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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종실록 4권, 효종 1년 5월 1일 계축 4번째기사 1650년 청 순치(順治) 7년
○慶尙道進士申碩亨等四十餘人上疏曰:
嗚呼! 故文成公臣李珥、文簡公臣成渾, 兩賢臣之生地之相距, 去臣居幾五百餘里; 世之相後, 去今日幾六十餘年, 今世實無親接其典刑者, 則惟其言行、道德, 可考於遺集, 而然而世無具眼人, 則其高下醇疵, 本非人人之所敢輕議者也。 姑擧柳㮨疏中大者而先言之。 臣等按, 李珥之往見文純公臣李滉, 在戊午歲, 是時李珥年二十三矣。 李滉卽與門人趙穆書有曰: "後生可畏, 前聖不我欺。" 云云。 其年李滉有答李珥書有曰: "年衰力微, 又不能取友四方, 以自補益, 恒自企佇。 兩書之來, 乃不及藥石, 而反欲借聽於聾者何耶? 聖遠言湮, 異端亂眞, 古之聰明才傑之士, 始終迷溺者, 固不足論矣。 惟程伯子、張橫渠、朱晦菴諸先生, 若不能無少出入, 而旋覺其非, 噫! 非天下之大勇大智, 其孰能脫洪流, 而返眞源也哉? 往聞人言, 足下讀釋氏書, 頗中其毒, 心惜之久矣。 日者之來見我也, 乃不諱其實, 而能言其非, 今見兩書之旨, 又如此, 吾知足下之可與適道也。 所懼者, 新嗜靡甘, 熟處難忘, 五穀之實未成, 而稊稗之秋遽及也。" 云云, 且曰: "如滉者, 非但厥初, 至白首尤甚, 常恐吾生之浪過, 而有望於竝世之君子, 不啻如飢渴之在躬。" 云云。 柳㮨等取本書, 刊去上下, 孤擧新嗜靡甘以下四句, 諉以李滉深慮痛戒之辭云云。 其後李滉答李珥論定《聖學十圖》書有曰: "《仁說圖》當在《心學圖》之前, 此見甚超詣。 滉去年歸來, 始審得當如此, 及得來說, 而益信之, 卽已依此互易矣。" 云云則兩賢平生學問之契悟, 莫大於此, 而柳㮨等則以爲: "無絲毫契悟。" 云。 李滉之卒, 在庚午歲, 而癸酉歲, 諸臣請賜謚, 上以無行狀不許。 李珥曰: "李滉一生, 沈潛義理之學, 言論、風旨, 雖古名賢, 亦不是過。 行狀有無, 有何增減? 殿下於已死之賢, 行迹已著, 而猶靳褒崇, 況於一時之士, 寧有好賢之誠乎? 李滉之謚, 雖遲一二年, 猶無大害, 四方之士, 疑殿下無好賢之誠, 則其害豈淺淺乎?" 云云。 辛巳歲, 李珥又請以: "欲明敎化, 必須尊奬先賢, 使後學有欲矜式。 如趙光祖倡明道學, 李滉沈潛理窟, 亟宜先許從祀, 以振士望。" 云云, 而柳㮨等則曰: "李滉沒後, 李珥攻李滉之學, 不遺餘力。" 云, 其言之無據, 皆節節類此, 而至如理氣辨, 則因李滉與奇大升論四七辨, 李珥與成渾, 俱將朱子語, 而有所講明焉, 成渾則以李滉見解爲是, 李珥則以李滉見解爲正見之一累, 而右奇大升。 其答成渾書曰: "明彦 【大升字。】 之學, 何敢冀於退溪耶? 只是有箇才知, 偶於此處, 見得到。" 云云。 李珥本非立異於朱子, 特於李滉見解, 有所分疏, 實見其公心無我。 正如《本義》之不用《程傳》, 南軒之不諱《知言》駁處, 晦菴之不爲回護於龜山、延平之言也, 而柳㮨等至引李珥書中, 何以爲朱子等語, 謂詆前賢云。 然則何以爲孔子等語, 亦且爲孟子詆孔聖之言乎? 此則非徒不知李珥, 又竝孟子而不知者也。 孟子曰: "君子亦仁而已, 何必同?" 噫! 其不同者, 雖在於是, 而其所同者, 實在於是, 則何害於兩賢之俱爲兩賢, 而柳㮨等强造不知之說, 猥作與奪之言。 其稱理氣爲一物, 心是氣等語, 本不見李珥之文集, 而創做於今日攻斥之舌, 要以誑後學而眩上聽, 欲巧而反拙矣。 噫! 幽遠猶可欺也, 一國其可罔乎, 不知者猶可罔也, 知之者其可欺乎? 本道故判書臣張顯光, 近世大儒也。 最邃於《易》, 爲士類之所推仰久矣。 其著經緯之說, 極論理氣, 橫說竪說, 無慮累千萬言, 無非立異於李滉, 同符於李珥, 而後學固未嘗以此, 爲疑於攻李滉之學, 則彼柳㮨等之言, 不知其果從何處人受來耶。 噫! 至此而先賢之受誣極矣, 本道之見賣甚矣。 又況成渾則理氣之辨, 實主李滉, 是亦李滉之見也, 而柳㮨等又以爲, 與李珥之學, 同一關捩而斥之, 此則尤不成說話者也。 又取辛巳論學封事而攻之, 夫辛巳封事, 莫非講明、窮格之事, 而特提保惜精神之語, 以爲射的。 其說雖巧, 其書尙存, 不可以誣, 誠不足多辨也。 嗚呼! 其始詆李珥以緇髡, 且以爲不許司馬謁聖云者, 癸未年宋應漑媢嫉之啓辭也; 其肇誣成渾以遺君害士云者, 李弘老、鄭仁弘誣陷之譸張也。 應漑則宣祖大王以此之故, 至於親撰敎書而放流之; 弘老、仁弘則平生所誣陷者, 非特一成渾也, 終乃見伏於國家之常刑, 則此輩入於輿儓僕隷之盟詛者久矣。 爲士而不知其祖述蹈襲之爲恥, 徒幸其前日投杍於三至之言, 而又欲其今日揉椎於十夫之手, 其習固惡, 其風固不可長也。 嗚呼! 理氣同其辨也, 而在李滉則尊之, 在成渾則斥之; 讒兇一仁弘也, 而誣李滉則排擊之, 誣成渾則祖述之。 噫! 天下豈有同其辨, 而或尊或斥之論議乎, 亦豈有同其誣, 而或排擊或祖述之是非乎? 噫! 不考前賢言行、事迹之如何, 而妄爲之說, 則是豈徒不知李珥、成渾而已哉? 實是竝李滉而不知者也; 是豈徒只誣李珥、成渾而已哉? 實是竝李滉而誣者也。 若使公平者論之, 則豈不以利在尊之而尊之, 利在斥之而斥之, 利在排擊則排擊之, 利在祖述則祖述之, 本無主宰之見, 而惟人言與惟利是徇也云哉? 竊伏念, 王者如天。 其一寒一暑, 雖或乖常, 亦莫非至公, 而特有喜有憾者, 在下之所不免也。 臣民之望, 惟願日月之明, 自無幽隱之冤, 士夫之論, 只務公明之見, 要祛偏蔽之弊。 試以故文正公臣趙光祖事明之。 方其登庸也, 國內莫不想望, 而特嫉之者, 群小也。 及其罹禍也, 國內莫不冤痛, 而特幸之者, 群奸也。 然其伸雪之寵、贈謚之褒、從祀之典, 旋出於聖子神孫, 而當時後世, 益仰其孝理, 稱頌其善述焉。 今此兩賢臣之事, 仁祖大王踐阼之初, 因儒臣、士林公共之請, 旣已伸雪焉, 旣已贈謚焉, 則其善述我宣祖者, 人莫不稱頌, 而柳㮨等又引仁祖大王乙亥一時之御批, 冒煩上聽, 要濟其私, 而其爲歐迫敦率之狀, 正如閭閻匹夫有些區處, 而責其子以不敢有所更改者然, 是何道理, 是甚氣象也哉? 何況乙亥御批所稱疵累之說, 仁祖大王聖聽, 旣已釋悟於筵臣眞率之酬酢, 而及故相崔鳴吉自明疏下批之後, 不獨國內傾耳而聽之, 本道最爲詳聞焉。 柳㮨等, 及今又爲郞, 當援據, 則其回邪猥濫之態, 誠亦痛矣, 而不但爲今日之罪人矣。 大槪李滉之於我東, 比則周、程也; 李珥、成渾之於李滉, 比則朱、張也。 後學宗周、程, 而斥朱、張, 實非道理也, 而忌刻偏迫之餘風, 每欲私李滉而斥李珥、成渾。 不究其端, 不訊其末、强爲此不近之說, 而不恤其混竽續貂於讒兇之後, 吁亦異哉! 嗚呼! 雖係匹夫匹婦、屋下私議論、閑說話, 必欲有徵而取信者, 恒人常性。 況此干係前賢, 合一道而告吾君父者, 其不信無據如此, 而誠有所不忍聽聞者。 此雖出於一二人之主張, 而惟其合一道之儒冠, 無匹夫之覷破, 風靡波蕩, 靡有底定, 則豈非嶺鄕士林羞愧之甚者乎? 世道至此, 誠可寒心。 臣等今日之言, 正所謂余不得已者, 惟聖明寬照焉。
答曰: "省疏具悉。 爾等互相排擯, 紛紜不已, 以予觀之, 無異於烏之雌雄也。"
유직이 이이 등의 유학자를 헐뜯은 상소가 부당하다는 신석형의 상소
경상도의 진사(進士) 신석형(申碩亨) 등 40여 인이 상소하기를,
"아, 고 문성공(文成公) 신(臣) 이이(李珥)와 문간공(文簡公) 신 성혼(成渾) 두 현신(賢臣)의 탄생지가 신들의 거주지와는 5백여 리나 떨어져 있고 세대 또한 오늘날과 거의 60여 년이나 차이가 나는 까닭에, 지금 세대에 그들의 전형(典刑)을 실제로 접할 길이 없고 보면, 오직 그들이 남긴 문집을 통해서 그들의 언행과 도덕을 상고할 수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세상에 안목을 갖춘 자가 없고 보면 그 학덕(學德)의 높고 낮음과 완전하고 불완전함에 대해서는 본래 누구든지 감히 가볍게 논의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우선 유직(柳㮨)의 상소 가운데 크게 문제되는 것을 거론하여 먼저 말씀드리겠습니다.
신들이 살피건대, 이이(李珥)가 문순공(文純公) 신 이황(李滉)을 찾아가 만난 것은 무오년020) 의 일로서 이때 이이의 나이가 23세였는데, 이황이 즉시 문인 조목(趙穆)에게 글을 보내기를 ‘후생가외(後生可畏)라고 했는데, 옛성현이 나를 속이지 않았구나…….’ 하였습니다. 그 해에 이황이 이이에게 보낸 답서에 ‘나이가 늙고 기력이 약한데다 사방에서 벗을 취하여 스스로 도움이 되게 하지 못한 까닭에 늘 바라보고 기다리던 참에 두 장의 편지가 왔소. 이를 나의 약석(藥石)으로 삼기에도 채 미치지 못할 형편인데, 도리어 이 귀머거리에게 얻어 들으려 하다니 어찌된 일이오? 성인과 세대가 멀어 그 말씀이 인멸된 까닭에 이단(異端)이 진리를 어지럽힌 결과, 옛날의 총명하고 재주가 걸출한 인사들도 시종 미혹되었는데 이것이야 본래 논할 것이 없다고 하더라도, 정백자(程伯子)021) 와 장횡거(張橫渠)022) 그리고 주회암(朱晦菴)023) 등 여러 선생까지도 거기에 약간은 드나들지 않을 수가 없게끔 되었다가 곧바로 그 잘못됨을 깨달았던 것이니, 아, 천하에 큰 용기와 큰 지혜의 소유자가 아니라면 그 거센 물결을 벗어나 진리의 물줄기로 어떻게 되돌아 올 수 있겠소. 지난날 사람들의 말을 듣건대, 족하가 석씨(釋氏)의 글을 읽고 상당히 중독되었다고 하기에, 마음으로 애석하게 여긴 지 오래였소. 그런데 전일 나를 찾아왔을 때 그러한 사실을 숨기지 않고 잘못됨을 말하였고, 지금 두 편지의 취지를 보아도 또 이와 같으니, 족하는 더불어 도에 나아갈 만한 사람임을 내가 알겠소. 다만 두려운 것은 새맛이 붙기 전에 옛맛을 잊기 어렵다는 점과 오곡이 익기 전에 가라지와 피가 먼저 익지 않을까 하는 점이오.’ 하고, 또 말하기를 ‘나의 경우 처음도 그랬소만 늙어갈수록 더욱 덧없이 생애를 보내지 않을까 늘 두렵기만 한데, 훌륭한 군자를 바라는 마음이 배고프고 목마를 때보다 더하다오.’ 하였습니다. 그런데 유직 등은 이 편지의 위아래를 잘라 버리고 ‘새맛이 붙기 전에’ 이하의 네 귀절만을 거론하여, 이황이 깊이 염려하고 통렬하게 경계한 말이라고 핑계대었습니다.
그 뒤에 이황이 《성학십도(聖學十圖)》를 논정(論定)한 이이에게 답서를 보내면서 ‘인설도(仁說圖)는 심학도(心學圖) 앞에 있어야 한다는 그 견해가 매우 뛰어나오. 내가 지난해 돌아와서야 그렇게 되어야 옳다는 것을 알았는데, 보내온 글을 받고 더욱 확신하게 되어 즉시 그대로 순서를 바꾸었소.’라고 하였으니, 양현(兩賢)이 평소 학문을 하면서 계오(契悟)된 것이 이보다 클 수가 없다고 할 것입니다. 그런데 유직 등은 ‘털끝만큼도 계오된 바가 없다.’고 하였습니다.
이황이 경오년에 죽었는데, 계유년에 여러 신하가 시호를 내릴 것을 청하자, 위에서는 그의 행장(行狀)이 없다는 이유로 윤허하지 않았습니다. 이때 이이가 아뢰기를 ‘이황은 일생 동안 의리의 학문에 침잠(沈潛)하였는데, 그 언론(言論)과 풍지(風旨)는 옛 명현이라도 이보다 더할 수 없습니다. 행장의 유무가 무슨 상관이 있겠습니까. 전하께서 이미 죽은 현인에 대해서 그 행적(行迹)이 이미 드러나 있는데도 오히려 포숭(褒崇)을 아끼시는데, 더구나 현재의 선비들에 대해서야 어떻게 현인을 좋아하는 성의를 가지실 수 있겠습니까. 이황의 시호가 한두 해 늦더라도 크게 해로울 것은 없지만, 온 나라의 선비들이 전하께서 현인을 좋아하는 성의를 갖고 있지 않다고 의심한다면, 그 해로움이 어찌 적다고 하겠습니까…….’ 하였습니다.
신사년에 이이가 또 청하기를 ‘교화를 밝히려면 반드시 선현을 높이고 추장(推奬)하여 후학이 모범으로 삼도록 해야 합니다. 예컨대 조광조(趙光祖)는 도학(道學)을 창명(倡明)했고 이황은 이학(理學)에 침잠했으니, 먼저 종사(從祀)할 것을 윤허하시어 선비들의 소망을 진작시키는 것이 마땅합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유직 등은 말하기를 ‘이황이 죽은 뒤에 이이가 모든 힘을 다하여 이황의 학문을 공격하였다.’고 하였으니, 그 말의 근거가 없는 것이 구절마다 모두 이런 식입니다.
이기변(理氣辨)에 대한 것은 이러합니다. 이황과 기대승(奇大升)의 사칠논변(四七論辨)에 대해서 이이와 성혼이 함께 주자(朱子)의 말을 가지고 강명(講明)한 바가 있었는데, 성혼은 이황의 견해를 옳다고 하고 이이는 이황의 견해를 정견(正見) 중의 한 점 누(累)라고 여겨 기대승의 편을 들었습니다. 그러나 이이는 성혼에게 답서를 보내면서 ‘명언(明彦) 【기대승의 자(字).】 의 학문을 어찌 감히 퇴계와 견주겠는가. 단지 약간의 재지(才知)가 있어 우연히 그것을 알게 된 것이다…….’고 하였습니다.
이이는 본래 주자에 대해 이론을 세우지 않고 단지 이황의 견해에 대해서만 시비를 가렸는데, 실로 아집(我執)이 없는 공정한 마음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는 마치 본의(本義)024) 에서 정전(程傳)025) 을 쓰지 않고, 남헌(南軒)026) 이 《지언(知言)》027) 의 순수하지 못한 것을 기휘하지 않았으며, 회암(晦蓭)028) 이 구산(龜山)029) 과 연평(延平)030) 의 말을 옹호하지 않았던 경우와 꼭 같은 것입니다. 그런데 유직 등은 심지어 이이의 글 가운데 ‘어떻게 주자라고 하겠는가.[何以爲朱子]’ 등의 말을 인용하여 전현(前賢)을 헐뜯었다고 말했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공자라고 하겠는가.[何以爲孔子]’ 등의 말도 맹자(孟子)가 공성(孔聖)을 헐뜯은 말이라고 하겠습니까. 이렇게 되면 이이만 알지 못한 것이 아니라 맹자까지도 모르는 것입니다.
맹자가 이르기를 ‘군자는 역시 인(仁)을 할 뿐이니 어찌 꼭 같아야 하겠는가.’ 하였습니다. 아, 서로 같지 않은 점이 있더라도 바로 그 속에 같은 점이 실제로 있고 보면, 두 현인이 함께 현인이 되는 데에 무슨 상관이 있겠습니까. 그런데도 유직 등은 알지 못할 이야기를 억지로 지어내어 외람되게도 자격을 심사하는 말을 만들어 내었습니다. 그들이 말한 ‘이기(理氣)는 일물(一物)이며 심(心)은 곧 기(氣)’라는 등의 말은 본래 이이의 문집에는 보이지도 않는데, 오늘날 그를 공격하고 배척하는 말로 만들어 내어 후학을 속이고 상을 현혹시키려고 하였습니다만, 교묘하게 하려다가 도리어 졸렬하게 되고 말았습니다. 아, 후미진 곳은 속일 수 있다 하더라도 나라 전체를 어떻게 속일 수 있겠으며, 알지 못하는 자야 속일 수 있다 하더라도 아는 자를 어떻게 속일 수 있겠습니까.
본도(本道)의 고 판서 신(臣) 장현광(張顯光)은 근세의 대유(大儒)로서 《주역(周易)》에 조예가 깊어 사류(士類)의 추앙을 받은 지 오래입니다. 그가 지은 경위지설(經緯之說)은 이기(理氣)를 극론(極論)하면서 종횡으로 무려 수천만 언을 논했는데, 모두 이황과 다른 입장을 취하고 이이와 부합되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일찍이 후학들 중에서 그가 이황의 학문을 공격했다고 의심한 자는 아직 없었고 보면, 저 유직 등의 말이 과연 어느 곳의 사람에게서 받아 온 것인지 알지 못하겠습니다. 아, 이에 이르러 선현이 극도로 무고를 당했고 본도의 이름이 헐값으로 넘어가고 말았습니다. 더구나 성혼의 경우는 이기를 변론한 것이 실로 이황을 위주로 한 것이니, 이 또한 이황의 견해라고 할 것입니다. 그런데도 유직 등이 이이의 학문과 동일하다고 말하면서 배척하니, 이는 더욱 말이 되지 않습니다.
또 신사년에 쓴 논학봉사(論學封事)를 취하여 공격합니다만, 신사년 봉사는 모두 궁리(窮理)와 격물(格物)에 대한 일을 강론하여 밝힌 것인데도, 다만 ‘정신을 보존하고 아낀다.[保惜精神]’는 말을 끄집어 내어 표적을 삼고 있습니다. 그들의 말이 비록 교묘하다 하더라도 그 글이 아직 남아 있으니 속일 수 없는 일로서 정말 여러 말이 필요없다고 할 것입니다.
아, 처음에 이이가 승려였다고 헐뜯으면서 ‘사마시(司馬試) 때에 알성(謁聖)을 허락하지 않았다.’고 한 것은 계미년에 올린 송응개(宋應漑)의 질투어린 계사(啓辭)이며, 성혼을 처음으로 무함하여 ‘임금을 버리고 선비를 해쳤다.’고 한 것은 이홍로(李弘老)와 정인홍(鄭仁弘)이 지어내서 모함한 이야기였습니다. 응개는 선조 대왕께서 이 때문에 친히 교서(敎書)를 지어 유배시켰습니다. 그리고 홍로와 인홍은 평소 무함한 사람이 성혼뿐만이 아니었는데, 끝내는 국가의 상형(常刑)에 복주(伏誅)되었습니다. 그러고 보면 이 무리들이 저주하기로 맹세한 하천배의 패거리에 끼어든 지 오래 되었다고 할 것입니다. 선비의 신분으로서 옛날 하던 대로 답습하는 것이 수치가 된다는 것도 모른 채, 자꾸 헛소문이라도 퍼뜨리면 사실로 인정되더라는 과거의 일만 다행으로 여기고서, 또 오늘날 다수의 세력을 동원하여 매장시키려고 하니, 그 버릇이야말로 가증스러운 것으로서 이러한 풍조는 결코 자라나게 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아, 이기에 대한 변론이 똑같은데 이황의 것은 높이고 성혼의 것은 내쳤으며, 인홍 한 사람이 모두 흉악하게 참소하였는데 이황을 무고한 것은 배격하고 성혼을 무고한 것은 조술(祖述)하였습니다. 아, 천하에 어떻게 똑같은 변론에 대해서 누구는 높이고 누구는 물리치는 논의가 있을 수 있으며, 또 다 같이 무고하였는데 어떤 것은 배격하고 어떤 것은 조술하는 시비(是非)가 있을 수 있겠습니까. 아, 선현의 언행과 사적이 어떠했는지 잘 상고하지 않고 함부로 말한다면 어찌 이이와 성혼만 모르는 것이 되겠습니까. 실은 이황까지도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 어찌 이이와 성혼만 무고하는 것이 되겠습니까. 실은 이황까지도 무고하는 것입니다. 만약 공평한 자에게 이를 논하게 한다면, 높이는 것이 이로우면 높이고 배척하는 것이 이로우면 배척하고, 배격하는 것이 이로우면 배격하고 조술하는 것이 이로우면 조술하여 본래 주견도 없이 남의 말과 이로운 것만 따른다고 말하지 않겠습니까.
삼가 생각건대 임금은 하늘과 같습니다. 한서(寒暑)의 차서(次序)가 어긋날 때도 있지만 역시 천도는 지극히 공정하지 않음이 없는 것처럼 임금이 특히 기뻐하고 유감으로 생각하는 것은 아랫백성들이 면할 수 없는 일이라 하겠습니다. 다만 신민(臣民)이 바라는 것은 오직 해와 달의 밝음으로 어둡게 숨겨진 원통함이 없어졌으면 하는 것이며, 사대부가 논하는 것은 단지 가능한 한 공명한 견해를 드러내어 치우치고 가려진 폐단을 제거했으면 하는 것입니다.
시험삼아 고 문정공(文正公) 신 조광조(趙光祖)의 일을 들어서 밝혀보겠습니다. 그가 등용되자 온 나라 안이 다 기대하여 마지않았음에도 유독 미워한 것은 소인배들이었으며, 그가 화를 당하게 되었을 때 온 나라 안이 모두 원통하게 여겼건만 유독 다행이라고 여긴 자는 간신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신원(伸冤)해 주는 은총과 시호를 추증하는 포장과 문묘에 종사(從祀)하는 은전이 역대 임금으로부터 잇달아 나왔으므로 그 당시나 후세에서 그 효성어린 처사를 우러러보고 잘 조술한 것을 더욱 칭송하였습니다.
지금 이 두 현인에 대해서도 인조 대왕께서 즉위하신 초기에 유신(儒臣)과 사림(士林) 공동의 요청을 들어서 이미 신설(伸雪)하고 증시(贈諡)하였고 보면, 선조(宣祖)를 잘 조술한 일을 모두가 칭송해 마지않는 터입니다. 그런데도 유직 등은 인조 대왕께서 을해년에 내린 한때의 어비(御批)를 내세워 상의 귀를 번거롭게 하면서 사사로운 뜻을 이루려 하고 있는데, 몰아쳐서 핍박하는 모양이야말로 마치 여염집 필부가 어떠한 조처를 취했을 때 그 아들에게 감히 이를 변경할 수 없다고 책망하는 것처럼 하고 있으니, 이것이 무슨 도리이며, 무슨 기상(氣象)입니까.
더구나 을해년에 비답을 내리면서 허물이 있다고 하신 말씀은 인조 대왕께서 경연에서 연신(筵臣)과 진솔하게 대화하시는 가운데 이미 그 잘못을 깨달으셨고, 고 상신(相臣) 최명길(崔鳴吉)의 스스로 발명하는 소에 대해 비답을 내리신 뒤로는 나라 전체가 귀를 기울여서 들었을 뿐만이 아니고 본도에서 가장 상세히 들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또 유직 등이 낭관이 되어 그것을 근거로 원용하였고 보면 너무도 그 태도가 간사하고 외람되다 할 것이니, 비단 오늘날의 죄인이 되는 것만이 아닙니다.
대개 우리 나라에서 이황은 주돈이(周敦頤)와 정자(程子)에 비유되고 이이와 성혼은 이황에 대해 주희와 장식에 비유됩니다. 후학이 주돈이와 정자는 받들면서 주희와 장식을 배척하는 것은 실로 도리가 아닙니다. 그런데도 시기하고 편벽된 풍조의 결과로 번번이 이황을 편들고 이이와 성혼을 배척하려고 합니다. 그 단서와 결말을 따져 물어보지도 않고 비슷하지도 않은 말을 억지로 만들면서 흉악하게 참소한 무리들의 후예에 같이 뒤섞이게 된다는 것을 돌아보지도 않으니, 아, 또한 괴이한 일입니다.
아, 비록 보통 사람들이 집에서 나누는 대화나 한가로운 이야기라도 반드시 증거가 있어야 믿으려고 하는 것이 일반 사람들의 상식입니다. 그런데 더구나 선현과 관계된 일로 온 도를 대표하여 군부에게 고하면서 이렇듯 믿지 못할 근거없는 말을 하다니, 정말 차마 듣지 못하겠습니다. 이것이 비록 한두 사람의 주장에서 나왔다 하더라도 도(道) 전체 선비들을 규합시켜 아무도 다른 의견을 내놓지 못하게 하고 온통 그 와중에 휩쓸리게 하여 진정되지 못하게 하였고 보면 영남 사림의 크나큰 수치가 아니겠습니까. 세도(世道)가 이 지경에 이르고 보니 진실로 한심합니다. 신들이 오늘날 말씀드리는 것이야말로 부득이한 데서 나온 것입니다. 성명께서는 너그럽게 살펴주소서."
하니, 답하기를,
"소를 보고 잘 알 았다. 그대들이 서로 배척하여 끝없이 분란을 조성하고 있는데, 내가 보기에는 까마귀의 자웅을 가리는 것과 조금도 다름이 없다."
하였다.
[註 020] 무오년 : 1558 명종 13년.
[註 021] 정백자(程伯子) : 명(名)은 호(顥).
[註 022] 장횡거(張橫渠) : 명은 재(載).
[註 023] 주회암(朱晦菴) : 명은 희(熹).
[註 024] 본의(本義) : 주희의 역전(易傳).
[註 025] 정전(程傳) : 정이(程頤)의 역전.
[註 026] 남헌(南軒) : 장식(張栻).
[註 027] 《지언(知言)》 : 호굉(胡宏)의 저서.
[註 028] 회암(晦蓭) : 주희.
[註 029] 구산(龜山) : 양시(楊時).
[註 030] 연평(延平) : 이통(李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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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종실록 4권, 효종 1년 5월 20일 임신 1번째기사 1650년 청 순치(順治) 7년
헌부가 아뢰기를,
"지난번 영남 유생들이 분소(分疏)054) 한 것은 한때의 공의(公議)에서 나온 행동이었는데, 추악한 무리들이 서로 배척하여 그들의 집을 허물고 도에서 축출하는 벌을 가하기까지 하였으니, 이야말로 과거 정인홍(鄭仁弘)이 한 도를 위협했던 풍조라 할 것입니다. 방백으로 하여금 공명정대하게 조사하여 수창(首倡)한 자를 적발해서 정죄(定罪)하게 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 내가 보기에 서로 배격했다는 점에서는 서울의 유생들이 정삭(停削)055) 했던 행동도 이와 다름없다고 생각한다."
하였다. 이상진(李象震)은 종사(從祀)하자는 의논을 비난했다가 정삭되는 벌을 받았고, 신석형(申碩亨)은 영남 유생들을 배척했다가 도에서 축출되는 벌을 받았는데, 상이 이렇게 하교한 것은 둘 다 미워한 것이었다.
[註 054] 분소(分疏) : 이이(李珥)와 성혼(成渾)을 변호하여 상소한 것.
[註 055] 정삭(停削) : 이이와 성혼을 배격하는 자를 유적(儒籍)에서 삭제시킨 것.
○壬申/憲府啓曰: "頃者嶺儒分疏之擧, 出於一時公議, 而醜正之徒, 互相排擯, 至施毁家黜道之罰, 此是曩時鄭仁弘威脅一道之習也。 請令方伯, 明正査覈, 摘發其首倡者定罪。" 答曰: "依啓。 以予觀之, 互相排擯, 則京儒停削, 亦與此無異也。" 李象震非議從祀, 而有停削之罰; 申碩亨排詆嶺儒, 而有黜道之擧, 上之有是敎, 兩惡之也。