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창세기 강해 제 29장 야곱의 결혼
하나님은 벧엘 언약을 통해 야곱과 늘 함께 하시며 그 어떤 위경에도 지켜주시고 보호하실 것과 약속하신 것을 다 이루기까지 그를 떠나지 않겠다고 약속하셨다. 그 언약대로 하나님은 야곱의 멀고 험한 도피 여행을 인도하셨고 목적지에 무사히 도착할 수 있게 하셨다.
1. 하란에 도착한 야곱
야곱은 벧엘에서 하나님을 만나기 전까지만 해도 지옥 같은 절망에 사로잡혀 있었으나 벧엘 사건 이후 목적지 하란에 이르는 여정은 마치 천국으로 가는 활기찬 여행이 되었다.
‘야곱이 길을 떠나 동방 사람의 땅에 이르러’
개역 성경에는 ‘야곱이 발행하여’라고 되어 있는데 ‘이사 라글라우’ 라는 이 말은 ‘발을 들어 올렸다.’ 라는 말이다. 야곱에게 있어서 벧엘의 체험은 그의 여로에 대단한 용기와 힘을 불어넣었다.
하나님을 만난 기쁨과 큰 소망은 부푼 꿈으로 그의 마음에 가득했으며 그의 발걸음이 가벼워 빠른 속도로 진행했음을 보여준다. 실로 용기 있는 출발, 확신의 출발, 힘찬 출발이었다. 비전이 있는 자의 걸음은 언제나 힘이 넘치는 것이다.
야곱은 약 20일에 걸쳐 여행 한 후 메소포타미아 땅에 이르렀는데 성경은 이 내용은 단 한 마디의 말로 표현하고 있다. ‘야곱이 발행하여’ 야곱이 발을 들어 올리자마자 동방 사람의 땅에 도착했다는 것이다. 이만큼 야곱의 발걸음이 가벼워졌다는 말이다.
뿐만 아니라 야곱은 들에 있는 우물을 발견하고 기뻐 소리를 쳤다. ‘보라! 우물이 들판에 있도다.’ 일종의 이정표 역할을 했던 고대의 우물은 사람들이 모이는 곳으로 야곱의 여정을 쉽게 알려줄 것이기 때문이었다.
물론 이 우물은 일찍이 아브라함의 종 엘리에셀이 리브가를 만났던 그 우물은 아니다. 당시의 우물은 마을 근처에 있는 식수용 우물이었으나 이 우물은 양떼를 위해 들판에 파놓은 우물이었기 때문이다.
이 우물은 지면보다 낮은 곳에 있었는데 우물 주위에는 돌로 만든 물통이 있고 먼저 온 순서대로 양떼에게 물을 먹이며 그동안 다른 양들은 가만히 기다려야 한다. 우물은 큰 돌로 아귀를 막아 두었는데 물의 청결함 유지와 불필요한 사고를 막기 위함이었다.
이 우물은 마을의 공동 소유로서 사막의 특성상 물을 공평하게 분배해야 했다. 그래서 개인이 함부로 사용하지 못하도록 넓고 평평한 무거운 돌로 입구를 막았던 것이다.
‘내 형제여 어디서 왔느냐 그들이 이르되 하란에서 왔노라.’
들에 있는 우물은 성읍이 아니기 때문에 야곱은 먼저 그곳의 위치를 확인할 필요가 있었다. 목자들이 하란에서 왔다고 하는 대답은 하나님께서 야곱의 여정을 깊이 관여하셨고 자상하게 인도하셨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야곱은 히브리어를 말하고 목자들은 갈대아어를 말하는데 어떻게 상호 소통이 되었는지 알 수 없지만 야곱이 모친에게 언어 교육을 받았는지, 아니면 신약시대에 아람어가 유대인들 사이에 통용된 것 같이 둘 다 셈 계통의 언어를 사용하였는지 내용을 알 수 없지만 야곱과 목자들은 별다른 장애 없이 대화를 하고 있다.
‘너희가 나홀의 손자 라반을 아느냐’
야곱이 라반을 그의 아버지 브두엘의 아들이라 하지 않고 구태여 나홀의 손자라고 부른 까닭은 나홀의 이름이 오래 전부터 널리 알려진 이름일 수 있고, 어머니의 부친 브두엘은 외할아버지이지만 나홀은 아브라함의 동생으로 작은 할아버지였기 때문에 친가를 강조하는 말이었을 것이다.
야곱은 그의 평안을 물었다. 이것은 육체적 평안뿐만 아니라 영적, 정신적으로 생활 전반에 걸친 복된 생활을 의미한다. 목자들은 라반이 평안하다고 말하고 그의 딸 라헬이 지금 양을 몰고 오고 있는 중이라고 하였다.
이 당시에는 양떼를 몰고 다니는 처녀를 발견하는 것은 어렵지 않는 일이다. 모세가 미디안의 우물가에 앉았을 때에 이드로의 딸들이 양에게 물을 먹이기 위해 그곳에 당도하였고 모세는 그 처녀들의 도움을 받았다.
‘해가 아직 높은즉 가축 모일 때가 아니니’
하나님이 자기와 함께 하신다는 자신감을 가진 야곱의 ‘신 의식’은 낯선 땅 하란에서도 그대로 나타나 그가 마치 하란 땅의 주인인양 목자들에게 지시를 하고 우물을 임의대로 집행하는 자신만만한 처신을 하였다.
야곱은 목자들에게 양떼들은 해가 질 때에 우리에 가두어 두는데 아직은 그럴 때가 아니니 게으름을 피우지 말고 빨리 양에게 물을 먹이고 풀을 더 뜯게 하라고 재촉했다. 야곱의 이 재촉 속에는 라반의 딸 라헬을 단 둘이 만나고 싶은 생각이 저변에 깔려 있다.
그러나 하란의 목자들은 자신들의 규칙을 지켜야 함을 주장하였는데 이들의 공동 질서가 엄격함을 보여준다. 물이 부족했던 상황에서 먼저 온 양들만 많이 먹이면 뒤에 오는 양들에게 물이 부족하는 불이익이 돌아가기 때문이다.
‘그가 그의 양들을 치고 있었기 때문이더라.’
‘로아 히우’ 직역하면 ‘그녀는 목자였다.’이다. ‘라헬’의 이름의 뜻은 ‘암양’이다. 당시에 양을 치는 목자는 남녀의 구별이 없었다.
고대 팔레스틴 지역 경제에 제일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 것이 목축업이다. 기후 조건이 수량이 절대로 부족한 탓도 있었지만 광야와 산지를 이루는 특수 지형 때문에 자연스럽게 목축업이 발달한 것이다.
그 중에서도 번식력도 왕성하며 고기와 젖을 주는 양을 대량 방목하는 일이 많았는데 목자라는 직업은 아벨 때부터 생겨났다. 히브리인들에게 목자는 절대로 천시 받는 직업이 아니다. 그러나 농업을 기간산업으로 하여 문명의 발전을 이루었던 애굽인들은 목축업을 천한 것으로 여겼다.
목자의 주 임무는 가축에게 풍부한 물과 초지를 찾아주어야 하고, 흩어진 가축 떼를 모으고 질서를 잡아 주는 일, 가축을 들짐승과 도둑으로부터 보호하는 일이다. 그러므로 목자의 생활은 하나님의 백성을 지도하기 위한 필요한 과정이기에 충분한 것이다.
예를 들면 모세가 출애굽의 위업을 위해 부름받기 전에 목자생활을 하였으며, 이스라엘의 성군 다윗도 어린 시절 목동 생활을 했었다. 특히 많은 가축을 안전하게 인도한다는 측면에서 이스라엘의 참된 목자로 하나님이 비유되기도 했다.
이러한 개념을 최초로 설립한 사람들이 이스라엘의 목자 자신들이었다. 야곱은 운명 직전에 하나님을 자신의 목자라 불렀다. 하나님을 목자로 부른 최초의 인물이 야곱이다.
*창48:15 그가 요셉을 위하여 축복하여 이르되 내 조부 아브라함과 아버지 이삭이 섬기던 하나님, 나의 출생으로부터 지금까지 나를 기르신 하나님..
다윗도 하나님을 자신의 목자라고 불렀다.
*시23:1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다윗 시대의 찬양 책임자였던 아삽 역시 하나님을 신실한 목자라고 고백하였다.
*시80:1 요셉을 양 때 같이 인도하시는 이스라엘의 목자여 귀를 기울이소서. 그룹 사이에 좌정하신 이여 빛을 비추소서.
이사야 선지자도 하나님을 목자라고 하였다.
*사40;11 그는 목자 같이 양 떼를 먹이시며 어린 양을 그 팔로 모아 품에 안으시며 젖먹이는 암컷들을 온순히 인도하시리로다.
예레미야 선지자도 하나님을 생명을 돌보지 않고 가축을 지킨다는 점에서 목자라고 하였다.
*렘31;10 이방인들이여 너희는 여호와의 말씀을 듣고 먼 섬에 전파하여 이르기를 이스라엘을 흩으신 자가 그를 모으시고 목자가 그 양 떼에게 햄함 같이 그를 지키시리로다.
에스겔 선지자도 하나님을 무리를 찾는 집념과 성실을 들어 목자라 하였다.
*겔34;12 목자가 양 가운데에 있는 날에 양이 흩어졌으면 그 떼를 찾는 것 같이 내가 내 양을 찾아서 흐리고 캄캄한 날에 그 흩어진 모든 곳에서 그것들을 건져낼지라.
이러한 사상은 신약 시대에 이르러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양 떼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선한 목자로 선언하셨으며, 그 선언대로 희생적인 인생을 사셨다. 그리고 히브리서 기자는 예수를 ‘양의 큰 목자’라고 불렀고, 베드로는 ‘영혼의 목자’ 라고 하였다.
‘야곱이 그의 외삼촌 라반의 딸 라헬과 그의 외삼촌의 양을 보고’
야곱이 우물가에 도착하자마자 외삼촌의 딸 라헬이 양 떼를 몰고 그곳에 온 것이다. 마치 100여 년 전에 이삭의 신부감을 구하기 위해 이곳에 보내졌던 엘리에셀의 경험과 너무나 비슷하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인도하고 계시는가를 똑똑히 보여 주는 산 증거들이다.
한 가지 차이점이 있다면 엘리에셀은 이삭의 신부감으로 리브가를 시험했지만 야곱은 라헬을 보자마자 자신이 우물 아귀에서 돌을 옮기고 그 양떼들에게 물을 먹였던 것이다. 이것은 이미 아버지 이삭이 결정한 대로 외삼촌 라반의 딸을 만났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창28:2 일어나 밧단아람으로 가서 네 외조부 브두엘의 집에 이르러 거기서 네 외삼촌 라반의 딸들 중에서 아내를 맞이하라.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가 알지 못하는 순간에 우리의 생각과 마음을 감찰하시고 발걸음을 지도하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도의 삶은 우연이나 요행이 아닌 하나님의 주권적인 섭리에 의해 진행되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가 라헬에게 입맞추고 소리 내어 울며’
외사촌 여동생을 만난 기쁨과 애정의 표현으로 야곱은 라헬에게 입을 맞추며 크게 소리 내어 울었다. 야곱이 소리 내어 운 까닭은 천신만고 끝에 드디어 친족을 만난 기쁨 때문이었을 것이며, 동시에 하나님의 신실하신 인도하심에 대한 감격도 있었을 것이다.
야곱이 자신의 신분을 상세히 고하자 라헬은 지체하지 않고 집으로 달려가 아버지 라반에게 이 사실을 고하였다. 리브가가 어머니에게 먼저 고한 것과 달리 라헬은 라반에게 이 사실을 고한 것이다.
누이동생 리브가가 집을 떠난 지 97년이라는 세월이 흐른 뒤였기 때문에 누이동생 리브가의 아들인 조카 야곱을 맞는 라반은 큰 기쁨과 감회에 젖었을 것이다. 야곱의 설명을 들은 라반은 모든 사실을 그대로 수긍하고 그의 신분을 확인할 수 있었으며 야곱을 가장 가까운 혈육으로 인정하였다. 이로서 야곱은 한 달은 외삼촌의 집에 거하게 된다.
2. 야곱의 하란 정착과 결혼
‘네가 비록 내 생질이나 어찌 그저 내 일을 하겠느냐 네 품삯을 어떻게 할지 내게 말하라.’
야곱은 한 달 동안 외삼촌 집에 있으면서 그냥 손님 대접만 받지 않고 힘닿는 대로 열심히 일을 한 것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야곱의 성실성과 유능한 목자로서의 자질과 능력을 인정 받았으며 외삼촌은 야곱과 고용 계약을 맺기를 원했다.
야곱이 라반을 처음 만나던 날에 ‘야곱이 자기의 모든 일을 라반에게 말했다.’ 고 했다는 것은 이삭의 당부에 ‘외삼촌의 딸 중에서 아내를 맞이하라.’ 는 말도 틀림없이 전했을 것이다. 다시 말하면 야곱이 이곳에 온 이유는 라반의 딸 중에서 신부를 구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한 달이 지나도록 라반의 반응은 없었다. 왜 그랬을까.
아브라함이 이삭의 신부감을 구하기 위해 엘리에셀을 자기의 친족에게 보냈을 때에는 많은 예물과 선물을 함께 보내었다.
*창24:10 이에 종이 그 주인의 낙타 중 열 필을 끌고 떠났는데 곧 그의 주인의 모든 좋은 것을 가지고 떠나 메소포타미아로 가서 나홀의 성에 이르러..
신부와 그의 가족에게 줄 예물도 준비하였고 또한 신부를 데리고 올 때 필요한 낙타까지 준비했었다. 그런데 이삭이 야곱을 보낼 때는 예물을 실은 한 마리의 낙타도 없었고, 신부나 가족들을 위한 예물도 전혀 없었다.
이삭이 가난해서 그렇다고는 볼 수가 없다. 만약 이삭이 야곱을 보내었을 때 풍성한 예물을 준비했더라면 라반이 과연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 생질에게 참 골육이라고 해놓고 한 달도 못되어 ‘네 품삯을 정하라.’ 고 하는 노동자 취급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라반은 이기심이 강하고 물질에 탐심이 많은 사람이었다. 그는 약삭빠른 친절을 가장하여 야곱을 이용하려 했다. 야곱이 자신의 딸 라헬을 마음에 두고 있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자기의 노동 제안에 큰 요구를 하지 않을 것을 예상했던 것이다.
또 한 가지 생각할 것은 아버지를 속이고 형에게 장자권을 빼앗은 야곱의 거짓된 행동에 대한 대가가 종의 신세로 전락하고 만 것이다. 하나님의 언약의 후손에게 종살이로 14년간이라는 동안의 노역이 주어진 것이다.
사랑에 기초한 봉사는 즐겁고 유익한 것이지만 그렇지 못한 경우의 봉사는 무거운 짐이며 고역이다. 유랑 생활을 마감한 야곱 앞에 험한 길이 기다리고 있었다. 물론 이것은 라반의 간교함에 기인한 것이지만 야곱의 간교한 성품이 빚어낸 하나님의 징벌의 결과였다.
*잠15:16 악한 꾀는 여호와께서 미워하시나 선한 말은 정결하니라.
*잠12:22 거짓 입술은 여호와께 미움을 받아도 진실하게 행하는 자는 그의 기뻐하심을 받느니라.
이러한 사실을 이삭이나 리브가가 알았더라면 얼마나 마음이 아팠을까. 상상도 못한 일이,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던 일이 먼 타국에서 일어난 것이다.
‘레아는 시력이 약하고 라헬은 곱고 아리따우니’
레아가 시력이 약하다는 말은 눈에 총기가 없다는 뜻으로 이는 ‘몹시 지치다.’ ‘슬프다’ 라는 뜻의 ‘레아’ 라는 이름과 조화를 이루는 해석이다. 레아는 몸이 가냘프고 유약하여 심신이 매우 지쳐 있었으며 여성적인 매력이 부족했던 것 같다.
반면에 라헬은 우아하고 외모가 아름답고 성품이나 생각이 활달하고 총명하여 여성적인 매력이 넘쳤던 것 같다. 따라서 야곱은 외모를 중시하여 라헬을 더 사랑했지만 사실 레아가 자신이 낳은 아들의 이름을 짓는 것을 보면 그녀의 신앙심이 매우 깊은 것을 알 수 있으며 라헬과 다툴 때에도 양보심이 많고 마음이 넉넉한 것을 알 수 있다.
하나님은 인간의 생각을 초월하여 레아에게 아들을 많이 주셨으며 레아의 아들인 유다를 혈통을 통하여 메시야가 태어나도록 섭리하셨다.
‘라헬을 위하여 외삼촌에게 칠 년을 섬기리이다.’
‘섬기다.’ 라는 말 ‘아바드’는 신께 헌신하며 종으로서 일할 때를 지칭하는 말로 철저하고 성실한 순복을 가리킨다. 깊은 사랑에 빠진 야곱이 결혼을 위해 지불할 지참금을 갖지 못했기 때문에 이러한 노동의 보상을 제안한 것이다.
야곱의 마음 한 구석에는 사랑하는 이를 위하여 완전한 숫자인 7년을 헌신하겠다는 결의로 가득 차 있었다. 요즈음 노동력으로 환산하면 노동자가 한 달에 250만원을 번다고 할 때 7년 품삯이면 2억천만 원이나 되는 큰돈이다.
남자가 결혼할 때 신부집에 결혼 지참금을 지불하는 이유는 딸이 출가하면 그만큼 노동력을 잃게 되기 때문이다. 야곱의 제안에 라반이 흔쾌히 동의하고 노사 간에 계약이 체결되었다.
‘칠 년을 수일 같이 여겼더라.’
야곱의 사랑을 효과적으로 묘사한 말로 남녀 간의 참된 사랑이 성경의 인정을 받고 있다. 라헬은 야곱의 생소한 환경과 고된 일에 쉽게 적응할 수 있도록 하는 원동력이 되기에 충분하였다. 이처럼 남녀 간의 사랑은 고통스럽고 불안한 환경을 초월할 수 있는 힘이다.
야곱은 70세가 넘도록 그저 어머니의 치마폭에서 지냈기 때문에 이성에 눈을 뜨지 못했다. 그러나 이제 라헬에 대한 사랑이 움트기 시작하자 사랑에는 희생이 요구된다는 참 사랑의 의미를 체득하게 된 것이다.
‘내 기한이 찼으니 내 아내를 내게 주소서.’
라헬의 몸값 대신에 계약한 7년 노동의 세월이 지나갔으며 야곱의 나이는 84세가 되었다. 그의 나이를 지금의 나이로 환산해 보면 거의 50세 가까운 나이가 된다. 참으로 늦은 장가를 가는 셈이다.
우리 같으면 먼저 결혼하고 살아가면서 7년을 봉사하겠다고 할 만한데 야곱은 라헬을 사랑하여 먼저 7년을 봉사하고 이제 결혼식을 올려 달라는 것이다. 오래 참은 야곱의 이 같은 직설적인 요구를 볼 때 라반은 계약 기간 만료 후에도 야곱과 맺은 계약을 서두르지 않고 있었다.
그 이유는 곧 밝혀지겠지만 라반은 모종의 음모를 꾸미고 있었던 것이다. 라반이 동네 사람들을 다 불러 모으고 흥청거리는 잔치를 배설했는데 소란한 분위기를 이용하여 신부를 바꾸어서 야곱을 속이려는 의도 때문이었다.
재물에 구두쇠인 라반이 동네 사람들을 다 불러 모아 잔치를 베푼 것은 레아가 분명히 야곱과 혼례를 올린 것을 하객들에게 입증시키기 위해서였다. 속인 자가 이제 속임을 당하는 순간이다. 야곱이 심은 대로 거둔 것이다.
‘그의 딸 레아를 야곱에게로 데려가매 야곱이 그에게로 들어가니라.’
라반은 의도적으로 큰 딸 레아를 작은 딸 라헬 대신에 야곱의 침소로 들여보냈다. 그런 사실을 추호도 모르는 야곱은 자신의 신부와 동침했는데 이로써 그의 결혼은 라헬이 아닌 레아 사이에 이루어졌다.
물론 레아에게는 이러한 라반의 계획이 사전에 알려졌을 것이며 라반은 라헬의 적극적인 동조 하에 일을 진행시켰을 것이다. 야곱은 7년을 라헬을 사랑했으나 막상 잔칫날 언니와 동생을 구별하지 못했다. 그 이유는 몇 가지가 있을 것이다.
첫째, 신부가 몸 전체를 베일로 감싸고 있었으며,
둘째, 레아가 야곱을 맞아한 시간은 캄캄한 한 밤중이었을 것이며,
셋째, 야곱은 결혼식 주인공으로 술에 만취해 있었을 것이며,
넷째, 야곱이 아버지에게 한 것처럼 레아가 라헬로 치밀하게 가장하고 처신했을 것이며,
다섯째, 레아도 야곱을 짝사랑했을 것이며,
여섯째, 하나님의 특별하신 간섭 때문이었다.
이삭의 인간적인 고집을 꺾어 놓으신 하나님은 야곱의 육체적인 욕망을 눈멀게 하셨던 것이다.
‘그의 여종 실바를 그의 딸 레아에게 시녀로 주었더라.’
라반은 딸의 결혼 선물로 수종을 드는 여종을 붙여 주었다. 그러나 라반이 사랑하는 딸의 결혼 선물로 단지 몸종만 주었다는 것은 그의 탐욕과 인색한 성품을 잘 드러낸다. 리브가가 이삭에게 결혼할 때에는 아버지 브두엘로부터 유모와 종자들을 다 받았던 것이다. 야곱은 칠 년 동안 죽도록 고생하여 레아와 그녀의 시녀 실바만 받은 것이다.
라반의 은밀하고도 야비한 속임수의 이면에는 그가 아버지를 속인 죄책의 대가가 엄청난 열매로 되돌아 온 것이다.
‘외삼촌이 나를 속이심은 어찌됨이니이까.’
연로한 아버지의 결점을 이용해 형을 속이고 장자권을 탈취할 만큼 영리했던 야곱이 이제는 도리어 외삼촌의 속임수에 넘어감으로써 라헬 대신 언니 레아를 취하게 되었다. 결국 죄는 죄로 벌을 받는 것이다.
*삼하12:10-12 이제 네가 나를 업신여기고 헷 사람 우리야의 아내를 빼앗아 네 아내로 삼았은즉 칼이 네 집에서 영원토록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셨고 여호와께서 또 이와 같이 이르시기를 보라 내가 너와 네 집에 재앙을 일으키고 내가 네 눈앞에서 네 아내를 빼앗아 네 이웃들에게 주리니 그 사람들이 네 아내들과 더불어 백주에 동침하리라. 너는 은밀히 행하였으나 나는 온 이스라엘 앞에서 백주에 이 일을 행하리라 하셨나이다 하니..
야곱은 장인인 외삼촌이 이 같은 비겁한 행동을 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래서 엄중하게 항의를 하였다. ‘왜 나를 속였느냐고. 외삼촌이 조카인 나에게 모욕을 줄 수 있으며 당신에게 변함없는 애정과 헌신을 한 나에게 상호 맺은 계약을 위반하고 묵살할 수 있느냐고.’ 억울한 심사를 항의했다.
하지만 이러한 일의 배후에는 레아를 통하여 메시야 족보를 형성하시려는 하나님의 오묘한 섭리가 있었다. 이처럼 인류의 구속사 전개는 사람의 계획이 아닌 하나님의 섭리에 의해 이루어져 간다.
*잠16;33 제비는 사람이 뽑으나 모든 일을 작정하기는 여호와께 있느니라.
그런데 이상한 점은 야곱이 레아와의 비정상적인 결혼에 대해 무효를 주장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라반은 하란 지역의 결혼 관습을 들어 변명을 하였으나 이는 야곱과 노동 계약을 맺을 때 이런 관습에 대해 설명하고 언니 레아의 결혼 때까지 라헬과 혼인할 수 없다는 것을 밝혀야 했다.
언니의 결혼권리를 동생이 빼앗을 수 없다는 라반의 주장은 속임수로 형의 장자권을 빼앗은 야곱에게는 치명적인 약점이요, 날카로운 비수와도 같이 폐부에 와 닿았을 것이다. 야곱은 라반의 말에 한 마디로 대꾸하지 못했다.
‘네가 또 나를 칠 년 동안 섬길지니라.’
기왕 이렇게 되었으니 레아의 잔치 날짜 7일을 채우고 다시 라헬을 신부로 주겠다는 것이다. 작은 딸 라헬을 빌미로 야곱의 노동력을 다시 7년 동안 붙잡아 두려는 라반의 이기적인 제안이었다. 야곱은 이의를 제기하지 않고 그대로 하여 7일을 채우고 라헬을 아내로 맞이하였으며 그녀의 종으로 빌하도 받았다.
라반의 속임수가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라반은 속으로 야곱의 아둔함을 비웃고 자신의 영리함과 훌륭한 계획이 성공하자 쾌재를 불렀을 것이다. 그러나 20년 후에는 결국 라반도 야곱의 꾀에 넘어가 크게 보복 당하고 만다.
*잠28:22 악한 눈이 있는 자는 재물을 얻기에만 급하고 빈궁이 자기에게로 임할 줄은 알지 못하느니라.
라헬의 미모에 이끌리어 라헬을 레아보다 편애하는 야곱의 인간성이 다시 나타난다. 이는 인간적인 욕심 때문에 자식들을 편애했던 이삭과 리브가를 연상하게 한다. 이삭과 리브가가 자식들을 편애하여 수많은 불화를 일으켰듯이 야곱의 편애 역시 조만간 시기와 질투가 반목하는 가정불화를 초래하게 되는 것이다.
부모의 삶이 자식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야곱은 다시 7년간의 고된 종살이를 해야만 했다. 본문에는 더 이상 야곱이 7년을 수일 같이 여겼더라는 말이 없다. 결혼하기 전보다 결혼한 후에 더 행복했어야 할 야곱이었지만 육체의 사랑이 결코 만만하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3. 레아의 출산
마음에 없는 결혼이란 상대를 모두 피곤하게 한다. 마음이 온통 라헬에게 빠져버린 야곱에게는 레아가 안중에도 없었다. 그러므로 신혼의 단꿈을 잃어버린 레아의 삶은 여간 고통스러운 것이 아니었다.
이에 하나님은 레아에게 축복의 증표인 아들을 생산하게 함으로써 형용할 수 없는 기쁨과 위로를 제공하셨다. 하나님은 고통당하는 자의 편이시며 그의 상처를 치료하여 주시며 그의 대변자가 되어 주시는 것이다.
레아는 연이어 네 아들을 얻는 축복을 받았고 그의 아들이 태어날 때마다 그 아들들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며 그 사랑에 감사하고 더불어 남편의 사랑을 갈구하는 각각의 이름을 지었다.
특히 레아는 메시야의 조상이 된 유다를 출산하는 영광을 얻었는데 이는 분명히 낮은 자를 높이시는 여호와의 강권적인 역사에 의한 것이었다.
‘레아가 사랑받지 못함을 보시고’
‘세누아’라는 이 말은 ‘미움 받다’ 라는 뜻으로 라헬에 비해서 레아가 상대적으로 사랑을 받지 못하다는 말이다. 이러한 레아의 딱한 처지를 여호와께서 긍휼히 여기셨다. 야곱으로부터 상대적으로 사랑을 받지 못한 레아를 불쌍히 여겨 하나님께서 은총을 베푸신 것이다.
그 결과 라헬은 오랫동안 무자하다가 나중에 2남을 얻었으나 레아는 6남1녀를 얻는 축복을 받은 것이다.
자녀를 잉태하는 것은 결혼의 자연스러운 결과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특별히 허락하신 선물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이러한 결과 속에는 라헬만을 편애하는 야곱에게는 책망의 뜻이 들어있고, 남편의 사랑을 독차지하려는 라헬에게는 언니 레아에 대한 고통의 이해와 겸손을 요구하시는 하나님의 섭리가 들어있다.
하나님은 고통 받는 자를 돌아보시고 위로하시며 교만한 자를 겸손하게 하시는 분이다. 이러한 하나님의 섭리는 이스라엘 백성의 형성과 기원이 결코 자연의 역사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총의 역사라는 것이다.
‘레아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고’
레아가 연달아 낳은 네 아들이 소개된다.
‘르우벤’의 뜻은 ‘보라, 아들이다.’ 이며 레아가 야곱에게서 낳은 장자이다. 르우벤의 출생은 레아에게는 하나님의 특별한 은총이며 예기치 못한 축복이었다. 레아는 찬송하기를 ‘여호와께서 나의 괴로움을 돌보셨으니 이제는 내 남편이 나를 사랑하리로다.’고 하였다.
그 이름의 의미로 볼 때 동생 라헬로 인해 상대적으로 야곱에게 무시를 당했던 레아가 얼마나 하나님의 긍휼을 사모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따라서 이제는 남편의 사랑을 차지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을 것이다.
레아가 하나님을 조상들과 언약을 맺으신 여호와로 알았다는 사실은 그녀의 신앙이 성숙했음을 보여준다. 레아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고통의 일거수일투족을 면밀히 보시고 일일이 관찰하시고 긍휼히 여기셨다고 고백한다.
아마도 레아는 마음이 괴로울 때마다 하나님께 호소하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요청했을 것이다. 남편이 함께 하지 않는 긴긴 밤을 질투와 시기로 채우지 않고 오로지 하나님께 매달리며 기도하고 위로를 받았을 것이다.
‘시므온’의 뜻은 ’들으심‘이다. 레아가 자신의 고통스러운 처지를 호소한 결과 하나님께서 응답하신 증거로서 아들을 얻었음을 말한다. 다시 말하면 레아는 믿음과 간구의 여인이었다. 그는 부르짖어 기도했고 하나님의 마음을 깨웠던 것이다.
레아가 다시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내가 사랑받지 못함을 들으셨으므로 내게 이 아들도 주셨다.’고 하므로 레아가 르우벤을 출생하였으나 여전히 야곱의 총애를 받지 못하였던 것이다. 레아는 자신의 출산이 온전히 하나님의 은총임을 분명히 깨닫고 있었으며 야곱의 사랑보다 하나님의 긍휼을 향한 믿음을 가졌다.
‘레위’는 ‘연합’이라는 뜻이며 이 이름에서 볼 수 있는 것은 레아가 얼마나 남편 야곱의 사랑을 갈급해 왔는가를 알 수 있다. 레아는 또 말하기를 ‘내가 그에게 세 아들을 낳았으니 내 남편이 지금부터 나와 연합하리로다’ 라고 했다.
아직까지 레아는 하나님의 사랑보다 야곱의 사랑을 더 갈급해 했으며 야곱의 사랑을 받지 못하는 것을 심히 억울해 하고 있다.
‘유다’ 는 ‘찬송’ 이라는 뜻이며 ‘내가 이제는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라고 하므로 하나님의 속성과 그의 하시는 일에 대한 감사의 고백을 의미한다.
*대상16:4 또 레위 사람을 세워 여호와의 궤 앞에서 섬기며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를 칭송하고 감사하며 찬양하게 하였으니..
*시97;12 의인이여 너희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기뻐하며 그의 거룩한 이름에 감사할지어다.
레아가 넷째 아들을 낳고 더 이상 남편의 무관심을 받지 않고 행복에 벅차 그에게 붙여준 이름이다. 하나님은 낮은 자를 높이시며 그를 통해 찬양받으시기를 원하신다.
유다를 낳고 마음의 평정과 행복을 얻은 레아는 일시적으로 생산이 멈추었다. 이것은 지금까지 남편으로 인해 고통 하는 레아를 위로하시고 축복하신 하나님의 섭리가 충분했음을 뜻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과 축복은 우리의 심령에 만족을 주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