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회사 Episode_ 금욕주의와 수도원 제도
일찍이 초대교회의 믿음과 행위 속에 살금살금 기어들어와 복수를 시작한 이교는 단 한 순간도 교회에서 완전히 제거된 적이 없다. 또한, 이교는 언제나 신자들의 믿음이 저하되거나 열성이 식을 때에 이단이나 부패의 핵심 세력으로 바뀔 준비가 갖추어져 있었다.
4세기 말에는 로마 카톨릭의 금욕주의와 그 뒤를 따른 수도원제도가 특징이었다. 당시 투르의 주교 마르틴은 프랑스 루아르 강의 제방 주변에 프랑스 최초의 수도원을 설립하였다. 그의 극단적 엄격한 금욕주의는 거짓 기적들에 관한 지어낸 과장된 보고들과 연결되면서 서유럽에서 금욕적 생활에 대한 열정을 불러일으켰다. 복음의 단순성을 잃은 이 종교제도는 한편으로는 허영심 가득한 우쭐함과 영적 자만과 불가사의한 권세에 대한 요구를, 다른 한편으로는 거짓 겸손과 의기소침이었다. 이 둘 모두는 그리스도의 완전하고도 충분한 희생에 관한 가르침을 훼손시키는 금욕주의라는 잘못된 제도의 소산이었다.
이 금욕주의는 마르틴과 같은 사람들의 고통과 선행에 과도한 가치를 부여했다. 이교의 제단에서 기독교의 성당으로 옮겨져 온 종교적 관습들이 한 죽은 성인에 대한 기억 때문에 교묘하게 의식이라는 이름으로 존귀히 여김을 받았다. 더 나아가 교황 겔라시우스는 5세기에 서방 교회에 이교도의 축제인 루페르칼리아(이 날부터 새가 교미를 시작한다는 고대 로마의 풍요 기원제)를 추가하기 위하여 ‘빛의 행렬’과 더불어서 정결 축제를 소개하였다.
수도원 제도가 금욕주의를 바싹 따랐다. 저스틴 마터(A.D. 150)의 잘못된 가르침은 초기의 배교자 중 매우 두드러진 인물이었다. 그의 제자인 타티안이 그의 뒤를 따랐고, 타티안은 알렉산드리아의 교리문답 학교의 창시자 중 한 사람인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를 가르쳤다(A.D. 190). 클레멘트는 자신이 이교의 철학을 섞지 않은 복음은 전하지 않겠노라고 공언하였다. 하지만 독신주의에 대한 칭송을 시작하는 일은 그의 후계자요 제자인 오리겐에게 넘겨졌다. 오리겐은 금욕을 위해 스스로 자신을 불구로 만들었으며 사도들이 전해 준 성경을 자신의 이교적인 사상에 맞게 편집하여 오늘날 알렉산드리아 계열 많은 성서의 모체가 되었다.
수도원 제도는 불교에서 온 것임이 분명한데, 기독교 안에는 이집트에서 처음 발견되었다. 수도사 중에는 두 종류가 있었다. 첫째는 광야에서 어두침침하며 사람이 살지 않는 곳을 찾아서 홀로 거하는 부류였고, 둘째는 수사로서 수도원 공동체를 이루고 사는 부류였다. 교회의 최고 우두머리 외에는 그 어떤 영적 권위에도 복종을 거부한 그들은 그 어떤 회중에 의해서도 움직이지 않고 오직 교황권의 명령에 따라서만 움직이는 기동력 강한 방대한 수의 군대 조직이 있었다.
수사들은 때를 따라 겉치레와 땅바닥에 납작 엎드리거나 무릎을 꿇는 행위들을 하였다. 이 모든 외형적 행위들은 교회의 제도가 점차로 증가되어 가고 있음을 알려주는 징후들로 교황 교회가 정부와 연합하는 일을 위해 길을 닦는 데 도움이 되기도 하였다.
제롬은 이러한 시기에 교황권의 라틴어 성경을 만들 때 잘못 전해진 오리겐의 조작된 헬라어 사본을 비롯한 전와된 사본을 사용해서 이미 초기부터 번역되어 그리스도인들에게 널리 사용되던 이딸라 성경(A.D.157)을 대체하는 새로운 라틴어 성경(5세기)을 만들어 내었다. 이것은 이교적인 교리를 가져온 자신들의 합리화를 위한 것이었다.
금욕주의와 수도원제도의 선동자와 그 히스테리의 영향은 어떠했을까? 다음 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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