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소리로 풀어낸 제주 무속신화
▲ 1882년 헐려버린 제주도의 내왓당이란 신당에 있던 12신 무신도 중 하나로, 여신‘홍아위’를 그린 거래요. 내왓당 무신도는 현재 10폭만 남아있대요. /문화재청 사람들은 코로나 때문에 많은 시간을 집에 머물게 되면서 새삼 집의 소중함을 느끼게 됐어요. 바쁜 현대사회에서 집은 아침저녁 잠시 몸을 맡기던 공간이었지만 코로나 사태 이후 직장인들은 재택근무를, 학생들은 온라인 수업을 하면서 집이 삶의 중심이 됐지요. 그래서 '집의 재발견'이라는 말도 나옵니다.
조상들에게 집은 온 가족이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는 매우 큰 의미를 갖는 공간이었어요. 집 안 곳곳에는 '가택신(家宅神)'들이 있어서 가족의 안전을 보살펴준다고 생각하기도 했어요. 지난 12~13일 가택신을 소재로 한 흥미로운 판소리 무대가 의정부음악극축제에서 펼쳐졌어요. 제주도의 무속 신화 '문전본풀이'를 바탕으로 한 판소리 '오버더떼창: 문전본풀이'라는 작품이에요.
합창·여러 악기·힙합… 변신하는 판소리
원래 판소리는 부채를 든 소리꾼 한 명이 고수의 북 반주에 맞춰 노래(창), 말(아니리), 몸짓(발림) 등을 사용해 이야기를 전하는 우리 민족 고유의 공연 예술이에요. 판소리는 소리꾼 한 명이 노래하는 것이 특징인데, 복잡한 시김새(전통음악의 장식음 표현)를 자기만의 개성으로 노래할 때 아름다움이 극대화됩니다.
하지만 최근에는 젊은 소리꾼들을 중심으로 판소리에 새로운 해석과 감각을 더한 작품이 많아지고 있어요. 고수가 북 이외에 다양한 악기를 연주하기도 하고, 소리꾼이 여러 명 등장하기도 하죠. 춤과 힙합이 더해지기도 하고요.
'오버더떼창: 문전본풀이' 역시 소리꾼 1명이 아니라 6명이 등장하고, 다 같이 합창도 해요. 여기서 '떼를 지어 노래한다'는 뜻의 '떼창'이라는 제목이 나왔지요. 떼창에는 소리꾼 각각의 개성이 잘 어우러져 있어요.
이 작품은 소리꾼으로도 등장하는 박인혜씨가 '작창(作唱)'한 것이기도 합니다. '작창'은 '소리를 창작한다'는 뜻으로, 우리 전통 소리를 우리 장단과 음계를 활용해 새로 짜는 걸 말해요. 작창은 판소리 다섯 바탕인 춘향가·심청가·흥보가·적벽가·수궁가 가락을 기본으로 해서 짜기 때문에 작창을 하려면 이 다섯 바탕에 대해 잘 알아야 하지요. 또 판소리는 본래 서양 음악처럼 악보로 전해지는 게 아니라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것이기 때문에, 작창을 할 때도 소리꾼이 새로운 소리를 듣고 외운다고 합니다.
제주 신화 담긴 '문전본풀이'
이 작품의 원작인 '문전본풀이'는 제주도에서 전해지는 무속 신화예요. 집 안의 여러 공간을 지키는 가택신들에 대한 본풀이라는 의미죠. '본풀이'는 굿 절차 중 하나로 무속신이 어떤 활동을 했는지 내력을 알려주는 내용이에요.
'문전본풀이'는 제주도 남선마을에 사는 한 가족의 이야기예요. 세상 물정 모르고 책만 읽을 줄 아는 가부장적인 남 선비와 생활력이 강한 여산 부인이 일곱 아들을 키우며 가난하게 살고 있었어요. 어느 날 남 선비에게 친구가 찾아와 장사를 해서라도 돈을 벌어보라고 권했고, 남 선비는 신비의 섬 '오동국'으로 떠납니다.
하지만 남 선비는 거기서 만난 노일저대라는 여인의 계략에 빠져 가진 돈을 탕진하고 눈까지 멀어 눌러앉게 되죠. 남편을 기다리며 삯바느질로 생계를 이어가던 여산 부인은 아들들과 협동해 부자가 됐어요. 몇 년 후 여산 부인은 오동국으로 남편을 찾아 떠나 결국 남편과 상봉해요. 하지만 거기서 노일저대의 계략에 빠져 목숨을 잃고 남 선비는 노일저대와 함께 고향으로 돌아와 아들들을 만나요. 노일저대는 일곱 아들의 목숨도 뺏으려 하지만, 막내 녹디생이의 지혜로 모두 살아나죠.
이 이야기는 주인공들이 가택신이 되면서 끝을 맺어요. 여산 부인은 부엌을 담당하는 '조왕신'이 됐고, 노일저대는 화장실을 담당하는 '측간신'이 됐어요. 남 선비는 '정주목정살지신'이 됐어요. 제주도의 전통 가옥엔 대문 대신 정주목에 '정낭'이라고 부르는 통나무 세 개를 끼워놓았어요. 이곳을 지키는 신이 '정주목정살지신'이에요.
지혜로운 막내 녹디생이는 '문전신'이 됐어요. 문전신은 제주도 전통 가옥에서 마루에 해당하는 '상방'을 드나드는 앞문을 지키는 신이에요. 상방은 아파트 거실처럼 집의 중심이자 모든 곳으로 연결되는 통로로, 이곳에선 집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다 볼 수 있어요. 그래서 제주도에서 문전신은 '집안 모든 일을 안다'는 말이 있고, 가택신 중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해요. 나머지 아들들은 상방의 뒷문을 지키는 '뒷문전', 그리고 집의 동·서·남·북·중앙을 지키는 '오방토신'이 됐어요.
'문전본풀이'에 등장하는 신들 외에도 우리나라 민속 신앙엔 다양한 가택신들이 있어요. 영화로도 제작된 웹툰 '신과 함께'에 등장하는 '성주신'은 대청마루를 지키는 신으로 집안의 평안과 부귀를 관장하며 가택신 중 가장 높은 위치로 여겨져요. 안방에는 자녀의 출산·육아 등을 관장하는 '삼신'이, 소·말이 사는 축사엔 '우마신'이 있다고 믿었죠. 된장·고추장 등을 보관하는 '장독대'엔 평안과 무병을 담당하는 '철륭신'이 있다고 여겨졌고, 곳간엔 재복(財福)을 담당하는 '도장지신'이 있다고 믿었대요.
제주엔 왜 신이 많을까
우리나라에는 지역마다 다양한 무속신들이 있어요. 특히 제주도엔 1만8000여 신이 있어 '신들의 고향'으로 불려요.
제주도에 이렇게 무속신이 많은 건 '기후'와 관련이 깊다고 해요. 제주는 온대에서 아열대로 넘어가는 지대에 있는 화산섬이라는 지리적 특성 때문에 바람이 많이 불고, 비도 많이 오고 가뭄도 자주 일어났어요. 사람들이 많이 사는 해안가는 연중 따뜻해서 미생물 번식이 활발해 전염병도 자주 퍼졌죠. 과거엔 과학이 발달하지 않았기 때문에 자연재해나 질병을 '민간 신앙'으로 해결하려고 했어요. 흙이나 바위, 그리고 집 안 곳곳에 '신'이 존재해서 이들에게 빌면 사람들을 지켜준다고 믿었던 것이지요. 지진 등이 잦은 섬나라 일본에 수많은 신이 존재하는 것도 같은 이유라고 할 수 있어요. 지금도 제주엔 350곳의 신당(神堂·신을 모시는 집)이 운영되고 있다고 해요.
▲ 마을의 부부 수호신과 영등신 등에 어부와 해녀의 안전과 풍요를 기원하는 제사를 올리고 굿을 하는 제주칠머리당영등굿의 한 장면. /문화재청
▲ 집 안 곳곳을 지켜주는 가택신의 이야기를 담은 판소리 공연‘오버더떼창: 문전본풀이’의 한 장면. /의정부문화재단
최여정 '이럴땐 연극' 저자 기획·구성=김연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