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사: 통신병과-겸임업무 폭주 속 C4I체계수립-김호태
이 회고는 대열임관50주년 기념책자 (가칭: 대열 반세기 여정)에 수록할 대열의 현역시절 활약 약사를 작성하기 위해 편집진에서 병과별 해당 동기들의 대표집필을 통해 제공받은 내용으로서, 책자발간 이전에도 모든 동기생들이 함께 보면서 아! 그랬었구나! 하고 공감해 볼 필요도 있다고 보아, 회고담으로 전재(轉載)해 올립니다.
아래 약사는 [통신]병과를 대표해 김호태가 동기가 작성했습니다. 그 동안 통신병과 동기생들이 여러 사정으로 떠나, 혼자 남다시피한 입장에서. 통신동기생들에 관한 자료수집이 극히 어려운 입장에서도 탄생시킨 멋진 글이어서, 김호태 동기께 진심으로 그 노고와 정성에 경의와 감사의 뜻을 전하며 소중하게 이글을 회고록에 올립니다.
한편 방공포병과 공군전군, 기갑, 통신, 법무, 병참, 기갑 병과들처럼 해당병과 근무 동기생들이 모두 유고상황이거나 홀로 남은 경우의 병과역사는 자연스럽게 집필 동기생의 개인회고처럼 될 수밖에 없는 상황임도 읽어주시는 동기생들께서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편집위원 김명수 (註)
겸임업무 폭주 속 C4I체계수립
김호태
통신은 인간사회의 공기와 같은 것이다. 인간이 공기의 고마움을 잊고 살듯이 사회도 통신의 고마움을 잊고 있는 듯하다. 통신은 길과 같은 것이다. 즉 정보(데이타)가 흘러가는 길을 만들어 줌으로써 각종 정보(데이타)를 필요한 곳에 즉시에 올바른 내용을 전달하는 수단인 것이다. 이것을 잘 만들고 조직화하는 것이 우리 통신에 종사하는 사람들의 역할이라 생각한다.
육군통신학교(지금의 육군정보통신학교)의 슬로건은 “ 통하라 ”이며, 육군의 통신장병은 모두 이곳을 이수하여 맡은바 임무와 책임을 다하고 있다
통신 동기생은 김순규 김호태 박권식 이성호 차동석 한상국 등 6명으로 전원이 전방사단의 사단 통신중대 소대장 및 보병대대 통신대장 등으로 초임 배치되었다.
생도시절에 이미 초등군사반 교육을 수료한 터이지만 전방 보병대대 통신대장으로 부임한 소위들은 통신대장이라는 명칭 하에 통신소장과 통신장교(대대통신참모)를 겸직하게 되어 초임부터 어려운 경험을 하게 됐다.
당시 전방부대의 통신 실정은 야전선, 6,25때 미군으로부터 원조 받은 진공관식 무전기가 전부였다. 이런 상황에서 GOP 철조망 보강공사와 같이 통신축선 보강을 위한 야전선 지하매설 및 노후된 야전선 보수업무에 임하였고, 성능 저하된 무전기로 원활한 통신을 하려면 무선중계소 개발이 매우 중요하여 통신대장 1년은 매우 힘든 기간이었다.
한편 60년대 중반 월남전 파병으로 미군이 사용하던 트랜지스터를 사용한 무전기(PRC-25)가 일부 부대에 보급되면서 통신에 숨통이 트이고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소대장이후 사단 통신중대 VHF소대장과 통신참모부 통신운영장교 직을 겸임하면서 주로 통신운영장교 직을 수행하게 되었다. 이 직위는 통신참모의 주요 업무를 담당한다. 그래서 매일 야근하고 주말도 없이 업무에 매진하는 것이 기본이었다.
일견해 보면 통신참모가 사단 결산회의 후 주어지는 과제는 “ 이것 알아보고 내일 아침 보고해”하는 것이 거의 매일이었고, 주말 결산회의 결과는 주말에 준비하여 월요일 아침에 보고하는 것이 반복되었다.
짧은 기간이지만 장교보충이 어려워 겸직을 맡으면서 개인 사생활은 있을 수도 없고 생각하지도 못하고 영내에서 생활했다.
이후 특전사령부 9공수부대에 근무하면서 고등군사반 과정에 입교하게 되었다.
야전부대 근무 중에 동기생에 여러 변화들이 있었다. 1973년에 육사 교수요원 위탁교육으로 김순규 동기가 야전을 떠나 육사교수로 정년 퇴임했고 이성호 동기는 병으로 시력을 상실하고 미국으로 이민 중이다.
1972년, 월남전의 막바지에 동기생 통신에서 유일하게 박권식 동기가 십자성부대로 참전했다.
1974년 3월에서 9월까지 고등군사반 교육을 수료하고 전략통신사령부 기술근무처 유선 및 교환 장교로 보직되어 통신공사업무를 맡은 공무장교로 통신케이블 설치공사에 대한 많은 경험을 하였다. 이 시기는 전략통신사령부가 전군의 통신을 책임지고 있어 육군본부는 물론 국방부외부 통신소요도 책임져야 했다. 그래서 전군통신지원을 위한 케이블공사를 많이 했다.
아래와 같은 케이블공사설계 및 설치공사 집행부대를 관리하면서 많은 경험을 했다.
1.3군 M/W동축케이블 신설공사.
전방축선유지를 위한 육본에서 1군단지역까지 콰드케이블 설치공사
육직부대 특전사령부까지 콰드케이블 설치공사 등
1974년 12월 기구개편(전략통신사에서 제5통신단)후 동일보직에 계속근무 했다.
본인이 중대장을 근무하게 되는 시기에는 중대장 보직기간을 18개월을 근무하게 되었었다.
육군본부를 지원하는 제5통신단 VHF대대 1중대장에 보직, 육군본부와 각 군사령부 및 직할부대의 통신망 중에서 기존 운용 통신망이 두절시 비상대책을 맡은 아주 중요한 통신축선 운영 부대에 근무하게 되었다.
이 중대장 직을 수행하면서 원활한 비상통신축선 유지를 위하여 중계소 개발과 다양한 통신축선을 개발 개선하는 데 진력함과 동시에 중대원들의 철저한 교육을 통하여 자신감 넘치는 통신병으로 육성한 결과 중대ATT에서 최우수(1977년8월)로 선정되었다.
1976년 8월 8.18판문점 도끼 만행 사건 당시 전군비상통신망 대기 상태 유지로 긴장감을 느껴보는 경험도 하였다.
1977년 11월 기구개편(제5통신단에서 육군통신사령부)
중대장 보직을 마친 후에 사무관 특채제도에 의해 통신에서는 차동석 한상국 동기가 지원하여 육사행정연수원에 입소, 공무원으로 전환되었다.
(이후 그 동기생들의 행적을 알 수 없어 여기 기록에 남기지 못함에 미안한 마음으로 양해 바란다)
박권식 동기는 미 해군대학 VHF장비 소개 과정을 이수했고 김호태 동기는 야전에서 실무를 경험하면서 야전 통으로 매진했다.
(따라서 앞으로 진행되는 내용은 동기생들의 행적을 알 수 없어 본인을 중심으로 기술함을 양지하시기 바랍니다.)
소령 진예자로 육군통신사령부 기술근무처 근무 장교로 근무하면서, 제5통신단에서 육군통신사령부로 재개편되어 육군본부와 각 군사령부 및 예하 직할 부대 간 작계상의 통신지원계획 재수립과 통신망 재구축에 매진했다.
육본에 각종 전시대비 훈련에 통신지원계획 수립 및 시행과 군 통신수단과 한국통신공사의 통신수단을 활용하여 군관민 유기적인 협조, 정부비상통신망의 구축 협의, 정부주요 지하시설(B1)에서 국가전시대비 통신지원계획 및 시행계획 수립과, 실행을 위한 통신망구축훈련 연습 등 육군의 통신지원계획을 완벽하게 수립하는 데 전력을 다하였다.
1978년 소령으로 진급해서는 1979년 10월 수도군단 108통신단 부대대장으로 보직되어 여러 일을 경험했다. ‘10.26’, ‘12.12’, 1980년 5월17일 비상계엄하의 광주(전교사)통신두절로 인한 긴급지원, 국보위비상대책위원회 파견 등 많은 경험을 한 기간으로 기억된다.
1981년 3월~1982년 2월에 늦게 육군대학 과정을 거쳐 중령 진예자로 육군통신학교 교리발전처장(1982년2월~1983년2월) 겸 교무처장(1982년6월)으로 보직 겸직 후는 주로 교무처장 업무만 수행하였다.
학교장의 지시에 맞추어 통신병 양성과정 및 보수교육과정 등 교과과정을 미래지향적인 교육체계로 전면 개편 하는데 진력하였다.
1983년에 백골사단 통신대대장을 무사히 마치고 육군통신감실 사업계획 장교 겸 작전장교(1985년1월~1986년1월)에 이어 무기체계장교로 근무하는 동안 통신장비의 개체별 개발에서 시스템 개발로 전환하여 지금도 세계에서 제일 우수하다고 생각되는 적이 도청할 수 없는 주파수 HOPING방식의 무전기 개발 소요 제기와 개발관리 및 통신망체계를 TREE형 구조에서 MESH형 구조로 전환하여 군단급 전술통신체계(SPIDER) 개발소요 제기 및 통신 전력증강 사업관리에 주도적 역할을 담당하였다.
1988년 대령으로 진급되어 2군사령부 통신참모부 전자과장(1988년9월~1989년12월)으로 보직되어 잠시 근무하는 중 육군본부 통신감실 예하 특수참모부 창설추진요원(1988년10월~1988년12월)으로 차출되어 전산과 통신의 결합에 관하여 연구, 정보통신 참모부 창설에 기초가 되었다.
1989년 12월 8군단 통신단장을 무사히 마치고, 1992년 12월 국방대학원(안보과정)을 이수하고 이어 육군 전술C3I 통신사업단 체계관리과장으로 보직되어 중령시절 통신감실 무기체계 장교 때 소요 제기 되었던 전술통신체계 선행개발 장비를 실용 개발하기 위한 NETWORK개념 재정립, NETWORK구조(구성) 세분화, 편성을 조정 검토하였다.
NETWORK구조 재정립에는 기본운용개념의 재정립, 각 구성요소의 역할과 기능 분류, 각 장비의 기능 배분과 축소화, network의 구조와 계층화 등이 있다.
이어서 전술C3I통신사업단 전력화지원과장(1995년 3월까지)으로 자리를 옮기면서 군수지원 요소와 편성을 검토하여 편제에 반영(율곡사단 개편 시 반영)하였다.
지금의 육군 C4I 개념은 전술C3I통신사업단이 연구의 출발점이 되었다. 이곳에서 연구한 내용이 교육사령부 C4I연구개발단으로 이관되었다.
1995년 3월 교육사 시험평가단 제3시험(특수)처장으로 보직되어 중령시절 통신개발 소요 제기 되었던 장비 및 시스템을 시험평가하게 되면서 어찌 보면 군 생활 대부분을 통신 전력증강 사업에 종사한 것으로 느껴지며 육군의 통신발전을 위하여 일조할 수 있었던 것에 무한한 책임과 함께 자부심을 갖고 싶다.
남은 것은 훌륭한 후배 분들이 알아서 잘할 것으로 믿는다.
다시 한 번 통신동기생들의 근황이 제대로 반영되지 못하여 죄송하다는 말씀을 드립니다.
오늘날의 대한민국은 정보통신의 역할로 먹고 살고 있다. 앞으로 대한민국의 먹거리는 무엇으로 할 것인가?
2021.8.15. 김호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