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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포자연문화(부여문화)의 두를 처음 접한 것은 1990년대 중반 무렵이다.
당시 현지에서 길림시를 중심으로 하는 부여문화의 대표 유물군을 보면서 그 가운데 전국연과 서한 양식과 상대적으로 높은 대각이 있다는 점에서만 유사할 뿐, 결코 같은 양식, 같은 형식으로 묶을 수 없는 독특한 두가 있는 것을 보고, 직감적으로 이 토기가 포자연문화의 핵심 기종임은 물론 주변 문화와의 관계를 파악할 수 있는 중요 유물임을 알 수 있었다.
이후 길림성과 이웃하고 있는 빈현 경화 성지에서 동단산형두와 일부 유사하나 다른 양식의 두를 현장에서 다량 확인하였고, 또 전뢰락이현의 한서문화 관련 유적에서 포자연문화나 경화유형과 유사하나 분명한 차이를 보이는 두를 확인하게 되었으며, 마지막으로는 흑룡강성 동부 일대의 박물관과 현장에서 앞의 세 문화의 두와 유사하지만, 또 다른 두들을 확인하게 되었다.
이후에도 중국 동북지역의 위 네 유형의 두를 오랫동안 관찰, 실측, 촬영하는 시간을 갖게 되었는데, 어떤 경우는 내가 현장에서 확인한 유적들이 나중에 시굴 및 발굴 조사되어 뒤늦게 보고되는 경우도 있었고, 현재까지도 아직 정식 보고되지 않고 있는 유적들도 있게 되었다.
이러한 조사 경험이 축적되면서 언젠가 이 두들에 대해 정리해야 겠다는 생각을 늘 하고 있었는데, 몇 해전 이를 정리하여 공동저서의 단편 논문으로 발표하기에 이르렀다.
사실 동단산형두는 포자연문화에서 사용된 여러 양식, 유형의 두 가운데 한 유형을 지칭하는 학술적 개념이다-앞에서 거론한 한서형두(한서문화), 경화형두(경화유형), 봉림형두(봉림문화)와 함께 내가 처음으로 유형화하여 제시한 학술 개념이다-. 다시 말해 포자연문화(부여문화)에는 동단산형두만을 사용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기원전 3~기원후 4세기 중국 동북 지역 토착 문화권에서 제작된 두 가운데 기원전 3세기 사가가유형에서 제작된 초기의 장각두와 함께 기원전 2~기원후 3세기 제2송화강 중상류역을 중심으로 제작되었음과 동시에 주변의 광역의 지역, 물질문화의 두 제작에 심대한 영향을 끼친 포자연문화 포자연유형의 특정 양식의 두를 중국 동북 지역 토착 문화권의 두 가운데 가장 인상적이면서도 중요한 성격을 갖고 있는 두인 것만은 분명하다.
그렇다면 포자연문화 포자연유형에서 제작된 여러 형식의 두, 두형토기 가운데 광역에 걸쳐 영향을 끼친 두는 구체적으로 어떤 양식과 형식의 것일까?
포자연유형에서는 이차 분류 속성까지만 고려할 때, 직병형 장직병식(가A식)과 중직병식(가B식) 및 단직병식(가C식), 사직병형 단사직병식(나B식), 호선병형 장호선병식(다A식)과 단호선병식(다B식), 나팔상대각형 단나팔상대각식(라A식)과 중나팔상대각식(라B식) 등의 두, 두형토기가 확인된다.
그런데 이 가운데 장직병식의 일부, 예를 들어 永吉縣 學古 東山 73K2 등은 두 전체의 형태와 병부의 상대 너비 폭 등이 같은 시기 西漢의 요동군과 현도군 등 변군에서 제작된 漢式의 장직병식두와 상당히 흡사함과 동시에 같은 장직병식이라 하더라도 토착계 두 등과는 전혀 다르다.
또한 나팔상대각형은 세부 형식을 불문하고 포자연유형에서는 그리 선호되지 않던 형식의 두이다. 나팔상대각형은 중국 동북 지역 토착 문화권의 여러 지역, 물질문화에서 많지는 않지만 꾸준하게 제작되고 있던 단나팔상대각식두의 제작 전통이 지속된 것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서 포자연유형만의 고유 형식의 아니다.
기원전 3세기 이전에 출현한 단나팔상대각식두로는 崗上文化 강상단계의 大連市 崗上 적석묘 13호 묘실의 注口鏤孔豆, 雙遼市 後太平 2지점 07년 채집 두, 西團山文化 또는 사가가유형 전기의 伊通滿族自治縣 杏山 만기층, 通化滿族自治縣 拉拉屯 유적 등을 관련 사례로 꼽을 수 있다.
포자연유형에서 제작, 사용된 두 가운데 서한의 두를 모방하였거나 재현된 것과 청동기시대 제작 전통의 연장선에 놓여져 있는 것 등의 변이를 제외한 나머지 두들은 배신부와 병부 길이 속성에서 각각 일정한 차이를 보이고 있기는 하지만, 전체적인 형태는 물론 기술적 양식에서 공통성을 갖추고 있는 것이 있다.
형태적인 속성으로는 배신부, 병부, 대각부 각각의 기형과 위 세 부위가 결합되어 형성하는 기형 전체 특징을, 기술적인 속성으로는 태토, 혼입물, 소성도, 경도, 색조, 연흑색 물질 도포와 마연 등을 꼽을 수 있는데,
포자연유형 두에서 가장 변별성을 보이고 있는 속성만을 들면, 먼저 형태적인 속성에서는,
첫째 병부가 다른 지역․문화과는 달리 길이에 비해 너비가 넓다든지, 약간의 변이가 있기도 하지만, 대체로 대각을 제외한 병부만의 길이 대 너비 비율 지수가 1.3~1.5에 해당되는 것들이 다수이다.
둘째 중병과 단병이 상당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든지,
셋째 두의 전체 기고에 비해 대각의 저부 너비가 좁고 낮다든지(대각의 높이와 너비가 좁은 까닭에 전체적으로 보면 시각적으로 다소 불안정적인 竪立感을 주기도 한다),
넷째 대각의 기벽선이 짧게 직선 사경하는 것이 많다든지,
다섯째 그 결과 병부와 대각의 전체 기형이 구부가 짧게 사직하는 나팔형을 이루고 있다든지,
여섯째 배신부가 완형인 경우, 최대 구경에 비해 기고가 낮아 낮은 깊이의 기형을 이루고 있다든지 하는 점에서 공통성을 보인다.
기술적인 속성에서는 굵은 사립[粗砂(Coarse Sand), 0.5~1.0mm]이 다량 혼입되어 있음과 동시에 태토와 혼입 정도가 어떠하든, 태토의 외면 색조가 어떠하든 간에, 기표 전면에 걸쳐 연흑색 물질을 0.5~1.0mm 전후로 고르게 도포한 뒤 다시 정밀하게 마연하여 놓은 것들이 적지 않게 확인된다.
이와 같이 성형과 소성 후 기면을 다시 도장 처리하는 방식은 유사한 기형 속성을 보이고 있는 단결-크로우노프카문화와 봉림문화의 두에서도 확인된다. 물론 포자연유형의 두 가운데에는 위의 기형 속성을 갖고 있으면서도 기면에 연흑색 물질을 도장 처리하지 않은 것도 있다.
이러한 형태 및 기술적 속성을 갖추고 있는 두는, 앞서 언급한 것처럼 포자연유형에서 처음으로 출현하여 제2송화강 중상류역 중심의 포자연유형권과 병행 시기는 물론 후행 시기 주변 지역과 물질문화로 확산되었다. 이러한 두를 나의 기존 기원전 3~기원후 4세기 중국 동북 지역 전역에 걸친 광역의 두를 대상으로 한 일반적인 형식 분류안으로는-보다 상위의 기준에서 분류한 것이기에- 양식 및 유형적 특색을 적확하게 드러내기에 어려움이 있다.
이러한 점들을 고려하여, 나는 이 논문에서 포자연유형에 공반하는 여러 두 가운데 위의 속성을 갖추고 있는 특정의 두를 특정 명칭으로 개념화하여 양식과 유형적 특징을 명료화하였다.
이와 관련하여 나는 기왕에 포자연유형 전형의 토기군을 역시 내가 처음으로 정명한 ‘西團山型土器’ 및 ‘大海猛型土器’와 대별되는 개념으로서 ‘泡子沿型土器’로 일괄한 뒤, 이 가운데 弧形內斜頸壺를 ‘泡子沿型壺’, 위 속성을 갖춘 豆를 ‘泡子沿型豆’로 특칭한 적이 있다.
위의 토기를 ‘포자연형’으로 특칭한 까닭은 포자연유형을 대표하는 기종, 기형이기에 문화와 유형명을 표지적 토기에 관칭하는 것이 편리하다는 점과 위의 토기군의 가장 이른 초기 형식이 포자연유형 전기의 대표 유적인 吉林市 泡子沿前山 유적에서 공반 관계를 이룬 채 처음으로 출현한다는 점을 고려하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길림시 泡子沿前山에서 출토된 두는 병부가 상대적으로 짧고 직선형을 이루고 있지 않다는 점에서만 유사할 뿐,
배신부, 대각부(포자연전산F3①), 좁은 봉상 심부(포자연전산F2①) 등에서 전형적인 서한의 두는 물론 이 유적 보다 늦은 시기 포자연유형의 두와도 다르다.
이러한 점을 고려할 때, 포자연전산은 포자연유형 특유 양식 두의 시원 형식이라 할 수는 있지만, 전형적인 속성이 아직 완전히 구비되어 있지 않다는 점에서, 이 유적을 표지로 하여 포자연유형 특유 양식 두를 정명하는 것에는 문제가 있다 생각하였다.
따라서 이 글에서 나의 기존 명칭을 완전히 취소하고, 포자연유형 특유 양식의 두를 길림시 東團山 유적 일대에서 출토․수습된 표본들을 표지로 하여 ‘東團山型豆’로 명칭하였다.
현재 중국 학계에서는 부여 왕성지인 길림시 南城子 성지와 그 배후산인 동단산은 물론 길림시 龍潭山驛 南 및 官地 성지 부근까지를 넓게 지칭하는 개념으로 ‘동단산 유적’이란 유적명을 사용하고 있는데, 이 일원은 부여의 정치경제와 문화의 최중심일 뿐만 아니라 위의 속성을 전형적으로 갖춘 두가 공식적으로 다량 보고되어 있는 상태이다. 아울러 최근에는 길림성박물원에 발굴, 수습된 양호한 완형 개체가 전시되어 있기도 하다.
이와 관련하여 이러한 류의 두를 楡樹縣 老河深 중층 고분군과 길림시 帽兒山 고분군을 표지로 하여 ‘노하심형두’ 또는 ‘모아산형두’라고도 할 수도 있으나, 노하심 중층 고분군의 두는 포자연전산 유적과 동단산 유적의 중간 단계, 즉 아직 동단산형두의 전형성이 갖추어져 가는 중간 과정의 두만이 공반하고 있다. 모아산 고분군은 완전한 전형성을 갖춘 두가 출토되기는 하였지만, 보고서이든, 박물관 전시물이든 보고, 공개되어 있는 개체수가 몇 점에 지나지 않을 뿐 아니라 발굴 조사 내용도 구체적으로 알려져 있지 않다.
이러한 점을 감안하여, 나는 이 논문에서 내가 기존에 '포자연형두'라 명명하던 것을 '동단산형두'로 개념화하였다.
아래는 이 글의 요지이다.
포자연유형에서 제작된 여러 형식의 두 가운데 초기부터 후기까지 전형성을 확보해가며 다량으로 제작된 특정 유형의 두가 있는데, 이 유형의 두는 구경에 비해 기고가 낮은 碗形 중심의 배신부, 기고에 비해 횡폭이 넓은 두툼하고 상대적으로 짧은 병부, 선행하는 다른 지역․문화에서는 유행하지 않은 호선병식 병부, 기고가 낮고 횡폭이 좁아 불안한 竪立感을 주는 대각부, 대체로 직선 사경하는 대각 기벽선, 흑연의 도말과 마연(후기)이 주요한 속성을 이루고 있다. 여기에서는 동단산 유적에서 전형 표본이 가장 많이 출토되었다는 점 등을 고려하여 이러한 두를 동단산형두로 유형화하였다.
나는 중국 동북 지역 토착 문화권 전체의 기원전 3~기원후 4세기 두의 분류 체계를 수립한 적이 있다. 나의 기존 분류 체계를 약간 수정하여 동단산형두를 분류하면, 병부 형태와 길이 비율을 1,2차 기준으로 할 때 장직병식(가A식), 중직병식(가B식), 단직병식(가C식), 장사직병식(나A식), 단사직병식(나B식), 장호선병식(다A식), 단호선병식(다B식), 배신부 기종을 3차 기준으로 할 때 완(a아식), 협나팔상완(c아식), 발(d아식), 옹형발(e아식), 호(f아식), 대각과 배신 전체의 복합적인 구조와 형태를 4차 기준으로 할 때 ㄱ아식, ㄴ아식, ㄷ아식, 흑연 도말 여부를 5차 기준으로 할 때 1(있음)아식, 0(없음)아식으로 분류된다.
포자연문화 포자연유형은 유물 조합을 기준으로 할 때 포자연전산 단계(기원전 2세기), 학고 동산 단계(기원전 1세기), 노하심 중층 고분군 단계(기원후 1세기), 동단산-모아산 고분군 단계(기원후 2~4세기 전반; 1기: 중심 연대 2세기, 2기: 중심 연대 3세기)로 구분된다. 공반 단계 별 동단산형두 각 속성과 형식의 조합 관계를 고려할 때, 동단산형두의 상대적인 변천 관계는 직병형류에서 호선병형류로, 장직병식, 중직병식에서 단직병식으로, 장호선병식에서 단호선병식으로, 완→완, 완형발, 옹형발, 천발, 단경호→완, 완형발, 분형발로, 흑연 도포(도말) 없음(0아식)에서 있음(1아식), ㄱ아식→ㄷ아식으로 변천된다.
동단산형두는 처음부터 분류 기준으로 삼은 여러 속성이 완비된 상태에서 출현한 것이 아니라 점차적으로 전형화되는 방향으로 변모되었다. 이러한 시각에서 동단산형두를 위의 분류 체계와 수준을 상회하는 중범위 수준에서 다시 조망하면, 짧고 두툼한 병부 등 기본적인 요건을 갖추기는 하였지만 병부의 芯部 구조와 형태라든지, 배신부 저부의 형태라든지, 대각 기벽선 처리 등에서 변이가 확인되는 단계, 전기와 후기 중간 수준의 전형성과 변이가 확인되는 단계, 전형성이 확보된 단계의 두로 구분되는데, 나는 이를 각각 東團山型 泡子沿式豆, 老河深式豆, 東團山式豆로 일괄하였다.
포자연문화 포자연유형과 병행과 후행하는 시기 주변 지역, 물질문화에서는 동단산형두와 일부 속성에서 상통하는 유형의 두가 유행하였는데, 제1송화강 중류역 경화유형의 경화형두와 삼강평원 봉림문화의 봉림형두가 그러하다. 경화유형에서는 여러 형식의 경화형두가 제작, 사용되었는데, 병부가 단각화되어 있다든지, 대각이 상대적으로 낮고 좁다든지 하는 점에서 동단산형두와 유사한 면이 있다. 특히 경화형두 가운데 단직병식두는 태토, 색조, 홍색 채회, 배신부 세부 속성에서만 차이가 있을 뿐 동단산형두와 형제 관계라고 할 수 있을 만큼 상당 부분에서 유사한 속성을 공유하고 있다.
이와 관련하여 주목되는 것이 한서문화의 단직병식두이다. 기원전 3세기 한서문화는 사가가유형을 중심으로 광역에 걸쳐 형성되어 있던 장각화된 두 분포권의 변연 지대에 속하여 있었다. 두 기종 자체가 선호되지는 않았지만, 남쪽 지대의 두 제작 열풍에 영향 받아 토착적인 두를 제작하기 시작하였고, 그 결과 출현한 것이 전곽이라사몽고족자치현 동등루고둔 홍석립자의 두툼하면서도 짧은 병부와 낮고 좁은 대각을 가진 완형 배신의 두이다. 홍석립자의 두는 공반하고 있는 홍색 채회 내사경 외반구연 장경호 등 기물 조합을 고려할 때, 아무리 늦어도 기원전 3~2세기 초엽으로 편년된다.
이러한 점들을 고려할 때, 기원전 2세기 한서문화가 남진과 동진하는 가운데 동요하 중상류역과 제1송화강 중상류역에 한서문화를 직접적인 계통 기원으로 하는 포자연문화 서차구유형과 포자연유형이 형성되었고, 이러한 여파 속에서 제1송화강 북안에도 한서문화의 요소가 일부 복합된 경화유형이 형성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이러한 점은 서차구유형과 포자연유형 전기를 구성하는 중심적인 유물 요소가 한서문화에서 조형이 찾아지는 것에서 잘 나타난다. 위와 같은 문화 양상을 고려할 때, 한서문화의 확산과 영향에 따라 동단산형두와 경화형두가 각각 출현하게 되었다고 판단된다.
연변조선족자치주의 단결-크로우노프카문화 후기 유적군에 동단산형두와 토착적인 나팔상대각식두가 공반하는 현상이 확인되는데, 두 유형의 두간에 제작 기법상의 난이도와 기술차가 있고 공반 유적의 중심 연대가 3세기라는 점을 고려할 때, 단결-크로우노프카문화의 토착 수장층들이 동단산형두를 고급 기물로서 수입하여 사용하다가, 285년 모용외의 부여 침공으로 부여 왕실과 주민들이 이 일대로 망명한 뒤 일부 정착하는 사건이 발생하게 되었고, 이후 이 지역에 잔류하게 된 부여 도공들이 현지에서 동단산형두를 생산, 공급하게 되면서 급속하게 확산된 것으로 생각된다.
3세기 후반~5세기에 이르면 봉림문화에서 봉림형두가 제작, 사용된다. 봉림형두는 포자연유형이 아닌 단결-크로우노프카문화의 동단산형두를 조형으로 하여 파생된 것인데, 봉림형두에 나팔상대각식두가 적지 않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든지, 봉림문화의 토기군에 단결-크로우노프카문화 고유의 주상파수가 부가된 토기가 포함되어 있는 점을 통해서 알 수 있다. 봉림형두는 고고학적인 조사 정황과 역사 기록을 대비하여 볼 때, 3세기 중반 전후에 발생하였을 것으로 여겨지는데, 봉림형두 출현 시점부터 봉림문화의 철기문화 수준이 현격하게 제고되는 것으로 보아 봉림형두에 일정한 상징성을 부여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