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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의 권세
사도행전 3:1~10
오늘 본문 말씀에서는 초대 예루살렘 교회의 사도 베드로와 요한을 통하여 나타난 공개적인 병 고침의 사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일은 예루살렘 성전에 있는 가장 바깥 구역인 이방인의 뜰에서 여인의 뜰로 들어가는 문인 ‘미문’ 곧 ‘아름다운 문’이라는 곳에서 일어났습니다. 오후 3시 예배 시간에 성전 예배에 참석하여 기도하러 올라가는 사도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 바깥 뜰에서 여인의 뜰로 들어가던 중이었는데, 마침 미문에 앉아서 구걸하는 걸인이 그들의 눈에 띄었습니다. 그 걸인은 태어나면서부터 한번도 일어서서 걸어본 적이 없는 불구의 몸이었습니다. 그 날도 이 걸인은 다른 사람들이 떼매고 와서 자리에 앉아 예배차 문에 들고 나는 사람들을 향하여 눈을 쳐다보며 말을 걸어 구걸하고자 손을 내밀곤 했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미문에 들어가려하자 이 앉은뱅이는 여느 때처럼 그들에게서 무엇을 얻을까 하여 그 두 사람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러자 사도 베드로가 발을 멈추고 그를 주목하여 쳐다보다가
“우리를 보라”
고 말한 뒤에, 그를 향하여 이렇게 힘차게 말을 했습니다.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그렇게 말한 베드로 사도는 무슨 말인가 하고 어리둥절하게 앉아 있는 그 걸인에게 다가와 오른손을 잡아 힘을 주어 일으켰습니다. 그러자 놀랍게도 한번도 서본 적도 없고 걸어본 적 없는 그 걸인은 자기의 발과 발목에 힘이 생긴 것을 느꼈습니다. 그리하여 걸인은 자기도 모르게 베드로의 손을 잡고 한발 한발 내딛더니 자기도 놀라 걷고 뛰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사도 베드로와 요한이 여인의 뜰을 넘어 이스라엘 남자의 뜰 안으로 들어갈 때까지 함께 따라가면서 너무 기뻐서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면서 큰 소리로 하나님을 찬송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예배 시간에 모인 사람들이 그 사람이 미문에 앉아 구걸하던 앉은뱅이 걸인인 줄 알고 그가 고침받은 기적을 보면서 깜짝 놀라서 다 함께 몰려들었습니다. 이 일은 수많은 사람들이 모인 공개적인 성전 뜰 안에서 일어난 일이었기 때문에 큰 반향을 일으켰고 그 날 그곳에 모인 많은 사람들이 이 기적을 인하여 크게 놀라고 사도 베드로와 요한을 주목하여 몰려들어 에워싸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사도 베드로와 요한을 통하여 일어난 앉은뱅이 치유의 이 공개적인 기적은 또 한 차례 초대 교회의 부흥의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는 이 기적의 원천이 되었던 사도의 말 한 마디를 주목하여 살펴보고자 합니다. 3절 말씀을 다시 한번 함께 읽겠습니다.
“베드로가 이르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하고”
그렇습니다. 베드로와 요한 사도에게는 은과 금 곧 그 걸인에게 적선해줄 돈은 없었습니다. 하지만 단지 한 끼 식사를 해결해줄 돈보다 더 중요하고 더 근본적인 도움을 줄 보배가 사도에게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의 보화입니다.
한 사람의 이름이라는 것은 그 사람의 인격, 그 사람의 말, 그 사람의 생각, 그 사람의 의지와 뜻이 다 담긴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의 이름에도 그 힘과 권세가 담겨 있습니다. 예를 들어, 저작권료, 사용권료를 지불하지 않으면 아무 것도 노래 한 곡도 마음대로 쓸 수 없습니다. 초상권이라고 해서, 본인의 허락 없이는 누군가의 사진도 함부로 쓸 수 없습니다.
저 예산 시장통에는 거리 이름이 ‘백종원 거리’라는 표지판이 세워져 있습니다. 티브이나 각종 대중 매체에서 음식 평론가로 식품업의 매니저와 멘토로서 큰 영향력을 끼치고 있는 백종원씨가 침체에 빠진 예산 시장에 활력을 불어놓을 아이디어를 제공하여 죽어가던 예산 시장을 살리겠다고 선언하고 이렇게 저렇게 도움을 주었습니다. 그리하여 실제로 손님이 거의 없던 예산 시장이 때 아닌 활기가 넘쳐서 주말에는 차를 댈 자리가 없을 정도로 활성화되어 뉴스 시간 화제가 되기도 했습니다. 이것이 백종원이라는 사람의 이름이 가지는 힘입니다. 이렇듯 사람의 이름도 그 힘이 있습니다.
이처럼 우리 구주 예수님께서도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시면서 우리 곁에, 우리 안에 위대한 그의 이름을 남겨두셨습니다. 그 자신의 이름을 자기의 제자들과 자기의 신자들에게 사용하도록 맡겨주셨습니다. 아무나 그 이름을 사용하도록 허락되지 않았습니다. 아무나 그 이름을 사용한다고 그 이름의 능력과 권세가 발휘되는 것도 아닙니다. 주님은 자기의 몸된 교회와 성도들에게 그 이름을 남겨놓으시고 그 이름을 사용하도록 권한을 넘겨주셨습니다.
잡히시기 전날 밤에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신 말씀이 바로 그 말씀입니다. 요한복음 14:13~15 말씀에 보면 주님께서 이르시기를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내가 하는 일을 그도 할 것이요 또한 그보다 큰 일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라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라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행하리라”
고 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5:16 말씀에서도 주님은 반복해서 이것을 확인해주셨습니다.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열매를 맺게 하고 또 너희 열매가 항상 있게 하여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라”
예수님은 자기 제자들에게 자기 이름의 사용권을 넘기시겠다고 분명하게 여러번 선언하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은 부활하시고 승천하시어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아계시지만 그는 그의 이름을 지상 교회와 성도들에게 남겨놓으셨습니다. 이로써 그 이름의 권세를 통하여 주님이 이 땅에 계실 때와 다를 바 없이 그 인격의 뜻과 의지를 이 땅에 이루어가시고 그 세상 만물의 통치자로서의 권세에 따른 힘과 능력을 그 이름을 사용하는 교회와 성도들을 통하여 여전히 펼쳐나가게 하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교회와 성도들이 사용할 주님의 이름의 위대한 권세와 능력은 어떠한 것일까요? 세상 그 어떤 것보다 더 강하고 효력 있는 주님의 이름의 권세와 능력은 어떤 것일까요? 세상의 수많은 은과 금이나 세상 권력으로도 감히 어쩌지 못하지만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의 권세와 능력으로 일으키는 역사는 무엇입니까? 생각나는 대로 언급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먼저, 죄사함과 죄의 세력을 이기는 권세가 있습니다.
세상의 많은 은금 가지고도 사람의 죄를 씻을 수 없습니다. 죄로 말미암은 양심의 가책을 덜어낼 수 없습니다. 죄로 인한 하나님 앞에서의 정죄의식을 떨쳐낼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은 인간의 죄를 사할 수 있으며, 양심의 가책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게 해줍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죄의 견고한 결박을 풀어내고 죄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해줍니다.
고린도전서 6:9 이하에 이러한 말씀이 나옵니다.
“불의한 자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줄을 알지 못하느냐 미혹을 받지 말라 음행하는 자나 우상 숭배하는 자나 도적이나 탐욕을 부리는 자나 술 취하는 자나 모욕하는 자나 속여 빼앗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리라 너희 중에 이와 같은 자들이 있더니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우리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받았느니라”(고린도전서 6:9~11)
음행 죄, 우상 숭배 죄, 도둑질한 죄, 탐심을 부린 죄, 술 취한 죄, 남을 모욕한 죄, 사기와 강압으로 남의 돈을 빼앗은 죄를 범했더라도 진심으로 주 예수님을 영접하였을 때, 진심으로 주님 앞에 나와 회개하였을 때에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인하여, 성령의 씻어주심을 인하여 죄가 사함받고 거룩해지고 의롭게 되어 천국에 들어가는 은혜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피 흘리신 공로는 지극히 강력하여 죄를 범한 자가 진심으로 하나님 앞에 나와 죄를 고하고 용서를 구하며 예수님의 십자가의 피 흘리신 은혜를 사모할 때 예수님의 이름으로 죄가 사해지고 다시는 기억지 아니하는 은혜가 주어지는 것입니다.
이렇게 죄를 사함받는 은혜는 억만금을 준다고 해도 얻지 못하는 축복입니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주님의 백성된 우리는 그 이름의 권세를 따라 죄를 사함받고 양심의 가책에서도 풀려나고 실제적인 죄와의 싸움에서도 점점 죄를 이겨가고 승리하는 은혜를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자신의 노력으로나 경건의 힘으로는 죄를 이길 수 없고 죄를 사함받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죄가 하나도 없으시고 우리를 대신하여 죄값을 피로써 다 쏟아주신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순결한 피와 그 이름의 권세가 우리 죄를 말끔히 씻어주고 다시는 기억조차 하지 않게 해주시고 현실 속에서도 죄의 권세를 점점 이겨가도록 도와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직도 지난 날의 죄로 인하여 양심의 가책으로 고민하며 눌린 사람이 있다면, 예수님께서 남겨놓으신 그 거룩하신 이름의 능력과 권세로 죄가 다 사해졌으며, 죄로 인한 정죄의식을 더 이상 가질 필요가 없음을 스스로에게도 선언하시기 바랍니다. 우리를 죄에서 건져내시려고 자기의 생명을 대신 내어주신 주님의 거룩하신 이름을 헛되게 하지 마시고, 주님의 이름으로 모든 악과 모든 죄가 사해졌음을 믿고 그것을 받아들으십시오. 더 이상 지난 날의 죄의 무게를 곱씹지 마시고, 모든 죄가 주님의 이름으로 깨끗해졌음을 받아들이고 주님의 이름으로 찬양하시기 바랍니다. 죄사함과 구원의 은혜를 인하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소리 높여 찬양하십시오.
그리고 예수님을 믿은 후에도 신자에게 종종 죄의 유혹이나 마음의 압박감이 다가옵니다. 이럴 경우에도 그러한 죄의 세력과 맞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대적하시기 바랍니다. 죄는 마치 살아 있는 생물과 같습니다. 가인에게 하나님은 죄가 마치 사람의 문틈을 노리고 웅크리고 있는 들짐승과 같다고 설명해주신 바 있습니다. 죄는 마치 살아 있는 들짐승처럼 힘이 있습니다. 우리의 천연적인 본성으로서는 이러한 죄의 끈질긴 유혹과 죄의 강압적인 힘을 결코 이겨낼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늘과 땅의 권세를 가지시고 모든 죄의 시험을 다 당하시고 이겨내신 의로우신 우리 주님의 이름의 권세를 가지고 그러한 죄의 유혹을 향하여 강하게 물러가라고 명령하시기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욕심을 마음에 가져다주는 어둠의 권세야 떠나가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인간 자랑과 허영의 정신은 떠나가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자꾸만 미워하는 마음을 갖다주는 어둠의 권세는 떠나가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자꾸만 세상의 즐거움과 화려함에 끌리는 마음은 사라지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세상 근심과 세상 염려에 자꾸만 붙잡히는 마음은 평안함으로 바꾸어질지어다.”
그리고 죄와 무질서와 심리적인 압박감 등은 종종 악한 마귀와 귀신의 공격에도 관련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거라사 지방에 배 타고 가셔서 귀신을 쫓아내주심으로 치유받았던 군대 귀신 들렸던 사람의 경우를 생각해봅시다. 그 사람도 정상적인 삶을 살고 싶었지만 강력한 악령의 압박에 이끌려 사람 사는 동네를 벗어나 무덤 사이를 떠돌면서 자기 몸을 학대하면서 혼자 울부짖으면서 짐승처럼 살았습니다. 모든 것이 불결하고 무질서하고 영혼과 삶이 어둠에 의하여 갇혀 있는 신세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오셔서 그 군대 귀신을 내쫓아주시자마자 그는 어떻게 변했습니다. 차분해졌습니다. 옷을 벗은 것을 부끄럽게 여겨졌습니다. 옷을 갈아입고 조용히 예수님의 발 앞에 앉아 가르침을 들었습니다. 예수님이 다시 배 타고 가고자 할 때에 예수님 곁에 머물기를 간청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권위 아래 들어갔을 때에 모든 무질서와 불결함과 혼란과 소란스러움이 완전히 사라졌습니다.
이처럼 지금도 악한 영은 우리 삶을 혼란스럽게 하고 무질서하며 소란스럽게 하며 어둡게 합니다. 마음이 어둡고 무기력하게 만들고 세상적인 것들에 대하여 분별력이 없고 예수님의 발 앞에 나와 차분하게 말씀을 듣지 못하게 만듭니다. 그러나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의 권세 아래 들어가면 모든 무질서와 혼란이 사라집니다. 차분하고 안정되고 정결해집니다. 그러므로 우리 심령과 생활이 무질서와 혼란의 상태가 지속된다 생각하면,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무질서와 혼란과 어둠의 영에게 물러가라고 단호하게 명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혼돈과 무질서를 가져와 마음의 안정을 해치며, 마음을 압박하는 강박감을 갖다 주는 어둠의 세력도 떠나가라.”
우리는 우리 자신의 힘과 권세가 아니라 더 큰 권세와 능력의 도우심을 받아야 합니다. 강한 자인 귀신과 우리 안의 타락한 본성을 이기기 위해서는 더 강한 자이신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도우심이 필요합니다. 주님께서 이렇게 자기의 권세 있는 복되신 이름을 사용하도록 사용권을 주셨으니, 우리가 스스로 자신의 노력과 결심으로 죄와의 싸움을 싸우려고 애쓸 뿐 아니라 온전하시고 승리하신 주님의 이 권세 있는 이름을 지금보다 더 훨씬 많이 확신을 가지고 사용하시기를 축원합니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의 권세는 저주의 권세보다 강합니다. 아담의 범죄로 말미암아 세상에 찾아온 것은 온갖 종류의 저주들입니다. 그 중에는 질병도 있고, 가난도 있고, 각종 사건 사고, 각종 재난, 자연 재앙, 전쟁 등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각종 가난, 질병, 사건 사고, 기타 각종 불명예, 인간 관계의 괴로움 등과 같은 이러한 저주들이 세상에 들어와서 모든 사람을 힘들게 해왔습니다. 믿는 사람들에게까지도 저주의 세력이 영향을 끼치려고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신 이유 중에 하나가 이러한 저주를 속량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나무 십자가에 매달려 예수님께서 죽으신 이유도 바로 이 저주로부터 주의 백성들을 자유케 하기 위함이라고 성경은 밝히고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3:13,14 말씀에 이르기를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릴들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라”
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이 말씀에 근거해서 주의 백성들은 자기에게 다가온 질병과 가난과 각종 저주에 대하여 주님의 이름으로 속량되었음을 선포하고 기도함으로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이 임하기를 구할 때에 저주는 사라지고 축복이 임할 수 있습니다. 역대상 4장에 보면, 태어나면부터 질병과 고통과 근심이 많았던 시련의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유다 자손 중 하나였던 야베스라는 사람입니다. 이 야베스라는 이름은 ‘수고로이 낳았다’라는 뜻을 갖고 있습니다. 그 어머니가 이 아이를 낳을 때 많은 진통 끝에 아기가 태어남으로, 부모가 그 이름을 수고로이 낳았다는 의미를 가진 야베스라고 칭한 것입니다. 그는 태어날 때부터 몸이 약했고 여러 환난이 많았던 것이 분명합니다. 근심 될 일이 많았던 것 같습니다. 집안의 재산도, 기업의 땅도 다 팔아서 거의 없는 상태였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야베스는 오직 축복을 주시는 하나님께 기도하기에 온 힘을 썼습니다. 그가 기도하기를
“주께서 내게 복을 주시려거든 나의 지역을 넓히시고 주의 손으로 나를 도우사 나로 환난을 벗어나 내게 근심이 없게 하옵소서”(역대상 4:10)
라고 하였습니다. 그의 간절하고 끈질긴 기도, 선하시고 복주시기를 기뻐하시는 하나님을 신뢰하고 구한 기도에 하나님께서 응답해주셨습니다. 그는 그의 지경이 넓어졌고 환난과 근심과 가난을 벗어나게 해주셨고 그를 하나님께서 형제들보다 더 귀중한 자로 높여주셨습니다. 환경적으로는, 태생적으로는 그는 많은 저주가 에워싸고 있었지만 저주를 바꾸어 축복으로 변하게 해주시는 하나님께 끈질긴 기도로써 구하여 자기 삶을 변화시켰던 것입니다.
언제나처럼 오늘날에도 아담과 하와의 원죄와 우리의 조상들의 우상 숭배, 조상 숭배, 잡신 숭배 등으로 인하여 온갖 저주가 세상에 가득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러한 죄악에 깊이 빠질 때에 하나님께서 세상에 저주가 가득하게 내버려두시곤 하였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의 백성이 이렇게 숱한 저주 속에서 고통을 겪는 것을 그냥 내버려두시는 것이 그의 본심이 아닙니다. 예레미야 29:11 말씀에 우리를 향하신 그의 본심이 이렇게 분명히 드러나 있습니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은 내가 아나니 평안이요 재앙이 아니니라 너희에게 미래와 희망을 주는 것이니라”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구주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어 나무 십자가에 못박혀 피 흘려 죽게 하신 이유도 그러한 하나님의 분명한 뜻을 선명히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의 삶 속에서 분명 어떤 끈질긴 저주가 있고 원치 않는 고난이 있고 근심이 있다면, 우리의 저주를 속량하시고 대신에 축복을 우리에게 주시기 위하여 하나님이 우리에게 보내주신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붙잡고 야베스처럼 하나님께 끈질기게 기도합시다. 하나님의 우리와 우리 자녀를 향하신 본심은 재앙이 아니라 평안이요 근심이 아니라 미래와 소망을 이루어주기 위함임을 확신합시다. 이 확신 가지고 간절히 우리 삶에 다가온 저주를 향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멀리 옮겨달라고 기도합시다.
주님께서 친히 약속하시기를
“하나님을 믿으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이 산 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져지라 하며 그 말하는 것이 이루어질 줄 믿고 마음에 의심하지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마가복음 11:23)
고 하였습니다. 아무리 태산 같은 큰 문제라고 할지라도 우리가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의 권세를 적극 사용한다면, 아무리 꿈쩍하지 않는 지속적인 저주, 가난, 질병, 관계의 문제일지라도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인하여 그 큰 산 같은 문제가 우리로부터 멀리 옮겨질 것이요 저 깊은 바다에 빠져 다시는 흔적조차 없이 사라질 것입니다. 참으로 예수님의 이름은 무한한 가능성인 것입니다.
그런데 성도 여러분은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존귀하신 이름의 권세를 한두 번 사용하지 말고 자주 그리고 지속적으로 그리고 믿음과 마음을 다하여 사용하시기 바랍니다. 1970년대에 우리나라에 신유의 여종으로 크게 쓰임받았던 현신애 권사님의 치유 역사의 간증책인 ‘능력의 증언’에 보면, 많은 사람들이 현신애 권사님 집회에 참석하여 병을 고침받은 간증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자궁암, 심장병, 위장병, 관절염, 정신병, 혈루증, 폐병, 앉은뱅이 등 수많은 병자들이 그 집회에 참석하여 현신애 권사님의 안수를 받고 나았습니다. 그 책을 보면, 단번에 낫는 경우도 있습니다만 많은 경우는 그 집회에 여러 차례 참석하여 여러번 안수를 받으면서 완쾌되는 내용이 많이 나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일제 1920년부터 30여년 동안 우리나라에 신유의 기적을 많이 일으킨 김익두 목사님의 전기 ‘안악산골’이라는 책을 보면, 이적 증명회가 결성하여 기록한 내용에 수많은 병고침의 이적에 대한 이야기가 소개되고 있습니다. 김익두 목사님의 집회에서 소경도 낫고 앉은뱅이도 낫고 수많은 사람들이 나았는데, 곧장 낫는 사람도 있기도 하지만 집회 기간 내내 조금씩 나아져서 집회 끝날 때에 완전히 낫는 경우도 많이 있었습니다. 황해도 어느 불신자의 큰 딸이 앉은뱅이였답니다. 그 소녀가 목사님의 소문을 듣고 부모님을 졸라서 김익두 목사님의 황해도 신천교회에 출석하여 9일간 안수를 받았으나 낫지 않아서 근심하며 집에 돌아갔다고 합니다. 그러나 우연히 집에서 지팡이를 짚고 일어서보니 일어나는 기적이 일어났답니다. 그리하여 얼마 후에 다시 신천교회에 와서 목사님께 다시 기도받고서 완전히 낫고 집에 돌아갈 때는 지팡이를 버려두고 두 발로 걸어서 갔노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런 기록들을 보면 알 수 있듯이, 한두번 기도하여도 병이 낫지 않거나 문제가 해결되지 않거나 저주가 풀리지 않는다 해도, 우리가 계속 끈질기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면 병도 낫고 문제도 해결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지극히 크고 존귀하고 강하신 이름 역시 우리가 그 이름의 권세를 믿고 자주 기도하고 끈질기게 기도할 필요가 있습니다.
생각하건대, 이렇게 우리가 주님의 이름을 사용할 때 그 이름의 권세가 힘있게 나타나기 위해서, 우리는 다음 몇 가지 조건을 충족하여야 하겠습니다.
먼저, 주 예수를 진심으로 믿고 사랑하여야 하겠습니다.
사도행전 19장에 보면 사도 바울이 에베소 교회에서 사역할 때 손수건과 앞치마만 병자에게 갖다 얹어도 병이 낫고 귀신이 나가는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그러자 그 소문을 들은 유대인 마술사인 스게와의 아들 일곱이 시험삼아 악귀 들린 자의 귀신을 쫓아낸다고 하면서 “내가 바울이 전파하는 예수를 의지하여 너희에게 명하노라”고 귀신에게 명했습니다. 그랬더니 그 악귀가 대답하기를 “내가 예수도 알고 바울도 알거니와 너희는 누구냐” 하면서 악귀들린 사람이 그 사람들에게 뛰어놀라 눌러 이기니 그들이 상하여 벗은 몸으로 그 집에서 도망치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예수의 이름을 머리로 아는 것이 아니라 가슴으로 마음으로 알고 구주로 영접하고 진정으로 예수님을 사랑하는 자라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사용할 수 있고 그 이름을 사용할 때 권세와 능력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또한 기도를 많이 해야 하겠습니다. 마가복음 9:29 말씀에 보면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일러주시기를,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종류가 나갈 수 없느니라”고 하였습니다. 다수사본에서는 “기도와 금식 외에는”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악하고 끈질기고 견고한 사탄의 진이 있고 오랜 질병의 뿌리가 있고 오랜 저주의 내력이 있는 경우에는 그에 상응하게 그 문제들을 물리칠 수 있는 성도들의 끈질기고 강력한 기도가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기도 많이 하고, 기도를 많이 쌓고 끈질기게 구해야 문제가 해결되고 저주가 풀리고 강력한 마귀의 진이 깨뜨려져 자유케 됩니다. 기도를 많이 해야 합니다.
또한 한 가지 더한다면 주님의 이름에 모든 영광을 돌리는 충성된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문제가 해결되고 저주가 풀리고 병이 고쳐지고 축복이 임하는 기적이 일어날 때에 자칫 그런 도구로 쓰임받은 사람 자신이 주님의 영광을 가로채서는 안됩니다. 오늘날 수많은 이단 사이비 중에는 처음에는 순수했으나 훗날 변질된 사람들도 있습니다. 김기동 목사나 이재록 목사나 박태선 장로와 같은 사람들도 처음에는 순수했던 것으로 보여집니다. 그런데 사람들의 찬사와 박수와 존경이 집중되고 부와 명예와 환호가 밀어닥치니까 그만 시험에 들어서 주님께 영광 돌리는 대신에 자기가 영광을 다 받아버리게 된 것입니다. 그렇게 되어 결국 자기 자신을 신격화시켜서 자기가 예수님의 자리에 앉아버리게 되고 온갖 수치와 모욕을 뒤집어 써 버리게 되곤 합니다. 누가 하나님께 계속하여 쓰임받을 수 있습니까? 누가 주님의 이 존귀하신 이름을 받아서 선용하며 계속하여 그 이름의 권세와 능력을 사용할 수 있게 됩니까? 그것은 바로 주 예수 우리 주님님의 이름에게 그 영광과 존귀를 다 돌리는 자입니다. 곧 주님을 향하여 온전히 충성된 마음이 있는 자라야 주님께서 그의 이름의 권세를 마음껏 쓰도록 하고 능력이 그 이름에 따르게 역사해주시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주님의 복스러운 이름의 권세를 다 받은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이 복된 이름을 우리의 삶 속에서 힘써 사용합시다. 죄와 저주와 사망과 영벌을 이기신 우리 주님의 이름의 권세를 힘써 사용합시다. 우리 삶에 다가오는 온갖 저주와 죄의 유혹과 삶의 문제 앞에서 우리 주님의 이름을 힘써 사용합시다. 야베스처럼 자기 삶을 바꿀 수 있는 놀라운 이름의 권세가 우리에게 있습니다. 문제에 잡혀 자기 힘으로 그 문제와 싸우려고만 하지 말고, 우리 자신의 무력함을 인정하고 하늘과 땅의 권세를 가지신 우리 주님의 이름으로 문제를 해결하도록 기도하며 명합시다. 산을 명하여 바다에 던지라 가르쳐주신 주님의 명령대로 우리도 주님의 이름으로 모든 문제의 산들을 더 깊은 바다에 던져 옮겨버리는 역사가 일어날 것입니다.
참으로 우리를 진정으로 우리 되게 해주고 부요하게 해주고 세상과 맞서 당당하게 해주는 것은 우리가 가진 은과 금도 아닙니다. 세상 권세도 아닙니다. 나를 둘러싼 사람들의 세력도 아닙니다. 우리를 진정으로 힘있게 해주는 것은 바로 주님께서 교회와 그의 백성들에게 남겨두신 그의 존귀하고 강한 이름의 보배입니다. 이 지극히 복된 영원한 보배이신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가지고 우리 자신을 세워가며 모든 죄와 저주와 세상과 당당히 맞서 싸웁시다. 우리 모두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받은 지극히 존귀한 자아상을 가지고 주님이 자기를 내어주신 이 세상까지 품고 사랑하는 자가 됩시다. 이 세상에 주님의 이름의 권세를 가지고 섬기는 자가 됩시다. 그리할진대 초대 교회 위대한 주님의 사람들 베드로, 요한, 초대 교회 성도들이 그러한 것처럼, 우리도 수많은 세상 사람들을 주님의 존귀하신 이름을 받게 하고 믿음으로 살게 하여 그들로 기쁘게 뛰게 만들고 찬송하게 만들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