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0322 사순3주간 화 – 133위 096° 최사관 예로니모
“너희가 저마다 자기 형제를 마음으로부터 용서하지 않으면,
하늘의 내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그와 같이 하실 것이다.”(마태 18,35).
133위 096° ‘하느님의 종’ 최사관 예로니모
이름 : 최사관(崔士寬) 예로니모
출생 : 1804년, 서울 황교(黃橋)
순교 : 1868년 3월 4일, 물고옥사, 좌포청
최사관(崔士寬) 예로니모 회장은 서울의 황교(黃橋, 현 서울시 종로구 원남동)[0.1]에서 태어났으며, 어려서부터 천주교리를 배웠으나 드러나게 신앙생활을 하지는 않았다. ‘사관(士寬)’은 그의 자(字)이다.
장성한 뒤 최사관 예로니모는 동촌(東村)[0.2]에 사는 판서의 노비와 혼인하여 아들 하나를 두었으나 상처(喪妻)하였고, 1839년 기해박해 때 체포되었다가 석방된 뒤 한 교우와 혼인하여 다시 2남 1녀를 두었다. 그러나 교우들로부터 ‘교회법에 어긋난다.’는 말을 듣고는 두 번째 부인과 헤어진 뒤 다시 다른 교우 과부를 아내로 맞이하였다.[1][1.1]
이후로 최사관 예로니모는 차츰 교리 실천에 열중하였다. 그러다가 제3대 조선대목구장 페레올(J. Ferréol, 高 요한) 주교가 입국한 뒤에는 회장으로 임명되어 교회의 중요한 일들을 맡아보았으며, 김인협(金仁協, 야고보) 등 이웃에게 교리를 전하는 데도 노력하였다.
1856년 제4대 조선대목구장 베르뇌 주교가 조선에 입국한 뒤 최사관 예로니모는 다시 회장에 임명되었다. 그리고 정의배(丁義培, 마르코), 홍봉주(洪鳳周, 토마스) 등 지도층 신자들과 교류하면서 열심히 교회 일을 도왔으며, 새로 입국하는 선교사들을 보살펴 주었다. 또 그는 자신의 집에 공소를 개설하여 교우들이 성사를 받을 수 있게 했으며, 끊임없이 전교에 노력하여 김창순(金昌順, 요셉) 등 여러 사람들을 교회로 인도하였다.[2]
1866년 병인박해가 일어나자, 최사관 예로니모는 남대문 밖에 있는 집을 빌려 아내와 함께 피신하였다. 그러던 중 베르뇌 주교가 새남터에서 순교하자, 교우들과 함께 그 시신을 거두어 와서(瓦署, 현 서울시 용산구 한강로 3가)에 안장하였다. 그리고 이후로는 최인서(崔仁瑞, 요한) 등과 함께 선교사 영입을 계획하기도 하였다.[3]
최사관 예로니모가 체포된 것은 1868년 초였다. 한 배교자가 그의 거처를 포교에게 밀고한 때문이다. 이내 좌포도청으로 압송된 그는 다른 교우들을 밀고하지 않으려고 이미 지난 일만을 진술하였다. 그런 다음 갖은 문초와 형벌에도 “비록 형벌 아래 죽을지언정 절대로 배교하지 않겠다.”고 하면서 굳게 신앙을 증언하였다. 그 결과 그는 1868년 3월 4일(음력 2월 11일) 이후에 물고(物故)로, 곧 형이 집행되기 전에 문초와 형벌 가운데서 순교했으니, 당시 그의 나이 64세였다.[4]
[註]__________
[0.1] 황교(黃橋) : 서울 창경궁 남쪽 종로구 원남동 76번지 서쪽에 있던 다리. 황(黃) 참의(參議, 육조에서 참판[종2품 차관]과 함께 판서[장관, 정2품]를 보좌하던 차관보[정3품])가 사재를 들여서 놓았다 하여 ‘황참의 다리(黃參議橋)’, ‘황참교(黃參橋)’, ‘참판교(參判橋)’, ‘황교(黃橋)’라 불렸다. 한성판윤 홍계희(洪啓禧, 1703~1771)가 준천사(濬川司, 도성 하천과 도랑 준설)의 사업내용을 기록한 ≪준천사실(濬川事實)≫에는 신석교(新石橋)로 기록되어 있어 1760년 전후로 새로 돌다리를 놓은 것 같다.
[0.2] 동촌(東村) : 서울 종로구 이화동 일대. 조선시대에는 수도 한양의 주거지로 경복궁과 창덕궁 사이 북촌(北村), 경복궁의 서쪽 서촌(西村), 남산 자락 남촌(南村), 장교와 수표교 일대 중촌(中村)이 있었으며, 창덕궁과 종묘의 동쪽을 동촌(東村)이라 불렀다. 연지동·효제동은 창덕궁과 종묘의 동쪽에서 낙산(駝駱山) 능선 일대가 동촌에 속했다. 한양 도성 안이면서도 궁궐과 종묘사직, 관아와 시전이 모여 있는 도심으로부터는 벗어난 한적한 지역이라 북촌과 더불어 대표적인 주거지로 꼽혔다.
[1] 최 예로니모가 어떤 이유로 혼인 조당(阻擋)에 걸렸는지 기록에 나와 있지 않고 배우자가 ‘교우 과부’로 나온다(병인치명사적』, 9권, 19면). 그가 교회 혼인법을 지키려고 한 사실은 명확하다(『치명일기』, 정리 번호 89번; 『병인치명사적』, 9권, 19면; 『좌포도청등록』, 무진(1868년) 2월 11일).
[1.1] 혼인장애·조당(婚姻障礙·阻擋)
혼인장애·조당은 혼인이 무효한 상태, 곧 ①혼인무효장애, ②혼인합의무자격·무효, ③혼인형식결여·결함 등이 있을 때를 말한다.
① 혼인무효장애 : 혼인무자격은 장애가 소멸·관면되어야 하고 혼인당사자 합의가 갱신되어야 유효해진다. 관면이 불가한 혼인은 유효화할 수 없다.
N | 장애종류 | 교회법 | 관면권 | 한국민법 |
1 | 연 령 (c.1083) | 교회실정법, 男16·女14세미만 | 사제 | 男女 18세 미만(807; 808; 816; 817; 819) |
2 | 성교불능 (c.1084) | 자연법 | 불가 | 혼전 무지 (816,2; 822) |
3 | 전혼인유대 (c.1085) | 하느님실정법 | ①부부관계완료된 합법혼 : 불가 ②부부관계미완료된 합법혼 : 교황 | 이혼·혼인무효로 혼인소멸. 중혼(重婚)만 규제(810; 816; 818) |
4 | 미신자 (c.1086) | 교회실정법, 신자와 미신자(가톨릭과 유대가 없는 개신교 포함) | 사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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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 성품장애 (c.1087) | 교회실정법, 부제·사제·주교품 | 사도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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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 종신서원 (c.1088) | 교회실정법, 공적서원 수도자 | 성청설립: 사도좌 교구설립: 교구장 |
|
7 | 유 괴 (c.1089) | 교회실정법, 혼인목적 女유괴 | 사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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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 범 죄 (c.1090) | 교회실정법, 혼인목적 배우자살해 | 사도좌 |
|
9 | 혈 족 (c.1091) | ①자연법: 직계·방계2촌내혈족 ②교회실정법: 방계3~4촌혈족 | ①불가 ②사제 | 동성동본, 남편8촌 이내 방계혈족(809; 815; 817) |
10 | 인척직계 (c.1092) | 교회실정법, 배우자 존비속 | 사제 | 인척직계, 남편8촌혈족이내(815,3) |
11 | 내연관계 (c.1093) | 교회실정법, 직계 1촌 혈족, 준인척직계장애 | 사제 |
|
12 | 양자관계 (c.1094) | 교회실정법, 입양으로 생긴 직·방계 2촌 이내 | 사제 | 입양부터 혼인 중 출생자와 동일(772; 877) |
N.B.
1. 사제의 무효장애 관면권은 ‘한국천주교회사제특별권한’에 의거한다.
2. 국법이 금하거나 무효로 하는 혼인은 ‘한국천주교회사목지침서’의 규정에 따라 교회가 준용해야 한다. 하지만 관면해도 교회법상 관면은 유효하다.
② 혼인합의 무자격 및 무효 : 혼인 그 자체를 무효로 한다.
N | 종 류 | 교회법 규정 |
1 | 합의무자격 (c.1095) | ①충분한 이성 사용 결여 : 혼인유지가 불가한 심신상실·박약, 정신병 ②혼인에 대한 본질적 의무·권리 분별력 중대한 결핍 : 혼인유지에 필요한 의무·권리 식별 부족 ③심리적으로 혼인의 본질적 의무 이행 불가 : 혼인유지가 불가한 신경증, 성격장애, 중독, 동성애 등 |
2 | 혼인무지 (c.1096) | 무지는 정보의 결여. 혼인은 남녀 간의 성적결합, 자녀출산, 평생공동운명체 유지임을 모르고 한 혼인합의는 무효. |
3 | 사람착오 (c.1097) | 착오·착각은 정보의 오류. 단순한 착오가 아니라 ‘사람 자체’(가령, 언니를 동생으로)를 오인 또는 홍링 달사자가 주요하고 직접적으로 의도한 사람에 대한 자질을 착각한 혼인합의는 무효. |
4 | 자질사기 (c.1098) | 상대방의 의도된 범의(계략)로 그의 혼인 자질에 대해 속아서 한 혼인합의는 무효 |
5 | 합의가장 (c.1101) | 거짓 합의. 혼인의 본질적 요소(성적협력, 자녀출산, 평생운명공동체)나 본질적 특성(일부일처, 불가해소) 배제한 혼인합의는 무효. |
6 | 조건부합의 (c.1102) | 과거·현재에 관한 조건부는 조건의 존부(存否)에 따라 합의 유·무효 갈림. 미래조건부 혼인합의는 무효 |
7 | 외적강압·공포 (c.1103) | 외부로부터 가해지는 물리적 폭력이나 심한 공포를 면하기 위해 한 혼인합의는 무효 |
③혼인형식결여 또는 혼인형식결함 : 교회법적 혼인형식 요건을 갖추어 혼인을 다시 맺어야 유효하다.
N | 구 분 | 교회법 규정 |
1 | 교회법적 혼인예식 요건(c.1108) | ① 합법적 주례자, ② 2명의 증인, ③ 교회혼인예식서에 따라 혼인 |
2 | 혼인형식결여(carentia formae) | 교회법적 요건을 갖춘 교회예식 없이 사회예식으로만 혼인합의을 했거나 혼인신고만 한 경우 |
3 | 혼인형식결함(defectus formae) | 교회예식으로 혼인하였으나 교회법적 혼인형식 요건 중 하나만이라도 빠진 경우 |
박해시대에 국법상 혼인법이 제대로 정비되지도 않았고 교회혼인법에 관한 교우들의 이해나 준수가 오늘날처럼 정밀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최사관 예로니모가 교우들로부터 두 번째 혼인이 “교회법에 어긋난다.”라는 말을 들은 까닭은 위의 ①혼인무효장애, ②혼인합의 무자격 및 무효, ③혼인형식결여 또는 혼인형식결함 중에 저촉된 것이 있었다는 것이다. 최사관 예로니모이 2남 1녀를 낳은 두 번째 사실혼에는 여자에게 전 배우자의 생존과 같은 혼인무효장 같은 유책사유가 있었거나 여자가 교회 혼인예식을 거부했거나 여자가 혼인 전에 공개적으로 배교하고 회두를 거부하였기 때문에 교우 공동체로부터 지탄을 받았을 수 있다.
[2] 『병인치명사적』, 9권, 20면; 『좌포도청등록』, 1868년 7월 5일, 1869년 11월 17일. 예로니모는 포도청의 문초에서 베르뇌 주교에게 세례와 견진 성사를 받았다고 진술하였다(『좌포도청등록』, 1868년 2월 11일).
[3] 『우포도청등록』, 1868년 3월 30일, 4월 29일.
[4] 『병인치명사적』, 9권, 20면; 『좌포도청등록』, 1868년 2월 11일. 앞의 기록에는 예로니모가 포도청에서 교수형을 당한 것으로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