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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빙점] 몸치장
4월. 도오루는 중학교 1학년, 요코는 초등학교 2학년이 되었다.
‘드디어 내일 무라이가 온다.’
저녁 식사를 마치고 게이조는 소파에 기대어 그 사실을 나쓰에에게 말할까말까 망설이고 있었다. 나쓰에는 부엌에서 설거지를 하고 있었다.
“열심히 공부할 거야.”
하고 말하며 도오루는 중학교 새 교과서에 흥미가 있는지 요즘은 날마다 자기 방에 틀어박혀 있었다.
요코는 방에서 열심히 동화책을 읽고 있었다.
사위는 조용했다.
어느 집에선지 문에 달린 방울 소리가 아련히 들려왔다.
“봄이구나.”
게이조는 이렇게 중얼거렸다. 눈이 쌓여 있을 때에는 들을 수 없던 소리였다.
나쓰에가 앞치마를 벗으며 방으로 들어왔다.
“아니, 이층에 계신 줄 알았는데요.”
“응.”
게이조는 나쓰에를 바라보았다. 요즘 들어 나쓰에의 살결이 더 아름다워진 것이 이상하게 마음에 걸렸다. 봄이 되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서 게이조는 계속 나쓰에를 바라보았다.
무라이와의 재회를 대비하여 날마다 공들여 피부를 다듬고 있다는 것을 게이조는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러나 슬쩍 만져 보고 싶을 정도로 부드럽고 반들거리는 살결을 의지하자 무라이와는 절대 만나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런 한편 무라이와 나쓰에가 다시 만나는 장면을 자기 눈으로 분명히 보고 싶다는 생각도 전혀 없지는 않았다.
“요코, 이제 그만 자지 그러니.”
나쓰에는 게이조 앞에서는 요코에게 매우 상냥했다. 요코는 책을 읽기 시작하면 남의 말이 귀에 들리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런 줄 알면서도 나쓰에는 마음속으로 대답을 하지 않는 요코가 못마땅했다.
“아직 일곱 시 반밖에 안 되었소. 벌써 자는 건 너무 일러요.”
“그래요?”
“오늘 다카기에게서 전화가 왔소. 무라이는 내일 오후 두 시 오십 분에 아사히가와에 도착한다더군.”
나쓰에는 허리를 굽혀 차를 타고 있었다. 그래서 게이조는 그녀의 눈빛을 볼 수 없었다.
“그래요?”
“당신도 마중을 나가는 게 좋지 않겠소?”
“네, 갈게요.”
나쓰에의 목소리는 아무 거리낌도 없었다.
게이조는 어느 정도 안심했다.
“내일은 마침 일요일이라 나와 사무장, 그리고 에구치 간호원장이 마중을 나가기로 했소.”
“다카기 씨도 함께 와요?”
“그럴 거요. 다카기는 무라이의 뒤를 봐주고 있으니까. 어느 정도 자리가 잡히면 그의 색시감을 물색해야겠다더군.”
게이조의 말에 나쓰에는 움찔했다.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나쓰에는 갑자기 손으로 입을 막고 하품을 참는 시늉을 했다. 그것은 무라이의 결혼 따위에는 전혀 관심이 없다는 듯이 보이려는 행동이었다.
“저 목욕 좀 해야겠어요.”
나쓰에는 일어나서 가 버렸다.
게이조는 나쓰에가 방에서 나가자 갑자기 ㅈ불안해졌다. 나쓰에는 무라이를 잊지 않고 있는 것 같았다. 만일 8년 전에 무라이의 품에 안겼다면, 그것은 아마도 결혼 후 최초의 부정이었을 것이다. 처음으로 남편을 배신한 것이 그녀의 마음속에 아무런 미련도 남기지 않았을 리가 없다.
‘그렇게 간단히 무라이를 잊을 수 있을까?’
게이조는 열심히 책을 읽고 있는 요코를 바라보았다.
‘나쓰에와 무라이 사이에 아무 일도 없었다면, 나는 절대로 저 애를 맡으려고 하지 않았을 것이다. 어쩌면 요코는 아마 영원히 만났을 리가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부모와 자식이라는 이름으로 한 지붕 밑에서 근 8년 동안이나 살아왔다.’
이렇게 생각하니 게이조는 요코가 갑자기 가엾게 생각되었다.
‘만일 내가 맡지 않았더라면 요코는 어느 집에서 어떠헥 자라고 있었을까?’
게이조는 일어섰다.
“요코.”
요코는 책장을 넘기려는 참이었다.
“왜요?”
“아직 안 잘 거야? 벌써 여덟 시야.”
“아, 정말.”
요코는 시계를 쳐다보고 방긋 웃었다. 그 천진스러운 모습이 게이조의 마음을 울렸다.
“엄마는요?”
“목욕해.”
“그래요? 그럼 안녕히 주무세요, 아빠.”
요코는 복도를 달려서 사라졌다. 욕실에서 나쓰에가 뭐라고 말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I am a boy.”
“I am a girl.”
게이조는 서재에 들여가려다가 멈춰 서서 영어 책을 읽고 있는 도오루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그의 가슴속에는 이십여 년 전 자신의 소년 시절이 되살아났다. 딱딱한 판자 같은 새하얀 표지의 리더스 북을 처음 펼쳤을 때의 기쁨이 어제 일처럼 생생하게 떠올랐다.
지금 도오루가 쓰는 방이 그때는 게이조의 방이었다. 게이조는 문득 도오루의 방 문을 열었다.
“공부하고 있구나.”
게이조는 좀처럼 도오루의 방에 들어가지 않았다. 도오루는 이상한 눈추리로 바라보면서 말했다.
“웬일이세요, 아빠?”
“아냐, 방금 네가 영어책을 읽는 소리를 듣고 아빠 어렸을 때 생각이 났어. 아빠도 그땐 이 방을 쓰고 있었지.”
게이조는 새삼스럽게 그리운 듯이 방안을 둘러보았다. 도오루는 그런 게이조의 감상 따위에는 조금도 관심이 없다는 듯이 말했다.
“아빠, 저 요새 엄마가 싫어졌어요.”
게이조는 부드럽게 웃었다. 그러면서 마음속으로,
‘나도 그런 때가 있었지. 그게 바로 반항기라는 거야.’
하고 생각했다.
도오루는 무언가 말하고 싶은 듯이 아버지의 얼굴을 가만히 보다가 입을 열었다.
“역시 요코는 얻어온 아이죠?”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 도오루?”
“엄마는 요코에게 너무 쌀쌀한 것 같아요, 아빠.”
도오루는 어른다운 표정으로 깊이 생각하는 듯이 말했다.
“엄마가 요코에게 쌀쌀할 리가 없어. 오히려 무척 귀여워하잖아.”
“그런가요? 전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데요. 학예회 때 모두 맞춰 입는 옷도 만들어 주지 않고……”
“응, 그건 점원이 그만 잊어버렸다고 엄마가 말하더구나.”
“그럼 그건 그렇다 치더라도 학예회를 보러 가긴 했어야 하잖아요? 다쓰코 아줌마도 보러 갔었는데.”
중학교에 들어간 후로 도오루는 말시도 약간 어른스러워졌다.
“엄마는 그때 몸이 불편했을지도 몰라.”
게이조는 나쓰에가 그 비밀을 알게 되었으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만일 요코의 출생에 대해 알았다면, 나쓰에는 절대로 요코를 집에 두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게이조에게 대들며 따져 물었을 것이다. 어쨌든 이런 조용한 나날이 계속될 리가 없었다.
게이조는 도오루의 생각을 신경질적인 소년다운 억측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얕잡아 보았다.
“그런데다가………”
도오루는 어물어물했다.
“그런데다가 또 뭐?”
“칫.”
도오루는 입을 다물었다.
“무슨 얘기야? 말을 하려다 그만두는 게 아냐.”
“학예회 때 우리 반 여자아이가 요코를 얻어온 애라고 했어요.”
“그래? 너는 아빠의 말보다 남의 말을 더 믿니?”
“………”
“정 마음에 걸리면 시청에 가서 알아보렴. 얻어온 아이라면 반드시 양녀로 되어 있을 테니까.”
게이조는 이렇게 말하면서 도오루의 책상 위에 있는 책꽂이를 들여다보았다. 도오루는 얼른 손을 내밀어 그 중에서 책 한 권을 재빨리 빼내 책상 서랍 속에 감췄다.
“무슨 책이야?”
“아무것도 아니에요.”
“아무것도 아니라면 감출 필요 없잖아?”
게이조가 약간 엄하게 말하자 도오루는 마지못해 서랍을 열었다.
“아니 문집 아니냐? 이런 거라면 감출 필요 없잖아?”
게이조는 차례를 죽 훑어보았다.
“6학년 때의 문집이니?”
도오루는 대답하지 않고 게이조의 얼굴을 흘끔 바라보았다.
<강물의 수영>, <아사히 산의 스키 대회>, <미술 시간>, <6학년이 되어서> 등등의 제목 속에서 <죽임을 당한 여동생>이라는 글자가 게이조의 눈에 뛰어들었다. 그 아래 도오루의 이름이 씌여 있었다.
“여기서 읽으시면 싫어요.”
“그래?”
게이조는 일어나 방에서 나왔다. 그는 서재에 들어와 숨을 죽이고 도오루의 작문을 읽기 시작했다.
<죽임을 당한 여동생>
6학년 2반 쓰지구치 도오루
내 형제는 여동생 하나밖에 없다. 그러나 사실은 둘이 있어야 한다. 지금 살아 있다면 3학년이나 4학년이 되었을 것이다. 이름은 루리코였다.
1946년 7월 21일은 루리코가 죽은 날이다. 7월 21일인 어제는 손님들이 몰려와 북적거렸다.
스님도 손님들도 모두 술을 마시거나 음식을 먹으면서 즐거워하는 것 같았다. 사람이 죽은 날인데도 즐거운 걸까 하고 나는 어쩐지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여동생인 요코는,
“축제는 떠들썩해서 재미있어.”
하고 무척 기뻐했다. 어제는 아사히가와의 축제일이었다. 1학년인 요코는 아마도 축제로만 생각했을 것이다. 그런데 엄마가,
“요코, 축제가 아냐.”
하고 말하면서 갑자기 울음을 터뜨렸다.
그때까지 엄마는 부엌에 드나들거나 손님들과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나는 어쩐지 이상한 생각이 들어 요코를 데리고 밖으로 나갔다.
“엄마는 왜 운 거야?”
하고 요코가 물었다.
“그게 말이야, 루리코가 죽은 날이라서 생각나서 그랬을 거야.”
“아주아주 오래 전에 죽었는데 왜 울어?”
요코가 이상한 듯이 물었다.
“아주 오래 전에 죽어도 생각이 나면 슬퍼져. 그런데 루리코는 숲 저쪽 강변에서 나쁜 놈에게 죽임을 당했어. 그래서 더욱 슬픈 거야.”
하고 내가 말했더니 요코는 깜짝 놀라 새파랗게 질려 버렸다. 아빠도 엄마도 루리코가 죽임을 당한 얘기를 하지 않아 요코는 아무것도 몰랐던 모양이었다.
요코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린 것을 보니 말하지 말 걸 그랬다, 실수했다고 나는 생각했다. 하지만 사실이니까 말해도 상관없는 일이었다.
루리코는 내가 다섯 살 때에 죽임을 당했다. 그때 루리코는 세 살이었다. 그때 일을 나는 뚜렷이 기억하고 있지 않다. 다만 강변에 사람들이 모여 울고 있었던 것 같다.
지금까지 나는 루리코가 죽임을 당한 것을 생각하기 싫었다. 하지만 나는 6학년이다. 최고 학년이다. 이렇게 생각하고 이번에는 천천히 루리코의 일을 생각해 보기로 했다.
‘누가 죽였을까? 범인은 잡혔을까? 사형에 처했을까? 무엇 때문에 루리코와 같은 어린애를 죽였을까? 어떻게 생긴 놈일까?
하고 생각했다. 그러나 눈썹이 송충이 같고 눈을 무섭게 굴리는 나쁜 놈의 얼굴이 눈앞에 떠올랐다. 루리코의 얼굴은 완전히 잊어버렸다. 불단에 사진이 걸려 있으나 나는 가능한 한 보지 않으려고 한다. 간혹 보아도 내가 본 루리코와는 다른 것 같다.
나는 숲속의 나무에 걸터앉아 오랫동안 루리코와 법인에 대해 생각했다. 너무 오랫동안 생각했는지 옆에 있던 요코는 어디론가 놀러 가 버렸다.
루리코는 죽임을 당했을 때 얼마나 무서웠을까 하고 생각하니 나는 가슴이 메어졌다. 그리고,
‘사람은 죽으면 어디로 갈까? 천국일까? 정말로 천국이나 지옥이 있을까?’
하고 생각했다. 언젠가 축제에서 6가에 있던 가설 극장을 보니 지옥 그림이 걸려 있었다.
뾰족한 산에서 귀신에게 쫓겨 도망치는 죽은 사람의 그림이 무척 징그러워 보였다. 하지만 루리코는 지옥에야 가지 않았겠지. 조금도 나쁜 짓을 하지 않았으니까. 그러나 정말 지옥이 있다면, 범인은 반드시 지옥에 갈 것이다. 나는 어디로 갈까? 아직 알 수 없다.
어쩐지 궁금한 일이 많아졌다. 여러 가지 일을 알 수 있도록 빨리 어른이 되고 싶다.
요코가 쐐기풀과 빨간 클로버를 많이 따 왔다. 요코는,
“이 꽃 루리코 언니에게 줄 거야.”
하고 말했다. 우리는 숲속에 작은 돌을 쌓아 올려 무덤을 만들었다. 나는 어쩐지 어린애 같은 장난 같은 기분이 들었으나, 요코가 애써 꽃을 따 왔기 때문에 무덤을 만들어 주었다. 요코는 손을 모으더니 오랫동안 뭐라고 빌고 있었는데,
“뭘 빌었니?”
하고 물었더니,
“루리코 언니가 빨리 살아나서 요코와 오빠랑 같이 놀 수 있게 해 달라고 빌었어.”
하기에 나는,
“뭐야? 바보같이. 죽어서 불에 태워져 뼈만 남았단 말이야. 다시 살아날 수는 없어.”
하고 말했다. 요코는 아직 1학년이었기 때문에 그런 어리석은 말을 해도 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죽임을 당한 여동생이 정말 가엾어서 견딜 수 없다. 그래서 나는 죽은 여동생 몫까지 요코를 귀여워하려고 한다.
게이조는 도오루의 작문을 읽고 자신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
게이조의 소년기는 학교에 가서 공부를 하고 강에 가서 수영을 하거나 책을 읽으면서 순조롭게 지났다. 적어도 ‘한 여동생은 죽임을 당했다’, 또 ‘한 여동생은 얻어온 아이다’라는 복잡하고 어두운 그림자 따위는 게이조의 생활에는 없었다.
‘가엾은 도오루.’
게이조는 새삼스럽게 요코를 맡은 것을 후회햇다.
‘도오루의 앞날에 어떤 생활이 기다리고 있을까?’
오로지 나쓰에의 부정에 분노하여 사이시의 자식을 기르게 하기 위해 요코를 데려오는 바람에 검은 그림자가 지금 자기 집 전체를 뒤덮고 있다는 것을 게이조는 깨닫게 되었다.
‘결국은 복수하려고 한 나 자신이 가장 뼈아픈 복수를 당하게 되는 것이 아닐까?’
갑자기 게이조는 내일 아사히가와로 돌아오는 무라이의 일이 걱정스러웠다. 어쩐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무엇 때문에 무라이의 복직을 허락했을까?’
다만 다카기에게 나쁘게 비치고 싶지 않다는 자신의 어리석음이 저지른 일이었다. 지금 도오루의 작문을 읽은 게이조는 요코를 맡아 키운 것을 후회하고 있었다. 무라이의 복직도 크게 후회하게 되지 않을까 하고 생각하니 자기 자신이 너무도 어리석에 여겨졌다.
‘요코나 무라이의 일은 되도록 피했어야만 했다.’
이렇게 생각하면서 게이조는 창가로 다가가 초록색의 두꺼운 커튼을 약간 젖혔다. 직각으로 꺾인 별채에 요코의 방이 있었다.
그 방은 벌써 불이 꺼져 있었다. 2학년인 요코가 그 어두운 방에서 혼자 자고 있을 모습을 상상하니, 문득 게이조는 요코에게 사과하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무라이와 나쓰에가 8년 전 그 날 루리코를 밖으로 내보내지만 않았더라면 루리코는 죽임을 당하지 않았을 것이다. 루리코는 사이시를 만나지 않았을 테니까. 그리고 요코는 친아버지인 사이시와 어디선가 살고 있을 것이다.’
사건의 원인은 역시 무라이와 나쓰에에게 있다고 생각되었다.
어두운 뜰에 갑자기 전등빛이 쫙 퍼졌다. 게이조 부부의 침실에 전등이 켜진 것이다. 나쓰애가 목욕탕에서 나온 모양이었다. 그녀가 이불이라도 펴고 있는지 때때로 검은 그림자가 뜰에 흔들렸다.
‘나쓰에는 목욕탕에서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게이조는 지금 나쓰에의 마음을 차지하고 있는 것은 오직 무라이뿐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생활에서 어떻게든 벗어날 방법은 없을까 생각하며 게이조는 도오루의 작문으로 눈을 돌렸다.
‘그래서 나는 요코를 죽은 여동생 몫까지 귀여워하려고 한다.’
하는 마지막 대목이 게이조의 마음을 아프게 찔렀다.
‘요코가 사이시의 딸이라는 것을 알고도 나와 나쓰에와 도오루가 진심으로 요코를 사랑할 수 있다면 그 이상 바람직한 일은 없을 텐데…….’
나쓰에는 속옷에서 겉옷에 이르기까지 새것으로 말끔히 갈아입고 있었다. 무라이가 다시 쓰지구치 병원으로 돌아온다는 것을 알고 몰래 마련한 것이었다. 하오리도 허리띠도 게다도 모두 새것이었다.
그것이 무라이에 대한 나쓰에의 마음이었다. 게이조의 아내로서는 용서받을 수 없는 일이었다. 이런 용서받을 수 없는 마음을 새 옷으로 휘감고 나쓰에는 역 앞에서 차를 내렸다.
이미 게이조와 사무장이 나와서 뭐라고 이야기를 누누고 있는 것이 보였다. 나쓰에의 모습을 보자 사무장은 다리를 질질 끌면서 다가왔다. 그의 다리는 나면서부터 그랬다고 들었다. 그 늙은 사무장은 서 있을 때에는 평범하게 보였지만 걸으면 이상한 위엄이 있었다. 겸허하고 점잖아 보였다.
“이거 수고가 많으시군요…….”
쓰지구치 병원의 사무장으로 일해 온 긍지 같은 것이 그를 믿음직스러운 사람으로 보이게 했다.
“안녕하셨어요?”
나쓰에는 얌전히 고개를 숙였다. 게이조는 흘끔 나쓰에를 바라보기만 했을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 간호원장이 잠자코 미소를 지었다. 말이 없었으나 인상은 나쁘지 않았다.
게이조는 나쓰에가 새 옷으로 갈아입은 데다 무척 생기 있어 보이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 짙은 남색 기모노와 하오리에 흰 레이스 숄을 두른 차임이 나쓰에의 아름다움을 한결 돋보이게 했다. 사람들이 나쓰에의 아름다움에 압도되어 몰래 훔쳐보는 것을 게이조도 알아처렸다.
‘돌이킬 수 없는 사태가 벌어질지도 모른다.’
게이조는 나쓰에와 무라이가 서로 얼굴을 마주치는 순간의 눈빛을 잘 보아 둬야겠다고 생각했다.
억제하려고 해도 억제할 수 없는 마음의 움직임이 자연스럽게 얼굴에 나타나는 것을 나쓰에 자신도 잘 알 수 있었다. 자기의 아름다움에 무라이도 놀랄 것이라고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설레었다.
‘앞으로 1분이야.’
나쓰에는 1분이라는 시간의 길이에 놀라면서 그 1분이 지나가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사무장이 무어라고 말을 걸어 와도 제대로 맞장구를 칠 수 없었다. 그 초조한 자신의 표정에 남편이 날카로운 시선을 던지고 있다는 것도 그녀는 알아차리지 못했다.
기적 소리가 울리고 기차가 홈으로 기세 좋게 들어왔다.
“아사히가와, 아사히가와.”
확성기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맞추듯이 기차는 차츰 속도를 늦추더니 드디어 멈춰 섰다.
나쓰에는 사무장이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쪽으로 얼굴을 돌렸다. 다카기가 손을 들고 웃는 것이 보였다. 그러나 무라이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다카기가 사람들에게 밀리면서 그 육중한 몸을 옆으로 돌려 개찰구를 빠져 나왔다.
‘무라이 씨는?’
나쓰에는 다카기의 주위로 눈을 돌렸다. 무라이의 모습은 여전히 보이지 않았다.
“야, 이거 참.”
다카기가 큰 소리로 말했다. 그 뒤에 따라오는 뚱뚱한 사나이를 보았을 때 나쓰에는 자신도 모르게 소리를 지를 뻔했다. 거기에는 키가 후리후리한 그 옛날의 무라이는 없었다. 그러나,
“이거 참 반갑습니다.”
하고 말하는 목소리는 분명 무라이의 것이었다. 그러나 부석부석하고 윤곽이 희미해진 그 얼굴에서는 그 옛날 무라이의 멋진 용모는 찾아볼 수 없었다. 그는 어딘지 약간 찌들어 있었다. 7년 반에 걸친 요양 생활에서 비롯된 피로 같은 것이 얼굴에 나타나 있었다.
‘난 기껏 저런 남자에게 몸과 마음을 맡기려고 이토록 목을 매고 기다리고 있었던가?’
나쓰에가 분명히 실망의 빛이 떠오른 눈을 싸늘하게 치뜨는 것을 게이조는 재빨리 알아차렸다.
“이제 몸은 괜찮소?”
게이조는 자기가 듣기에도 우스울 정도로 쾌활한 목소리로 무라이에게 말을 걸었다.
“그곳을 떠날 무렵에 약간 감기가 들긴 했지만요.”
무라이는 게이조에게 정중히 인사를 하고 나서 나쓰에 곁으로 다가왔다. 무라이는 그리웠다는 듯이 웃음을 던졌으나, 나쓰에는 정색을 하고 형식적인 인사만 했다.
나쓰에가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이런 초라한 사나이가 아니었다. 그녀가 몇 번이나 가슴에 그린 무라이와의 재회는 이런 것이 아니었다. 좀더 시적이고 좀더 극적인 것이었다.
“나쓰에 씨, 또 무라이가 신세를 지게 되었군요.”
정중한 다카기의 말에 나쓰에는 번쩍 제정신이 들었다.
“저희가 오히려 신세를 지게 되었어요.”
평범하게 인사를 한 것이 나쓰에 자신에게도 이상하게 생각되었다.
‘이 사나이는 이렇게 호탕한 체하고는 게이조와 둘이서 무슨 일을 꾸몄는가? 사이시의 딸이라는 것을 알고도 요코를 내 손에 넘겨 준 것은 다름아닌 이 사나이였다.’
일행은 병원 차에 올라타고 나쓰에 혼자 남게 되었다. 차가 멀리 사라지자 나쓰에는 갑자기 심신이 피로해 왔다.
이럴 때 남자라면 술을 마실지도 모른 일이었다. 세상의 모든 것으로부터 버림을 받은 듯한 외로움을 나쓰에는 주체하기 어려웠다. 4월의 봄바람이 옷자락을 휘감듯이 싸늘하게 불어닥쳤다.
‘속옷에서부터 겉옷에 이르기까지, 새것으로 갈아입고…..’
나쓰에는 자기 자신을 비웃으면서 지금의 자신은 어디에 가나 마음이 안정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