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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책을 사랑하는 기술 원문보기 글쓴이: 어린왕자
사도, 완벽한 영화라 생각한 순간 김을 뺀 아쉬움/ 최복현
"마지막 순간은 따뜻했다!" 영화를 보면서 감상평을 이 문장으로 쓰려고 생각했다. 이제 끝나는구나 싶었는데 끝이 아니었다. 참 여운이 남게 잘 만들었구나 하는 순간, 이어지는 영화, 아주 완벽한 결말이겠구나 싶었는데 결말이 김을 뺐다. 그게 참 아쉽다. 영조가 뒤주쪽으로 걸어나오며, 아들에게 말한다. 아들이 대답한다. 물론 이 장면에서 실제로 대화하는 설정은 아니다. 이심전심으로 주고 받는 무언의 대화를 그리 처리한 것이다. 이 대화로 아들과 아버지의 멀고도 멀게, 아프고도 아프게, 길게 돌아와 서로를 이해하면서 한 사람은 저승으로 떠나고, 한 사람은 비록 왕이지만 인간다운 인간으로 살아갈 것 같은 느낌으로 영화가 끝나는 줄 알았다. 만일 그렇게 영화가 거기서, 딱 거기서 끝났다면, 이 영화는 만점을 주고도 남을 영화다.
그런데 이 영화,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어른이 된 정조가 어머니의 회갑연을 열고, 춤을 춘다. 아니 이 영화의 이 장면이 무슨 필요가 있지. 잘 만들어 놓고 산통을 깨는 것 같아 아쉬웠다. 이 장면들로 이어지지 않고, 아버지가 뒤주ㅉ고으로 다가오면서, 아들은 죽어가면서, 그리고 뒤주 속으로 손을 넣어 죽은 아들의 얼굴을 만지며, 그래, 진한 눈물이라도 울어서 왕이 아닌 아버지의 진 모습을 보여주면서 끝내주었더라면, 이 얼마나 여운이 남는 좋은 영화였을까? 그게 나만의 아쉬움은 아닐 것이다. 어쩌면 너무 완벽하게 만들려다 보니 수를 잘못 둔 것 같다. 야구 선수가 어깨에 힘을 주면 제대로 타격을 못하는 것처럼, 투수가 공을 제대로 던지지 못하는 것처럼, 이 영화의 옥의 티라면 길이를 늘인 것일 게다. 아쉽다. 거기서 끝났으면 아직도 긴 여운이 내게 남아 있을 텐데. 물론 그럼에도 이 영화는 꼼꼼하게 잘 만들었다. 암시를 주고, 그 암시에 따른 결과를 보여주거나, 결과를 먼저 보여주었으면, 왜 그런 결과가 나왔는지 원인을 설명해준다. 타당성이나 구성을 아주 꼼꼼히 챙겼다는 의미다. 옥의 티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1000만 관객 이상을 불러 모으고도 남을 것 같긴 하다.
칼이 비에 젖는다. 그 칼을 든 사도세자가 더는 움직이지 못한다. 아버지를 죽이러 나섰고 충분히 죽일 수는 있었다. 그런데 그의 발은 얼어 붙었다. 그의 앞을 막아서는 사람이 없었음에도. 그게 궁금했다. 그렇다고 아버지가 그를 상대할 무예가 있는 것도 아니었고, 젊고 힘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늙은이였다. 그런데 왜? 영화는 이 장면으로 시작하고 그 이유는 나중에야 알려준다. 영조는 사도세자의 아들과 함께 있었던 것, 사도세자의 어머니가 그렇게 하려고 했고, 사도세자의 아내가 그렇게 도왔던 것이다. 세손을 살리려는 할머니와 어머니의 어쩔 수 없는 선택이라면 선택이었다.
영조는 좋은 일이 있으면 만안문으로 들어온다. 흉한 일이면 경안문으로 든다. 사랑과 미움을 분명하게 표현한다. 기분 나쁜 일이 있으면 처소에 들기 전 물을 떠오게 하여 귀를 ?는다. 그런 날이면 미운 사람을 불러 놓고는 한 마디하고는 가 봐 그리고는 처소에 든다.
영조에 대하여 세자비에게 설명한 이 문장들이 사사건건에 암시들이다. 이 조항에 사도세자가 하나식 걸려들 것이기 때문이다. 사도세자가 반역을 시도했다가 결국 실패하고 난 날 영조는 경안문으로 들었다. 이제 사도세자는 아버지에게 불려가야 한다. 아니 왕에게 불려가야 한다. 두렵다. 아버지가 두렵다. 해서 사도세자는 "세손이라도 대려가 볼까?" 죽음이 두려우니 그 말을 한다. 하지만 세자비는 반대한다. "남편보다 자식이 먼저라, 자네 무섭구료." 영조가 칼을 던져준다. "자결하라!" 사도세자가 자결하려 칼을 든다. 하지만 그의 부하들이 달려들어 만류한다. 더는 죽을 수 없다. 영조가 다시 명한다. 뒤주를 가져오란다. 뒤주로 사도세자가 자진해서 들어간다. 하지만 어느 누구도 뒤주에 못을 못 박는다. 그러자 영조가 손수 못을 박는다. 아버지 심정이라면 자신의 가슴에 못을 박는 것 같았을 것이고, 이미지대로 지독한 왕이라면, 그가 내세우는 300년 종사를 지키기 위해 아무 감정 없이 냉혹한 심정으로 못을 박았으리라.
그렇게 뒤주 속 첫날이 시작이다. 인간적이며, 사리분멸이 뛰어난 아들에 대한 질투심 또는 열등감일까? 영조는 아주 쌀쌀맞다. “언제부터 나를 세자로 생각하고, 또 자식으로 생각했소!”라는 사도세자의 말처럼 말이다. 아니면 그와 반대로 그리스신화에서 유래한 파에톤 콤플렉스일까? 완벽한 아버지를 둔 자식들에게서 나타나는 콤플렉스 말이다. 아버지를 넘어서려고 아버지보다 나은 일을 벌이려다 실패하거나, 아니면 아예 아버지를 넘어설 수 없으니 되는 대로 살아가는 아들의 심리 말이다. 이를테면 사생아로 자란 파에톤이 아버지인 태양신을 찾아갔다가 아버지가 운전하는 태양마차를 운전하려다 아버지 말을 따르지 못하고 하늘 높이 오르거나 너무 낮게 대지에 붙었다가 제우스가 던진 벼락으로 추락하여 죽고 만 데서 따온 심리학 이론이다. 그만큼 사도세자는 어린 시절 남다른 총명함으로 아버지 영조의 사랑을 받았다. 그런데 자라면서 아버지와 달리 예술과 무예에 뛰어났다. 게다가 영조는 공부만 알았던 사람인데, 사도세자는 자유분방한 기질을 지녔다. 그러니 사도는 영조의 바람대로 완벽한 세자가 되고 싶었지만 그렇게 따를 수 없었다. 영조는 너무 완벽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세자는 영조가 자신의 진심을 몰라주고 다그치기만 하는 걸로 생각하고 아버지를 점점 원망할 수밖에 없다. 이렇게 보면 영락 없이 파에톤 콤플렉스다.
“이것은 나랏일이 아니고 집안일이다. 나는 지금 가장으로서 애비를 죽이려고 한 자식을 처분하는 것이야” 영조는 한 번도 아버지인 적이 없다. 그저 왕으로만 있을 뿐이다. 비정한 왕으로만 사는 아버지 아닌 왕, 사도세자는 아버지를 원망할 수밖에 없다. 사도세자는 세자이기보다 사람이다. 둘째 날 이 영화는 하루가 시작되면 과거로 돌아가 사도세자가 살아온 날들을 회상하는 식으로 보여준다. 둘째날엔 세자비가 들어오면서 영조의 성격을 말해주는 내용이다. 폭풍처럼 몰아칠 비극을 여견하듯 세자비는 경사스러운 날을 앞두고 눈물을 흘린다. 그녀의 아버지 홍씨는 남들에겐 세자비로 간택되는 것이 경사라지만 가문에 화라며 염려한다. 세자비에겐 강아지를 선물한다. 영조는 기특한 그에게 그래도 그때는 이렇게 애정을 표했었다. "놀이는 한때의 밭, 공부는 평생의 밭" 지금은 놀 때가 아니라 공부할 따라고 꾸짖는 것이다. 그러면 그럴수록 사도세자는 아버지에게 멀어져 간다. 이러한 장치들이 암시적인 것들이다. 이 강아지가 나중에 사도가 뒤주에 갖혔을 때 제일 먼저 주인을 찾아주니까.
장인이 사도세자가 다시 갇힌 뒤주 안에 흑룡이 그려진 부채를 넣어준다. 세자가 아들을 낳기 전에 꿈에 본 흑룡을 그려 넣어 만든 부채다.
사도세자가 어렸을 때 영조는 그랬다. "사가에선 자식을 자애로 기른다. 하지만 왕가에선 왕자를 원수처럼 기른다." 부정보다는 종사가 먼저라 생각하는 영조, 세자와는 점점 멀어져 간다. 그러면서 냉혹할 수밖에 없는 자신의 의견을 세자에게 강요한다. "숙종은 부인에게 사약을 내려 죽였느니라. 경종은 형재와 조카를 죽이고 종사를 지켰느니라. 왕가에선 자식을 원수로 기른다. 네가 왕이 되면 알 것이다." 우여곡절 끝에 대리청정을 하게 된 세자, 하지만 세자가 할 수 있는 일이란 없다. 일을 잘 처리하면 잘 처리한다고 심통이요. 그렇다고 미루면 그것도 못하느냐고 다그친다. 이렇게도 미워하고 저렇게도 미워한다. 마치 로마의 미친 황제 깔리꿀라처럼. "잘해라 잘해야 아비가 산다." 온당하게 자신보다 일을 더 잘 처리한 아들을 대견스럽게 생각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나무란다. "왕은 결정하는 자리가 아니라 신하들의 의견을 윤허하고 책임을 묻는 자리다." 그렇게 세자에게 올 것이 왔다. 앞에선 화합을 외치고 뒤에선 당파를 나눈다는 세자의 일침에 아픈 곳을 찔린 것처럼, 아들을 점점 미워하는 영조는 귀를 씻는다. 오늘의 미운 사람으로 세자가 선택되었다. 별일 없지. 가 봐라. 대리청정, 잘해야 본전이라는 대리청정에서 세자는 본전도 못 찾고 미움만 늘렸다.
돌아보니 슬픈 일 투성이다. 영조가 왕을 그만두겠다고 투정을 부리자 대비가 그러면 그만두라고 한다. 그러자 영조는 궁을 나간다. 마음이 모질면 아버지를 그대로 내버려 두고 그냥 왕위에 올라도 좋으련만 세자는 석고대죄를 하여 결국 대비의 윤허를 거두게 한다. 그 대신에 할머니는 죽는다. "넌 이것이 술로 보이느냐. 내가 죽인 할머니의 피눈물이다." 그는 미쳐간다. 이제 그의 편이 없다. "목숨을 걸고 나섰는데, 거드는 놈은 한 놈도 없어." 과거의 자조섞인 그 한탄이 현재 상황으로 연결되며 다섯 째 날로 넘어간다.
찾아오는 사람 하나 없는데 세자비가 시집올 때 가져 온 개가 그를 찾아왔다. 그래 사람보다 개가 훨씬 낫다.
과거, 영조가 세자보다 어린 여자를 아내로 맞았다. "장부의 기개는 태산보다 높고 여인의 지조는 바다보다 깊다." 그런 어린 중전을 배알해야 하는가, 도무지 못하겠다. 그럴수록 영조에게서 멀어지는 세자.
어제는 개가 찾아왔더니 이번에 세손이 찾아왔다. 참 기특한지고.
영조는 말했었다. 왕이라고 칼자루를 쥐고, 신하라고 칼날을 쥐고 있는 것도 아니다. 왕이라도 실력이 모자라면 칼날을 쥐는 것이다. 달라도 너무 다른 아버지와 아들, 점점 더 멀어지는 부자지간. 세자와 달리 세손은 공부를 즐긴다. 그런 자기 아들 앞에서 활을 쏜다. 그가 쏘는 화살들은 목표에 백발백중이다. 그러다 그가 일부러 허공으로 멀리 화살을 날린다. "허공으로 날아가는 저 화살이 얼마나 떳떳하냐" 그 화살은 자신의 모습, 자신의 원하는 모습이리라. 이 암시를 결과로 보여주기 위해 영화를 늘렸을 수도 있을 터. 그가 며느리에게 조언한다. "서로의 실수를 덮어주고, 예법에 얽매이지 않고, 서로 끝없이 사랑하는 것이다." 자신은 그렇게 못한 것, 인간다운 그가 그리 못한 것을 아들 부부라도 그리 살기를 바랐을 터다. 세자가 어머니의 늦은 회갑연을 베풀었다. 중전이 아니면 4배를 할 수 없음에도 그는 4배를 하도록 세손에게 명한다. 그렇게 반항하는 그를 영조는 더욱 미워한다. 귀를 씻고, 그를 불러 밉다는 상징, "넌 존재자체가 역적이다." 그 말에 대노한 그가 할 수 있는 행동은 무엇이랴. "사람이 있고 예법이 있는 것이다. 사람이 있고, 예법이 있고, 공부가 있는 것이다."
드디어 왕이 세자를 찾아온다. 뒤주속에서 일곱째날이다. "이승과 저승의 갈림길에서 이런 이야기를 나눌 수밖에 없단 말이냐. 나는 자식을 죽인 애비로 기록될 것이고, 너는 임금을 죽이려 한 역적이 아니라 미쳐서 아버지를 죽이려 한 이름으로 기록될 것이다. 그래야 네 아들이 산다." "내가 임금이 아니고, 네가 임금의 아들이 아니라면, 이것이 우리의 운명이다." 그리고는 죽은 아들을 확인한다. 뒤주 안으로 손을 들이밀어 아들의 얼굴을 쓰다듬으며 아버지 다운 표정을 찾는다. 하지만 거기까지다. 그는 다시 300년 종사를 지키기 위해 냉혹한 왕으로 돌아간다. 아들이 죽은 날, 그날 개선가를 부르며 경희궁으로 환궁을 명한다. "독하구만, 자식 죽이고 개선가라니!"
그럼에도 이 여덟째 날은 사족인 것 같다. "이제 다리 쭉 펴고 편히 주무소서."
감독송강호 영조 역 유아인 사도 역 문근영 혜경궁 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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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책을 사랑하는 기술 원문보기 글쓴이: 어린왕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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