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예언·계시에 대한 성경의 원칙
예언·계시와 관련한 대표적인 성경 말씀인 신명기 18장을 살펴보면서 이야기를 시작하는 것이 좋겠다. 신명기 18장에서 모세가 하나님의 말씀을 예언하는 선지자에 대해 언급할 때 몇 가지 원칙을 제시한다. 첫째, 예언은 하나님이 주신 것이라는 것이다. 선지자는 자신의 생각이나 말을 전하는 자가 아니라 하나님이 명령하신 것을 전하는 자라는 것이다(신 18:18). 둘째, 선지자가 전한 하나님의 말을 듣지 아니하는 자는 벌을 받을 것이다(신 18:19). 셋째, 선지자가 하나님이 명령하지 않은 것을 마음대로 전하거나 다른 신들의 이름으로 말하면 죽임을 당한다(18:20). 넷째, 선지자의 말이 하나님이 주신 것이면 증험과 성취함이 있다(18:22). 즉 하나님의 계시는 무오하다는 것이다.
구약시대에 "여호와께서 말씀하셨다" 또는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등 여호와께서 말씀하셨다는 것에 대해 자유주의적 신학자들은 하나님이 직접 말씀하셨거나 전해 준 것이 아니라 중요한 내용이라는 것을 강조하는 표현이라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이는 위에서 언급한 첫 번째 원칙을 위배할 뿐 아니라 세 번째 원칙을 위배하는 것으로 하나님이 하시지(혹은 주시지) 않은 말씀을 선지자가 임의대로 전하는 것과 같다. 구약시대 하나님께서는 예언자, 왕, 제사장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과 뜻을 직접 혹은 간접적으로 전했다고 말한다. 이때 직접적으로 전할 말을 주기도 하지만 꿈이나 이상(비전, 환상)을 통해서 주기도 했다. 물론 거짓 선지자들도 말씀이나 꿈, 이상 등을 인용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 주신 마지막 말씀이다
신약시대에도 예수님을 통해 예언·계시가 존재했고 사도들을 통해 예언·계시가 주어졌다. 이때도 말씀뿐 마케도니아의 환상 등과 같이 꿈이나 이상 등을 통해 주어졌다. 그러나 신약시대 이후에는 예언·계시는 종결되었으며 이미 주어진 예언·계시에 근거해서 순종하며 살아가는 것이다. 히브리서 1장 1~2절은 "옛적에 선지자들을 통하여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이 모든 날 마지막에는 아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라고 말씀하신다. 히브리서 기자는 예수님이 사역을 시작했을 때를 '모든 것의 마지막 날'이라고 인식하고 있다. 이는 신약적 종말론으로 예수 그리스도가 종말의 시작으로, 하나님이 세상에 주시는 마지막 말씀이라는 의미이다. 현시대에 신앙인들이 예언·계시를 꿈이나 환상 등을 통해 받았다는 것은 모두 가짜다.
이런 인식은 이미 17세기 신앙의 선배들 때 정리되었다. 장로교 목사들은 목사 안수를 통해 임직을 받을 때 17세기 작성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에 따라 "성경의 가르침을 총괄한 줄로 알고 신종하겠느뇨"라는 질문에 "예"라고 답했다. 성경의 가르침이 모든 것을 총괄함을 믿고 따르겠다는 것이다. 1항 마지막에는 "하나님께서 계시해 주시던 과거의 방법들은 이제 중지되었다"고 선언하고 있고 6항 중간도 "성경 외에 성령의 새로운 계시나 인간의 어떠한 것도 더 할 수 없다"고 명시하고 있다.
예언과 예언자는 있다. 단 틀릴 때도 있다(?)
보수적 신학자로 예언 운동의 신학적 근거를 제시한 사람은 '웨인 그루뎀'이다. 그는 '벌코프'의 '조직신학' 내용을 현대적 영어로 풀어 기술했다. 벌코프는 신약 계시 이후 새로운 계시는 없으며 예수님이 다시 오시는 상황이 새로운 계시의 시작이라고 했다. 그러나 그루뎀은 오늘날도 계시가 있다고 주장했다. 그의 스승인 '리차드 게핀'과 같이 신약학자면서 조직신학을 공부하고 가르친 그루뎀의 영향은 지대했다. 한 가지 그루뎀은 오늘날 계시가 있지만 경우에 따라 틀릴 수도 있다고 했다. 그루뎀의 바로 이런 계시가 경우에 따라 틀릴 수 있다는 주장은 신명기 18장에서 살펴본 원칙 중 계시의 무오성을 위배한다. 하나님께서 주신 예언이 상황에 따라 틀릴 수 있다면 하나님의 무오성이 훼손되는 심각한 문제가 발생한다.
그루뎀의 주장보다 한걸음 더 나가는 운동이 바로 '피터 와그너', '하우스 피클', '신디 제이콥스' 등으로 대표되는 '신사도운동'이다. 와그너는 그의 책 <목사와 예언자>에서 목사들은 하나님께서 우리 시대 사용하시는 예언자들과 관계가 좋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는 교회 내 은사를 가진 자들과 목회자들이 어떻게 관계를 정립해야 하느냐는 문제점에 대한 인식이다. 와그너는 목회자 외에 하나님께서 특별하게 사용하시는 예언자들이 있다고 주장한다. 실제 와그너는 풀러신학교에서 교수로 있다가 소위 예언자들의 이야기를 듣고 풀러를 떠났다. 한국에 방문했던 와그너는 신사도운동을 비판하거나 받아들이지 않는 목사들에 대해 "오늘날 목사들은 기관의 영에 사로잡혀 성령의 역사에 순종하지 않으려고 한다. 이는 잘못된 영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이다"고 말하였다.
예언을 가르치고 배우는 사람들(?)
한걸음 더 나가 와그너는 예언자들뿐 아니라 사도들도 있다고 하는데 이들이 성경의 사도가 아닌 우리 시대 새로운 사도라는 의미로 '신사도'이다. 사도와 예언자는 격이 다른 부류로 사도들의 말에는 절대적 권위가 부여된다. 그는 2010년부터 신사도운동의 제2의 시대가 시작되었다고 한다. 이런 사도들의 모임이 '사도위원회'를 구성하는데 의장은 와그너이다. 또 예언자를 양성하기 위해 별도로 예언자 학교를 운영하는데 구약에 선지 학교를 통해 선지 생도들이 양산한 것처럼 예언자 학교도 존재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신명기 18장에서 보듯이 예언이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지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인데 이를 배워서 한다는 것은 납득하기 어렵다.
와그너는 각 지역은 지역을 사로잡고 있는 지역의 영에 지배를 받기 때문에 이를 통찰해야 한다고 가르친다. 그래서 영적으로 문제가 있는 지역에는 십자가를 세우고 땅 밟기를 하며 지역의 영을 통제한다. 그러나 십자가 자체가 무슨 영적 효과가 있다는 것은 성경적이지 않다. 십자가는 그 의미, 즉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의미가 있는 것이지 그 자체가 부적과 같이 힘을 발휘하는 것이 아니다.
바울은 모두가 사도겠느냐고 질문한다. 이 말은 모두가 사도가 아니라는 것이다. 12사도와 바울만이 사도이다. 사도들의 말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정되고 영향력이 있다. 그럼에도 바울의 서신서를 보면 당시 바울의 사도성을 의심하는 사람들이 있어서 바울은 상황과 사안에 따라 여러 말로 설명하고 설득한다. 그래서 우리는 바울서신이라는 성경 계기를 우리가 가지게 된 것이다. 그루뎀도 인정하듯이 이제 더 이상 신약성경 외에 성경적 계시로서 의미 있는 것은 없다.
성경 사도들의 가르침에 충실해야
우리 시대에도 바울 시대에 바울의 말을 받아들이지 않은 사람들처럼 성경 사도들의 말을 철저하게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 성경 사도들의 말을 마태 공동체, 요한 공동체 운운하며 사도가 속한 공동체의 공통된 시대적 인식 정도로 폄하하는 것이다. 예언·계시 등에 대한 자의적 해석이나 주장은 사도들을 세우셔서 주신 말씀의 절대성을 인정하지 않는 것에서 기인한다.
이런 주장은 교회사 속에 언제나 있어 왔다. 그러나 '몬타누스파'와 같이 성경 외에 새로운 계시가 있다는 주장에 대해 당시대 신앙의 선배들은 그들을 단호하게 이단으로 정죄했지만, 오늘날에는 저런 견해도 있을 수 있다고 인정하고 있다.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을 상대적으로 보기 때문이다. 결국 성경 절대성에 대한 위기가 문제의 핵심이다. 현재 한국교회에서 예언·계시에 대한 혼동은 신학적 가르침에 충실하지 않기 때문이다.
예언·계시의 종결을 이야기하면 성령을 무시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질문과 의문을 가지게 된다. 교회는 성령님이 인도하신다. 그래야 제대로 된 교회이다. 성령님의 활동 중 중요한 사역은 성경 계시를 영감해서 알려 주는 것이다. 따라서 성경 계시를 영감해 준 것과 모순된 방식으로 오늘날 성령이 역사한다는 것은 잘못이다. 성령이 역사할수록 성경과 더 가까워지는 쪽으로 간다. 이것이 실질적으로 성령의 인도를 받는 것이다.
하나님이 내게 주신 것이라는 주장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실질적으로 하나님이 주신 것이 중요한 것이다. '신천지' 이단도 '신탄'이라며 성령이 계시해 주셨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새로운 계시에 근거해서 성경을 해석한다. 그들도 성경을 무시한다고 하지 않는다. 오히려 철저히 따라간다고 한다. '여호와의증인'도 마찬가지다. 창시자는 스코틀랜드 출신으로 스코틀랜드의 성경 무오성을 그대로 가져와 그 위에 새로운 계시를 주장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새로운 계시가 결국 성경 해석의 중심이 된다. 신사도운동의 틀도 마찬가지다.
참된 성령의 역사는
보수적인 교회에서 성령의 역사를 무시하거나 제한함에 따라 비성경적인 예언·계시를 앞세운 성령 운동이 일어나고 있다. 그렇다면 참된 성령의 역사와 잘못된 성령 운동을 어떻게 구분할 것인가? 먼저 어떤 것이 잘못된 것인가를 분별하는 것이 중요하다.
첫째, 성경과 다른 이야기를 성경에 근거해서 이야기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박윤선 박사는 고린도후서 주석에서 "예언의 역사는 사도와 같이 단회적이다. 교회 시대는 예언의 후속으로 설교가 자리 잡았다. 현대의 예언들 가운데서 사실에 부합하는 경우라도 우리는 그것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했다. 이 말은 참 의미가 있다. 예언·계시가 사실에 부합해도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이다. 성경 시대와 마찬가지로 현대 시대에도 세상 속에 있는 점쟁이들도 예언을 하고 더러 맞는 경우가 있다. 맞고 안 맞고가 성령의 역사의 기준이 아니라는 것이다.
둘째, 성령에 근거한 사역은 비인격적인 사고나 관계를 맺을 수 없다. 비인격적인 말투나 태도는 성령이 임하심에 따라 맺어지는 성령의 열매와 모순되는 것이다.
셋째, 성령님의 역사는 비도덕적 형태로 벌어질 수 없다. 교회에서 편법, 불법적 교회 건축 등 도적적이지 않은 것을 행하면서 기도를 주장을 관철하는 수단으로 이용하는 것은 잘못이다. 또 국가와 관련해 어떤 주장을 관철하기 위해 기도회를 이용하는 것은 기도를 예수 믿는 사람들의 데모 수단으로 전락시키는 것이다.
넷째, 성령의 역사의 결과는 신약성경에서 말하는 참된 교회에서 벗어날 수 없다. 이를 생각할 때 참된 성령의 역사에 의한 목회는 첫째, 성경의 가르침에 일치하고 더욱 성경의 가르침에 깊이 있게 들어가며 둘째, 인격적으로 성숙해 가고 셋째, 우리가 목회하는 교회 성도들이 인격적으로 변해 가고 넷째, 우리가 섬기는 교회가 신약 교회가 가르치는 참된 교회가 되도록 최선을 다하는 것이다.
'은사 중지론'은 이적, 치유, 방언의 중지가 아니다
한 가지 오해가 있는 것이 있다. '은사 중지론'을 이야기하면 모든 이적, 치유, 방언 등이 중지되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중지된 것은 예언·계시를 말하는 것이다. 이적, 치유, 방언 등은 지금도 여전히 존재한다. 단 하나님께 주권이 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방법으로 하나님의 때에 일어난다. 이는 기도의 응답이다. 따라서 특정인이 이적과 치유 등을 마음대로 베풀거나 성령의 역사를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다는 식으로 말하거나 행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방언은 있지만 초대교회와 같은 예언·계시적 의미의 방언이 아니다.
치유에 대해서는 어떤 특정 개인에게 주신 것이 아니라 '교회' 공동체에게 주신 것이다. 교회가 기도하라는 것이다. 따라서 교회를 벗어난 병 나음을 목적으로 한 소위 '치유 집회'는 가능하지 않다. 조나단 에드워즈는 부흥 운동 당시, 이적과 치유를 경험한 사람들이 얼마 후에 다시 원위치 되어 있거나 오히려 신앙을 잃은 경우를 보면서 이적과 치유가 잠깐 있다가 없어질 수 있는가에 의문을 가졌다. 이에 대해 에드워즈는 사탄이 성경만을 의지하지 못하도록 이적과 치유를 도구로 사용하는 경우가 있다고 주장하며 이를 경계, 성령의 역사의 최종적 증표로 사용하지 않았다.
첫댓글 바르게 분별하는 것이 참 중요한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