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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엄경산림 대법회 154강 – 3 – c
金翅在空에 觀大海(금시재공관대해)라.
금시조가 허공에서 큰 바다를 보고는
闢水搏取龍의 男女(벽수박취용남녀)로다.
물을 헤치고 숫룡ㆍ암용을 잡아가듯이
十力能拔善根人(10력능발선근인)하사, 十力은 부처님이지요.
그렇지요? “부처님께서 능히 뽑아낸다.”
“十力”이라고 했다가, 조금 전에는 뭐라고 했습니까?
“대 공덕”이라고 했다가, 그렇지요?
“대 요익”이라고 했다가 전부 다 누구입니까? 부처님의 마음작용을
이렇게 해놓은 것이지요. 법리적인 현상으로, 법리적으로 해석을 했지요.
그러니까 인격적으로 해석을 하면 석가모니다 하든지, 그 다음에
비로자나라 하든지, 아미타불이라 하든지 ←이렇게 말씀하실 것 아닙니
까? 그렇지요? 그러니까 법리적으로...
인격적으로 얘기할 때도 있고, 법리적으로 얘기할 때도 있고요.
쉽게 얘기하면, 理적으로 얘기하면 이렇게
“十力이다ㆍ대 공덕이다ㆍ대 요익이다.” 이렇게 이치를 얘기할 수 있고
요. 事적으로 얘기하면 뭡니까? 그 사람의 지위나 계급이나 이름이 있잖
아요? 그것을 갖다가 부여할 수도 있지요.
十力能拔善根人이라. 10력의 힘으로서 중생을 가려내어서,
令出有海除衆惑(영출유해제중혹)이로다. 令出有海 = 3계 25유.
생사의 바다를 벗어나게 한다.
除衆惑이로다. 모든 삿된 번뇌의 미혹ㆍ의혹으로부터, 번뇌의 미혹함
으로부터, 衆惑으로부터 다 제거 해버린다. 없애버린다.
譬如日月遊虛空(비여일월유허공)에,
비유하면 마치 태양이 허공을 빙빙 도는데,
照臨一切不分別(조임일체불분별)인달하야,
해와 달이 저 허공에서 비추면서, 온 세상의 모든 것을 다 비추면서,
높고ㆍ낮고, 멀고ㆍ가까운 것을 동시에 다 비추면서 분별이 없는 것과
같이,
世尊周行於法界하사, 부처님께서도 세상을 돌면서,
“大圓鏡上에 絶親疎(대원경상절친소)라.”
친한 사람 비추고, 안 친한 사람 안 비추는 것이 아니라 이겁니다.
다 비춘다 이겁니다. 다 비추는데요. 국화도 집에서 피는 것을 보면 햇빛
많이 받는 쪽에는 국화가 좀 하얗게 피고, 햇빛 못받는 쪽에는 노리끼리
하게 피고, 똑같은 종자인데, 세멘바닥에는 요즘 피는 국화는 보니까 갈색
으로 핍니다.
그러니까 조건이 악하면 악할수록 꽃 색이 조금 탁해지더라고요.
사람도 절에 와서 사는데 이렇게 보니까 자기 마음쓰는 꼬라지가 쪼그러
들면 쪼그러들수록 사람이 탁해요.
저는 백옥 같다고 주장을 하는데 백옥 같지는 않지요. 백옥 같지는 않지만,
그래도 살아야지요.훤~~ 한 사람이 있고, 쪼글 쪼그리한 사람이 있고,
그것은 어떻게 할 수가 없는 것이지요.
와~~ 국화도 한종자인데 어떻게 그렇게...
화엄경을 많이 본 사람은 좀 훤~~ 해 질것이고, 안 본 사람은 쪼그리해서
있을 것이고 그런 것이지요.
世尊周行於法界하사, 부처님이 법계에...
법계에는 중생이 사니까 그 법계를 이렇게 돌아다니시는 것도,
돌아다닐 일이 없는데, 不動名爲佛(부동명위불)인데, 주행하는 것도 다
그런 뜻입니다.
敎化衆生에 無動念이라. 중생을 교화해도 흔들리는 생각이 없다.
이런 것을 “和而不同(화이부동)이라.”고 하지요.
7. 如來出現의 正覺
(1) 正覺의 體相
佛子야 諸菩薩摩訶薩이 應云何知如來應正等覺의
成正覺고
佛子야 菩薩摩訶薩이 應知如來가 成正覺하사
於一切義에 無所觀察하며 於
法平等하야 無所疑惑하며 無二無相하며
無行無止하며 無量無際하며
遠離二邊하야 住於中道하며 出過一切文字言說하니라
如來出現의 正覺(여래출현정각)이라.
부처님의 정각은 어떠한 것이냐?
부처님의 경계ㆍ부처님의 행ㆍ부처님의 깨달음ㆍ부처님의 올바른 마음.
이것이지요. 번뇌없는 마음은 어떻게 생겼는가? 봅시다.
正覺의 體相(정각체상)이라. 정각의 본체, 체상의 모양이라.
佛子야
諸菩薩摩訶薩이, 모든 보살마하살이
應云何知如來應正等覺의 成正覺고?
부처님이 정각을 이뤘다는 것을 우리가 어떻게 이해해야 됩니까?
佛子야 菩薩摩訶薩이
應知如來가 成正覺하사,
응당히 알아야 한다. 여래가 바른 깨달음을 이루는 것은
於一切義에, 일체 모든 뜻에
無所觀察이며, 관찰하는 바가 없고,
이것이 조금 어려울지 모르겠습니다만,
“일체 뜻에 관찰하는 바가” 관찰하는 것은 뭘 가지고 하느냐? 하면 생각
가지고 합니다. 쉽게 얘기하면 우리가 환희지. 색계 4선정에 들어갈 때,
제일 처음에 선정에 들어가기만 하면, 일단 제일 가까이에 있는 냄새나는
것하고 맛 보는 것하고, 이 두 가지의 괴로움으로부터 벗어난다네요.
네 가지는 남아있습니다.
鼻根(비근)ㆍ舌根(설근)이 매몰되는, 맛이라든지 말초신경이 일단은 거기
에... 코로나 걸려버리면 맛도 모르고 냄새도 모르잖아요.ㅎㅎㅎㅎㅎㅎㅎㅎ
그런 데에 대해서 취말리지 않으면 일단 초선에 들어갔다 하지요.
초선에 들어갔다 하더라도 몸이 있잖아요. 몸이 춥고 덥고요.
이것을 목욕탕 같은데 가서, 찬물에 가서 혼자 실험해 보면 느껴집니다.
처음에 찼다가 손을 계속 담그고 있다가 한 10분쯤 지나면서 몰입해서 딱~~ 공부하면 몸이 뜨끈뜨끈해 지거든요. 자체적으로 열이 올라옵니다.
그러면서 그 찬물에 얼마든지 하루종일 있을 수도 있습니다.
스스로 몸의 감각을, 춥고 덥고를 없애버릴 수도 있잖아요.
일부러 저는 목욕탕 갈 때마다 쭉~~ 들어가서 처음에 들어갔다가,
차가운데 들어가서 즐기려 하고, 뜨거운데 들어가서 즐기는 것이 아니라,
뜨거운데 들어가서 잊어버리고, 차거운데 들어가서 잊어버리고, 자기를 몰고 들어가버려야 됩니다.
그래 몸에 대해서 그것[춥고 더운 감각]이 사라지고 나면, 남아있던 네 가지
중에 의식만 남거든요. 몸하고 보고 들리는 것에 대해서 좀 무심해져 버리잖
아요. 그 다음에 의식하나만 남아서 3선이 있는데요.
의식하나 남은 것 중에서 제일 마지막까지 의식하나만 끌고 가거든요.
의식까지 다 뚝 끊어져 버려야 됩니다. 意가 있잖아요. 그렇지요?
분별심에 사로잡히지 않는 쪽으로 자기를 끌고 가는 것이잖아요.
“관찰” 이라는 것이 그런 얘기입니다.
그러니까 유식관에 보면, “오위100법” 이라는 “이것 識(식)이다.” 이렇게
해서 자세하게, 분별사식을 잡아 들어가는 그 상태라서,
“無所觀察이며, 관찰하는 바가 없다.”니, ‘각 관의 보고 듣고하는 바깥의
현상적인 분별사식에 끄달리지 않는다.’ ←이런 말씀입니다.
“바른 깨달음을 이루는 온갖 이치에 관찰함이 없고,”
‘그런 데에 대해서 그냥 쪼잔하게 파고들고’ 이런 것이 아니다.’ 이겁니다.
於法에 平等하야, 모든 법에 평등하여,
無所疑惑하며, 의혹이 없으며,
無二無相하며, 둘이 없고 모양도 없으며,
無行無止하며, 행도 없고 가고 오는 것이...
본래 없는데요 뭐. 가기는 어딜가고 멈추기는 뭘 멈춰요?
없는 것을 어떻게 없앨 수는 없잖아요.
無量無際하며, 한량도 없고 한계도 없고,
遠離二邊(원리이변)하야, 이쪽 저쪽. “이쪽 저쪽”이라 하면 뭡니까?
“생사열반 본평등이라. 생사열반 상공화라.” 하고,
장수 자선선사는 “본평등이라.” 그랬지요. 생사와 열반이 본래 평등하다는
것은 본래없다는 것이지요.
허공이 좌측에 있는 허공이나, 우측에 있는 허공이나 똑같지 뭘 그래요?
그래서 우리가 49재 지낼 때는,
百草林中一味新(백초임중일미신)
趙州常勸幾千人(조주상권기천인)
烹將石鼎江心水(팽장석정강심수)
“江 心 水” 했습니다. “궁좌실제중도상”에 갔을 때는 아래 위가, 좌우가 없
잖아요. 烹將石鼎江心水(팽장석정강심수)
願使亡靈歇苦輪(원사망령헐고륜)
그러니까,
“영가여, 중도정견에 들어가서 니 생각에 사로잡혀서 여기로 떨어지고
저기로 떨어지지 말아라.” 하는 것이지요. 그것 아주...
49재 지낼 때는 게송 하나ㆍ하나 씩 보면 촌철살인이지요.
옛 분들의 공부 살림살이가 다 나오지요. 여기도 써 놨네요. 그래서
“住於中道하며, 중도에 머물으며 遠離二邊하야”
화엄경에는 이렇게 나왔지요?
“보살 수행자가 가면서 생사에도 대지도 않고,
열반의 언덕으로 가지도 않고, 중간에 머물지도 않는 것을
중도라 한다.”
중간에 머물러야 중도가 아니고, 때로는 좌측에 가도 중도고, 우측에 가도
중도고요. “住於中道하야” ←이것이 “궁좌실제중도상” 중도에 가면 뭡니
까? “구래부동” 중도가 바로 부처님이지요. 여래출현이지요.
“궁좌실제중도상 구래부동”
‘아~~ 이것이 부동이고 명위불이구나!’ 아까 “부동ㆍ불생ㆍ불감이다.”
해봤잖아요. 그렇지요? 중도고, 궁극이고, 다 그런 뜻이지요.
叵息妄想必不得
무연선교, 인연 없는 중생도 다 전부 다 여의주 한 보따리씩 챙겨줘라.
無緣善巧捉如意 歸家隨分得資糧.
以陀羅尼無盡寶. 눈코입귀에 이 다라니를... 눈으로도 다라니가 한량없고,
귀로도 다라니가 한량없고, 이다라니 무진보배!
안이비설신의로 이다라니 무진보!
莊嚴法界實寶殿. 지 법당을 잘 챙겨줘라.
窮坐實際中道床 舊來不動名爲佛이라.
出過一切文字言說하니라. 일체 문자 언설을 벗어나야 된다.
그러니까 이런 것들은 기신론 같은데 “이 심념상이다. 분별사식으로ㆍ
마음으로 반연하는 것을, 생각을 끊어라.”
달마스님은 뭐라고 했지요?
“心行處滅(심행처멸)이다. 言語道斷(언어도단)이다.”
言語道斷을 기신론에서는 “이 언설상” 또 다른 말로하면 “이 명자상ㆍ
이 심념상ㆍ이 언설상” ←이렇게 얘기하잖아요. 그렇지요?
달마스님은
“言語道斷이요 心行處滅 心如墻壁(심여장벽)이라야
可以入道(가이입도)라.”
방거사 게송까지 붙인다면,
“但願空 諸所有(단원공제소유)언정
切勿實 諸所無(절물실제소무)라.
다만 원컨대 모든 있는 것도 없다고 해야 될지언정,
없는 것을 실제로 있다고 허망하게 집착하지 말아라.”
없는 것을 집착하는 것을 우리는 “망념”이라고 하지요. 妄念(망념).
(2) 三世一切法의 了知
知一切衆生의 心念所行과 根性欲樂과 煩惱染習이니
擧要言之컨댄 於一念中에 悉知三世一切諸法이니라
佛子야 譬如大海가 普能印現四天下中一切衆生의
色身形像일새 是故로 共說以爲大海ㄴ달하야
諸佛菩提도 亦復如是하야 普現一切衆生의
心念根性樂欲호대 而無所現일새 是故로 說名諸佛菩提니라
三世一切法을 了知(3세일체법요지)한다.
한 생각에 3세의 모든 법을 다 안다.
知一切衆生의 心念所行과 根性欲樂과 煩惱染習(번뇌염습)이니
擧要言之(거요언지)컨대 於一念中에 悉知三世一切諸法이니라.
그 다음 뒤에까지 읽읍시다.
佛子야 譬如大海가 普能印現四天下中에 一切衆生의 色身形像일새
是故로 共說以爲大海ㄴ달하야 諸佛菩提도 亦復如是하야
普現一切衆生의 心念根性樂欲호대 而無所現일새 是故로
說名諸佛菩提니라
知, 알지니라. 알아야 된다. 一切衆生의 心念所行과
根性欲樂과, 근기와 성품과 욕망과,
우리가 치문 배울 때,
“盖衆生之根欲性이 殊(개중생지근욕성수)라.” 하는 것도 화엄경에서 따
왔네요.
근성과 욕락과,
煩惱染習이니, 번뇌와 염습이니,
그러니까 染이라고 하는 것은 淨(정)자에 비유하여,
淨은 진여를 얘기하는 것이고, 染(염)은 망념을, 망심을 얘기하는 것입니
다. 진심은 청정한 淨자를 쓰고, 허망한 생각은 染이라고 하지요.
번뇌는 여기서는 굳이 쪼잔쪼잔하게 하면, 탐진치같이 바깥으로 행동개시
하는 구체적인 것이고요.
染習(염습)이라고 하는 것은, 찌들려서 훈습되어서 안 쪽의 미세 번뇌까지,
속에까지 물들어서 찌든 때가 안 빠지는 것. 쪼달려 있는 것. 8식의 습기.
“습기종자.”라고 그러지요. 種子. 번뇌는 분별이라고 그러고,
습기는 선천적인 것이라고 그럽니다.
여기서 예를 들어서, 분별번뇌는 후천적인 것이라고 한다면,
染習은 다생겁래에 찌들려서 중생놀음해서 “곤조”라고 그러지요.
“곤조 안 고쳐진다.”고... 곤조가 뿌리 근성이 딱~~ 박혀있는 것.
擧要言之컨댄, 중요한 것을 말하자면,
於一念中에 悉知三世一切諸法이니라.
1념중에 3세 제법을 다 알아야 하느니라.
佛子야
譬如大海가, 비유하건대 마치 큰 바다가
普能印現四天下中에, 보능인현. 해인삼매 나오네요.
큰 바다에서는 4천하에 있는 모든 중생들의 몸과
一切衆生의 色身形像일새. 일체중생들의 색신 형상이 다 나타난다.
是故로, 이러한 까닭으로
共說, 다 같이 말한다. 무엇을요?
以爲大海라. 큰 바다라고 하는 것은 모든 중생이 다 나타나기 때문에
대해라고 한다.
諸佛菩提도 亦復如是하야,
큰 바다가 세상의 모든 것을 다 비치듯이, 인터넷이 세상의 모든 것을 다
비치듯이, 모든 부처님의 보리도 또한 그와 같아서
普現一切衆生의 心念根性樂欲호대,
일체 중생의 심념과 근성과 욕망을 두루 나타내되, 그러나
而無所現일새. 나타낸 바가 없을새. 이것은 많이 나오지요.
중생들의 마음을 다 나타내도 나타난 바가 없다.
是故로, 이러한 까닭으로 이것을 뭐라고 하느냐?
說名諸佛菩提니라. “제불 보리” 라고 한다.
가장 대표적으로는 이렇게 얘기하지요?
“應無所住 而生其心(응무소주이생기심)이라. 머물으는 바 없이
그 마음을 나타낸다.”
또 화엄경의 10회향품에 보면 이러한 게송이 나오지요.
“보살의 선교!
아주 훌륭한 선교!
교묘한 지혜!
아주 빼어난 지혜는 이행보시라.
보살의 아주 빼어난 지혜로써 이행보시한다. 보시행을 행한다.” 이렇게 나오잖아요. 그렇지요?
“보시해도 행 하는 바가 없다.”
금강경의 첫 구절에 뭐라고 해놨지요?
“부처님! 보시를 어떻게 해야 될까요?”
“부주색보시하고, 부주성향미촉법보시하라.
지혜롭게 보시해도 보시한 바가 없게하라.”
널리 일체 중생의 심념과 근성과 욕락이 다 나타나지만, 그러나
而無所現이라. 하나도 나타난 바가 없다.
이러한 까닭으로 이것을 이름하기를 제불보리니라.
오늘 여기까지 해서 마치겠습니다. 근념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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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_()()()_
아름답습니다♬♪♩ 환희롭습니다♬♪♩ 감사합니다♬♪♩ 진수성찬입니다♬♪♩ 감미롭습니다♬♪♩ 꿀맛입니다♬♪♩
대♩ 방♩ 광♩ 불♩ 화♩~~ 엄♩~~ 경♩~~~
고맙습니다. 戒香! 定香! 慧香! 解脫香! 解脫知見香!
이렇게 많은 글을 쓰셨네요 근념하셨습니다
대방광불화엄경 _()()()_
百草林中一味新 趙州常勸幾千人
烹將石鼎江心水 願使亡靈歇苦輪...고맙습니다 _()()()_
고맙습니다_()()()_
용학스님께서는 경전에 해박하셔서 이곳 저곳 헤엄치시듯 오고가면서 법문을 하시는데 하나도 놓치지 않으시고 다 알아듣고 녹취하시는 보살님 실력이 대단하십니다.
勤念하셨습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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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맙습니다 나무대방광불화엄경_()()()_
나무대방광불화엄경나무대방광불화엄경나무대방광불화엄경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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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원성님, 고맙습니다
새해도 좋은 일 많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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