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도원이 있는 풍경 / 김용구
나는 꿈 많은 소년시절을 전원에서 자랐다. 한 사람으로 자라가며 여기 저기 살았고, 또 생업을 갖게 된 뒤로, 여러 나라로 떠돌아 보기도 하였지만, 나이가 들수록 어린 시절을 보낸 풍경이 그리워진다.
향수가 사무칠 때면, 나의 마음은 내 고향으로 귀향을 한다. 비록 먼 시간의 거리가 있지만, 언제나 그리우면 돌아갈 마음의 고향이 있다는 것- 그것이 얼마나 고마운지 모른다.
나는 포도원이 있는 경치에서 살았다. 평지에서 산으로 경사진 널따란 일대가 포도밭이었다. 한복판에는 거대한 은행나무 한 그루가 서 있었다. 이 거목은 무성한 잎의 구름을 이루어 한여름에도 그 아래 서면 더위를 모른다.
은행나무 곁으로 맑은 내(川)가 흐른다. 그것이 비가 오면 산에서 쏟아져 내리는 물로 세찬 여울이 된다.
은행나무 아래쪽으로 내 가까이에 우리 집이 있었다. 안채는 널찍한 기와집이고, 그 뒤에 초가집 두 채가 있었다. 여기는 농기구며 물건을 쌓아 두는 광으로 쓰였다.
들에는 포도넝쿨 외에도 앵두나무며 딸기밭이 있었고, 갖가지 곡식과 야채를 심었다. 겨울에는 온상재배를 하였고, 밭일은 원정들과 일꾼들이 맡아 보았다.
가축도 여러 가지가 있었다. 고양이 개 닭 토끼 돼지 염소 조랑말이 있었고, 옆집에서는 젖소도 쳤다. 조랑말을 제쳐놓고 가축은 집안에서 돌봤다.
어느 여름 갑자기 폭우가 쏟아진 때였다. 집 둘레에서는 물건을 챙기고, 밭에서 일하던 일손들이 비를 피해 집으로 뛰어 들어왔다. 그런데 나는 퍼붓는 빗속을 아랫밭 쪽을 향해 달려갔다. 문득 아침녘에 그쪽에 매어놓은 염소들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가엾게도 염소들은 폭우 속에 흠뻑 젖고 있었다. 나를 보자 어메메 우는 것들을 끌어 염소와 나는 함께 뛰어 집에 돌아왔다.
우리 집의 물장사는 내가 하였다. 여름이나 겨울이나, 은행나무 아래로 포도밭을 지나서 산기슭에 있는 샘에서, 나는 음료수를 물지개로 져 날랐다.
나는 개를 무척 좋아하였다. 우리 개 뿐 아니라, 이웃의 개들도 나를 따랐다. 들에 나가 휘파람을 불면, 사방에서 개들이 모여들었다. 큰 것, 작은 것, 검은 것, 흰 것, 누런 것… 여남은 마리가 몰린다. 나는 그것들과 언덕에 뛰어 올라, 풀밭에 뒹굴며, 앞서거니 뒤서거니 나무가 우거진 산 속을 쏘다녔다. 우리 일행은 산 속을 걸어 옛 성벽이 둘려 있는 으슥한 곳까지 가곤 하였다.
겨울이면 눈에 덮인 경치가 인상적이었다. 삼라만상이 눈에 쌓인 아침녘의 들과 산은 신비로웠다. 눈의 풍광이 아름답기도 하려니와, 눈밭에 찍힌 산토끼의 발자국을 쫓는 것이 무척이나 즐거웠다. 한참 쫓다보면, 김이 나는 토끼 똥을 발견하고 산토끼가 가까이 있다는 흥분 속에, 눈이 덮인 골짝을 헤매게 된다. 그렇게 가다가 먹이를 찾아 내려온 꿩이 ‘꺽꺽’ 하고 소리를 지르며 날아가는 것을 보고 얼마나 안타까워했던가.
나는 지금도 소박하고 목가적인 전원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것을 기쁨으로 회상한다.
포도넝쿨, 은행나무, 내(川), 동산, 개나리나무로 둘려진 집이 내가 자란 그리운 풍경이다. 거기서 나는 개, 염소, 산토끼, 꿩, 다람쥐와 벗하며 천진난만하게 자랐다. 나의 소년 시절은 그지없이 즐거웠고 아름답고 자유로웠다.
청춘의 시인 헤르만 헷세가 노래하듯, 그 시절은 ‘아름다운 전설’ 과 같았다.
포도가 익어 갈 무렵이면, 포도송이에 벌레가 끼지 않게 종이 봉지를 씌운다. 봉지는 헌 신문지로 만들었다.
어려서 나는 이 신문지를 들추며 읽기를 즐겼다. 그러다가 거기서 우리 포도원에 관한 기사를 발견하고 어린 마음에도 얼마나 흥겨워하였던가.
지금도 기억에 또렷이 남은 한 신문표제가 있다. ‘낫저는 포도원/ 밤에는 글읽기….’ 이것이 나의 아버지를 두고 한 말이었다. 그는 평범한 농사지기가 아니었다. 일곱 살에 아버지를 여윈 까닭에, 그의 기억이 아득한 나에게, 포도봉지의 헌 신문지는 신비에 싸인 아버지의 세계를 보여 주었다. 이것은 나에게 위대한 발견이었다.
나는 아버지를 자랑스럽게 여긴다. 그리고 포도밭을 가꾸어 나에게 그럴 수 없이 아름다운 소년시절을 갖게 하여 준 것에 무한히 감사하고 있다.
소년시절은 사람이 일생을 두고 걸어가는 길을 비춰 주는 빛의 발원이다.
[김용구] 언론인(한국일보 논설위원). 수필가.
* 《신선한 아침 풍경》, 《바보야 이 바보야》, 《가거라 시인이여》, 《철학산책》 등등
대서를 지나 성하의 7월이다. 연일 수은주가 기록을 갱신한다. 모래를 팝콘으로 튀겨낼 듯 태양열이 맹위를 떨쳐도, 포도나무는 묵묵하게 포도알알이 단맛을 깃들이고 있다.
선생께선 자연 속에서 참 평화롭고 행복한 어린 시절 보낸 듯하다. 꿈 많은 소년시절을 누린 대자연의 품, 포도원은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과 향수가 넘치는 곳으로, 언제나 그리우면 돌아갈 수 있는 마음의 고향으로 남아있는 것 같다. 소년기의 정서를 만들어 준 포도원이 있었기에 밝고 자유로운 내면 풍경도 함양되었으리라.
여름 소나기가 쏟아지자 아침녘에 매어 둔 염소가 생각났단다. 비에 흠뻑 젖은 녀석들이 마치 제 어미를 만난 듯 '어메메' 우는 것들을 이끌고 돌아 왔다. 비에 젖은 염소들의 모습이 훤히 그려지는 풍경화다. 윤오영의 '염소'에서는 장터에 팔러 나갔다가 남은 염소들을 줄 세워 돌아오는 저녁 풍경이 있었다. 어쨌든 어린 것들은 애잔하다.
첫댓글 농촌에서 소년 시절을 지내서
글을 읽으니 생각 나는 것들이 많습니다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어린 시절의 농촌 생활은 인생의 큰 재산이겠지요.
가난했으면 가난한 대로, 넉넉했으면 또 그런대로 다 귀중한 추억이죠.
무더위에 건강하세요~~
평화로운 전원의 모습을 상상하며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