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김천문화대전
조신
항목 ID한자영어음역이칭/별칭분야유형지역시대집필자
GC03200799 |
曺伸 |
Jo Sin |
숙분(叔奮),적암(適庵),효강(孝康)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인물/문무 관인 |
경상북도 김천시 |
조선/조선 전기 |
김병우 |
[상세정보]
[정의]
조선 전기 김천 출신의 문신.
[가계]
본관은 창녕(昌寧). 자는 숙분(叔奮), 호는 적암(適庵). 아버지는 현감을 지낸 조계문(曺繼門)이며, 얼자(孼子)로 태어났다. 형으로 조위(曺偉)가 있고, 점필재 김종직(金宗直)이 매형이다.
[활동사항]
조신(曺伸)[1454~1529]은 지금의 김천시 봉산면 인의리 봉계마을에서 태어났으며, 어려서부터 형인 조위와 함께 시문에 남다른 재능을 보였다. 그의 문명(文名)은 탁월하였고, 조위와 함께 매형인 점필재 김종직에게 나아가 학문을 배우고 문학적 재능을 길렀다. 생각과 표현력이 남달랐으나, 서얼 신분의 제약을 벗어나기 어려웠다. 그래서 청년기에 직지사 능여암에서 두문분출하고 학업에 정진하였고, 중국어·일본어는 따라갈 자가 없어 사람들이 신기하게 여겼다. 신분과 재능을 살려 역관의 길을 걸었다.
그러나 시문이 뛰어난 조신은 당대의 선비와 교류함에 조금도 부족함이 없었으며, 김종직, 김안국(金安國), 남효온(南孝溫), 정여창(鄭汝昌), 박상(朴祥), 이행(李荇), 권민수(權敏手), 이항(李恒), 홍언필(洪彦弼) 등 당대의 석학들과 폭넓은 교류를 나누었다. 또한 빼어난 문장과 외국어 실력으로 성종을 놀라게 하였고, 비록 서얼 출신이지만 중국의 사신이 올 때마다 필찰(筆札)을 책임지는 외교 문서 전문가로서의 위치에 자리매김하였다. 성종은 여러 차례 조신을 불러 시를 짓게 하고 학문을 논하면서 상을 주기도 하였다.
1479년(성종 10) 신숙주(申叔舟)가 통신사로 일본에 가게 되자 역관으로 수행할 것을 요청하였고, 이후 세 차례나 더 일본을 왕래하면서 문장으로 일본의 조야를 놀라게 하였다. 중국으로 가는 사신을 수행한 적도 일곱 차례나 된다. 북경에서 안남국[현 베트남] 사신 레티꺼(Le Thi Cu)[黎時擧]와 시문을 주고받아 베트남과 교류의 문을 열었고, 조신의 문명은 동남아로 퍼져 나가는 계기가 되었다. 이러한 외교적 공적으로 서얼로서는 파격적인 종3품의 사역원정(司譯院正)에 특진되었다.
1479년 2월 왕이 조신에게 시(詩)를 짓게 하였고, 그 시가 매우 좋으므로 통신사 군관(通信使軍官)으로 차임(差任)하였다가 곧 내시교관(內侍敎官)을 제수하였다. 그리고 다시 불러 조지서(趙之瑞)와 함께 심양야송객(潯陽夜送客)·상림춘(上林春)·서산관렵(西山觀獵)·성남답청(城南踏靑)을 글제로 삼아 율시(律詩)를 지어 바치게 하였다. 조신이 곧바로 지어 바치니 녹피(鹿皮) 1장(張)을 상으로 내려 주었다.
1481년(성종 12) 왕이 조신을 불러들여 술과 음식을 대접하고 한나라 고조가 백등에서 곤궁하였던 일을 사운 율시로 짓도록 하였다. 이것은 조신이 시를 잘 짓는다는 소문이 파다하여 한번 시험해 본 것이다. 또한 격문의 제목을 정하여 시를 지어 올리게 하기도 하였다.
1485년(성종 16) 왕은 첩의 자식과 12, 13세의 여자를 택하여 의원·의녀를 양성하도록 승정원에 지시하면서 조신을 의사(醫司)에 소속시키게 하였다. 당시 의원(醫員)이나 의녀(醫女)로서 의술(醫術)에 정통한 사람이 매우 적어 10세가량의 여자들을 택하여 먼저 사서(四書)를 읽힌 다음 의술을 가르치게 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2품(品) 이상의 첩(妾)의 아들은 의사에 소속하는 법이 있었으나, 조신은 2품의 첩의 아들이 아니어서 해당되지 않았지만 성종의 특별한 명으로 은전을 입은 것이다. 조신은 여기서 음양의 이치와 약리(藥理)를 가르쳤다.
1489년(성종 20) 왕은 조신을 내의원에 출사하게 하였다. 조신이 왕자군사부(王子君師傅)여서 의술에 오로지 전념하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1492년(성종 23) 유자광(柳子光)과 성현(成俔)은 조신에게 체아직의 녹봉을 줄 것을 요청하였다. 이것은 조신이 학식은 물론 상당한 음률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권장하기 위한 것이었다.
1498년(연산군 4) 무오사화가 일어나고 조위가 전라도 순천으로 유배를 가게 되자 조신도 관직에 대한 미련을 버리고 고향인 김천으로 낙향해 은거하였다. 형이 귀양지에서 세상을 떠나자 시신을 고향으로 운구하고 장사를 지내 우애가 깊음을 보여 주었다. 봉계에서는 은거 생활을 하였지만 시문에 대한 열정과 학문 정진은 게을리 하지 않았다. 금시헌이라는 당을 짓고 당대의 석학들과 폭넓은 교류를 지속하였다. 조신은 은퇴한 뒤 김천의 봉계마을에 거주하면서 풍류로 세월을 보냈다. 1529년(중종 24) 향저에서 75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김천 봉계마을의 문향으로서의 번성은 조위, 조신 형제가 끼친 영향이 컸다.
[학문 및 저술]
1518년(중종 13) 왕의 명을 받아 김안국(金安國)과 더불어 『이륜행실도(二倫行實圖)』를 편찬하였다. 『이륜행실도』는 김안국이 경연(經筵)에서 왕에게 시강(侍講)할 때 찬술한 뒤 경상도관찰사로 전임하자 사역원정 조신에게 위탁한 것이다. 이때 조신은 시인과 성리학 대학자로서의 면목을 유감없이 발휘하여 가문의 번영을 더하였다. 이 외에 『적암시고(適庵詩稿)』, 『백년록(百年錄)』, 『소문쇄록(謏聞瑣錄)』이 있다.
[묘소]
묘소는 김천시 봉산면 인의리 봉계마을 앞 동산에 있다.
[상훈과 추모]
1543년(중종 38) 왕은 문장에 능한 사람을 우대하는 뜻으로 서출이며 역관 출신인 조신에게 파격적으로 공조판서를 추증하고, 효강(孝康)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조정 대신들의 반대가 있었지만 왕은 성종의 인물 등용과 인연을 상기하면서 무마하였다.
[참고문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