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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마지막 문제까지(3)
2019년 9월 15일 / 사무엘상 26:1-12
삼상 26:1-12 / [사울을 다시 살려 주는 다윗] 몇몇 사람이 기브아에 있는 사울을 찾아와서 다윗이 숨어 있는 곳을 밀고하였다. ‘다윗은 유다 광야의 남쪽에 있는 하길라산 속에 숨어 있습니다.’ 2) 그러자 사울은 즉각 이스라엘에서 특
공대원 3천 명을 골라 다윗을 잡아죽이려고 광야를 향하여 출전하였다. 3) 사울은 하길라산 위에 올라가 그곳의 길가에 진을 쳤다. 이때에 다윗은 바로 그 광야에 숨어 있었기 때문에 사울이 출전한 것을 곧 알게 되었다. 4) 그래서 다윗은 정찰대를 보내 사울의 진영을 확인하였다. … 7) 그들은 날이 어두워질 때까지 산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한밤중이 되자 사울의 진영으로 잠입하였는데 아브넬과 사울은 물론이요, 그의 부하들까지도 모두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그런데 잠자는 사울의 머리맡에는 창이 땅바닥에 꽂혀 있었다. 8) 아비새가 다윗에게 이같이 속삭였다. ‘여호와께서 오늘 이 원수를 장군님의 손에 넘겨주셨습니다! 제가 원수의 창으로 그를 찔러 땅바닥에 박아놓겠습니다. 한번만 내리꽂으면 그만입니다!’ 9) 그러나 다윗이 말렸다. ‘그에게 함부로 손대지 마라! 그는 여호와께서 기름 부어 세우신 왕이기 때문에, 네가 그를 죽이는 날에는 벌을 받게 된다.’ 10) 결국 다윗은 아비새가 그를 해치지 못하도록 일부러 이런 말을 한 것이다. ‘살아 계신 여호와를 두고 내가 확실히 단언하지만 그는 우리가 손대어 죽일 사람이 아니다. 그에게 형벌을 내리실 분은 오직 여호와뿐이시다. 여호와께서는 그를 나발처럼 쳐 죽이시거나 죽을 날이 되어서 죽게 하시거나 전쟁터에 나가서 잡혀 죽게 하실 것이다. 11)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기름 부어 세우신 왕에게 내가 손을 들어 쳐 죽이는 일은 그분이 직접 막아 주시기를 원한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그의 머리맡에 있는 창과 물병만 가지고 어서 빠져 나가자!’ 12) 그리고 다윗은 그 두 가지 물건만 가지고 아비새와 함께 사울의 진영에서 무사히 빠져나왔다. 그러나 이것을 본 사람도 없고, 잠에서 깬 사람도 없었다.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깊은 잠을 내리셔서, 그들은 모두 갈비뼈를 빼가도 모를 정도로 깊은 잠에 빠져 있었기 때문이다.
6. 타락한 사울 왕의 안타까운 모습을 보면서 우리는?
사울은 여러모로 장점도 많은 사람이었다. 부모님께 효도하였고, 키가 크고 잘 생긴 미남이었으며, 인간적인 면에서 비교적 순수한 마음을 가졌고 겸손했었다. 좋은 가문 출신으로 용기도 대단했다. 더구나 하나님의 영에 사로잡혀 예언도 해 본 경험도 있다. 하나님께서 다른 사람들보다 그를 기뻐하셔서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의 초대 왕으로 세우셨다. 그리고 백성들과 연합하여 나라를 잘 세워나갔다. 전쟁에서 적을 물리쳐 승리도 했다. 사실 사울과 같은 사람을 쉽게 찾아 볼 수 없었다.
문제는 계속적으로 경건한 삶에 매진해야 할 터인데, 왕이 되어서인지 바빠서 그런지 신앙성장이 하향곡선을 그리기 시작하더니 뒤로 후퇴하는 경우가 잦아졌다. 인간의 본능이 조금씩 나오더니 나중에는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하며 교만해졌다. 전쟁에서 승리하고 왔을 때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는커녕 세상 왕처럼 자기 이름을 나타내려고 승전비까지 세움으로 하나님 앞에 버림을 받게 되었다.
얼마 후 블레셋 대장군 골리앗이 쳐들어와 이스라엘과 하나님을 농락하였는데, 생명을 걸고 앞장서서 나아가 싸워야 할 왕이 두려움에 휩싸여 뒤로 쳐질 때에 소년 다윗이 믿음을 가지고 골리앗과 싸워 승리하여 나라를 구하게 되었다.
경건을 추구하지 않은 사울왕의 처절한 모습 /
삼상 18:6-12 / [다윗을 질투하는 사울] 블레셋 족속의 용사 골리앗을 쳐 죽인 다윗이 이스라엘 온 군대를 거느린 사울과 함께 돌아오는데, 이스라엘 모든 성읍에서 여인들이 나와서 사울왕을 환영하였다. 여인들은 길가에 줄지어 서서 기뻐 뛰며 소고와 경쇠 소리에 맞추어 노래도 부르고 춤도 추었는데, 7) 이때에 그들은 다음과 같이 환호하는 노래를 불렀다. `사울왕이 쳐 죽인 원수는 수천이지만 다윗이 쳐 죽인 원수는 수만이라네!' 8) 사울은 이 노래를 듣고 몹시 기분이 상해 이렇게 투덜대었다. `내게는 겨우 수천 명을 죽인 공로만 돌리고, 다윗에게는 수만 명을 죽인 공로를 돌렸으니, 이제 그에게 모자란 것은 왕이 되는 것뿐이겠구나!' 9) 사울은 이때부터 질투하는 심정으로 다윗을 바라보게 되었다. 10) 다음날 하나님께서 사울에게 악령을 내려 보내시자, 사울이 왕궁에서 갑자기 발작을 일으키며 미친 사람처럼 떠들기 시작하였다. 그래서 다윗은 전과같이 수금을 타기 시작하였다. 이때 사울이 갑자기 창을 손에 들어 11) 다윗을 벽에 박아버릴 생각으로 내던졌다. 그러나 다윗은 이러한 사울 앞에서 두 번이나 몸을 피하였다. 12) 다윗이 사울을 살리려고 수금을 탈 때 사울은 다윗을 죽이려고 창을 두 번이나 던졌으나 실패하자 다윗이 점점 무서워지기 시작하였다. 이제는 사울도 여호와께서 자기에게서 떠나가고 다윗 편에 서 계신 것을 알게 되었다.
그뿐 아니라 적진에 보내어 적의 손에 죽게 만들려고 계교를 쓰기도 하였다. 그리고 다윗이 병들었다는 소문을 듣고 다윗의 집에 신하들을 보내 죽이려 하였고, 나중에는 들에 숨어 있는 다윗을 잡아 죽이려고 군대를 이끌고 수색하기도 했다.
사울은 점점 본래의 아름다운 모습을 잃어버리고 추하고 무서운 얼굴을 가진 마귀의 모습으로 변해 갔다. 그에게 존경받을만한 왕의 권위도 사라진지 오래다. 사울에게 이제 성령의 역사는 나타나지 않고 악령(惡靈)의 역사만 함께 하였다. 하나님께서도 그에게서 점차 멀어지시며 나중에는 그를 떠나셨다. 사울에게서 선한 양심보다 오로지 다윗을 제거하려는 생각으로 가득차 점차 불행하고 초라한 사람으로 변해갔다.
사울이 왜 그렇게 변질되었을까? 자신의 육신의 감정에 이끌려 행동하였기 때문이다. 미운 감정이 생기면 미워하고, 질투의 감정이 생기면 시기하고, 화가 나면 손에 잡히는 대로 창도 집어 던졌으며, 죽이고 싶은 마음이 생기면 살인하려고 하였다. 왕이라고 이렇게 마음대로 해도 된다는 말인가? 그렇게 살다보니 점점 악신이 사울을 사로잡아 종처럼 부렸다.
자신의 감정을 무조건 부정하며 살아서도 안 되지만, 자기감정에 따라 행동하는 것 역시 조심해야 한다. 사단에게 속아서도 안 된다. 사단은 죄로 오염된 인간의 감정을 지배하고 감정을 통해 신앙과 인격까지 지배하려고 한다. 살다보면 이런저런 일로 미운 감정이 앞설 때도 있고, 섭섭한 감정이 솟구칠 때도 있다. 그러므로 성도는 감정을 다스릴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한다.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이 인간의 악한 감정을 통제하고 내 자신의 감정을 주관할 수 있도록 하나님 앞에 엎드려 기도해야 한다. 이제부터라도 악한 감정의 지배를 받지 않고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따를 수 있게 해달라고 날마다 기도하자.
처참한 상황에서도 경건한 모습을 잃기는커녕 빛된 삶을 살고 있는 다윗 / 다윗은 참으로 이상한 사람이다. 인간적으로 보면 평범한 사람으로서는 이해조차 할 수 없는 거룩하고 신령한 사람인지? 아니면 바보 같이 멍청한 사람인지? 자기에게 해가 될지라도 그리고 남의 조언(助言)보다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에 기준을 두고 있는 다윗은 사울이 그처럼 그를 죽이려고 하는데도 한 번도 사울과 맞서지 않았다. 자기가 원하면 얼마든지 사울을 해칠 수도 있었다. 다윗을 벽에 박으려고 사울이 던진 창을 주워 다시 사울에게 던질 수도 있었지만 창을 던지기는커녕 그런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다윗의 마음 한쪽 귀퉁이에서는 ‘너도 사울을 향해 창을 던져버려라’고 하는 악마의 소리도 들렸을 것이다. 만약 그때 다윗이 창을 사울에게 던졌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하나님 마음에 꼭 맞기는커녕 그 역시 사울 왕과 별로 다를 바 없는 불행하게 살면서 미친 사람처럼 날뛰었을 것이다.
사무엘상 24장이나 26장에 나오듯이 주변에 있는 많은 사람들이 ‘사울을 죽이고 왕이 되시오.’라고 했다. 다윗이 사울을 죽인다 해도 정당방위로 얼마든지 변명할 수도 있다. 직접 죽이지 않고 다른 사람이 사울을 죽이도록 가만히 있을 수도 있었지만 다윗은 적극 사람들을 만류하며 자기를 원수처럼 끈질기게 죽이려는 사울을 하나님의 손에 맡기고 피하기만 하였다.
여기에서 꼭 집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다. 다윗은 원수 같은 사울왕의 목숨을 맡기면서 자기는 결코 왕을 해치지 않으니 하나님께서 해결해 달라고 기도한 것이 아니었을 것이다. 오히려 ‘하나님! 임금님의 마음에 평안을 허락하사 악한 영의 시달림에서 벗어나게 해 주십시오.‘라고 눈물로 기도하였을 것이다. 이 대목은 거룩하게 살고자 하는 성도들의 모범 답안이다.
작은 결론으로 성도들의 답안을 보자.
■ 어느 목사님의 간증이다. 내가 군대를 제대한 후 대학 3학년으로 복학한 때였다. 하루는 자취방에 누워 잠을 청하는데 군대 고참에게 구타를 당한 생각이 났다. 그 고참은 나를 30분 동안 부동자세로 세워놓고 주먹과 발길질로 구타를 했다. 그 때만 해도 군대에 구타가 사라지지 않고 남아있던 때였다. 그 생각이 나자 갑자기 내 마음은 견딜 수 없는 분노와 복수심이 맹렬한 불길처럼 타올랐다. 주먹을 불끈 쥐고 부르르 떨며 그 고참에게 복수하는 상상을 하고 있노라니 한 5분도 안 되어 온 몸이 땀에 흠뻑 젖어버렸다. 몸과 마음이 견딜 수 없이 괴로웠다. 나는 하나님께 ‘저를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성령을 주십시오.’라고 기도했다. 그러자 제 마음에 ‘그 고참을 긍휼히 여기고 기도하라’는 주님의 음성이 들려왔다. 그 고참을 위해 기도하기 시작하자 정말 그 고참 역시 폭력과 악의 희생자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그의 영혼을 위해 기도할 때 뜨거운 눈물이 터져 나왔다. 그렇게 한참을 그를 위해 기도하고나자 내 마음에는 말할 수 없는 평안이 찾아왔다. 그 후로는 그가 생각이 나면 분노 대신 긍휼의 마음과 기도가 나왔다. 그 기도는 내 자신을 파괴하는 분노와 복수심으로부터 해방시켜 주었다. 바로 이것이 예수님께서 원수를 사랑하고 핍박하는 자를 위해 기도하라(마 5:44-48)고 하신 이유였다. 이렇게 순종하는 성도들에게는 평안과 기쁨이 있고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같은 거룩함이 있다. 우리가 복수심에 사로잡혀 있을 때는 평화도, 기쁨도, 거룩함도 없다. 복수심을 버리고 원수를 사랑할 때 평화와 기쁨과 거룩함을 하나님께서 주실 것이다(눅 11:9-13).
그러므로 우리도 죄짐 맡은 구주 예수님께 기도하자. 스데반과 같은 기도를 할 수 있도록 기도하자.
♬ 죄짐 맡은 우리 구주 / 1. 죄짐 맡은 우리 구주 어찌 좋은 친군지 걱정 근심 무거운 짐 우리 주께 맡기세 주께 고함 없는 고로 복을 얻지 못하네 사람들이 어찌하여 아뢸 줄을 모를까 2. 시험 걱정 모든 괴롬 없는 사람이 누군가 부질없이 낙심말고 기도드려 아뢰세 이런 진실하신 친구 찾아볼 수 있을까 우리 약함 아시오니 어찌 아니 아뢸까 3. 근심 걱정 무거운 짐 아니진 자 누군가 피난처는 우리 예수 주께 기도드리세 세상 친구 멸시하고 너를 조롱하여도 예수 품에 안기어서 참된 위로 받겠네
행 6:15, 7:54-60 / 그러자 의회 안에 있던 사람들이 일제히 스데반을 쳐다보았다. 그의 얼굴은 천사의 얼굴처럼 빛나고 있었다. 7:54) [스데반의 순교] 유대인 지도자들은 스데반의 말을 듣고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라 이를 부드득 갈았다. 55) 그러나 스데반은 성령이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보았다. 그때 하나님의 영광과 하나님 오른편에 서 계시는 예수의 모습이 보였다. 56) 그가 소리쳐 말하였다. `보시오! 하늘이 열리고 메시아이신 예수께서 하나님 오른편에 서 계십니다!' 57) 그러자 사람들은 손으로 귀를 틀어막으면서 스데반을 향해 욕설을 퍼부었다. 58) 그러고는 돌로 쳐 죽이려고 그를 성 밖으로 끌어냈다. 공증인들, 곧 사형 집행인들이 겉옷을 벗어서 사울이라는 청년의 발 앞에 놓았다. 59) 그러나 돌들이 우박처럼 날아오는 속에서 스데반은 `주 예수님, 제 영혼을 받아주소서' 하고 기도를 드렸다. 60) 그리고 무릎을 꿇고 `주님,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소서' 하고 큰소리로 부르짖었다. 그 말을 남긴 뒤 그는 눈을 감았다.
스데반은 우리에게 그 원리를 잘 보여주었다. 스데반의 얼굴이 천사와 같았다는 것은 그의 마음에 평화와 기쁨과 거룩함이 가득했다는 말이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그를 돌로 치는 자들을 향해 복수심을 품지 않고 오히려 그들을 긍휼히 여기며 기도했기 때문이다.
■ 음성 나환자촌 사역 이야기를 담은 ‘잊혀진 사람들의 마을’이라는 책에 김요석 목사에 관한 이런 일화가 나온다. 김목사의 교회에 출석하는 양집사가 하루는 새벽에 방문을 마구 두드렸다. “아니, 이른 새벽부터 무슨 일이오?”, “아, 목사님, 제 이야기 좀 들어보셔요. 제가 키우는 돼지 다섯 마리가 어제 우리 밖으로 도망가서 이웃집 김씨네 채소밭에 들어가 채소를 좀 뜯어먹었습니다.”, “그런데요? 그래서 제가 김씨에게 채소 값을 물어주겠다고 했더니, 김씨 말이 채소 값으로는 안 되니 그 돼지 다섯 마리를 모두 내놓으라는 겁니다. 세상에, 이런 억지가 어디 있고 이런 날강도가 어디 있습니까? 그 동안 교회 다닌다고 제가 매번 참아 왔는데 더 이상은 못 참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목사님?” 김요석 목사가 가만히 생각하다가 이렇게 말했다. “집사님, 아마도 기독교인이 어떻게 나오나 보려고 그러는 것 같습니다. 돼지가 아깝지만 달라는 대로 줘버리십시오.”, “네? 그 돼지 값이 얼마인지 아십니까?” 목사님이 자기편을 들어주기를 기대했던 양집사는 고개를 푹 숙이고 돌아갔다.
그로부터 해가 지난 어느 날 새벽 또 다시 양집사가 김목사의 방문을 마구 두드린다. “무슨 일이오?”, “할렐루야! 목사님, 하나님은 살아계십니다. 아, 목사님. 작년에 제가 목사님 댁에 새벽에 와서 말씀드린 것 기억하시지요? 그 때 제가 목사님 말씀에 순종하여 돼지 다섯 마리를 줘버리지 않았겠습니까?”, “아, 잘 하셨네요. 그런데요?”, “할렐루야, 어제 그 김씨네 소 두 마리가 우리 채소밭을 다 뜯어먹어버렸습니다. 돼지 다섯 마리 주고 소 두 마리 얻었습니다. 할렐루야~.” 좋아서 어쩔 줄을 모르는 양집사에게 이렇게 말했다. “집사님, 그 소를 뺏을 생각이십니까?”, “아, 당연히 받아야지요. 저도 돼지를 몽땅 주지 않았습니까?”, “안 믿는 사람들이 그런다고 믿는 우리들이 똑같이 하면 어떡합니까? 그러지 마십시오.” 이번에도 양집사는 고개를 숙이고 돌아갔다.
그런데 다음 날 아침에 또 양집사가 김목사의 방문을 부서져라 두드렸다. “할렐루야! 목사님. 하나님은 진짜 살아 계십니다. 어제 목사님 말씀 듣고 김씨에게 찾아갔습니다. ‘김씨! 걱정하지 말게. 채소값 얼마나 한다고 소를 받겠나. 잊어버리게, 나는 벌써 잊었네.’ 그렇게 말해주고 왔습니다.”, “잘 하셨네요.”, “그런데요. 오늘 새벽에 김씨가 저를 찾아왔습니다. ‘이보게! 양씨. 나는 자네 돼지를 빼앗았는데 자네는 왜 내 소를 빼앗지 않나? 내 부끄러워 밤새 한 숨도 못 잤네. 자, 여기 자네에게 뺏은 돼지가 새끼를 쳐서 50여 마리가 되었네. 모두 가져가게나.’ 목사님, 이건 받아도 되겠지요?”, “잘 하셨습니다. 그 돼지야 원래 집사님 것 아닙니까? 당연히 받으셔도 되지요.” 그 일 이후 마을사람들은 양씨를 진정한 그리스도인으로 인정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 미국에 죠라는 노예가 있었다. 충성을 다하는 그에게 주인은 모든 일을 의논하여 맡기곤 했다. 어느 날 주인이 다른 노예를 사기 위해 죠와 노예 시장에 갔을 때이다. 힘 좋고 젊은 노예를 사려는 주인에게 죠는 어떤 병들은 노예를 사자고 하도 간곡히 부탁해서 죠의 말대로 했다. 죠는 병들어 일도 못하는 노예를 시간만 나면 치료해 주고 돌봐 주었다. 그것을 이상히 여긴 주인이 왜 그렇게 하는가를 물었을 때 죠는 이렇게 말했다. “저 노예는 나를 유괴해서 노예 상인에게 판 사람입니다. 그런데 뜻밖에 저 사람도 노예가 되어 병들어 있습니다. 저 사람을 바라보는 순간 하나님이 저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이제 저는 저 사람이 하나님께 갈 때까지 사랑할 것입니다.”라고 했다. 아마, 죠는 그 동안 갖은 고난과 학대를 받은 삶 속에서 자기를 유괴해서 노예로 판 그 사람을 증오하며 복수를 꿈꾸며 살았을 것이다. 그러다 보니 그 증오의 사슬에 스스로 매여 살았을 것이요, 기쁨이 전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 그 병든 노에를 돌보는 죠는 자유함과 기쁨이 충만했을 것이요, 하나님의 강력한 능력이 함께 하시는 가장 행복된 삶을 사는 자신을 발견했을 것이다.
■ 유태계 미국의 한 기독교인이 딸과 함께 이스라엘 성지순례를 떠났다. 그런데 성지순례 중에 아버지가 팔레스타인 테러리스트가 쏜 총에 머리를 맞아 관통함으로 그만 현장에서 직사(直死)했다. 수사는 사고 현장에서 범인을 체포하지 못해 장기전으로 돌입했다. 충격을 받은 소녀는 귀국하여 아버지의 원수를 복수할 마음으로 생활 히브리어와 현지 아랍어를 열심히 공부했다. 마침내 워싱턴포스트지의 기자가 되어 이스라엘 파견 근무를 자청, 그곳에 가 있으면서 법원의 기록을 모두 뒤지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12년에 걸쳐 아버지를 살해한 테러범이 ‘오마르 하티브’라는 사실과 그가 수감되어 있는 곳을 파악하는 데 성공했다. 드디어 아버지의 원수 갚을 기회가 왔다. 그녀는 그의 신분을 숨긴 채 범인과 가족을 만났다. 그런데 그의 마음에 세미한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왔다. “진정한 복수는 그들이 자신의 죄를 깨닫고 회개하는 것이다. 물리적 복수는 동물적 본능일 뿐이다.” 그녀는 자신의 마음에 말씀하시는 주님의 음성을 뿌리칠 수 없었다. 결국 그녀는 테러범과 그의 가족들에게 자신의 신분을 밝힌 후 그동안 복수를 위해 칼을 갈았던 것에 대한 용서를 구했다. 그리고 범인의 가석방을 위해 청원서를 제출하는 등 차원 높은 사랑을 보여주었다. 이 여인의 이름이 바로 ‘롤라 블루멘펠트’이다.
■ 남아공의 만델라 대통령은 인종차별정책에 저항하다가 27년 감옥 생활했다. 그의 대통령 취임식 때, 빌 클린튼 미국 대통령이 그를 만나 물었다. “진정코 그들을 미워하지 않나요?” 그가 대답했다, “미워했지요, 그러나 어느 날 채석장에서 바위를 깨다가 문득 그들이 내 정신과 마음 말고는 모든 걸 뺏어갔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나는 그것만은 절대 내주지 않기로 결심했습니다.” 빌 클린튼 대통령이 이어서 물었다. “감옥 안에서는 그렇다 치고, 감옥에서 나올 때 다시 증오가 솟구치지 않던가요?” “맞습니다, 그랬지요, 하지만 다시 생각했습니다, 이 사람들은 나를 27년이나 감옥에 가뒀는데, 그들을 증오한다면 계속 갇혀 있는거나 다름없지 않은가? 나는 자유롭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그 증오를 털어버리기로 했습니다.”
■ 원수에 대한 사랑 / 대학생선교회 CCC를 운영하면서 한국교회에 신선한 바람을 불러일으키신 김준곤 목사님의 실화이다. 예수 믿는다는 것 때문에 목사님의 가족이 다 공산당에게 끌려가서 갖은 고초를 겪었다. 목사님의 눈앞에서 목사님의 부친과 아내가 공산당에게 맞아 죽는 것을 보아야 했다. 목사님도 너무 매를 많이 맞아 혼수상태에 빠졌다. 그 때 미군 함정이 나타나는 바람에 겨우 위기를 벗어나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급기야 김목사님의 가족을 죽인 공산당원들을 미군들이 잡아들였다. 그런데 목사님은 빵을 들고 미군에게 찾아가서 공산당원에게 주고, 미군에게 사정사정해서 풀어달라고 하였다. 미군이 목사님의 간청에 못 이겨서 풀어주었다. 그런데 그 공산당원들이 산 속에 들어가서 계속 게릴라전을 벌였다. 그 때 김목사님은 성경책을 들고 산 속에서 게릴라전을 벌이는 공산당원들을 찾아 들어갔다. 그 결과 그들 공산당원들이 회개하고 돌아와 108명이 모이는 시골교회를 설립할 수 있었다. 김목사님은 하나님의 사랑을 가지고 아버지를 죽이고, 아내를 죽인 사람까지도 용서했다.
■ 원수를 사랑하라 / 2차 대전이 시작되자 앙리코는 한 유대인 가족을 2년간 숨겨주다 이웃의 밀고로 나치에 체포되어 수용소로 가게 되었다. 1944년 성탄절 때, 수용소장이 그를 불러 풍성한 음식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 음식들은 너를 위해 네 아내가 보냈네. 음식 솜씨가 훌륭해. 네가 이 곳에 올 때부터 이렇게 매일 음식을 보내서 내가 대신 잘 먹었지.” 이 말을 들은 앙리코는 웃으며 말했다. “당신을 사랑합니다. 계속 맛있게 드세요.” 소장이 너무 기가 막혀 방금 한 말을 다시 해보라고 했다. 그러자 앙리코는 다시 웃으며 말했다. “당신을 사랑합니다. 그 음식을 맛있게 드세요.” 그때 소장이 어이가 없었는지 밖을 향해 외쳤다. “이 자를 끌고 나가! 이제 이 사람이 미치려고 한다.” 얼마 후, 전쟁이 끝나 앙리코는 풀려났다. 몇 년이 지나 앙리코는 자신이 갇혔던 곳에 아내와 함께 방문했다가 그 근처에 옛 수용소장이 산다는 얘기를 들었다. 곧 그는 아내가 직접 만든 맛있는 요리를 들고 그 소장 집을 찾아가 물었다. “저를 기억 못하세요?” 그가 고개를 흔들자 앙리코는 다시 말했다. “1944년 성탄절 때 당신 사무실에서 제가 당신을 사랑한다고 하자 당신은 내게 미쳤다고 했죠?” 그가 소스라치게 놀라자 앙리코는 계속 말했다. “저는 그때 정말 미치지 않았어요. 지금도 그래요. 당신과 함께 식사하고 싶은데 허락해주실래요?” 결국 같이 식사를 하게 되었다. 식사 중에 옛 소장이 갑자기 톤을 높여 말했다. “도대체 당신이 원하는 게 뭐요?” 그때 그에게 믿음을 권하자 곧 그는 마음을 열었다.
원수사랑은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표지(表紙)이자 악인마저 회개시키는 능력이다. 원수를 사랑하고 핍박하는 자를 위해 기도하기를 시작하심으로 이 능력을 경험하시기를 축복한다.
진정한 평화와 기쁨과 거룩함을 원하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원수를 위해 인내로서 기도를 시작해 보자. 원수마저 긍휼히 여기게 되고 복수심에서 해방되어 참된 평화와 기쁨과 거룩함을 누리자.
요 3:16 / 하나님이 이처럼 세상을 극진히 사랑하셔서 외아들을 보내주셨으니 이는 누구든지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
요일 3:16 /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위해 죽으심으로써 사랑의 본을 보여주셨고 우리는 진정한 사랑이 무엇인가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믿음의 형제들을 위해 생명을 바쳐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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