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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왜 견인의 교리를 반드시 바르게 알아야만 할까요?
● 이 땅에서 외국인과 나그네로 사는 것은 예수님의 재림을 고대하며 하늘에 소망을 두고 사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나그네). 거기로부터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그는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하게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하게 하시리라." (빌3:20-21)
우리는 땅에 속한 사람이 아니요, 천국 시민권을 가진 하늘에 속한 사람들입니다. 그곳에서 다시 오실 예수님을 기다리는 삶을 사는 것, 이것이 외국인과 나그네로서의 삶입니다. 이것은 회심의 본질적인 요소입니다.
"주의 말씀이 너희에게로부터 마게도냐와 아가야에만 들릴 뿐 아니라 하나님을 향하는 너희 믿음의 소문이 각처에 퍼졌으므로 우리는 아무 말도 할 것이 없노라. 그들이 우리에 대하여 스스로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너희 가운데에 들어갔는지와 너희가 어떻게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살아 계시고 참되신 하나님을 섬기는지와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그의 아들이 하늘로부터 강림하실 것을 너희가 어떻게 기다리는지를 말하니 이는 장래의 노하심에서 우리를 건지시는 예수시니라." (데살로니가 1:8-10)
이것은 회심을 가장 잘 보여주는 구절입니다. 회심의 3대 요소를 기록한 것입니다. 존 스토트는 이 구절에 대해 이렇게 썼습니다.
"우리는 이제 ... 그리스도인의 회심의 본질 - 우상으로부터 돌아섬, 하나님을 섬김, 그리스도를 기다림 - 을 요약할 수 있다. 어떤 연구자들은 이것들과 믿음, 소망, 사랑의 세 요소 간의 대응을 간파한 바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로 돌아서는 것은 분명 믿음이고, 하나님을 섬기는 것은 사랑의 열매로 볼 수 있으며,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것은 소망의 요체이기 때문이다. 어쨌든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보낸 서신서들에서 변치 않는 회심의 모델을 보여주었다. ... 이러한 돌아섬, 섬김, 기다림이 없이는 어떤 사람이 회심했다고 거의 주장할 수 없을 것이다."
회심의 3대 요소인 우상을 버림, 하나님을 섬김, 재림을 기다림은 기독교 신앙의 본질입니다. 기독교 신앙은 본래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을 섬길 뿐 아니라 재림을 고대하며 슬기로운 다섯 처녀처럼 궁극적인 구원을 받기 위해 준비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곧 나그네로서의 삶입니다.
또한, 재림을 기다리는 삶을 사는 것은 회심뿐 아니라 신앙생활의 본질적인 요소입니다.
"바울과 실루아노와 디모데는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데살로니가인의 교회에 편지하노니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우리가 너희 모두로 말미암아 항상 하나님께 감사하며 기도할 때에 너희를 기억함은 너희의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를 우리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끊임없이 기억함이니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받은 형제들아 너희를 택하심을 아노라." (살전1:1-4)
신앙생활은 믿음의 행위와 사랑의 수고가 전부가 아닙니다. 소망의 인내가 있어야 합니다. 즉 궁극적인 구원을 바라보고 타협하지 말고 인내하며 순종하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이것이 곧 나그네로서의 삶입니다.
그런데 믿음의 조상들이 본을 보여준 대로, 과연 목회자와 신자들이 이 땅에서 외국인과 나그네로 살아가고 있습니까? 제가 보기에는 너무나 많은 목회자와 신자들이 이 땅에서 원주민으로 살아가는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너무나 많은 이들이 기독교 신앙의 3대 요소인 신·망·애 중 칼빈의 한 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이라는 거짓 교리로 인해 '망'을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저는 성령신학교에서 강의를 할 때 매 시간 두 명의 학생에게 설교를 시킵니다. 하루는 한신애라는 신학생이 설교를 했습니다. 설교를 들은 후 저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한신애라, 믿음도 있고 사랑도 있는데 소망이 빠졌네요. 현신애 권사님 생각이 납니다. 이분 이름에도 믿음도 있고 사랑도 있는데 소망이 빠졌지요. 이름뿐 아니라 삶도 그랬습니다. 그래서 입신을 경험했을 때 우리나라의 유명한 대부분의 목사님을 예수님이 모른다고 부인하시는 것을 듣고 회개하고 40억을 북한선교회에 바친 것 아닙니까? 치유사역을 통해 40억을 모았다는 것은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리며 하늘에 소망을 두고 살지 않았다는 증거입니다. 기독교 신앙은 믿음과 사랑으로만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믿음, 소망, 사랑이 다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이 중 가장 잃어버리기 쉬운 것이 소망입니다. 실제로 우리나라의 목회자들과 신자들의 삶 속에 빠진 것이 바로 소망입니다. 초대형 교회 목사들조차 적지 않은 수가 하늘이 아닌 땅의 것에 소망을 둔 삶을 살고 있고 그래서 각종 불법을 저지름으로 주님 얼굴에 먹칠을 하고 있지 않습니까?"
보통 우리는 고린도전서 13장 13절에 나타난 대로 믿음, 소망, 사랑 이런 순서로 부릅니다. 그런데 바울은 이 구절에서 믿음의 역사, 사랑의 수고, 소망의 인내 즉 소망을 가장 마지막에 두었습니다. 신앙은 믿음과 사랑을 가지고 소망을 바라보며 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즉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 이루어질 궁극적인 구원을 목표로 살아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이런 소망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그것이 곧 나그네의 삶입니다.
한편, 우리가 살펴본 족장들은 히브리서 11장에 나오는 다른 믿음의 선진들과 함께 구름같이 둘러 싼 허다한 증인들의 일부입니다. 그들은 과거에는 경주자였으나 지금은 응원자들입니다. 우리를 응원하면서 지켜보고 있습니다. 그들이 간절한 마음으로 무엇을 응원하겠습니까? 바로 세상 것이 아니라 궁극적인 구원을 향해 달려가는 것입니다. 죄를 끊어버리고, 거룩한 삶을 살고, 용서하고, 사랑하며, 예수님을 닮는 것입니다. 그렇게 끝까지 잘 달리기를 바라며 마음을 졸이며 우리를 응원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늘과 땅의 관심과 가치관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이 세상에 살아가면서 땅의 것에 지나친 관심을 갖기 쉽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렇게 경고했습니다.
"형제들아 내가 이 말을 하노니 그 때가 단축하여진 고로 이 후부터 아내 있는 자들은 없는 자같이 하며 우는 자들은 울지 않는 자같이 하며 기쁜 자들은 기쁘지 않은 자같이 하며 매매하는 자들은 없는 자같이 하며 세상 물건을 쓰는 자들은 다 쓰지 못하는 자같이 하라. 이 세상의 외형은 지나감이니라." (고전7:29-31)
또 바울은 이렇게 강권했습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의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 (골3:1-2)
하늘에 있는 증인들은 우리의 소유나 세상적인 성공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이 없습니다. 저는 이것을 케네스 해긴 목사님의 『당신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이라는 책에 나오는 간증을 통해 배웠습니다. 그 간증을 여러분에게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이 믿음의 사람들의 거대한 군중은 당신이 이 땅에서 달리고 있는 일반적인 달리기를 관람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이 땅 위에서 일어나는 자연적인 경주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예를 들면, 그들은 당신이 매일 영위하는 하루하루의 일들을 관찰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당신이 새 옷을 사거나 새 차를 사거나 얼마만큼 돈을 은행에 맡기고 있는지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그들은 당신이 당신의 영적인 경주를 그리스도인으로성 어떻게 하고 있는지를 보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은 당신이 당신의 삶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을 따르고 있는지 아닌지에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나는 수년 전에 초자연적인 경험을 통해서 이 계시를 받게 되었는데 그 계시는 하늘나라 관람석에서 우리를 보고 있는 구름 같은 증인들에 대한 실재를 내게 보여주었습니다.
1968년 한 세미나에서 (지금은 천국에서 주님과 함께 있는) 유명한 성경 교사요, 예언자였던 진 윌커슨 자매(Jeanne Wilkerson)는 그해 가을 내가 하늘나라로 사로잡혀 올라가는 에녹과 비슷한 경험을 하게 될 것이라고 예언하였습니다. 에녹은 육신의 상태에서 사로잡혀 올라갔는데 그의 몸이 이 땅을 떠났던 것입니다(창5:26, 히11:5). 그러나 윌커슨 자매는 내가 영 안에서 사로잡혀 올라가게 될 것이며 하나님으로부터 계시를 받게 될 것을 예언하였습니다. 이 예언이 성취되도록 하기 위해서 나는 특별히 어떤 일도 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나는 하나님을 계속 섬겼을 뿐입니다.
그해 가을이 되자 나의 유일한 여동생인 올레타가 쉰다섯 살의 나이에 암으로 죽게 되었습니다. 올레타는 전에도 한번 크게 아파서 죽을 뻔한 적이 있습니다. 그때 내가 올레타를 위해서 기도하자 나았었습니다. 그 당시에 그녀는 영적으로 어린아이였으므로 나는 말씀에 대한 나의 믿음으로 그녀가 치유받을 수 있도록 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들 각 사람이 믿음 안에서 자라기를 기대하시기 때문에 우리는 다른 사람을 무한정 우리의 믿음으로 업고 다닐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그해 가을 내 여동생은 죽었습니다. 우리 집안사람들은 모두 그녀가 마지막 숨을 거두는 날 저녁 그녀의 침대 곁에 모였습니다. 그 다음 날 밤 한시 반쯤에 나는 여동생의 영이 그녀의 몸을 떠나서 주님과 함께 있기 위해 하늘나라로 올라갔을 때 어떤 상태일까 하고 침대에 누워서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나는 아파서 침대에 누워 있던 1933년 8월 16일 나의 심장의 고동이 멈추었던 때를 생각했습니다. 심장이 멈추자 나의 영은 몸을 떠났고 뒤를 돌아 내려다보았을 때 나의 몸이 그 침대에 누워 있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나는 어머니께서 내 손을 잡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때 나는 다시 여동생을 생각했습니다. 그녀가 죽어서 몸을 떠났을 때 그녀는 우리 모두가 침대 주위에 모인 것을 내려다보고 우리의 사랑과 관심도 보았을 것입니다.
내가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갑자기 엘리베이터만 한 크기의 밝은 황금빛의 한 줄기 빛이 하늘로부터 천장을 바로 뚫고 비쳤습니다. 그 빛이 내게 닿자마자 나의 영은 몸을 떠났습니다. 마치 엘리베이터가 올라가듯이 나는 그 빛줄기를 타고 하늘나라에 도달할 때까지 올라갔습니다.
하늘에서 나는 여동생이 예수님과 이야기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내가 그들에게로 걸어서 다가가자 예수님은 여동생에게 말씀하던 것을 멈추시고 나를 쳐다보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나를 보시자 여동생은 예수님께서 누구를 보시는지 보려고 고개를 돌려서 나를 보았습니다.
이것이 여동생이 내게 한 첫마디 말이었습니다. '켄, 오빠가 믿음의 기도를 할 수 없었던 것을 너무 가슴 아파하지 마세요. 오빠가 기도할 수 없었던 이유가 있어요.' (그녀는 그 이유에 대해서는 내게 말하지 않았습니다.)
가끔 하나님께서는 어떤 사람들이 왜 병 고침을 받지 못하는지 그 이유를 우리에게 밝혀주지 않으십니다. 신명기 29:29에는 '오묘한 일은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속하였거니와 ...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내 여동생은 나의 어머니의 부모님이신 할머니 할아버지를 이미 만났다고 내게 말했습니다. 그녀는 또 세 살 때 죽은 손자 제이슨도 만났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내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케네스, 나는 앤을 만났어요.' (앤은 스물다섯에 교통사고로, 어린 두 아이를 두고 죽은 여동생의 딸입니다.) 내 여동생은 계속해서 말했습니다. '앤이 내게 한 첫 마디 말은 빌과 아이들은 어떻게 지내고 있냐는 거였어요.' (빌은 앤의 남편이었습니다.) '나는 앤에게 빌이 재혼한 것을 말하지 않았어요.'
그러고 난 후 나의 여동생은 내게 실제로 계시가 된 것을 말했습니다. '오빠가 보다시피 여기 있는 사람들은 땅 위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의 자연적인 삶에 관해서는 관심이 없답니다. 여기 사람들은 땅 위에 사는 사람이 새 차나 새 옷을 사는 것이나 은행에 돈을 얼마나 많이 가지고 있는지에는 관심이 없어요.'
'그들은 영적인 것에 관심을 가지고 있지요. 그들은 사람들의 삶의 자연적인 영역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는 모르지만, 사람들이 영적으로 하는 일은 모두 알고 있답니다. 그들은 어떤 사람이 그리스도를 믿기로 작정하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내 여동생은 우리가 영적인 경주를 하는 동안 하늘에서 우리를 지켜보고 있는 구름 같은 증인들에 관해서 말하고 있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윌커슨 자매가 예언했던 내가 이 사건을 통해 깨닫게 될 계시였던 것입니다. 하늘로 사로잡혀 올라간 이 경험을 하기 전에는 나는 오직 이 계시에 대해서는 하나의 암시나 흘깃 한 번 본 것 정도의 수준이었습니다.
내 여동생은 내게 '켄, **(그녀는 그녀의 막내아들의 이름을 언급했습니다.)에게 꼭 좀 말해주세요. 오빠가 하는 말은 들을 거예요.'라고 말했습니다. 내 여동생이 말하고 있는 그 아들은 전에는 하나님을 알고 자신의 삶에 대한 하나님의 사역에로의 부르심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후 하나님으로부터 도망하여 수년 동안 하나님과 교제가 없었습니다.
내 여동생은 내게 말했습니다. '내 아들에게 그는 결코 행복하지 못할 것이며 그가 자신의 삶을 주님께 드리기 전에는 인생에서 아무것도 잘되는 것이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고 전해주세요. 그가 자신이 삶을 주님께 다시 헌신하면 나도 알게 될 것이라고 그에게 말해주세요. 우리는 이곳에서 땅 위에서 영적으로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고 있다고 말이에요.'
이 일이 있은 후에 나는 내 여동생의 아들에게 그녀가 내게 원했던 대로 말했었습니다. 그는 비록 하나님께로 조금 가까이 가기는 했지만 그의 삶을 하나님께 전적으로 내어 드리지는 않았습니다. 내 여동생이 예상한 대로 그는 이 때문에 그 후로도 오랜 세월을 아무것도 잘되는 것이 없었습니다.
그 뒤에 내 여동생의 최근의 우리 캠프미팅에 참석했다가 자신의 삶을 주님께 완전히 드려서 전임사역으로 부르신 하나님의 부름에 응답했습니다! 내 여동생이 아들이 그의 삶을 예수님께 다시 헌신하는 그 순간 하늘에서 알았다는 것이 얼마나 하나님께 감사한 일인지요. 그 아들이 자신의 삶을 위한 하나님의 계획을 따라 그의 경주를 열심히 달리고 있는 것을 지켜보며 그녀는 기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늘에서 우리를 응원하고 있는 증인들과 똑같은 관심을 가지고 이 땅을 살아가야 합니다. 그런데 그렇지 못할 때가 얼마나 많은지요! 2세기 초에 『헤르마스의 목자(Shepherd of Hermas)』를 쓴 익명의 저자는 하나님의 도성을 간절히 사모하지 않았던 당대의 기독교인들을 책망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썼습니다.
"하나님의 종들인 너희들은 외국 땅에 거주자가 되었음을 알고 있다. 너희들의 도성은 지금 이 도시가 아니다[즉 로마]. 너희가 거주할 그 도성을 인식한다면, 여기서 남용적인 땅과 비싼 도구, 건물, 거처들을 왜 준비하는가? 이 도시를 위해 이것들을 준비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도성으로 돌아갈 것을 의도하지 않는 것이다." (Heris. Sim. 1.1: 참조 1.6)
솔로몬의 경험적인 고백이 보여주듯이 세상의 모든 것은 다 헛되고 무익합니다.
"전도자가 이르되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해 아래에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가 사람에게 무엇이 유익한가?" (전도서1:2-3)
"내가 내 마음으로 깊이 생각하기를 내가 어떻게 하여야 내 마음을 지혜로 다스리면서 술로 내 육신을 즐겁게 할까? 또 내가 어떻게 하여야 천하의 인생들이 그들의 인생을 살아가는 동안 어떤 것이 선한 일인지를 알아볼 때까지 내 어리석음을 꼭 붙잡아 둘까하여 나의 사업을 크게 하였노라. 내가 나를 위하여 집들을 짓고 포도원을 일구며 여러 동산과 과원을 만들고 그 가운데서 각종 과목을 심었으며 나를 위하여 수목를 기르는 삼림에 물을 주깅 위하여 못들을 팠으며 남녀 노비들을 사기도 하였고 나를 위하여 집에서 종들을 낳기도 하였으며 나보다 먼저 예루살렘에 있던 모든 자들보다도 내가 소와 양 떼의 소유를 더 많이 가졌으며 은금과 왕들이 소유한 보배와 여러 지방의 보배를 나를 위하여 쌓고 또 노래하는 남녀들과 인생들이 기뻐하는 처첩들을 많이 두었노라. 내가 이같이 창성하여 나보다 먼저 예루살렘에 있던 모든 자들보다 더 창성하니 내 지혜도 내게 여전하도다. 무엇이든지 내 눈이 원하는 것을 내가 금하지 아니하며 무엇이든지 내 마음이 즐거워하는 것을 내가 막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나의 모든 수고를 내 마음이 기뻐하였음이라. 이것이 나의 모든 수고로 말미암아 얻은 몫이로다. 그 후에 내가 생각해 본즉 내 손으로 한 모든 일과 내가 수고한 모든 것이 다 헛되어 바람을 잡는 것이며 해 아래에서 무익한 것이로다." (전도서 2:3-11)
그러므로 우리는 오직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분의 말씀을 지켜야 합니다.
"일의 결국을 다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명령들을 지킬지어다. 이것이 모든 사람의 본분이니라." (전도서 12:13)
이 세상에서 헛되지 않은 것은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말씀을 지키는 것과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에 충성하는 것뿐입니다.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 앎이라." (고전15:58)
하늘에 있는 증인들은 이것들 외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이 외에는 가치 있는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증인들 중 하나인 사도 바울도 이 땅에 살 때 세상적인 것에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는 이 땅에 살 때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롬8:24)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 (고후4:18)
우리도 이 땅에 살 때 바울처럼, 하늘의 증인들과 우리의 관심을 일치시켜야 합니다. 그들과 동일한 관심을 가지고 이 세상의 남은 때를 살아가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참 지혜이며, 오직 그런 사람만이 슬피 울고 이를 갈며 후회하지 않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결론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 자신이 복음을 바르게 알고 믿으므로 구원받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중요한 것은 복음을 전파하여 다른 영혼들을 구원하는 것입니다. 바울의 평생 달음질은 이 두 가지를 위한 것이었습니다.
"운동장에서 달음질하는 자들이 다 달릴지라도 오직 상을 받는 사람은 한 사람인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너희도 상을 받도록 이와 같이 달음질하라.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 그들은 썩을 승리자의 관을 얻고자 하되 우리는 썩지 아니할 것을 얻고자 하노라. 그러므로 나는 달음질하기를 향방 없는 것 같이 아니하고 싸우기를 허공을 치는 것 같이 아니하며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 (고전9:24-27)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행20:24)
그러므로 우리도 이 두 가지를 위해서 변함없이 달리고 또 달려가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생명의 말씀입니다. 생명처럼 중요합니다. 열왕기하 6장에 보면 아람 왕 벤하닷이 그의 온 군대를 모아 올라와서 사마리아를 에워쌌습니다. 그래서 성중이 크게 주렸습니다(24-25절). 어는 정도로 주림이 심했느냐하면 왕이 성 위로 지나갈 때에 한 여인이 이렇게 외쳤습니다.
"이 여인이 내게 이르기를 네 아들을 내놓아라. 우리가 오늘 먹고 내일은 내 아들을 먹자 하매 우리가 드디어 내 아들을 삶아 먹었더니 이튿날에 내가 그 여인에게 이르되 네 아들을 내놓아라 우리가 먹으리라 하나 그가 그의 아들을 숨겼나이다." (왕하6:28-29)
그런 극한 상황에서 엘리사가 이렇게 예언했습니다.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일 이맘때에 사마리아 성문에서 고운 밀가루 한 스아를 한 세겔로 매매하고 보리 두 스아를 한 세겔로 매매하라 하셨느니라." (왕하7:1)
다음 날 성문 어귀에 있던 나병 환자 네 사람이 서로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가 어찌하여 여기 앉아서 죽기를 기다리랴? 만일 우리가 성읍으로 가자고 말한다면 성읍에는 굶주림이 있으니 우리가 거기서 죽을 것이요. 만일 우리가 여기서 머무르면 역시 우리가 죽을 것이라. 그런즉 우리가 가서 아람 군대에게 항복하자. 그들이 우리를 살려 두면 살 것이요 우리를 죽이면 죽을 것이라." (왕하7:3-4)
한마디로 죽기 아니면 살기였습니다. 그들은 아람 진영으로 갔습니다. 그런데 그곳에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람 군대로 병거 소리와 말 소리와 큰 군대의 소리를 듣게 하셔서 혼비백산하여 도망가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나병 환자들은 신이 나서 장막에 들어가서 먹고 마시고 은과 금과 의복을 가지고 가서 감추었습니다. 그들은 원하기만 하면 더 많은 재물을 모으고 감추므로 큰 부자가 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들은 몸은 나병이 들었어도 마음이 바른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서로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병 환자들이 그 친구에게 서로 말하되 우리가 이렇게 해서는 아니되겠도다. 오늘은 아름다운 소식이 있는 날이거늘 우리가 침묵하고 있도다. 만일 밝은 아침까지 기다리면 벌이 우리에게 미칠지니 이제 떠나 왕궁에 가서 알리자 하고" (왕하7:9)
이것이 바로 우리가 해야 할 고백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당장 해야 할 일입니다. 그러므로 담대히 입을 열고 여러분이 듣고 배운 다이아몬드와 같은 복음을 전파하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복음을 전할 때 우리는 바울이 했던 것처럼 해야 합니다.
"이는 우리 복음이 너희에게 말로만 이른 것이 아니라 또한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된 것임이라. 우리가 너희 가운데서 너희를 위하여 어떤 사람이 된 것은 너희가 아는 바와 같으니라. 또 너희는 많은 환난 가운데서 성경의 기쁨으로 말씀을 받아 우리와 주를 본받은 자가 되었으니" (살전1:5-6)
이처럼 우리는 복음을 말로만 전하지 말고 성령의 능력으로 전하고, 나아가서 본이 되는 삶을 통해 전해야 합니다. 이에 대해 김세윤 교수님은 이렇게 썼습니다.
"바울은 '여러분이 우리를 본받은 자들이 되고, 주를 본받은 자가 되었다'고 합니다. 언뜻 생각하기에는 순서가 바뀌어야 할 것 같습니다. '먼저 주를 본받은 자 되고, 그 다음에 우리를 본받은 자 되었다'고 말입니다. 하지만 바울은 우리의 생각과는 반대로 '너희가 우리를 본받은 자 되고 또 주를 본받은 자 되었다'고 합니다. 같은 말이 고린도전서 11장 1절에도 나옵니다. 그런데 개역한글 성경에서 어순을 바꾸어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 된 것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 되라'고 번역했습니다만 원어대로 풀면, '나를 본받는 자들이 되시오. 내가 주를 본받는 자 된 것같이' 하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논리적으로 보아 바울은 지금 고린도인들에게 '나를 본받음으로써 여러분은 주를 본받게 됩니다. 왜냐하면 내가 주를 본받는 자이기 때문입니다' 하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순서를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
복음 선포자는 복음을 말(글)로 선포합니다. 하지만 동시에 그 복음을 삶을 통해 그려내야 합니다. 복음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이 창조주 하나님의 우리를 위한 구원사건이라는 복음을 말로만 선포해서는 안 됩니다. 선포자 자신의 삶으로 그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를, 죽음으로부터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그려내야 합니다. 이것이 복음 선포자의 임무요 소명입니다."
바울은 실제로 자신이 말로 전한 복음을 삶을 통해 보여주었습니다. 그 증거 중의 하나가 갈라디아서 3장 1절입니다.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 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
이 구절의 원문을 권연경 교수님은 이렇게 번역했습니다.
"참 어리석군요. 갈라디아인들이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분으로 여러분의 눈앞에 분명하게 제시되었는데, 누가 여러분을 현혹했다는 말입니까?"
그 후 이 구절의 의미를 이렇게 해석했습니다.
"바울은 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를 보면 답이 나와야 한다고 말한다(갈2:21, 3:1).
왜 그럴까? 바울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제시한 방식에서 어느 정도 해답을 찾을 수 있다.
바울은 갈라디아인들에게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분명히 제시했다.' 하지만 이방 신자들이 예수님의 십자가를 목격한 것은 아니다. 바울이 '하나님의 아들을 이방인들에게 전하는' 일차적 수단은 '말'이었다(롬10:14, 17, 15:18, 고전2:4, 엡6:19, 살전2:13). 바울은 복음을 '말했고' 그들은 복음을 '듣고 믿었다.'(2, 5절) 하지만 앞에서 지적한 것처럼, 복음선포는 단순한 언어적 전달을 넘어선다. 복음은 깨달아야 할 교리도 포함하지만, 구체적으로 살아내야 할 삶의 방식이기도 하다. 따라서 선포의 '말'은 언제나 그 복음에 함축하는 삶의 실제를 보여주는 '행위'와 분리될 수 없다(롬15:18, 고전4:17). 복음을 듣고 믿는 과정에도 바울에게서 '본' 삶을 '본받는' 과정이 포함되었다(고전4:16, 11:1, 빌4:17, 살전1:6 등). 바울은 말과 행위로 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를 분명히 보여주었다."
이처럼 바울은 '말'과 '능력' 그리고 '본'이 되는 삶을 통해 복음을 전파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그렇게 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설교자들에게 행하며 가르치는 자가 되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계명 중의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또 그같이 사람을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 누구든지 이를 행하며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크다 일컬음을 받으리라." (마5:19)
바울은 성도들이 불신자들도 읽을 수 있는 그리스도의 편지가 되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너희는 우리의 편지라. 우리 마음에 썼고 뭇사람이 알고 읽는 바라. 너희는 우리로 말미암아 나타난 그리스도의 편지니 이는 먹으로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살아 계신 하나님의 영으로 쓴 것이며 도 돌판에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육의 마음 판에 쓴 것이라." (고후3:2-3)
베드로는 가족을 비롯해서 가까운 사람들을 구원할 수 있는 비결이 변화된 삶에 있다고 했습니다.
"아내들아 이와 같이 자기 남편에게 순종하라. 이는 혹 말씀을 순종하지 않는 자라도 말로 말미암지 않고 그 아내의 행실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게 하려 함이니 너희의 두려워하며 정결한 행실을 봄이라. 너희의 단장한 머리를 꾸미고 금을 차고 아름다운 옷을 입는 외모로 하지 말고 오직 마음에 숨은 사람을 온유하고 안정한 심령의 썩지 아니할 것으로 하라. 이는 하나님 앞에 값진 것이니라." (벧전3:1-4)
우리는 복음진리를 알고 전할뿐 아니라 믿고 행해야 합니다. 그래서 바울처럼 복음을 들려줄 뿐 아니라 보여주어야 합니다(갈3:1). 저는 이 점에 있어서 우리에게 예수님 다음으로 귀감이 되는 사도 바울에 대한 글을 여러분에게 소개해드리길 원합니다. 그것은 초대 교회 문서 중 어느 성도가 기록했다는 "사도 바울의 용모"에 대한 글인데, 그 글을 소개하면서 제가 지금까지 한 설교 중 가장 긴 설교인 다이아몬드 시리즈 설교를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그는 키가 정말 작았다.
특히 성도들에 비교하면 그렇게 보였다.
그의 코는 울퉁불퉁하며 크고 길게 널브러져 있어 보였다.
이런 외모는 얼굴에 참 맞지 않아 보였다.
그의 머리카락은 힘이 없어 보였고 탈모가 심한 상태였다.
그는 고난이 심했는지, 늘 상체를 굽히고 다녔으며
몸 전신이 말라서 보기 흉측했다.
내가 본 전체적인 그의 모습은 언제 죽을지 모르는 쓰러져가는 사람 같아 보였다.
다리 역시 너무 가늘어서 걸어 다니는 것조차 도움이 필요해 보일 정도로 약해 보였다.
한마디로 그의 용모는 못생긴 병자였다.
하지만
그의 모습 안에서는 엄청난 광채의 빛이 늘 비추고 있었다.
사람들은 그가 마치 천사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고 했다.
그러나 내가 보기엔 그는 예수 그리스도 같았다.
예수 그리스도와 완전히 하나가 되어 동일해 보였다.
그의 겉모습과 달리 그의 얼굴엔 평화와 기쁨이 가득했다.
그의 몸은 엉망이었지만 나는 느낄 수 있었다.
그의 얼굴은 정말 예수 그리스도였다.
눈에 보이지 않았지만 느낄 수 있었다.
내 주변의 성도들도 동일한 것을 느꼈다.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 때문에 그의 못생긴 외모는 생각할 가치도 느끼지 못했다.
많은 죄인들과 병자들이 거부감이 느껴질 만한 그의 외모에 반응하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에 반응했다.
그의 얼굴을 보는 것만으로도 내가 거룩해지는 것 같았다.
그는 자신의 외모에 대해 신경도 쓰지 않았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을 신경 썼다.
그의 몸에서 나타나는 광채의 빛을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할 필요조차 느끼지 못했다.
왜냐하면
그의 존재 자체가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나타내 보였기 때문이다."
첫댓글 이런 긴 글(설교)을 올리신 형제님은 정말 끈질긴 분이 분명합니다. 어떻게 일일이 타자를 칠 수 있는 것인지! <견인>의 내용에서는 글이 길어서 이렇게 긴 설교가 있을 수 있구나 하며 따라가기 힘 들 정도였습니다. 최고의 글이지만 그보다도 형제님의 수고에 더 큰 감사를 드립니다. 할렐루야!
샬롬~^^
감사합니다!!
형제님을 향한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성취되
기를 간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