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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소와 똑같았던 10월26일 아침 출근길
그날 아침, 출근길에 나선 朴興柱(박흥주) 대령은 여느날과 마찬가지로 대문까지 마중나온 아내에게 다녀오겠다는 말을 남기고 집을 나섰다. 그 전날 밤 늦게 귀가한 朴대령은 초등학교 5학년인 큰딸 혜영이가 10월27일부터 반에서 사명대사 연극연습을 하게 되었다며 선조임금役(역)을 맡았으니 왕관을 만들어달라고 졸라대는 통에 너무 늦은 시간이어서 선뜻 대답을 하지 못했다.
은종이, 마분지와 풀로 얼기설기 만들다 만 왕관을 갖다 놓고 칭얼대는 딸의 부탁에 확답을 하지 않고 있다가 혜영이가 잠이 들고 난 후 마음을 바꾸어 왕관을 만들기 시작했다. 밤 늦게까지 잠을 자지 않고 왕관을 만드느라 朴대령은 늦게 잠자리에 들었다. 아침에 눈을 뜬 큰딸은 머리맡에 놓여 있는 근사한 종이 왕관을 보고, 반아이들에게 자랑할 생각으로 뛸 듯이 기뻐했다. 朴대령의 출근 모습은 평소와 다른 점이라곤 아무것도 없었다.
이상은 故(고) 朴興柱 대령의 부인 金妙春(김묘춘·58) 씨와의 인터뷰, 큰 딸 惠英(혜영·32)씨의 기록을 토대로 朴興柱 대령의 그날 아침 출근 모습을 필자가 再(재)구성해본 것이다. 10·26 朴正熙(박정희) 대통령 시해사건의 주요 인물의 한 사람이 된 朴대령이 사건이 일어나기 전에 「10·26」을 미리 알고 있었다는 징후는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金載圭 중앙정보부장은 민주화를 위해 「유신의 심장」을 쏠 계획을 미리 짜놓고 있었다고 주장하지만 적어도 그의 비서실장 朴興柱 대령에게는 朴대통령 시해 사건은 우발적인 것이었음이 분명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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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물굽이를 돌려놓을 엄청난 사건에 가담할 것을 미리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면 가족들에게 무엇인가 한 마디쯤은 시사할 법하지 않은가. 5·16 쿠데타를 일으킨 朴正熙 대통령도 거사 전에 가족들에게 훗날을 다짐하는 말을 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상식적으로 볼 때 그 편이 자연스럽다. 더구나 몸이 약한 아내와 두 딸, 그리고 결혼 10년 만에 얻은 아들을 몹시도 사랑한 남편이요, 아버지가 아니었던가.
서울 성동구 행당동 언덕배기를 힘차게 걸어 차를 세워둔 곳으로 내려가는 남편의 모습이 시야에서 사라지자 金妙春씨는 하루 내내 형광등을 켜두어야 하는 방으로 들어가 자리에 누웠다. 2층집의 1층이지만 지하로 푹 꺼진 셋집은 방이 두 개 있었는데, 朴대령 부부가 어둡고 큰 방(가족들은 이 방을 늘 껌껌했기 때문에 「한 밤」이라고 불렀다고 한다)에서 거처했고, 초등학교 5학년 혜영이, 3학년 혜은이는 작은 방을 사용했다.
그 무렵 金씨는 늘 몸이 좋지 않았다. 서른 일곱에 늦은 출산을 한 때문인지 누워 있을 때가 많았다. 그날은 몸살 감기 기운까지 있어서 金씨는 종일 누워 있었다. 올해 쉰여덟이 된 金씨는 남편의 운명을 가름한 21년 전 10월26일을 어젯일처럼 증언한다.
『그날 오전 남편한테서 한 차례 전화가 왔었어요.「애들 별일 없나?」 하루 한 번씩 꼭 하는 안부전화였어요』
『애들 잘 돌봐. 일이 있어서 간다』
그리고는 그날 밤이 되자 귀가 시간이 일정치 않은 남편을 기다리다가 金씨는 잠이 들었는데 비몽사몽간에 밖에서 남편의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다급히 『혜영 엄마, 혜영 엄마』 하고 부르는 소리에 잠을 깼다. 金씨는 방문을 열고 나가 계단을 걸어 마당으로 올라갔다. 대문을 열었다. 남편은 안으로 들어오려 하지 않고 그냥 선 채로 말했다.
『별 일 없나?』
『네』
『당신 몸은 어때?』
『 좀 아파요』
『애들 잘 돌봐. 일이 있어서 간다』
朴대령의 말투는 평소와 똑 같았다. 그 말만 하고는 몸을 돌리더니 유난히 급한 발걸음으로 언덕길을 걸어 내려갔다. 습관처럼 남편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金씨는, 남편의 양복 상의 뒤로 와이셔츠 자락이 빠져나와 있는 것을 보았다. 깔끔한 양반이 웬 일일까, 뭔가 급한 일이 있는 모양이구나, 하는 생각을 하며 방으로 들어왔다. 그것이 金씨가 집에서 마지막으로 본 남편의 모습이었다. 朴대령의 진술 기록에 의하면 朴대령이 집에 들른 시간은 10월 27일 새벽 4시 30분께다.
나중에 수사과정에서 밝혀진 일이지만 朴興柱 대령이 집을 찾아온 것은 궁정동에서 金載圭가 朴대통령을 시해한 후 황망 중에 金載圭 부장, 鄭昇和(정승화) 총장과 함께 국방부로 갔다가 무장해제를 당하고 난 뒤 사태가 어떻게 진전될지 아직 갈피를 잡지 못한 상황에서 한남동 주택가 골목에 한 시간 반 정도 머물며 마음을 진정시키고 있다가 불현듯 어쩌면 마지막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운전기사에게 집으로 가자고 한 것으로 되어 있다.
朴興柱 대령은 그러나 그 돌연한 귀가에서 아내에게 매일 하는 짤막한 안부만을 물었을 뿐 아무런 내색을 하지 않았다. 원래 집에 와서 바깥 일을 잘 이야기하지 않는 사람이긴 했지만 그렇게 엄청난 사건에 휘말린 중에도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나중에 똑같이 사형선고를 받게 된 朴善浩(박선호) 과장이 그날 집으로 가서 온가족을 모두 모아놓고 사람을 죽였음을 고백하고, 자결하겠다고 결의를 밝힌 것과는 대조적이다.
뜬금없이 남편이 다녀간 후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金씨는 채 한 시간이 못되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대문을 꽝꽝 시끄럽게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대문을 여니까 너댓 명 정도 되는 건장한 남자들이 서 있었다. 남자들은 주변을 이리저리 살피면서 물었다.
『여기가 朴興柱 대령님 댁입니까?』
그렇다고 했더니, 사모님 되시느냐고 다시 물었다.
『어휴, 집을 찾느라 고생을 했습니다』
朴대령 집을 찾으러 온 그 사람들은 행당동 산비탈을 한참이나 헤매다 끝내 못찾고는 동장의 도움으로 가까스로 집을 찾았다고 했다. 그러면서 中情(중정)부장 수행비서실장이 이런 집에서 살다니 놀랍다는 말들을 했다.
『朴대령님께 무슨 사고가 났나요?』
『모릅니다』
『말씀해 주세요. 제가 몸이 아픈데 너무 걱정이 됩니다. 혹시 차사고가 났습니까?』
그러나 그들은 걱정하지 말라고만 할 뿐 자세한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사모님, 라디오 있습니까?』
수사기관에 불려가 조사받다가 실신
한 남자가 물었다. 라디오는 없지만 朴대령이 월남에서 사온 낡은 전축에 라디오가 부착되어 있었다. 그들 중 두 사람이 신발을 벗고 방 안으로 들어가서 라디오를 켰다. 그때 金씨는 너무 당황한 데다 걱정이 되어 라디오에서 무슨 말이 나오는지 귀기울여 듣지 못했다. 계속 무전기로 연락을 주고받던 그들은 무슨 지시를 받았는지 어느 순간부터 태도가 거칠어지기 시작했다.
「사모님」이라는 호칭이 「아주머니」로 바뀌었고, 온 집안 이곳저곳을 뒤지기 시작했다. 장롱 서랍이며, 책상 할 것 없이 두 방을 마구 뒤졌다. 그들은 서랍을 빼어 바닥에 통째로 쏟아부으며 남편의 소지품이며, 책이며, 메모지들을 챙겼다. 그들이 朴대령의 사진을 달라고 해서 金씨는 육사 졸업사진을 찾아주었다. 소란하고 무거운 분위기 때문인지 깨어난 두 딸은 훌쩍거리고 있었다. 이제 生後(생후) 5개월된 어린 아들도 깨어나 칭얼댔다. 그때 방 안에는 부인 金씨가 전날 저녁 몸살 때문에 밥을 하지 못해서 밥 대신 끓여먹은 라면 그릇들이 그대로 상에 놓여 있었다.
두 칸 방을 마구 뒤진 그들은 이불을 지근지근 밟으면서 온갖 물건들을 뒤집어 놓아 방을 아수라장으로 만들어놓았다. 金씨는 영문도 모른 채 가택수색을 당하자 공포감을 느꼈다. 그 사람들에게 『지금 朴대령이 어디 계시냐?』고 거듭 물었으나 그들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얼마나 지났을까. 망연자실해서 어찌할 바를 모르고 넋이 빠져 있는데 전화벨이 울렸다. 두 딸의 학교에서 걸려온 전화였다. 날이 이미 훤하게 밝아 있었다. 아이들이 학교 갈 시간이 벌써 지나 있었다. 한번도 학교에 빠진 적이 없는 아이들이 등교 시간이 되어도 오지 않자 학교 선생님이 전화를 걸어온 것이다. 아직도 울고 있는 딸들을 달래서 부랴부랴 가방을 챙겨 학교로 보냈다. 두 딸이 집을 나서는 것을 마루턱에 앉아서 멍하니 바라보았다. 金씨가 朴대령이 朴대통령 시해사건에 연루된 사실을 안 것은 기억이 정확하지는 않지만 남편이 걱정스러워 켜둔 라디오 뉴스를 통해서였다.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충격 속에서 며칠이 흘러갔다. 金씨는 불안하고 마음이 혼란스러워 간단한 짐을 꾸려 가까이 살고 있는 여동생 집으로 아이들과 함께 거처를 옮겼다.
여동생네 집으로 옮겨 가 살던 때 金씨는 수사기관에 불려 간 적이 있었다. 두 남자가 찾아와서 조사할 것이 있으니 함께 가자고 했다. 아이가 너무 어려서 떼어놓을 수 없으니 여기서 조사하면 안되겠느냐고 아무리 사정해도 막무가내였다. 아이를 내려놓고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차를 타고 끌려간 곳은 어느 건물의 시멘트방이었다. 의자가 놓여 있고, 바닥에 타일이 붙어 있는 부분도 있었다. 종이를 내주면서 출신지부터 상세히 쓰라고 했다. 金씨는 겁부터 먹어 벌벌 떨며 조금 쓰다가 그 자리에서 기절하고 말았다. 눈을 떠보니 여동생네 집 방 안에 속내의만 입고 누워 있었다. 속내의는 가위로 마구 잘려져 있었다. 金씨가 정신을 잃고 혼절하자 정신차리게 하려고 하는 과정에서 그렇게 된 것 같았다. 그 일이 있은 후로는 더이상 수사기관에 불려가지 않았다.
『나는 軍人이오, 전장에 나가 죽었다고 생각하고…』
1979년 12월4일부터 육군 계엄보통군법회의 대법정에서 朴興柱 대령을 포함한 10·26에 관련된 7명의 재판이 시작되었다. 재판부는 「국민은 하루 속히 안정과 질서 속에 경제사회의 발전이 지속되기를 원한다」는 이유로 신속한 재판진행을 주장했고, 변호인단은 「새 대통령도 선출되었고, 긴급조치도 해제되어 사회가 안정되었는데 무엇이 급하단 말이냐」며 「재판 절차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朴興柱 대령의 변호를 맡았던 太倫基(태윤기) 변호사는 「비상계엄하에서 군인, 군속 등은 1심에서 형이 확정된다는 군법회의법이 헌법에 위배된다」는 주장을 펴면서 그 이유로 「헌법에서는 單審(단심)할 수 있다는 예외규정을 두었을 뿐인데, 군법에서 이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위헌」이라고 항변했다. 朴대령이 가는 길은 이미 각본이 정해져 있었다.
12월18일 朴興柱 대령에게 사형이 구형되었다. 이틀 뒤인 12월 20일에는 선고가 있었다. 재판은 속전속결로 진행되었다. 너무나 큰 충격으로 朴대령의 아내는 물론 어린 아들과 작은 딸까지 모두 몸이 아파서 아이들 이모의 보살핌을 받고 있었다. 그때 큰딸 혜영이는 아무도 없는 방으로 가 이모네 라디오를 켜놓고 혼자서 뉴스를 들었다.
『朴興柱 피고에게는 구형대로 사형이 선고되었습니다』
어린 딸은 방바닥에 엎드린 채 혼자 숨을 죽이고 울었다.
재판 중일 때는 남편의 뒷모습만 먼 발치에서 바라볼 뿐 눈빛조차 마주치지 못했던 金씨가 朴대령을 다시 만나게 된 것은 남한산성 부근에 있는 軍교도소로 면회를 가서였다. 버스를 몇번이나 갈아타고 시어머니를 비롯한 친척들과 함께 갔다. 첫 면회에서 金씨는 목이 메어 철창에 얼굴을 대고 『혜영 아버지』하고 부르고는 말을 잇지 못했다.
수척한 모습의 朴대령은 『혜영 엄마, 나는 군인이오. 전장에 나가 죽었다고 생각하고 너무 슬퍼하지 마시오. 현장에서 희생된 사람들도 있지 않소』 하며 끝까지 의연한 태도를 잃지 않았다.
두 번째 면회 때는 어린 두 딸을 데리고 갔다. 딸들은 아빠를 기쁘게 하겠다며 학교에서 받은 성적표와 상장, 메달 등을 챙겨가지고 가서 면회실 책상 위에 그것들을 늘어 놓았다. 한쪽 귀가 잘 들리지 않는 듯한 朴대령은 부인이 보온병에 담아간 인삼차도 거의 들지 않고, 말도 별로 없었다. 아버지의 품에 안긴 혜영이가 어찌나 엉엉 울어대었는지 朴대령의 쑥색 상의 가슴부분이 딸의 눈물로 짙푸른 색으로 변해버렸다.
朴대령은 열한 살 된 큰딸이 미리 써가지고 간 편지를 꺼내주자 눈으로 읽었다.
「아빠가 많이 보고 싶어요. 학교에서도 기죽지 않고 열심히 공부하고 있어요. 아빠는 집걱정은 마시고 건강에 신경쓰세요. 남동생이 얼마나 귀여운지 몰라요. 공부하는데 와서 손도 깨물고 양말도 벗기고 재롱을 떨어요. 아빠가 불쌍한 생각이 들어요. 아빠는 모든 걱정 마시고 건강에만 신경 쓰세요」
세 번째 면회를 갈 때 金妙春씨는 왠지 5개월된 어린 아들을 데리고 가고 싶었다. 朴대령은 두 딸을 얻은 후 아내에게 건강이 좋아지면 아들을 낳았으면 좋겠다는 말을 하곤 했다. 왜 그렇게 아들을 원하느냐고 아내가 물었을 때 朴대령은 싱긋 웃으며 『딸은 목마를 태울 수가 없지만 아들은 목마 태우기 좋잖소』라고 했다. 남의 집에 가도 남자 아이들을 무릎에 앉히며 귀여워 했었다. 아들을 낳았을 때는 좋아서 직접 시장에 가서 미역을 사올 정도였다.
그날 金씨는 날씨가 매섭게 차가웠으나 젖먹이 아들을 들쳐업고, 私食(사식)을 준비해 면회길에 나섰다. 남편의 두 손을 부여잡고 金씨는 오열을 떠뜨렸다. 우는 아내를 달래며 朴대령은 감옥에서 틈틈이 읽던 성경책을 펴서 아내에게 몇 귀절을 읽어보라고 권했다. 그리고는 젖먹이 아들을 들어올려 목마를 태우고 면회실 안에서 이리저리 몇 걸음을 옮겼다. 朴대령의 아들에 대한 소원이 이루어진 순간이었다.
손에 꼭 쥐어준 유서:「세상에 어떤 말이 있어 당신에게 위로가 되겠소」
면회 시간이 끝나갈 때 朴대령은 아들을 아내에게 업혀주는 척하면서 刑吏(형리) 몰래 아내의 두 손바닥에 무엇인가를 쥐어주었다. 金씨는 도시락 빈 통에 남편이 준 종이 쪽지를 얼른 집어넣고 덮었다. 아내와 딸들에게 보낸 편지였다. 딸들에게 보낸 편지는 빼곡히 쓴 내용을 제대로 알아볼 수 있었으나, 아내에게 보낸 편지는 도시락 통에 남긴 김치국물에 홍건히 젖어 알아보지 못하게 된 대목이 많았다. 이 두 편지는 결국 아내와 딸들에게 보내는 朴대령의 유서가 되고 말았다.
朴대령이 아내에게 쓴 편지의 한 대목을 읽어본다.
<혜영 엄마,
세상에 어떤 말이 있어 당신에게 위로가 되겠소. 오직 당신이 이 슬픔을 굳세게 이기고 사랑하는 우리 아이들을 위해 의연하게 참아주기를 바랄 뿐이오. 부모가 되기는 쉬워도 부모 구실을 하기는 참으로 힘드는 일인가 보구려. 내 구실을 제대로 못하게 되다니…. 그러나 현모에 의해 훌륭한 인재가 양성되었음을 생각할 때 당신에게 무거운 짐을 모두 맡기게 되면서도 한편 애들은 다행이라 생각되는 바이오.
애들에게 이 아빠가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으며 그때 조건도 그러했다는 점을 잘 이해시켜 열등감에 빠지지 않도록 긍지를 불어넣어 주시오. 남아서 앞으로 살아갈 식구들을 위해 할 말 다 못하고 말았지만 세상이 알 것은 다 알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사회가 죽지 않았다면 우리 가정을 그대로 놔두지는 않을 것이오. 정신적으로나 경제적으로 도와줄 것이라고 생각하오. 설사 그렇지 않다고 해도 의연하게 떳떳이 살아가면 되지 않겠소…>
다음은 두 딸에게 쓴 편지의 한 대목.
<혜영아,혜은아,
끝으로 중요한 말을 한 마디만 더 하겠다. 선택을 잘하라. 우리가 살아가는 데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선택을 어떻게 하느냐는 것이 아니겠는가! 자기 판단에 의해 선택하면 그에 대한 책임은 선택한 사람이 어쩔 수 없이 지게 되어 있다. 후회하지 않는 계획성 있고, 합리적인 판단하에 착실하고 슬기로운 선택을 해야 한다…>
두 딸에게 주는 편지는 미농지에 깨알같이 작은 글씨로 빽빽이 쓰여 있었다. 「딸들에게 하는 앞날에 대한 당부」가 朴대령 자신의 입장에 대한 변호처럼 읽혀진다. 어쩔 수 없는 선택에 의해 죽음을 맞이하는 자신의 운명을 변호하는 대목 같은 글도 보인다. 「10·26」에 朴대령이 참여한 것은 金載圭와의 상하관계, 인간적인 관계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끌려들어간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으나 이 편지를 보면 자신의 全존재를 걸고 「선택」한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이 편지를 단서로 판단하면 朴대령의 10·26 참여가 그날 「우발적으로」 일어난 순간의 선택일지언정 분명히 책임을 지고 한 선택이었다고 할 수 있을 듯하다. 朴대령은 이 편지에서 아버지가 딸들에게 주는 당부로, 「책은 女流(여류)중에서 훌륭하게 되신 분의 것을 사달라고 해서 보도록 해라, 이번 여름에는 수영에 더 열심히 해보도록 해라, 엄마 위로해드리고 ○○이를 사랑해라」는 등을 말하면서 「아빠는 아빠의 길이 있고, 너희들은 너희들의 길이 있는 것이니 너무 염려를 말아라」고 두 딸을 위로하고 있다.
아내 金씨는 이 세 번째 면회가 마지막이 되리라고는 짐작조차 하지 못했다.
주위에서 남편을 다른 곳으로 옮길지도 모른다는 등 여러 가지 불안스러운 소문을 전해왔다. 金씨는 서둘러 다시 면회를 갔으나 교도소측에서 면회를 시켜주지 않았다. 金씨는 면회를 시켜달라고 막무가내로 울부짖었다. 완강하게 가로막는 감옥 사람들에게 항의하다가 그 자리에서 기절을 하기도 했다. 그 이후로 다시 면회를 갔으나 교도소에서는 역시 면회를 시켜주지 않았다. 金씨는 세 번째 면회가 남편을 만나는 마지막 만남이 되고 말 것이었다면 꼭 해줄 말이 있었다고 기자에게 말한다.
「당신을 이 세상에서 가장 존경한다」고, 「당신은 그때 그렇게밖에 할 수 없었다」고. 그리고 마지막으로 두 팔로 힘껏 안아주었을 것이라고 한다. 설마 세번 면회하고 끝나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며 金씨는 지금도 남편에게 그 말 한 마디 못해준 것이 恨(한)이 되어 있다며 눈물을 훔친다.
『金載圭 비난 성명 내면 朴대령 살려주겠다』
朴興柱 대령에게 사형이 선고된 후에도 金妙春씨는 朴興柱 대령이 죽게 된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 없었다. 국가를 위해서 깨끗하고 올바르게 살아온 철두철미한 군인이 상관의 명령에 복종하는 것은 어길 수 없는 복무지침이 아니었던가. 金씨는 또 한편으로는 그때 朴대령이 金載圭의 명령으로 총을 쏘긴 했지만 직접 청와대 경호원들을 향해서 쏘지는 않은 것으로 믿고 있었다. 천장과 벽을 향해서 쏜 것으로 알고 있었다. 10·26재판 과정에서 누가 어느 쪽에서 쏜 총알이 누구를 겨냥한 것이었는지 모두 밝혀졌지만 朴대령이 쏜 총알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이 없는 것이 그 증거라고 金씨는 생각했다.
여기에 기대를 걸고 金씨가 朴대령의 목숨을 살릴 길을 찾고 있는 중에 수많은 사람들이 찾아왔다. 민주화운동 단체에서 찾아와 위로를 하기도 하고 격려를 해주기도 했다. 그러나 金씨에게는 그런 말들이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오직 朴대령의 생명을 살리는 데만 관심이 있었다. 이때 누가 金壽煥(김수환) 추기경을 만나보라고 권유했다. 가톨릭 신자는 아니었지만 金씨는 金壽煥 추기경을 뵈러 갔다. 다행히 金壽煥 추기경은 朴대령의 아내임을 알고는 면회를 받아주었다. 金추기경은 金씨가 울면서 하는 말들을 아무 말없이 다 듣고 나서는 딱 한 마디를 했다.
『朴대령을 편하게 해 드리십시오』
그리고는 말없이 허리 뒤로 깍지를 끼고는 창 밖만 내다보았다. 말없이 창 밖을 내다보는 金壽煥 추기경의 모습을 보고 金씨는 더 이상 말을 할 수가 없었다. 金씨는 면담 이후 실낱같은 희망이 사라지는 듯한 큰 충격을 받았다. 그때야 비로소 金씨는 남편 朴대령을 살릴 길이 없구나, 하는 절망감을 느꼈다고 한다.
그 무렵 사회공기는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사회 일각에서 金載圭를 민주화의 영웅으로 평가하는 말들이 터져나오기 시작했다. 이 무렵 당국에서 보낸 것으로 생각되는 사복차림을 한 남자들이 두세 차례 찾아와서 金載圭 부장에 대해서 이렇게 저렇게 말하면 남편이 살 수 있다면서 金載圭에 대한 비난성명을 요청하기도 했다. 그때마다 金妙春씨는 『난 그럴 수 없다. 남편의 상사인 金부장님을 내가 직접 만나보지도 않고 어찌 당신이 시키는 대로 말할 수 있겠느냐』며 거절했다.
朴대령의 친지들은 아직 주범 金載圭의 재판이 끝나지도 않았는데 서둘러 朴대령을 사형집행한 것은 여론조성을 통해 金載圭를 민주화 운동의 영웅으로 만들려는 일부의 움직임을 사전에 봉쇄하려는 신 군부의 강한 의지 표현이었던 것으로 짐작하고 있다.
淸貧한 장교
朴興柱 대령과 金載圭 부장의 운명적인 만남은 포병소위로 임관한 朴소위가 군번에 따라 6사단으로 배치되면서 시작되었다. 그때 6사단 사단장은 金載圭였다. 朴소위의 브리핑하는 모습을 눈여겨 본 金載圭는 朴소위를 전속부관으로 발탁했다. 그 이후 朴興柱는 「金載圭 사람」으로 통할 정도로 金載圭의 총애를 받게 된다. 金載圭가 중앙정보부장으로 나간 뒤 대령 진급 예정자인 朴興柱를 중앙정보부장 비서실장으로 발탁한다. 비서실장으로 있던 1978년 12월 朴興柱는 대령으로 진급했다. 朴대령은 연대장으로 나가고 싶다는 뜻을 여러 차례 비추었지만 金載圭는 「몇달만 참으라」고 만류했다. 그 몇달이 결국 10·26까지 이어지고 만 것이다.
대위 계급장을 단 朴興柱는 신혼 시절 아내와 함께 金載圭 부장 집에 인사를 간 적이 있다. 朴대위가 새댁인 아내를 인사시키기 위한 방문이었다. 金載圭와 朴興柱의 사이를 짐작해볼 수 있는 대목이다. 金씨의 기억에 남아 있는 金부장 집은 가구도 소박하고 모든 것이 검소하게 보였다. 호화롭게 살 거라고 지레 짐작하고 있었는데 뜻밖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金부장 부인에게서는 「곱고 조용한 분」이라는 인상을 받았다.
朴대령은 늦게 얻은 아들을 매우 귀여워해서 어쩌다 쉬는 날이면 햇빛이 잘 들지 않는 지하방에서 아이를 안고 마당으로 나가 돌도 안된 아이에게 햇빛을 쬐어주곤 했다. 朴대령은 가난을 전혀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金妙春씨의 기억에 의하면 너무나 당당했다고 한다. 어느날 큰딸 혜영이가 아빠에게 학교 친구들이 플루트를 배운다며 플루트를 사달라고 조르자 朴대령은 딸을 앉혀놓고 말했다. 다음은 큰딸 혜영씨의 기억.
『혜영아, 너 비단장수 왕서방이 뭔지 아니?』
『비단장수가 비단장수지, 뭐』
『비단장수는 비단 팔아서 돈이 많겠지?』
『장사하면 당연히 돈이 많겠죠,뭐』
『아빠는 비단장수가 아닌 군인이야. 군인이 뭐하는 사람이지?』
『나라 지키는 사람이오』
『그렇지. 그럼 군인은 돈이 많은 사람일까?』
『아니오』
朴대령은 딸에게 이렇게 말했다.
『네가 플루트를 꼭 사달라고 조르면 아빠가 군인을 그만두고 비단장수를 해서 돈을 벌어 사줄 수 있어. 그렇게 해줄까?』하고 말했다. 딸은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며 『플루트는 없어도 좋아요. 아빠 그냥 군인 하세요』 했다고 한다.
朴대령은 두 딸에게 별로 선물을 사주지는 못했지만 지극히 사랑했다. 『아빠는 우리 혜영이가 대처 여사 같은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라고 말했다. 『아빠, 나는 그 사람처럼 되는 건 싫어요. 나는 정치인은 싫어요』 하고 말했다. 그럴 때면 朴대령은 『정치가가 되라는 것이 아니라 여성이라도 그렇게 자신의 일을 갖고 성실하고 훌륭하게 살 수 있고, 가난하다는 것이 훌륭한 삶을 사는 데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말이다』 하고 말하곤 했다. 영국 수상 대처 여사는 철물점 주인의 딸로 어린 시절을 가난하게 살았다고 말하곤 했다.
朴興柱 대령은 軍에서 신망을 받는 장교였다. 육사 18기 가운데 가장 前途(전도)유망한 장교로 꼽힐 정도로 승진시엔 맨 먼저 계급이 올라가곤 했다. 1962년 소위로 임관하여 포병장교로 군인의 길을 걷게 된다. 1967년 대위, 1970년 소령, 1974년 중령, 1978년 대령. 朴대령은 1년 넘게 월남전에 참전하였고, 그후 전후방에서 두루 근무를 하며 대통령 표창, 사령관 표창 등을 받으며 동기생들 가운데서 선두走者로 나갔다. 12사단 포병대대장을 마치고 육군본부에 근무하던 중 앞서 말한 대로 1978년 중앙정보부장 비서실장으로 임명되었다. 朴대령은 육사 18기 중에서 「특진그룹」으로 통했다. 승진 때마다 가장 먼저 진급하는 너댓 명 중의 한 사람이었다. 육사 18기 졸업 앨범에 기록된 한 同期(동기)생도의 朴대령에 대한 평은 이랬다.
「균형잡힌 체격, 표준형 키, 언행은 항시 명랑하고 젠틀하다. 평소에 독서를 무척 즐겼으며 누구보다 많은 책을 읽는 多讀(다독)주의자다. 봄, 가을 산뜻한 휴일날에는 정구를 즐기는 정구 애호가이기도 하다. 在校(재교)기간 중 그가 그렇게 대범하고, 누구에게나 호감을 주었음은 천래의 품성이 온유한 탓도 있겠지만 독서와 사색을 통해 자기완성을 위해 꾸준히 노력한 결과가 아닌가 한다. 미소짓는 듯한 그의 표정에서 무엇인가 불굴의 의지와 응시하는 듯한 예지를 엿볼 수 있음이 그를 대할 때 느끼는 첫 인상이다」
朴대령과 서울고 동창이며, 육사 동기이기도 한 李學鍾(이학종·62) 예비역 대령은 졸업앨범에 나와 있는 평 그대로 朴대령은 온화하고 조용한 성품이었다고 말한다.
朴대령은 관사로 사병들을 데리고 와서 겸상으로 식사를 하며 『많이 먹으라』고 어깨를 두드려주던 자상한 상관이었다. 병사들이 낡은 포를 열심히 닦고 있는 모습을 볼 때마다 『우리나라도 어서 빨리 부강한 나라가 되어 녹슬지 않은 새 포를 부대에 배치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혼잣말을 하곤 했다는 것이다.
朴대령은 金載圭의 그림자나 다름없었다. 朴대령은 金載圭의 돈독한 신임을 얻고 있었다. 막강하다면 막강한 자리였다. 그러나 朴대령은 늘 군대로 돌아가 지휘봉을 잡는 것을 바랐다.
1979년 5월 아들을 낳고 나서였다. 朴대령은 아내 金씨에게 『군인은 軍으로 돌아가서 지휘봉을 흔들면서 지휘를 하고 정치는 정치가가 해야 해. 나도 이제 연대장으로 나가야겠어』 하고 말한 적이 있었다. 金씨는 그 말을 듣고 『여보, 그렇지만 전방에 가면 호롱불 켜고, 장작 때고 살아야 하잖아요. 귀한 아들을 얻었는데 산골에 가면 아이 목욕도 못 시키고 어떻게 해요?』하며 아들이 조금 큰 다음에 나가면 어떻겠느냐고 하자, 朴대령은 『나는 007가방을 들고 다니는 것이 정말 싫어. 야전에 나가 지휘를 하고 싶어』 라고 답했다고 한다.
그날 南山으로 갔다면
부마사태가 일어났을 때의 일이다. 朴대령과 함게 TV를 보던 金씨는, 『중앙정보부에서 저런 일도 수습하지 못하나요?』하고 물었다.
『 그렇게 많은 희생을 시킬 수는 없어』
『무슨 희생요?』
金씨의 거듭되는 질문에 朴대령은 『사람들을 희생시킬 수는 없어』라는 말을 반복했다.
사람들은 10·26 때 金載圭가 궁정동에서 朴正熙 대통령을 시해하고 나서 鄭昇和 총장, 朴興柱 대령과 함께 차를 타고 3·1고가도로를 지날 때 어쩌면 金載圭쪽에 기회가 있을 수도 있었으나 그 기회를 지나쳤다고 말하기도 한다. 그때 金載圭가 남산의 정보부와 한남동의 국방부로 가는 갈림길에서 정보부로 갔던들 사태는 달리 전개되었을지도 모른다는 것. 재판기록에 따르면 鄭昇和 총장이 국방부로 가자고 하자 金載圭가 朴대령에게 물었다.
『朴대령, 어디로 갈까?』
朴대령은 주저없이 말한다. 『국방부로 갑시다』라고. 朴대령에게 있어서 국방부는 혼란한 사태에서 국가를 흔들림 없이 지키는 보루였던 것이다. 만일 그때 朴대령이 남산의 정보부로 가자고 했으면 어떻게 되었을까.
다시 朴대령 집 이야기. 보안사 요원들이 수색하려고 들이닥쳤을 때 朴대령 집을 쉽게 찾지 못했던 것은 집이 너무나 허술했기 때문이었다. 설마 육군 대령이 이런 허름한 집에서 살 것이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던 것이다. 당시 朴대령의 집은 무학여고 뒤편 행당동 달동네 산꼭대기에 있었다. 이층집이라고는 하나 이층은 다른 사람이 세들어 살고 있었고, 朴대령은 땅이 푹 꺼진, 그래서 지하나 다름없는 11평짜리 두칸 방에 세들어 살고 있었으니 비상연락망의 주소가 아무리 정확하다 해도 찾기가 힘들었을 것이다.
큰 딸 혜영씨의 기억에 따르면 집은 대령이 산다고는 도무지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허름했던 것 같다. 재래식 부엌, 이층과 함께 쓰는 수세식 화장실, 금간 시멘트로 대충 바른 약간 비뚤어진 작은 마당이 있었다. 큰 방은 하루종일 햇볕이 들지 않는 「한밤」이었고, 작은 방은 잠깐 짧은 햇볕이 들어왔다가 사라지는 방이었는데, 두 딸에게는 작은 방을 주었다. 큰방에는 낡은 전축과 아귀가 잘 맞지 않는 문을 한 자개 장식장이 있었다.
쥐덫
이 방에서 가장 값이 나가는 것은 朴대령의 초고속 진급연도를 새겨놓은 장식물(패)과 트로피들이었다. 작은 방에는 이불을 잔뜩 올려 놓은 키 낮은 옷장과 동화책이 꽂힌 조그만 책장, 책상 대용의 빨간색 앉은뱅이 나무밥상이 전부였다. 아이들의 놀이터는 마당이었다. 한켠에 장독대가 있는 마당은 金씨가 기르는 팬지꽃 화분들, 빨래할 때 쓰는 자주색 고무다라이, 세면대로 만들어 놓은 시멘트 바닥 위에 비눗갑, 식구들의 칫솔, 치약 그리고 朴대령이 쓰는 도루코 면도기가 있었다.
수채구멍 옆에는 밤마다 찍찍거리며 朴대령 일가를 괴롭히는 쥐를 잡으려고 사다놓은 쥐덫이 있었다. 그 마당이 朴대령 가족들의 거실이나 다름없었다. 전화기는 두 대가 있었다. 하나는 검은색 전화기였고, 다른 하나는 회색전화기였는데, 회색 전화기는 朴대령이 받기만 하는 전용 전화었다.
역시 큰 딸의 기억. 朴대령은 두 딸을 늘 「큰 달 작은 달」이라고 불렀다. 두 딸이 자라나서 훌륭한 사람이 되라고 그렇게 불렀다. 아내 金씨가 아침상을 차리기 위해 푹 꺼진 부엌에 내려가서 준비하는 동안 朴대령은 두 「달」을 업어주기도 하고 어깨동무를 하며 함께 놀아주었다. 金씨가 아침식사를 준비하는 동안 두 딸은 아버지와 전축을 틀어놓고 춤을 추곤 했다. 주로 패티 페이지의 노래를 틀었다.
두 딸은 서로 다투어 아빠의 발 위에 발을 올려놓고 춤을 추었다. 엄마가 안방과 부엌 벽 사이에 난 공책만한 크기의 구멍으로 반찬을 밀어넣어 주면서 상차림을 채근해도 아랑곳않고 「아빠와 춤을」 추느라 아침식사가 늦어지게 마련이었다. 朴대령은 김치국물에 참기름을 한두 방울 떨어뜨려 밥을 말아 먹는 것을 즐겼다.
軍과 가정밖에 몰랐던 사람
朴興柱 대령은 왜 그다지도 가난하게 살았을까. 동기생들은 그 당시 대령 봉급이 얇은 봉투인 것은 사실이었지만 朴대령이 유독 가난하게 살았던 것은 그의 성품과 함께 親家(친가)의 어려운 가정 형편도 한몫 거든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가난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불편해하지 않은 성품 탓이라고밖에 할 수 없을 것 같다.
朴대령이 죽고 나서 金씨가 겪어야 했던 경제적인 어려움과 고통의 세월에 대해 여기에 일일이 쓸 겨를은 없지만, 家長(가장)이 없는 가정을 꾸리려고 金씨는 의류공장에서도 일했고, 우동집, 빵집 등을 다니며 억척스레 아이들을 길렀다. 다행히 아이들은 너무도 착하게 엄마의 뜻을 따라주었고, 두 딸은 고등학교 때부터 장학금을 받을 만큼 공부도 잘했다. 그러나 金씨는 남편을 잃은 충격과 힘든 家長 역할을 하느라 약한 몸이 견디지 못해 3년 전에는 대장암에 걸려 수술을 받았고 지금도 계속 치료를 받고 있다.
金씨가 서울 강남구 압구정동 35평형 아파트로 이사온 이야기는 아무래도 덧붙여야 할 것 같다. 金씨는 朴대령이 매우 사랑한 아들(아버지 얼굴을 사진으로밖에 보지 못한 아들)에게 보다 나은 환경에서 공부를 시키고 싶어 어떻게든 8학군 지역으로 가려고 하던 참에 지금은 이름을 밝힐 수 없는 어느 분의 후원으로 이사를 할 수 있었다.
서울 강남구 압구정동 이사를 놓고 한때 사람들 중에는 「朴대령이 청빈한 줄 알았더니만 숨겨 놓은 돈이 있었나보다」 하며 오해한 사람들도 있었다고 金씨는 씁쓰레 웃는다. 朴대령이 마지막 편지에서 쓴 대로 「우리 사회가 죽지 않았다면 우리 가정을 그대로 놔두지는 않는」 사람들이 있어 지금도 도움을 주고 있다고 金씨는 밝힌다. 그들은 朴대령의 서울고 동창생들로, 그중에서도 黃南奎(황남규·사업)씨는 21년 동안 앞장서서 朴대령의 유가족을 돕고 있다.
『가난이야 견딜 수 있어요. 늘 그렇게 살았으니까요. 朴대령의 복권조치가 있는 날을 남은 희망으로 삼고 살고 있어요』
金妙春씨의 말이다.
─남편을 죽게 한 金載圭 부장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金妙春씨는 질문이 끝나자마자 말했다.
『나도 인간인지라 어느 한 순간 金부장님과의 인연이 없었더라면 내 남편이 죽지 않았을 텐데 하는 생각을 한 적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분을 조금도 원망하지 않습니다 . 정말입니다. 그분이 해야 할 일을 했다고 생각합니다. 만일 10·26이 없었다면 우리나라가 어떻게 됐을까, 생각해볼 때 필요한 일을 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10·26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10·26은 우발적인 사건이었지만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던 사건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랜 세월 곪아 오던 것이 터졌던 것이라고 할까요. 그만큼 급박한 상황이었고, 金부장님도 「이렇게 되어서는 안되겠다」는 생각을 하시지 않았나 싶어요』
『여보, 난 군인이야』
─朴正熙 대통령이 국가발전에 치적이 크다고 평가하는 것에 대해서는 어떻게 보십니까?
『나는 정치는 모릅니다. 물론 나라 발전에 그분의 공이 적지 않았다고 생각은 하지만 10·26이 있게 된 원인도 또한 그분에게 있다고 생각합니다. 나라와 국민을 위한 헌신과 노력은 인정하지만, 국민이 원하지 않았던 유신헌법 제정이나 억울하게 죽은 수많은 사람들에 대해서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金妙春씨는 남편 朴興柱 대령이 밖에서 하는 일을 전혀 알지 못했다. 다만 드물기는 하지만 출근한 남편이 집으로 전화를 걸어 벗어 놓았던 와이셔츠 호주머니에 든 메모를 읽어달라고 하는 적이 있어서 金載圭 부장이 높은 분들을 만나는 자리에 남편이 함께 참석하는 정도만 알고 있었다. 내로라하는 사람들을 만나 식사를 같이 하고 청와대에도 가서 식사를 하고, 남편이 평범한 일을 하지 않는다는 정도는 알고 있었다. 한번은 남편에게 물었다.
『그런 높은 분들을 만나 멋진 곳에서 식사를 하고 행당동 언덕 골목길을 걸어 집으로 올라올 때 기분은 어떠세요?』 『여보, 난 군인이야. 언덕 위에 있는 내 집이 제일 좋아. 사랑하는 아이들과 당신이 있는 우리 집이 최고라고』
朴興柱 대령은 그런 사람이었다. 지하셋방에 살면서도 전혀 불편해하지 않았다. 가난을 오히려 편하게 생각했다는 징후가 여러 곳에서 발견된다. 朴대령이 金載圭 중앙정보부장의 수행비서관으로 있던 그때 형은 사북탄광 경비원으로 있었고, 동생 중 하나는 피복공장의 미싱공으로 일하고 있었다. 朴대령의 한 마디면 형은 하다못해 서울의 빌딩 경비원으로 올 수도 있었을 것이고, 동생은 그보다 여건이 나은 공장으로 보낼 수도 있었을 것이었다. 그러나 朴대령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역사의 재판정에서 복권되길 기다려
1980년 3월6일, 서울 교외의 시흥 야산에서 朴興柱 대령에 대한 총살형이 집행되었다. 朴대령에 대한 단심선고가 있은 지 75일 만의 일이었다. 朴興柱 대령은 사형집행장에서 『마지막으로 남길 말이 없느냐?』는 집행관의 물음에 기도할 시간을 요청했다.
『하나님 아버지. 지금 이 순간 나라와 이 민족을 누구에게도 맡길 수 없습니다. 오직 당신께서 이 나라와 민족을 이끌어주옵소서』
간단히 기도를 마치고 나서 朴대령은 두 눈이 가려지고 두 손이 묶인 채 크게 소리쳐 외쳤다.
『대한민국 만세! 대한민국 만세! 대한민국 육군 만세!』
그리고는 총소리가 하늘을 갈랐다.
형 집행 다음 날 屍身(시신)을 인수해가라는 통보가 왔다. 金씨는 마지막으로 한번 남편의 屍身이라도 안아주고 싶은 마음에서 屍身을 인수하는 자리에 가려고 했으나 이웃들이 약한 몸에 너무 큰 충격을 받으면 안된다며 한사코 만류하는 바람에 朴대령의 아버지와 朴대령의 친구인 黃南奎씨가 갔다. 총살당한 屍身은 참혹했다. 朴대령의 아버지는 아들의 屍身을 보고는 눈물을 흘리지 않으려고 한참 동안 천장만 바라보고 있었다. 屍身은 朴대령의 유언대로 군복을 입혀 안치했다. 경황이 없어서 朴대령의 군복에 대령 계급장을 못 달아 주었는데, 친구 黃씨는 지금까지도 그것이 마음에 걸린다고 했다.
金씨의 남은 소망은 남편 朴興柱 대령이 그의 평생 소원대로 국립묘지에 묻히는 것이다. 그러나 그 길이 쉽게 열릴 것 같지는 않다. 朴대령에 대한 법적인 再평가가 선행되어야 하는데 그러자면 몇 가지 법적인 문제가 해결되어야 한다. 현재 주범 金載圭와 그리고 朴善浩의 경우는 사형 집행 3년 후부터 유가족에게 연금이 지급되고 있는데, 朴대령에겐 연금지급이 안되고 있다.
현역 군인이 금고 이상의 형을 받으면 연금을 지급할 수 없다는 법 조항을 들어 일체 연금 지급이 되지 않고 있는 것. 그러나 이것은 같은 사건에 대한 형평성에서 볼 때도 문제가 있다고 朴대령의 부인과 朴대령의 친지들은 주장한다. 요즘 육사 18기 동기생들이 주축이 되어 朴興柱 대령의 명예회복 차원에서 연금 지급, 국립묘지 移葬(이장) 등을 위한 모임을 갖고 있다. 이의 해결을 위해 헌법소원도 준비중에 있다.
사실 金씨는 3년 전 대장암 수술 후로는 경제적인 활동을 전혀 하지 못하고 있어서 지금 둘째딸에게 얹혀 지내는 형편인데, 대학 1학년밖에 마치지 못하고 군에 입대한 아들이 복학하면 당장 등록금부터 걱정이다. 年金을 받았으면 하고 강렬히 소망하는 현실적인 급박한 이유이다.
金씨는 얼마 전 국방부 장관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돈을 벌려고 군인이 되었던 것이 아니라 이 나라를 지키며 젊음을 불사르며 마지막 순간에 국립묘지에 묻히고 싶다던 한 군인의 짧지만 올바르고 청렴하게 살았던 인생을 돌이켜볼 때 지나간 일을 용서와 화합으로 수용하는 이 시대에 다시 한번 고 朴대령의 생애를 되짚어 주시길 소원합니다. 생활의 고달픔은 시간이 지나면 잊혀질 수도 있겠지만 남편의 그 뜻은 어찌 잊을 수 있겠습니까.
바라옵건대 불행한 역사의 소용돌이에서 희생되어야 했던 남편의 안타까움을 기억해주시어 그렇게 원하고 자랑스러워했던 진정한 군인의 위치로 다시 돌아가 묻힐 수 있도록 길을 열어주시실 간절히 애원합니다…」
그러나 아직 아무런 답변이 없다.
金妙春씨는 말한다.
『남편의 사법적인 평가는 사형으로 종결되었지만, 지금 와서 돌이켜 보면 모든 절차가 新군부의 짜여진 각본에 따라 이루졌다고밖에 생각할 수 없습니다. 앞으로 역사의 재판정에서 再평가가 이루어질 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金씨는 주범이 아직 재판중인데 단지 군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종범을 먼저 처형한 것은 너무나 억울한 일이라고 말한다. 형집행을 늦추고 한번이라도 더 면회를 갈 수도 있었을 텐데 하면서 20년도 더 지난 안타까움을 감추지 않는다.
작가 李炳注(이병주)가 쓴 글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햇빛을 쬐면 역사가 되고, 달빛에 물들면 신화가 된다」
과연 역사는 朴대령을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그들은 지금
큰 딸 혜영이는 결혼한 후 독일로 유학을 가서 박사과정을 밟고 있고, 둘째 딸 혜은이도 결혼했는데 동생이 군대에 간 후 혼자 살게 된 병약한 어머니 金妙春씨가 걱정되어 어머니댁으로 들어와 함께 살고 있다.
다섯 살 때 처음 아버지 묘소에 가서 『아버지 얼굴 보고 싶으니 무덤을 파보라』고 떼를 써서 함께 갔던 사람들을 울게 만들었던 아들은 의젓하게 자라 대학 1학년을 마치고 軍에 복무중이다. 朴興柱 대령의 아버지는 올 봄에 세상을 떠났고, 어머니는 생존해 있다. 故 朴興柱 대령은 그토록 묻히고 싶어하던 국립묘지에 묻히지 못하고 경기도 포천군 주내면에 있는 교회묘지에 쓸쓸히 잠들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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