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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게시판 스크랩 10대뉴스 1970년 국내 10대 뉴스
겨울비(오덕희) 추천 0 조회 72 14.08.13 10:52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1970년 국내 10대 뉴스
박정희 대통령 8·15선언

박정희 대통령이 1970년 8월 15일 중앙청 광장에서 열린 제25주년 광복절기념 경축사에서 "북한은 무장공비를 남파해 폭력으로 대한민국을 전복하고 적화통일하려는 야욕을 버리고 이를 실천하면 남북한에 가로 놓인 인위적 장벽을 단계적으로 제거해 나갈 수 있는 획기적이고도 현실적인 방안을 제시할 용의가 있다"고 선언했다. 이 선언은 많은 선행조건을 제시했지만 결과적으로 정부의 대북한정책에 전기를 마련한 것으로 국내외의 비상한 관심을 모았다. 세계적 긴장 완화 추세와 '닉슨 독트린'에 따른 미국의 대한 정책 변화와 일반 대중들의 장기 집권에 대한 반발 등 국내 정세의 불안 이 같은 대북 선언의 배경이 됐다.

신민당 대통령후보에 김대중씨 지명

1970년 9월 29일 서울시민회관에서 열린 신민당 임시전당대회에서 김대중씨가 1971년 신민당 대통령후보로 지명됐다. 김대중, 김영삼, 이철승 의원의 40대 후보 3명이 경합한 끝에 제1차 투표에서 유진산 총재가 추천한 김영삼 후보가 최다 득표자가 됐으나 후보지명의 요건인 과반수를 넘지 못해 2차 투표가 실시됐다. 2차투표 결과 총투표자 8백84명의 과반수인 4백58표를 얻어 김대중 후보가 대통령후보가 됐다. 김영삼씨는 4백10표를 얻었다. 2차투표 직전 이철승 후보가 김대중 후보를 지지하고, 김영삼 후보를 지지하던 비주류계가 이탈해 대세를 뒤집었다. 대통령후보가 된 김대중씨는 후보수락연설을 통해 "앞으로 당이 단결해 선거에서 이겨 정권을 교체하도록 전력을 다하겠다."고 다짐했다.

경부고속도로 개통

번영의 대동맥이며 민족 중흥의 이정표인 경부고속도로가 1970년 7월 7일 개통됐다. 총길이 428km에 걸쳐 4차선 아스팔트가 깔리면서, 서울∼부산 천리길이 4시간 거리로 줄어들었다. 이로써 우리나라도 고속도로시대에 진입했다. 기업들은 운송기간이 단축될 것이라 좋아했고, 농어민들은 생필품을 값싸게 살수 있다고 반겼다. 박정희 대통령이 고속도로 건설을 지시한 것이 1967년 11월. 1968년 2월 착공 이후 2년 5개월만에 완공된 초스피드 건설이었다. 당시 공사비가 총 4백29억원으로 1km당 1억원이 소요된 절약형 건설이기도 했다. 또 공사에 동원된 연인원은 8백50여만명에 달했으며 쌓아올린 흙이 트럭 1천6백만대분이다. 박정희 대통령이 대구공설운동장에서 열린 준공식에서 "가장 싼값으로 가장 빨리 이룩한 대예술작품"이라고 자랑할 수 있었던 공사였다.

수학여행버스 열차 충돌로 46명 학생 사망

1970년 10월 14일 오후 4시20분경 충남 아산군 백방면 모산역 북쪽 약1km지점에 있는 건널목에서 현충사에 소풍갔다 귀경하던 서울 경서중학교 학생 76명을 태운 서울 연흥관광 소속 관광버스가 서울발 장항행 제5열차에 왼쪽을 들이 받혀 휘발유 탱크가 터지면서 불길에 휩싸여 80m나 튕겨나갔다. 이사고로 학생 45명과 운전사가 숨지고 30명이 중상을 입었다. 사고는 버스운전사가 '일단정지' 수칙을 지키지 않았고 이 건널목에는 날마다 각종 차량이 5천여대나 오가는데도 간수와 차단기도 없이 자동경보기만 설치한데다 담임교사가 감독을 소홀히 해 일어났다. 또 3일 후 원주 터미널에서 열차와 열차가 충돌, 수학여행길의 서울 인창고교 학생들과 교사 15명이 사망했다.

여객선 남영호 침몰로 326명 익사

1970년 12월 15일 새벽 1시30분경 전남 여수시 남쪽 소리도 근해에서 여객선 남영호(3백62t)가 침몰, 승객 3백26명이 사망하고 12명만 살아났다. 제주 서귀포와 부산을 오가는 정기여객선 남영호는 14일 오후 5시 서귀포항을 출발, 성산포항을 거쳐 부산으로 가던 중에 참사를 당했다. 사고는 수확한 감귤을 적정 화물적재량 1백49t의 3배가 넘는 5백여t이나 실은데다 화물을 갑판 앞뒤와 선체 왼편에 편중 적재해서 선체가 5도 가량 기운 상태에서 운향했기 때문인 것으로 밝혀졌다. 이 사건으로 남영호의 SOS 발신과 수신문제를 비롯, 경찰의 임검태세와 해운행정, 해경의 구조활동 지연 등이 정치문제가 됐다. 부산지검은 남영호 침몰사고와 관련, 선장 강태수씨와 서귀포경찰서 수상파출소장 양원필 경사 등 4명을 구속했다.

'오적(五賊)' 필화사건으로 김지하 구속

1970년 6월 2일 재벌, 국회의원, 고급공무원, 군장성, 장차관을 의미하는 풍자시 '오적(五賊)'을 사상계에 발표한 시인 김지하와 사상계 발행인 부완혁, 편집장 김승균씨 등이 반공법 위반혐의로 구속됐다. 수사기관은 이 시를 신민당 기관지 '민주전선'에 게재한 편집인 김용성씨도 함께 구속했다. '오적'은 처음 사상계 1970년 5월호에 게재되었으나 이때는 문제가 되지 않다가 한달 뒤 야당인 신민당 기관지 '민주전선' 6월 1일자 40호에 전재된 것이 말썽이 돼 이날 관련자 전부가 구속됐다. 이들의 구속이 정치적 논쟁으로 비화되자 문공부는 1970년 9월26일자로 사상계 등록을 말소시켰다.

정인숙 여인 피살

1970년 3월 17일 밤 11시경 제3한강로변에 세워진 검은 코로나 승용차 안에서 미모의 한 여인이 피살된 사체로 발견됐다. 경찰은 현장에서 허벅지에 관통상을 입고 신음중이던 운전사를 병원에 옮기는 한편, 즉각 수사에 착수했다. 경찰 조사결과, 피살된 사람은 정인숙이라는 여인이고, 범인은 운전사인 그녀의 오빠 정종욱이었다. 수사결과에 따르면 정종욱이 사생활이 문란했던 여동생 정인숙에 대해 분격한 끝에 권총으로 살해하고 자신도 자살하려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경찰의 수사발표를 곧이곧대로 믿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정인숙은 이른바 고급 접대부로서 정부의 고관대작들만을 상대로 하였던 것인데, 이 사건이 터짐으로써 고위층의 부도덕한 타락상이 세상 밖으로 노출되고 말았던 것이다. 사건의 전모는 지금까지도 정확히 밝혀지지 않고 있어 설(說)만이 무성할 뿐이다.

와우아파트 붕괴

1970년 4월 8일 서울 마포구 창천동에 있는 와우시민아파트 15동 건물 전체가 붕괴되어 33명이 사망하고 39명이 중경상을 입었다. 1969년 12월에 준공한 후 불과 4개월만에 일어난 붕괴사고는 조사결과, 건물을 60도 경사진 산중턱에 세운데다 지중량이 아예 없고 기둥 하나에 19mm짜리 철근 7개를 써야하는데 5개밖에 넣지 않았으며 시멘트 배합량이 기준에 미당하는 부실시공인 것으로 밝혀졌다. 또 이공사를 수주한 대퐁건설이 직접 시공하지 않고 무면허 업자 박영배씨에게 하청한 것도 사고원인으로 지적됐다. 이 사고로 아파트 부실공사에 대한 인책문제가 국회에까지 비화돼 김현옥 서울시장이 물러나는 사태까지 빚었다.

전태일 분신자살

가난 탓에 초등학교 4학년을 중퇴하고 밑바닥 인생을 전전하다 서울 평화시장 재단사가 된 전태일. 그는 1970년 11월 13일 오후 1시30분경 열악한 노동조건의 개선과 근로기준법 준수를 요구하며 평화시장 앞길에서 분신자살했다. 대구 출신으로 초등학교 중퇴 학력이 전부인 전태일은 17세부터 평화시장 피복공장에서 일했다. 평균 연령 15세, 하루 근무 시간 14시간, 임금 50원, 근무자 90%가 위장병 환자. 이것이 1970년대 당시 박정희 정권이 '수출 역군'이라며 치켜세우던 청계천 봉제공장 여공들의 근로여건이었다. "내 죽음을 헛되이 말라"며 자신의 목숨을 바친 전태일 분신자살은 노동계뿐만 아니라 70년대 지식인, 학생, 재야 민주화운동에 큰 충격을 준 일대 사건이었다. 그의 분신을 계기로 노학연대, 지식인의 노동현장 참여 등 사회운동의 새로운 지평이 열렸다.

영왕 이은 타계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태자 영왕이 1970년 5월 1일 서울에서 향년 73세로 별세했다. 이름은 은(垠)으로 고종의 일곱째 아들이고 순종 황제의 이복 동생이다. 1900년에 영왕(英王)에 책봉되었다가 1907년 황태자로 책립되었으나 그 해 12월 통감으로 부임한 이토 히로부미에 의해 11세의 나이로 일본에 강제 끌려갔다. 영왕은 한국에 이미 약혼자가 내정되어 있었으나 일본 왕실의 마사코(方子)를 비로 맞았다. 1910년 한일합병으로 순종황제가 폐위되자 황태자에서 왕세제로 불렸다. 일본의 육군사관학교와 육군대학을 졸업해 중장까지 진급한 그는 해방후 귀국을 시도했으나 이승만 대통령의 반대로 조국에 발을 들여놓을 수 없었다. 일본에서 고난의 세월을 보내다가 1963년 11월 56년 만에 환국할 수 있었다. 귀국 후에도 7여년 동안 병상에서 지내다가 이날 한많은 일생을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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