역으로, 농업이 산업의 근간을 이루던 전근대 사회 동안 풍요를 누리던 지역이었고, 고려왕조부터 조선왕조까지 약 1,000년 동안 목(牧)으로서의 지위를 유지한 전라도의 대표적 큰 읍치이었으며, 현존하는 관아 건물과 향교 건물들이 그에 상당한 권위를 보여주고 있어 상당한 가치가 있다.
나주 관아는 신증동국여지승람, 금성읍지, 여지도, 나주목지도를 비롯한 고지도 등에서 위치와 건물 구성을 비교적 자세히 알 수 있으며. 객사 등의 발굴 성과와 옛 사료들을 토대로 조선시대 지방통치 중심지의 구조를 파악하고자 할 때, 현존하는 관아 건물이 좌표축의 구실을 하는 중요한 가치가 있다.
나주 향교는 평지에 들어선 전묘후학의 배치형태를 띠고 있는 전형적인 예이며, 특히 보물 제394호로 지정되어 있는 대성전은 그 규모가 대단히 웅장할 뿐 아니라 양식, 격식이 뛰어나 조선후기 향교건축을 대표할 수 있어 건축학적 가치가 크다. 또한 나주향교는 조선시대 교육시설의 규모를 따지면 성균관 다음이라고까지 지칭될 정도로 규모가 클 뿐 아니라 교육과 제사의 고유기능을 간직하고 있어 중요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정수루(正綏樓) 전라남도 문화재자료 제86호
조선 선조 36년(1603)에 나주목사로 부임한 우복용이 지은 것으로, 나주의 관아문 구실을 했던 것이다.
앞면 3칸·옆면 2칸 규모의 2층 누각이며, 1층 양 옆은 벽으로 되어 있고 나머지 부분은 개방하였다.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이다. 2층에는 한때 시간을 알리기 위해 매달아 놓았던 북을 다시 복원해 놓았다.

나주향교 대성전(羅州鄕校 大成殿) 보물 제394호
향교는 공자를 비롯한 여러 성현에 제사를 지내고 지방민의 교육과 교화를 위해 나라에서 세운 교육기관이다. 나주향교는 태종 7년(1407)에 세워 제사와 교육기능을 수행하다가 신학제 실시 이후로는 제사 기능만을 수행하고 있다.
대성전은 제사를 지내는 곳으로, 교육기능을 수행하는 강당인 명륜당보다 위쪽에 있는 것이 일반적이다. 하지만 나주향교는 공자의 아버지를 모시는 계성사가 있어 명륜당과 대성전의 자리가 바뀌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
규모는 앞면 5칸·옆면 4칸으로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을 한 팔작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짜은 구조가 기둥 위에만 있는 주심포 양식인데, 기둥 사이에는 꽃모양의 받침을 만들어 위에 있는 부재를 받치고 있다. 건물 안쪽 바닥은 마루를 깔았고, 천장은 뼈대가 다 드러나는 연등천장으로 꾸몄다.
평면과 세부기법에서 조선 중기의 전형적인 향교 대성전 양식을 찾아 볼 수 있는 좋은 예이며, 서울문묘·강릉향교·장수향교와 더불어 가장 큰 규모에 속하는 중요한 향교문화재이다.







나주 동점문 밖 석당간(羅州 東漸門 밖 石幢竿) 보물 제49호
당간지주는 사찰입구에 세워두는 것으로, 절에 행사가 있을 때 당(幢)이라는 깃발을 달아두는데 이 깃발을 걸어두는 길쭉한 장대를 당간이라 하며, 당간을 양쪽에서 지탱해 주는 두 돌기둥을 당간지주라 한다.
대개는 두 지주만 남아 있는데, 이것은 당간이 함께 남아 있어 중요한 유물이다. 당간은 5개 돌을 서로 맞물리게 하여 세웠는데, 아래는 굵고 올라갈수록 차츰 가늘어져 안정감 있다. 이러한 당간에 철띠를 두른 후 지주의 안쪽에 마련된 받침돌 윗면에 구멍을 파서 이를 고정시켜 놓았다. 당간 위에는 8각의 보개(寶蓋:지붕모양의 장식)와 보주(寶珠:연꽃봉오리모양의 장식)를 달아 놓았다.
본래 당간은 절 앞에 세워지는데, 이 곳에 절이 있었다는 역사기록은 없고 다만 풍수설과 결합하여 나주의 땅모양이 배모양이기 때문에 안정을 빌기 위하여 당간을 돛대로 세운 것이라는 말이 전해내려오고 있다.



나주읍성(羅州邑城) 사적제337호
전라남도 나주시 남내동·남외동 일대에 있는 성터.
언제 축조되었는지 분명하지 않지만, 나주가 삼국시대 말기에 이미 지방 거점으로 중시되었으므로, 이때 읍성을 쌓았을 가능성이 높다. 현재의 읍성은 고려 초기에 축조되었는데, 정도전(鄭道傳)의 기록에 의하면, 고려 말기에 왜구의 침입으로 해안 지역은 황폐해졌던 반면 읍성은 피해가 없었다고 한다.
조선 초기에 성벽의 둘레는 1,162보 정도였다. 특히 인구의 증가와 군사적인 중요성 때문에 세종·문종 때에 성곽의 규모를 넓혀 쌓았다. 당시 성곽은 인구 증가의 추세에 따라 7,000척 규모로 확장될 필요가 있었던 것으로 파악되었다. 처음에는 북쪽을 600척(尺) 정도 확장하였지만, 성벽의 축조 기법은 법규에 맞추지 않았다.『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둘레가 3,126척이고, 높이는 9척이며, 성 안에 우물 20곳과 샘 12곳이 있다고 하였다.
조선 후기에 이르러서 성곽은 더욱 확장되었다. 둘레는 9,966척인데, 성벽에서 바깥쪽으로 돌출시켜 쌓은 치성(雉城)이 7곳 있었고, 성 위에 낮게 쌓은 담인 여장(女墻) 2,412개가 설치되었으며, 옹성과 함께 문루(門樓)를 갖춘 4대문이 있었다.
현재 읍성의 흔적은 조금 남아 있을 뿐이다. 남문은 남고문(南顧門)이라고 불리는데 1993년에 복원되었다. 성문 위에는 정면 3칸·측면 2칸에 팔작지붕을 올린 문루가 자리하고 있고, 성문 양쪽 끝에는 약간의 성벽이 남아 있다.
나주읍성은 뒤쪽에 자리한 금성산성(錦城山城)과 짝을 이루는 성곽으로, 우리나라 읍성 가운데 규모와 역사가 가장 크고 오래된 읍성이자 평지에 네모꼴의 모습으로 축조된 대표적인 읍성으로 알려져 있다.
동점문(東漸門)



서성문(西城門),영금문(映錦門)



남고문(南顧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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