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그빌/구현우
꿈에서 주운 개를 꿈 밖에서 키운다. 내가 먹는 밥을 먹인다. 내가 아는 곳으로 데려간다.
발코니로 간 나의 개는 밑에서 올라오는 담배연기를 태연히 빨아들인다.
그게 발코니의 냄새인 줄 안다.
한강으로 간 나의 개는 낯선 두 아이가 공 하나로 웃고 우는 장면을 지켜본다.
그게 가족인 줄 안다.
세탁소로 간 나의 개는 모피코트를 벗어놓고 나온 여자를 따라간다.
그게 마음인 줄 안다.
현관 앞에 멈춘
나의 개는
문을 열어두어도 안에서 불러봐도 꼼짝없이 앉아 있다.
주인과
타인이
그게 그건 줄 안다.
언제 어딘가로 사라졌는데, 나는
나의 개가 있었다는 것마저 잊어버린다.
이전인지 이후인지 모르겠지만
꿈에서 만난 개를 꿈에서 방치한다. 오줌을 뿌리며 따라오는 소리가 아직 뜻이 없는 낱말처럼 들린다.
꿈 밖에서 나는 혼자 이인분의 요리를 먹는다.
익숙하고도 익숙해지지 않는 도시를 걷다가
나의 개를 닮은 개와
나의 개를 하나도 안 닮은 개와
개도 아닌데 개로 불리는 남녀노소가
어디에나 있는 것을 본다.
도시는 한꺼번에 어두워지고
내가 없는데 내 방에 불이 들어온다.
- 2014년 <문학동네> 신인상 당선작
■ 구현우 시인
- 1989년 서울 출생
- 명지대 문예창작과 졸업
- 시집 <나의 9월은 너의 3월>
《 심사평 》
시는 무언의 발화점으로부터 시작해서 어디론가 번져나가는 말의 무늬, 차원을 가늠할 수 없는 말의 건축이라고 할 수 있겠다. 물론 건축물을 완성하고 나면 발화점은 단지 하나의 흰 점, 하나의 침묵으로 존재할 뿐, 그것을 알아보기 힘들다. 그래서 우리는 간혹 시인에게 이 시의 영감은 어디에서 시작되었습니까 하고 묻게 된다. 한 편의 시의 영감은 한 편의 시의 타자이다. 시인은 그 타자를 품고 질문하고 답하려 하고 울고 웃으며 감각과 행위의 집을 짓는다. 그렇기에 시의 영감은 시라는 한 편의 세계 가운데 시의 말들이 품고 도는 소용돌이의 텅 빈 중심이다. 그래서 한 편의 시를 읽고 난 뒤에 발화의 근원을 짐작조차 할 수 없는 경우가 생긴다. 그렇지만 기호학적 분석이 아니더라도 한 편의 시의 형식을 더듬는 과정 속에서, 그 진행의 말과 이미지들의 축조 속에서 시의 발화점이 어렴풋하게나라마로 짐작되는 경우도 많다. 신인상을 심사하면서 불 꺼진 뒤의 소방관처럼 발화점을 발견하려 애써보았지만 어렴풋하게나마라도 현실적이고 윤리적인 아니면 정서적으로라도 지금 이 시간의 우리가 숨쉬는 이곳이라는 발화점을 찾기가 어려웠다. 예심을 진행할 때도 그랬고, 본심을 진행할 때도 그랬다. 시들이 뿌리 없는 무늬만의 세계를 세공하는 느낌, 기존의 비교적 젊은, 평단의 관심을 끄는 우리나라 시인들의 시작법을 답습하는 느낌이 농후했다. 가장 기본적으로 말해보아도 한 사람의 시인은 하나의 각별한 시선의 발명자라고 부를 수도 있겠는데 그 시선을 그대로 답습하는 경우엔 시에 구축된 세계마저 의심하게 만들었다
구현우 씨의 도그빌 외 네 편은 시차적 관점을 품은 시들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각 시들의 화자는 자신들의 위치를 바꿈으로써 달리 보이는 대상을 먼저 탐구한다. 동일한 대상이라고 하더라도 시적 주체가 어디에 대상을 두느냐에 따라 그 대상에 대한 이해가 달라지는 현상을 문제삼는 시인의 태도를 반영한다. 이것은 다시 시인이 꿈속과 꿈 밖이라는 공간에 개를 둠으로써 두 장소의 차이를 드러내려 한 것을 넘어서서 그 공간들의 간극을 부각시키는 것으로 나아간다. 실재와 이미지 사이에 어떤 차이가 존재한다고 보는 관점을 넘어서서 실재에도 이미지에도 실체를 실체답게 하는 데 부족한 무엇이 있을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시는 그 둘의 간극에서 오히려 둘을 다 품거나 둘 다 품지 않은 실체, 어쩌면 사라짐이라는 현상을 껴안고 하나가 아닌 둘이 된 시적 주체를 드러내게 된다. 그래서 시의 마지막 문장에 가면 대상이 아닌 시적 주체마저 위치 이동되는 자리가 마련된다. 다른 응모작들에서도 이런 시선은 그대로 유지되는데 환상과 현실, 연속과 단속, 시차의 늪에 빠진 사람들에 대한 우화 가족이 되는 것과 가족이 되지 않는 것 그림자와 목격자 사람과 동물과 인간의 경계의 분리도 표면을 뒤집어 이면을 표면과 이면의 간극을 보려는 시인의 의지를 반영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단순히 그 간극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봄으로써 첫 번째 봄을 넘어서서 하나이면서 둘인 시적 주체를 반성하는 자리 그에 따른 비애가 있다 또한 대립되는 언어들을 반복 사용해 착각을 유도함으로써 시를 시적 변증법 안에 위치시키려는 시 장르 자체에 대한 질문을 던지고 있다고도 볼 수 있다. 그러나 마지막 두 편은 질문이 시적 형상화보다 선행하는 느낌이 있었고, 설명적이고 구체화되지 않은 서걱거리는 표현들이 있었다. 비교적 단순하지만 자신만의 방법적 성찰과 시적 장소를 발견하려 한 도그빌 외 네 편을 당선작으로 정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간결함이 과해서 생긴 부작용이 아닌가 싶다. 간결해지면서 오히려 풍부해져야 한다. 그런데 간결해지면서 부족해지고 있었다. 중요한 말과 중요하지 않은 말을 적절하게 섞어 쓰면서 시에 바람이 잘 통하게 만든 다른 작품들이 더 재미있다. 어색한 문장들이 이 응모자의 음악을 방해한다는 것이다. 시 전체는 오리무중일 수 있어도 문장 각각은 정확해야 한다. 쓴 사람의 의도를 초과해서 탄생한 것처럼 보일 정도로 역동적인 이미지와 서사가 천진함과 과감함을 오가는 목소리에 실려 전달된다. 그런데 이 역동성은 완결성과는 배치되는 미덕일까. 구조에 대한 배려가 좀더 치밀했으면 어땠을까. 당선작이 당선작인 이유는 그 단점이 다른 응모자의 단점들보다 약해서가 아니라 장점이 다른 응모자의 장점들보다 강해서다. 그러니 당선작에 대해서만큼은 장점을 말하자. 그것은 서사적 논리성이라 명명해보면 어떨까. 시를 두고 서사와 논리 운운했으니 두 번 실수한 것처럼 보이겠지만 그렇지 않다. 시에도 자주 서사가 담기는데 서사가 있다면 논리도 있어야 한다. 시가 논리적이라는 말은 한 가지 방식으로만 해석된다는 뜻이 아니라 다양한 해석을 받아낼 구조가 튼튼히 갖추어져 있다는 뜻이다. 특히 마지막 부분을 읽으면 열쇠가 딸깍 하고 돌아가는 소리가 들리고, 세 편을 각각 자기소외, 미련, 고독에 대한 서사로 해석해보고 싶다는 욕망이 생긴다. 이런 열쇠 구멍은 우연한 영감의 산물이 아니라 성실한 수련의 결과일 것이다. 당선은 그 결과의 결과다.
구 씨의 응모작은 관찰력, 구성력, 사유의 깊이와 유연함, 문장력 등 두루 신뢰할 만했다. 도시생활자 즉 현대인의 자기정체성이 교란되는 장면을 건조한 그래서 진정성이 더 살아나는 문체로 살려내고 있다.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환기가 사치처럼 여겨지는 시절에 나와 도시생활자 일반을 개라는 진부한 이미지와 연결하기란 만만치 않은 일이다. 하지만 도그빌에서 개라는 메타포가 일으키는 공명의 크기는 작지 않다. 겨울 산장에 갇힌 실종자들을 드라마틱하게 풀어낸 본능 이상의 것도 흡입력이 있었다. 굳이 길게 설명하지 않아도 긴장감을 유지하는 이야기 솜씨가 보기 좋았다. 제인 제이콥스, 앙리 르페브르, 데이비드 하비, 에드워드 렐프 등 현대 도시문제를 인문학적으로 접근한 학자들의 책을 권유하고 싶다.
(탈락자들에게)
굳이 첨언한다면 상상력의 스케일이 보다 확대되었으면 한다. 자신감을 가지고 수렴-구심력에서 확산-원심력의 상상력을 발휘해보시길. 마무리를 짓지 않은 것 같고 애매모호했으며 밀고 나아가다 만 느낌이 들고 이미지가 명료하되 의미가 희박했다. 응모작의 완성도가 들쭉날쭉해 보였다는 것이다. 주제와 대상에 대해 깊이 있게 천착하는 자세를 갖춘다면 습작기에서 빨리 벗어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문제는 읽는 재미를 넘어서는 의미를 찾아내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지시 대상을 떠올릴 수 없는 지시어로 이루어지는 시가 가능할 것이다. 현실의 반영이나 재현을 거부하는 시, 하지만 한계는 있다. 시의 주체와 대상 행위 등을 지나치게 자의식적으로 연결시킨 나머지 시가 혼란스러운 것은 아닌지 점검해보시기 바란다. 압축 생략하는 방법에 대해 고민해보시길 나열 병치하지 말고 하나의 중심에 집중하는 연습이 필요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