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중하李重夏(1846년~1917년)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후경(厚卿), 호는 규당(圭堂) · 탄재(坦齋). 현감 이인식(李寅植)의 아들이다.
좌랑(佐郎)으로서 1882년(고종 19)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 홍문관교리가 되었다.
1885년 공조참의 · 안변부사가 되었다가 토문감계사(土門勘界使)로서 청국측 대표 덕옥(德玉) · 가원계(賈元桂) · 진영(秦瑛) 등과 백두산에서 백두산정계비와 토문강지계(土門江地界)를 심사하였다. 국경 문제를 놓고 담판을 벌였으나 견해차가 심한데다 청국측이 강압적인 태도로 나와 회담은 실패하였다.
1886년 덕원항감리(德源港監理)가 되었다가 1887년 다시 토문감계사가 되어 회담을 재개했는데, 청국측이 조선 측의 주장을 거절, 위협하자 “내 머리는 자를 수 있을지언정 국경은 줄일 수 없다.”며 끝내 양보하지 않았다. 1890년 이조참의가 되어 충청도암행어사의 임무를 수행 하였고, 어사 이중하의 비는 충남에 고르게 분포되어 남아 있으며 총 10좌의 선정비가 있다.
서산 운산면에 있는 이중하의 비에는 碑題와 송시가 있으며, 송시는 마멸로 인해 명문의 판독이 용이하지 않다.
비제:암행어사이공중하영세불망비(暗行御史李公重夏永世不忘碑)
■持念■ 청렴의 마음 가짐으로....
■■賢否 현명과 부정을 .....
按察方面 고을을 두루 살피시니
■淸郡縣 ....청덕으로 군현을
■■無宅 ...집집마다 무탈하네
惠民■■ 은혜를 입은 백성들은.....
石峨一片 하나의 돌에 숭상함을 새기니
頌傳千世 공의 송덕이 천년 동안 가노라
세운 시기는 새겨져 있지 않으며, 비에 남아 있는 명문이 희미하고, 필자가 물을 묻혀 판독하였지만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고 남아 있는 명문도 제대로 판독 하였다고 볼 수 없기에, 보이는 명문만 풀이 하였다.
이중하의 암행어사 활동 시기는 1892년에 서계의 기록이 보여, 운산면의 선정비는 그 당시나 그 이후로 추정한다.
서산 운산면의 비는 송시가 있어 풀이를 하여야 하지만, 그 외의 지역은 대부분 비제와 설립년도만 새긴 경우가 많다
공주 신관동에는 6좌의 비가 있으며, 그중에 암행어사 비는 3좌가 있다.
공주는 공산성에 여러 좌의 비석을 모아 두었는데 여기는 그 곳에 모이지 못하고,
따로 모아 두었다.
여기에 있는 이유를 알아보니 비석이 있는 이곳은 깃대나루가 있었든 곳이기도 하고, 그 보다 더 중요한 일신역이 있었다.
신관동이라는 지명은 일신역과 관동이라는 지명에서 유래되었고, 선정비가 있는 이유는 역참과 관계되어 세운 것으로 추정된다.
어사 이중하 비는 “암행어사이공중하영세불망비(暗行御史李公重夏永世不忘碑)”라 되어 있고 세운 시기는 임진 11월이라 되어있다.
이중하가 임금께 올리는 서계는 많은 자료를 남겨 두지만, 이 서계는 글 한자라도 틀리면 추고를 받게 되는데 이중하가 그러한 경우이다.
승정원일기에는 그러한 내용이 남아 있다.
“고종 29년 임진(1892) 윤6월 28일(갑신) 맑음
지방관을 감찰하여 보고한 충청도 암행어사 이중하의 서계에 대해 회계하는 병조의 계목
임금께 아뢰는 문자는 얼마나 신중히 해야 하는 것입니까. 그런데 통어영 중군 이상덕(李相悳)의 덕(悳) 자를 덕(德) 자로 잘못 썼으니 매우 살피지 못한 것입니다. 해당 어사 이중하를 추고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였는데, 판부하기를,
“회계한 대로 시행하라.”
하였다.“
어사 이중하가 서계에 ”悳“을 ”德“으로 잘 못 표현 하여 글을 올렸는데, 병조에서
임금께 올리는 글에 신중을 기하지 않고 잘 못 썼으니, 추고하라는 내용이 보인다.
서계는 방대한 자료와 글이 있는데, 그 중에 한 글자라도 틀리면 벌을 주었으니, 어사의 임무는 백성을 살피고, 탐관오리를 탄핵하는 일이 전부는 아닌 것으로 생각된다.
우리가 아는 암행어사는 마패를 보이고 출도를 하는 것과 봉고파직하는 것이 전부라 생각되지만, 어사가 임금께 올린 서계는 그 당시 지방 상황을 알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ㄱ, 어사는 자세한 내용과 글 하나, 하나 틀림이 없어야 하는 어려움이 존재 한다고 생각이 든다.
남아 있는 이중하의 비는 10좌나 되고, 선무사 활동한 곳에는 마애비와 선정비가
남아 있어 별도의 표를 만들어 정리 하였다.
어사 이중하의 비는 충청도 에만 10좌의 비가 남아 있으며, 특히 충남에만 남아 있었다.
다르게 생각하면 충북에도 이중하의 선정비가 있었지만 멸실되거나, 필자기 찾지 못한 경우라고 생각이 든다.
마지막으로 부여 홍산객사에 있는 이중하의 비에는 그를 칭송하는 명문이 있으며 풀이하면 다음과 같다.
비제; 암행어사이공청백휼민선정비(暗行御史李公淸白恤民善政碑0
刷逋代納 쇄포를 대납 하여 주시고
虛結啓停 허결을 계도하고, 멈추게 하시니
民頌吏歡 백성이 칭송하고 아전들이 기뻐하네
邑瘼始伸 마을의 병든 것이 펼쳐 버리니
斃■■弊 죽은 .... 폐단은
欲刓其澤 사랑을 바라는 것은 그 은택이로다
畫財殖村 재물을 고루 갖추니 마을이 번창하네
山低海浅 산이 낮으니 바다도 얕구나
명문 풀이는 필자가 직접 하였지만 엉터리라 할 정도로 잘 하지 못 하였다고 생각된다.
누군가 나중에 제대로 풀이를 하였으면 한다.
”고종 20년 계미(1883) 9월 23일(경자) 맑음
우두법(牛痘法)은 서양 의학에서 창시된 것인데, 시험하는 족족 다 효험을 보여 만에 하나도 실패한 적이 없으니, 실로 사람을 살리는 훌륭한 의방(醫方)입니다.
따라서 사징전(査徵錢) 2900여 냥으로 우두국(牛痘局)을 충청 감영에 설치하여, 경상도 의원으로 하여금 그 기술을 가르치도록 하고, 소용되는 기계와 제반 갖추어야 할 것들을 모두 잘 헤아려 조처하도록 속히 내의원으로 하여금 해도에 관문을 보내 끝까지 좋은 결과를 맺도록 도모하는 일입니다
. 쓸 때마다 효험이 있다면 권면하지 않아도 저절로 받아들이게 마련입니다. 우두국을 설치하여 기술을 가르치게 되면 효과를 볼 수 있을 것이니, 영읍에서 먼저 적절하게 권면하고 신칙하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