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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자연의원리회 원문보기 글쓴이: 아리랑한마음
한때 거제도에만 해도 17만명의 인민군 포로들이 있었습니다.
38경비대 북한군 주력 부대원들도 있었고,
20세 이상 넘어서 노동당에 가입한 빨갱이들 인민군들도 있었고
그냥 전쟁통에 보충병으로 입대하여 포로된 이들
남한에서 미처 피란을 못 가고 인민군의 포로가 되어 그 자리에서 입대한 의용군,
또는 포로된 군인이 제네바 협약을 무시한 북한측으로 부터
국군복을 벗고 인민군복을 입고 현지에서 반대로 총부리를 겨누다 포로된 이들
피란을 오다가 인민군으로 오해 받은 민간인들도 더러 있었습니다.
그 중엔 위장포로가 된 고위 군관급 인민군들도 있었습니다.
대부분 80프로 이상의 인민군 포로들이 북한에 송환 되는 것을 반대 합니다.
휴전 협상을 하면서, 유엔과 미국 북한은 포로협상에 난항을 겪는데,
위장침투한 고위 군관급 인민군들과 골수 좌익들이 포로수용소를 점거 합니다.
철조망 외부경계는 한국군 헌병이 지키지만,
모든 포로들의 관리는 제네바 협정을 준수하는 미군들이 맡아 보았습니다.
처음엔 숨을 죽이던 좌익포로들이 좌익이든 우익이든 평등하게 대우하는 미군측의 헛점을
노려서 포로수용소에서 좌익으로 점거한 수용소에선 인공기를 게양하고
인민군 군가를 부르게 합니다.
대부분 인민군출신 포로들은 해방후 전쟁까지 5년간 북한 생활을 경험한 덕분에
공산당이 어떤 것인지? 빨갱이들이 어떤 것인지 너무나도 잘 압니다.
그러다 비록 포로의 몸이지만. 자유스런 분위기에서 생활하니,
끔직했던 북한으로 다시는 돌아가기 싫은 것입니다.
북에는 부모와 누나 동생들이 있지만. 절대로 돌아가기 싫은 것입니다.
부모자식도 없고 오로지 공산당을 위해서 가족이 가족을 자아비판하고
돌을 던져야 하고, 어느 순간에 숙청이 될 지 모르는 불안불안하고
자유가 없이 숨막히는 긴장감 속에서 서로가 견제를 하고 누굴 믿어야 할지 모르는
그 지옥으로 다신 가기 싫은 것입니다.
북한측과 골수좌익포로들은 공개적으로 협박을 합니다.
너희들이 송환 거부를 하면 북녁의 가족들은 어찌 되는지? 하고 인질로 삼는 것입니다.
그렇다 해도 돌아가 봐야 뻔한 것입니다.
이미 자유의 물을 먹은 것으로 송환하여 가족을 만나긴 커녕 대부분 숙청이 된다는 것입니다.
미군들은 그것을 이해를 못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포로라도 자기들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이 좋은 것이고 당연한 것인데
왜? 대부분 반공포로들은 북송되는 것을 목숨 걸로 반대하는 것일까?
너희들은 가족의 정도 모르고, 우리의 적이지만. 그래도 너희들 나라에 대한
애국심도 없느냐는 것입니다.
그런 까닭에 오히려 좌익 빨갱이들이 점거한 수용소에 엄지손가락을 치켜 세우며
최소한 포로지만 의리가 있다는 식으로 대우를 하기도 합니다.
그건 미군이 공산사회에서 살아 보지 않았기 때문에 그 처참한 상황을 모르고 하는 소리입니다.
반공포로와 마찬가지로 중공군 포로들 역시 중공으로 돌아가는 것을 결사 반대 했습니다.
모택동의 문화대혁명을 거치고 중국이 공산화 되면서 붉은 기를 들고 완장을 찬 공산당들의
잔인무도한 살육터전에서 겨우 숨만 쉬고 살다가 비록 포로의 몸이지만.
제네바 협상을 준수하고 나름 자유롭고 인권이 보장된 세상의 맛을 보니
절대로 그 잔인했던 공산사회로 돌아가기 싫다는 것입니다.
그 당시 중공군 포로들의 80프로 이상이 중국으로 송환을 결사 반대하고
자유 대만으로 가게 됩니다.
남한의 인민군 포로수용소에서도 대부분 포로들이 반공을 외치고
자유대한민국 만세를 하게 됩니다.
그런데 수천명 수만명 이상의 단위로 포로들이 집단 수용된 곳에
고정좌경세력들이 침투를 하면서 막사 하나하나를 좌경화 시킵니다.
그 동안 숨죽이고 있었던 일부 골수 좌익 인민군 포로들이 합세를 합니다.
외곽은 국군 헌병이 포로수용소 내부는 미군이 관리하는데
그 많은 숫자를 다 못하니 자체로 막사마다 담당 책임자들을 뽑아서 활용하게 됩니다.
좌익포로들은 하나하나 각 막사들을 좌경화 시키고 주도권을 잡습니다.
그 과정에서 위장침투한 최고사령관급 인민군은 세상에 100명의 사람이 있을때
99명이 우익이라도 그 99명을 다 죽이고, 나머지 1명만 좌익이 되더라도
좌익 세상을 만들어야 한다고 엄명을 합니다.
인민군 주력부대 골수당원들, 38경비대 출신들의 전투경험이 많고 살인 경험이
많은 자들을 선별하여 각 막사의 대표를 시킵니다.
그리고 밤마다 우익반공포로들을 선별해서 10명씩, 30명씩, 또는 50명씩
막사안에서 인민재판을 합니다.
극렬한 반동분자는 그대로 막사 안에서 인민재판을 열어서 돌로 쳐 죽이고
좀 덜한 반동은 몽둥이로 300대, 200대, 100대, 등 엄벌에 처하는데
대게 1-2백대 맞다 보면 죽는 답니다.
그럼 땅을 파서 묻어 버리거나. 드럼통을 잘라 만든 칼 등으로 시체를
조각 내어서 드럼통을 잘라만든, 허니바께츠(똥통)에 넣어 날마다
청소시간에 바다로 가져다 버립니다.
그것보다 더 심각한 것은, 막사안에서 쳐죽이 우익반공포로의 배를 갈라서
간을 꺼내서 강제로 씹어먹게 합니다. 그것을 씹어먹지 못하는 자는
역시 그 자리에서 극형에 쳐해집니다.
미군감시자들은 막사에 태극기가 걸리든,
북한 인공기가 걸리든 아무런 상관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냥 포로 감시만하고 먹을 것만 주고, 정전 후 유엔 등의 협상에 따라
포로 송환까지 그냥 감시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 안일한 사이를 뚫고 좌익인민군들은 막사 하나 하나를 공포로 몰아넣고
좌경화 시켜갑니다. 주동이 되는 우익분자를 가려내서 매일 밤마다 수십명씩 공개적으로
쳐죽입니다. 그 피를 받아서 천에 붉게 물들여서 인공기로 막사 밖에 공공연히
걸어 둡니다.
그러다 맞아 죽기 일보 직전의 우익포로가 머리에 피투성인채 탈출을 합니다.
뛰어서 철조망 근처까지 가니 국군 헌병들이 있더랍니다.
초인적인 힘을 써서 몇 중의 철조망을 뛰어 넘어 국군헌병들에게 살려 달라고
매달리니, 그 뒤를 수십명의 좌익포로들이 참나무 몽둥이를 들고 쫒아오더랍니다.
하는 말이,
"어이 국군나으리~ 저 새끼 악질 빨갱이 포로입니다. 잡아 쳐 죽여야 됩니다.
빨리 우리한테 넘기시라우~"
머리에 피가 터져 흐르며 도망쳐온 포로가 의식을 잃으면서 하는 말이
"국군님들 속지 마시오. 저 사람들이 악질 빨갱이 들이요. 매일 밤마다 인민재판으로
수 십 명씩 살인이 이뤄집니다."
이렇게 수용소 안의 전모가 결국은 들어나게 됩니다.
하지만. 국군헌병은 외곽경비만 책임이 있지
내부관리는 미군들의 몫이라 개입을 할 수 없었답니다.
몇 년 동안 포로수용소에서는 위장포로들이 잠입하여 체계적으로
조직을 만들어 좌경화 시켜 나가는 것에 자발적으로 우익포로들이
뭉치기 시작합니다.
막사에 수용된 포로들도, 좌익과 우익으로 나눠지고 날마다 좌우익 포로들이
피터지는 살육전이 벌어집니다.
한쪽에선 대한민국 만세 국군만세, 자유민주주의 만세를 열창하는 포로들이고
다른 쪽에선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만세, 하면서 인공기를 흔드는 포로들로 나눈 것입니다.
77수용소 같은 경우만 해도 한번은 결사적으로 탈출한 포로의 주장으로 막사 안에서 150여명의
우익포로들이 인민재판에 공개처형을 당한다고 정보를 줬는데도,
철조망 밖의 군인들은 발만 동동 굴릴뿐 대책이 없었답니다.
미군들 역시 좌익포로들의 교묘한 항의와 시간끌기 저지로 막사 안으로 한발짝도 들어가지 못했답니다.
날마다 밤마다 그렇게 살육전이 발생한 것입니다.
한 막사에 100명이 수용되어 있다면, 그 중에 80프로가 우익이라도,
20프로의 골수 좌익들이 선점을 하여 기선제압을 하고. 잔인한 살육과
즉결처형을 해 버리면, 나머지 포로들은 그냥 공포심에 떤답니다.
깡패 3-4명이 완력으로 십여명이 넘는 양민들을 맘되로 가지고 놀고 괴롭히는 것과 같습니다.
골목 술집이 수십개 있어도 불과 몇 명의 양아치들이 삥뜯어 먹고 다니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수용소에서 반공적인 언사를 하면 쥐도 새도 모르게 요주의 인물이 되고 친공으로 설득을 당하고
자신이 피해를 격지 않기 위해 타인의 선두에서 쳐죽이고, 그 간을 씹어 먹음으로서
일단은 목숨부지를 하는 것입니다...
좌익포로들은 시도 때도 없이 기습침투하여 우익포로들의 대표들을 죽입니다.
육이오전 38선 경비대에 근무하다 주력군으로 내려오다 잡힌 인민군들은 전투경험이 많습니다.
또한 살인의 경험이 많습니다.
이야기를 들어보면, 과거 일본군들처럼 악질 만행을 많이 했습니다.
살인을 하지 않으면, 쾌락을 느끼지 못할 정도가 된답니다.
내가 안죽고 남을 쫒아가서 죽이는 것이 세상에서 가장 흥분되고 쾌락이라 합니다.
해방후 북한은 스탈린으로 부터 수많은 전쟁물자를 받아서 최전방으로 곳곳에 배치를
하는 중이였습니다.
김일성은 그로 인해서 38경비대에 엄명을 내립니다.
이제부터 30선을 오고 가는 모든 민간인들은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100프로 다
죽이라는 것입니다.
그 전까지만 해도 비록 남북으로 갈라졌지만. 눈칫껏 남북을 왕래를 했는데
김일성이 남침준비에 열을 올리고 부터는 38선 왕래하는 사람들에게 군사기밀이 다
들어나고 보안이 깨진다고, 북한이 전쟁준비하는 것이 소문나고 들통 난다고
단단히 입막음을 한 것입니다.
실제로 그 당시 38선을 오가던 민간인들이나.
국군 경비대 대북침투조들은 북한이 상당한 전쟁물자를 최전방 배치하고
곧 전쟁을 일으킬 것이란 것이 파다하게 소문이 났습니다.
최전방 일선 관측장교나 보초병이라도 이미 그런 소문들이 났는데
이승만 정권은 무사안일하게 대처한 것입니다.
김일성 역시 전쟁준비하는 것이 탄로 날까봐 살육을 하는데,
총알을 아껴야 하니 총을 쓰지 말고 다른 방법으로 무조건 100프로 다 죽이라 합니다.
그때부터 수많은 민간인들이 남북을 오고가다 잡혀서 죽음을 당합니다.
세갈래로 날이 선 날창 총검으로 심장을 푹 쑤셔서 비틀고 발로 가슴팍을 차서
칼날을 빼내면 심장의 피가 분수처럼 순간 확 뿜는답니다.
그때 살짝 옆으로 핏줄기를 피하면 그 사람 죽이는 느낌이 그렇게 쾌감이랍니다.
열명씩 민간인 가족들이 잡히면, 새끼줄로 묶어서 벼랑으로 일렬로 세워놓고
한사람만 발로 차면, 나머지도 다 따라서 그 높은 벼랑에서 떨어져 죽는답니다.
어떤 날은 인민군 38경비대에 애기 업은 엄마가 잡혔습니다.
엄마 보는 앞에서 애기를 죽여 버리니, 여자가 눈을 까뒤집고 발광을 하더랍니다.
그것을 3명의 인민군들이 달려들어 옷을 다 벗기고 돌아가면서 윤간을 합니다.
나중엔 하도 해서 온 몸의 삭신이 다 쑤시더랍니다. 처음엔 여자가 아들 죽인 것에
고래 고래 소리를 지르더니, 이제는 제발 목숨만이라도 살려 달라고 애원하더랍니다.
발가벗긴 몸에 젖가슴이 그렇게 탐스러워 날이 시퍼렇게 선 날검으로
살아 있는 여자의 유방을 오래내고 아래 생식기를 오려내는데,
도륙을 당하는 여인이 처절한 눈빛으로 쳐다보며 죽는데 그땐 가슴이 써늘하게
공포가 역습 하더랍니다.
인민군들에 의한 38선에서 그런 일들이 실제로 비일비재 했다는 것입니다.
공산세상에서는 인민재판해서 부모자식도 돌을 던져 죽입니다.
이번에 박상학인지 대북전단 띄우고 하는 사람 암살 간첩이 잡혔다는데,
지금도 북한 가면, 탈북한 가족들은 공개광장에서 사람들이 돌을 던져
죽인답니다. 남한에 이미 탈북한 사람이 후에 소문을 들어니, 그 부모가
공개광장에서 돌에 맞어 머리가 터져 피가 철철 흐르자. 맛있다는 듯이
자기 머리에서 흐르는 피를 입으로 허겁지겁 맛있게 빨아먹더란 것입니다.
하도 배고프게 살아서 죽어 아귀가 되면 안된다고, 죽기 전에 자신의 피라도
실컨 배부르게 마시자는 것입니다.
몇 년 전 북한 일부 지역에서 반란이 난 적이 있습니다.
공장지역인데, 쌀이 배급이 되지 않아서 노동자들이 일을 못 했답니다.
식구들도 다 굶고 그래서 공장 간부들이 중국 국경과 가까우니, 공장에 있는
자재를 중국에 몰래 팔아서 옥수수를 사서 그걸로 자체로 노동자들에게 배급을 하고
어서 힘을 내서 공장을 가동시켜 실적을 올려 당에 충성하자는 취지였답니다.
하지만. 그 과정이 탄로나서 공장 간부들은 사형에 처해 졌답니다.
맘되로 당의 재산을 횡령한것이란 것입니다.
그 소문을 들은 그 지역 노동자와 가족들이 죽이지 말라고 침묵시위를 하는데,
인민군 탱크들이 몰려와서 그 시위대를 그대로 깔아버렸답니다.
온 거리가 시체들 흐르는 강이 되어 흐르는 핏물의 피비린내 더랍니다.
모택동과 스탈린과 김일성은 공산화 과정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라지 않았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희생을 당한 것입니다.
대다수 북한의 사람들은 공산주의가 뭔지도 모르고 그냥 무서워서 죽지 않으려고
그 숨막히게 긴장되는 곳에서 연명을 한 것입니다.
그것이 해방 후 부터 지금까지 쭉 그대로 계속 됩니다.
수많은 탈북자들이 중국에서 잡히면, 인민군들이 철사로 코를 꿰어서 줄줄이
끌고 가거나, 어깨를 줄줄이 철사로 꿰어서 몰고 갑니다.
지금도 정치범 수용소의 실태는 말 할 것도 없습니다.
골수 공산당, 빨갱이들이 그렇게 무서운 것입니다.
다행히 스탈린도 죽고 모택동도 죽고 러시아와 중국은 많은 자유가 생겼지만.
북한은 아직도 구시대 그 살육으로 이뤄진 공산주의를 신봉하느라 정신이 없고
남한에서도 그에 동조하는 극소수의 세력들이 기막히게 저들끼리는 잘도 뭉쳐서
좌익활동을 합니다.
남한에서 좌익 활동 하는 사람들 북한가서 살면 대부분 숙청 됩니다.
또한 가서 살지도 못합니니다.
공산국가의 실태를 몸소 살아 본 사람들은 골수 빨갱이 아닌 이상
치가 떨려 못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육이오때도 수많은 인민군 포로들이 목숨바쳐서 반공을 외치고
북한으로 송환되는 것을 반대했습니다.
밤마다 좌익 수용소에서 북한때와 똑 같이 인민재판이 이뤄지고
멀쩡한 생사람을 돌로 쳐죽이고 간을 꺼내 나눠 먹고 하는 그런
골수 빨갱이가 총사령관으로 대량 활동하는 그런 비정상적인 북한으로
돌아간다는 것에 당췌 엄두가 나지 않는 것입니다.
당연히 양심을 가진 인간으로서 반공을 외치고 공산타도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빨갱이들 세상이 얼마나 잔혹한지 알 수 있는 세계적인 큰 사건이 2가지 있습니다.
하나는 쏘련군 포로들 이야기 입니다.
온 세상이 이것으로 자유와 인권에 대해서 다시금 생각해 보게 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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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20량이 넘는 유개화차가 오스트리아 산악지대를 달리고 있었습니다.
그 안엔 콩나물 시루처럼 젊은 포로들이 들어차 있었습니다.
피끓는 젊은이들인데 다들 하나같이 얼굴에 슬픔과 침통함과 결연함으로 굳어 있었습니다.
모두가 미군 작업복을 입고 있었는데, 2차대전에서 독일군에 포로가 되었던 소련군 포로들이였습니다.
비록 포로들이였지만. 소련군포로들은 미국민간 정보교육기구를 통하여 수용소 안에서나마
꿈에도 꾸어보지 못한 신천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스탈린식 공산주의식 군대식 조직화된 사회
폐쇄된 암흑 독재 사회속에서 살던 그들이 진정 자유와 인권을 경험한 것입니다.
막연히 아버지 어머니 할아버지 할머니로부터 어렴풋이나 듣고 짐작한 자유세상
인간의 존엄성이 있는 세상을 가끔 짐작 해 보다가,
서방세계에서 포로생활을 하면서 개개인 인권과 언론과 행동과 생각의 자유를 맛 보자
다시는 그 끔찍한 스탈린의 공산 세계로 들어가기 싫었던 것입니다.
지배체제를 맘되로 비판도 할 수 있고 갈아치울수도 있고 여행도 마음되로 갈 수 있고
책도 마음껏 읽을 수 있고 얼마든지 개개인의 자유와 개성이 존중되는 사회를 알게 된 것입니다.
캄캄 어둠과 공포와 긴장 속에 살다가 자유롭은 햇볕을 본 것입니다.
하지만, 쏘련의 철권자 스탈린은 트루먼 대통령에게 이들의 송환을 강력 요구했습니다.
포로는 당국으로 돌아가는 것이 지극히 당연한 결과인데, 쏘련의 포로들은 한사코 고향으로
돌아가길 거부하는 것입니다.
그것도 부모와 처자식이 있고 형제 자매가 있는 고향으로 절대 안 돌아간다는 것입니다.
가 봐야 숙청되거나 힘든 노동자가 되어 퇴출 된다는 것
잔인한 자아비판과 서구의 물이 들었다는 이유로 의심과 견제를 받게 되고
생명의 위협까지 느끼게된다는 것이고, 무엇보다 인권과 자유를 외친 것입니다.
하지만. 미국의 트루먼은 소련군 포로들의 마음을 이해를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들의 자국이고 고향이고 부모형제들이 있는 곳으로 왜? 안가려 하는지 영문을 알 수 없었답니다.
하지만 소련 포로들은 공산세계를 경험해 보았고, 자유진영의 생활도 경험해 본 것입니다.
송환을 반대하며 4천 5백명이 단식도 하고 결사적인 투쟁도 했지만.
국제관계를 우려한 미국은 소련의 주장을 인도적으로 들어주기로 했습니다.
그 결과 총검으로 강제로 기차에올라 탄 소련군 포로들은 땅이꺼질듯이 한숨을 쉬었답니다.
송환을 반대했던 자신들이 본국으로 가면 어떻게 된 다는 것 쯤은 불을 보듯 뻔한것입니다.
이러한 포로들의 심정도 모른체 기관차는 힘차가 달렸습니다.
기차는 드디여 터널로 진입을 하고, 소련군 포로들은 저마다 일시에 전달사항을
앞뒤로 서로 결연한 목소리로 복명복창하는 것입니다.
미군 감시병들은 일순 긴장하여 총대를 힘있게 잡았습니다.
열차의 선두가 긴 터널을 빠져나와 깊은 계곡이 나왔고 그 아래 짙푸른 강물이 소용돌이치며
흘러 내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열차가 철교를 타고 푸른강물 위를 달릴때 화차 문이 갑자기 드르르 열리며
소련군 포로들은 일제히 질서 정연하게 그 소용돌이 치는 검푸른 강으로 낙하산병 모양
차례 차례 뛰어내리기 시작했습니다.
"헤이 유 까템 워츠마라"
이것봐 도대체 무슨 짖들이냐?
하고 미군 감시병들은 화들짝 놀라서 소리를 치며 발만 동동 굴렸습니다.
기차를 세울 수가 없어 더 쌔게 달려 그 높은 강의 철교를 벗어나려 했지만.
그럴수록 더 빠르게 포로들은 뛰어 내려서 마치 가을 바람에 쓸쓸히 날리는 낙옆들 처럼 우수수
허공으로 흩뿌려 졌습니다.
그렇게 4천 5백명 전원이 한사람도 남김 없이 투신 자살을 해 버린 것입니다.
공산주의 소련의 수용소군도, 강제노동수용소 생활을 택하기 보다는
차라리 죽음을 택함으로서 자신들의 애타는 의지를 세상에 알리고
훗날을 경계해 버린 것입니다.
온 몸을 바쳐 죽음으로서 자유와 인권의 소중함을 세상에 소리 없이 외친 것입니다.
***(추가)
스탈린의 수용소 군도들은 정말로 가혹한 생활을 합니다. 보통 사람들이 입소 되자 마자
살인적인 노동과 학대를 당하는데, 3일을 버티기 힘들고, 그 어느 누구라도 7일만 그곳에서
노동과 학대를 당하면 죽어뻐드러진다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사람 목숨이 그렇게 질기답니다.
기어이 살아 남는 사람들이 있다 합니다. 가장 심한 고문은 홀딱 벗겨 놓고 쇠사슬에
묶어서 싸늘한 독방에 넣어 놓으면, 서서히 저체온으로 얼어죽는답니다.
차라리 한파가 몰아치는 곳에 놓으면 금방 얼어죽어 차라리 좋다 합니다.
아주 서서히 저체온으로 얼어죽는 그 고문이 그렇게 끔직하답니다...
역사상 유래가 없는 이런 불상사로 세상의 언론은 입을 모아 이 사건을 다투어 보도하였습니다.
매스컴의 빗발치는 항의에 미국의 트루먼행정부는 궁지에 몰려 진땀깨나 흘리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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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로부터 6년이 지난 트루먼 행정부는 이번엔 대한민국에 수용된 인민군 포로 송환 문제에 다시
부딪힌 것입니다.
유엔군과 미군과 북한은 휴전협상을 진행 중이고
이승만과 대한민국 국민과 국군들은 결코 휴전반대 이참에 통일을 이뤄야
후손들이 더 이상 전쟁이 없다고 결사항쟁을 외쳤습니다.
또한 포로 수용소에서도 유엔등의 결의로 거의 모든 인민군 포로들이 강제 북송을
당할 것 처럼 분위기가 조성되어 있었습니다.
북한은 조직적으로 포로수용소에 골수좌익을 침투시켜 온갖 방법을 동원해서
우익포로들을 살해하고 좌익투쟁을 전개 했고, 포로수용소 안에서 자생적으로
그에 맞선 우익포로들이 들고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좌익포로들은 드럼통을 잘라 칼과 창을 만들고, 막사 아래서 부터 지하땅굴을 파고
지하에 대장간까지 만들어서 드럼통을 잘라 날카로운 칼과 창을 만들었답니다.
또한 비밀리에 화염병을 만들고, 지하통로를 파서 옆막사로 공격을 하고
일시에 미군과 국군을 제압하고 무기를 탈취해서 지리산 빨치산과 합류 한다고
작정을 하고 행동을 개시 할 때였습니다.
자다보면 어느새 돌맹이나 칼로 공격을 하기에, 좌우익 서로가
치열한 살육전이 벌어진 것인데,
국군헌병들은 포로에 대한 아무런 권한이 없어서 우익 포로들이 밤마다 당하는 것을
그냥 발만 동동 구르며 안타깝게 쳐다 볼 수 밖엔 없었답니다.
한번 우익을 지향한 포로들은 자신들이 북한으로 돌아가면 반드시 즉결처형이란 것은
지난 해방후 5년간 공산화된 북쪽의 삶을 살아봐서 너무나도 자명하게 알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목숨을 걸고 스스로의 목숨을 지키기 위해 투쟁을 한 것입니다.
국력이 약해서 임진란과 병자호란을 당하고
일제식민지배를 당하고
육이오 비극을 겪고, 또한 힘이 없어서 같은 민족의 포로 문제하나
자체적으로 할 수 없게 된 것입니다.
이때 세상이 놀란 또 한번의 사건이 터집니다.
바로 이승만 대통령의 단호한 결단인 6.18 대 사면입니다.
(초창기엔 세계 각국의 비난이 있었지만. 차차 세상의 여론도 한국의 조치가 옳았다고
인정을 하게 됩니다.)
1953년, 반공포로들의 문제가 난항에 빠지고 북한쪽에 극히 유리하게 협상이 전개되어
우익 반공포로에 아주 불리한 상황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일단 포로들을 분류심사 하여 좌익포로와 우익포로를 격리수용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마친 18일 0시를 기해서 부산 가야리, 광주, 대전, 논산, 마산, 부평, 대구
등지의 포로수용소를 일시에 국군 헌병이 점령을 하게 됩니다.
그 전 17일 저녁을 먹은 반공포로들은 자치 중대장 소대장 간부들의 전달사항을 듣습니다.
오늘 밤에 심한 태풍이 온다고 하니, 자다가 천막이 날라 갈지 모르니
모두 신을 신고 옷을 입고 가취침을 하란 것입니다.
무슨 명령만 떨어지면 즉시 움직일 수 있게 준비하라고 했으며
절대 움직일때 그 어떤 소지품도 그 자리에 두라 합니다.
포로들은 의아해 햇습니다.
하늘을 보면 그렇게 태풍이 불 것 같지는 않았기 때문입니다.
부산 가야리 제9수용소의 밤도 또한 그렇게 깊어 갔습니다.
공정심사가 되지 못하고 좌익수용소에 남은 수많은 우익들에겐 안타까운 밤 이였습니다.
......그 전부터 우익 반공 진영은 전체 반공포로들의 혈서 서명을 받아서 탄원서를 썼습니다.
적색분자들과 밤마다 잔인한 살육전에도 굴하지 않고 투쟁하고 있으며
날마다 우익 포로들이 죽임을 당하여 생매장 당한다는 안타까운 사실들과
자신들을 즉시 석방하여 북진하는 국군에 합류하여 조국통일에 선봉에
세워 달라고 울부짖으며 호소를 했지만. 국방부 역시 미군, 전체적으론 유엔의 관활이라
어찌 할 수가 없다 하며 그냥 같이 안타까워 해 줄 따름이였습니다.
그 소식을 들은 전체 반공포로수용소에선 비탄스런 한숨들만 나오던 시기였습니다.
그런데 드디어.........6월 17일 가야리 9수용소 부근에도 상인 차림의 3남자가 나타났습니다.
헌병총사령관 밀사인 김진호 중령과 부산 지구 헌병대장 유병국중령
제35포로경비대대장 성영창 중령등이 였습니다. 이들은 밀회를 하고 성영창 대대장이
지휘하는 별동대가 미군의 배치상황을 파악하고 철조망을 끊었습니다.
동시에 군군 헌병들이 일시에 미군 보초들을 총으로 겨냥해서 무장해제를 시켜
영창에 강금해 버렸습니다.
한편 성중령은 반공포로 간부들을 비밀리 접선해서 폭풍대비 준비를 완료하라고
귓뜸을 한 상태였습니다.
100여명씩 가취침 상태로 잠자던 막사에 대한민국 군인들이 들어와서 기상하고 외칩니다.
"자 이제부터 여러분들은 손에 아무것도 들지 말고 인솔자를 따라 질서있게 나아갑니다."
끝까지 석방된다는 말은 하지 않았답니다.
뭔가 눈치를 챈 반공포로들은 물 밀듯이 막사와 철조망을 빠져나온 반공포로들은 별동대의 지시를 따라서
쿵쿵 거리는 심박동을 감당하면서 어둠 속에서 재빨리 탈출을 하였습니다.
여기서만 4천명의 반공포로들이 순식간에 탈출에 성공을 했습니다.
인솔대원들인 국군의 안내에 따라 해발 500미터가 넘는 산정상까지 탈출을 하자
미군이 관리하던 저 아래 수용소 쪽에서 산발적으로 총소리와 예광탄 신호탄
소리들이 들려 왔습니다...
산 정상 쪽으로 반공포로들이 거의 도착하자 정산 부근에서 미리 대기하고 있던
민간인들이 여기 저기서 달려와서 저마다 한명씩 포로들의 손을 따듯하게 잡고는
산을 내려 마을로 민가로 안내를 하는 것입니다.
이승만대통령의 결단으로, 국군 헌병총사령관의 지휘로,
일차로 헌병들이 미군들을 무장해제시키고, 철조망을 끊어서 포로를 탈출시킨 다음,
육군에서 그 포로들을 인솔해서 산너머까지 무사히 이동을 시킨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산 정상에선 이미 경찰들이 사복을 입고, 마을 동장 통장들과 주민들과 합세를 하여서
반공포로들을 하나하나 인수해서 민가로 숨겨 준 것입니다.
그렇게 하여 6.18일 새벽 전국적으로 수만명의 포로들이 일시에 탈출을 한
세계적인 일이 일어났습니다. 물론 그 과정에서 낙오하여 미군의 총탄에 죽어 간 포로들도
생겼고, 탈출에 실패한 포로들도 8천 여명이나 되었습니다.
*이들 8천명 역시 100일간 끈질긴 투쟁 끝에 다수가 목숨을 잃는 희생자들이 생겼지만
결국은 모두에게 자유가 주어졌다 합니다.
탈출한 포로들은 민간인들이 저마다 한명씩 따듯하게 데리고 가서 보호를 해 줬습니다.
포로복을 벗고 미리 준비해 놓은 민간인 복으로 갈아입고, 신발도 새로 지급을 받으며
포로의 때를 벗겨내었습니다.
민간인들이 해 주는 밥을 얻어 먹으면서 밖에 나오지 않고 꼭꼭 숨어 있었던 것입니다.
또한 그 즉시 미리 준비한 도민증을 발급 받아서 북한 인민군 포로가 아닌
대한민국 국민으로 즉시 전입이 된 것입니다.
날이 밝자 미군은 전방의 전투요원까지 차출 할 정도였고, 헬기를 띄워
곳곳 산악지대를 수색하고 마을을 검문검색 하였지만.
그 어디서도 포로들을 찾기 힘들었다고 합니다.
저마다 불쌍한 반공포로들을 위해 민간인들이 숨겨 준 것입니다...
마을 반장 통장들은 거리 거리 돌면서
"반공청년들은 집밖으로 나오지 마이소~ 미군 아아들이 마가 잡으로 다닙니데이~"
하고 소리치고 다녔을 정도 랍니다.
밤새도록 산을 타고 헐떡이는 탈출을 감행하고 아침이 되어서야 각 민가로 숨어든
포로들을 위해 주민들이 따듯하게 밥을 하고 맛있게 반찬을 해서 아침상을
차려 왔답니다. 인민군 반공 포로가 배가 고파 허겁지겁 식사를 하려는데
이웃 집에서도 피란민 생활 없는 산림에서... 아줌마들이 저마다 그릇이나 접시에 계란후라이나. 나물무침, 김치
등의 반찬을 들고 와서 먹으라고 내 놓더랍니다.
반공포로는 수년간 포로수용소 생활에서 한겨울엔 동상과 이질과 감기와
목숨 건 싸움을 했고, 또한 좌익세력과 밤마다 살육전을 하느라 긴장되어 언제
죽을지 모른다는 불안함에 수년을 떨며 살었는데, 드디어 이승만 대통령의 단독 주권행사로
미군보초병들을 무장해제시키고 대한민국 군인과 경찰과 민간인들까지
총 동원 되어서 반공포로들에게 자유를 주고, 따듯한 보살핌까지 받게 되니
그제야 밥숟갈로 그 따듯하고 하얀 이밥을 푹 퍼서 입에 넣는데,
무어라 말 할 수 없는 슬픔과 따듯함과 이제야 살았다는 안도감 등에서부터 눈물이 왈칵 솟고
목이 메어서 밥이 넘어가지 않더랍니다.
미군측은 그냥 법대로 반공포로든 친공포로든 다 같은 인민군 포로 취급을 했지만.
대한민국 국민들은 정말로 자유대한민국을 원하고 북송을 반대하여 목숨걸고
수용소 안에서 태극기를 걸고 자유대한민국 만세를 외치던 반공청년들을 따듯하게 맞아들였습니다.
외신 기자들이 탈출한 포로들 취재하려고 하루종일 민가를 헤매고 사람들을 만났지만.
그 어떤 기자도 반공포로를 만나지 못했답니다.
대한민국 국민들이 다들 입을 닫아 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기자들이 경찰서를 찾아가서 도움을 요청했답니다.
그러니 경찰서장 등 주선을 하자 즉시 기자들을 데리고
민가에 숨은 반공포로들을 만나 취재를 할 수 있게 해 주더랍니다.
그러면서 경찰들이 집 주변을 단단히 지켜서 다시 끌려가지 못하게 막아 주더랍니다.
미군들도 처음엔 잘 몰랐답니다. 그냥 같은 인민군 포로들인데 왜 서로 치열하게 싸우고 또한
반공포로들은 목숨을 걸고 결사항쟁하면서 자유대한에 남고 싶다고 외치는 까닭을 몰랐답니다.
하지만. 공산주의 세상이라든가 자유를 찾으려는 이들의 실상을 나중엔 알아 주더랍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서 수만명의 반공포로들이 대한민국에 남아서 자유를 찾게 되었습니다.
반대로 친공을 하여 북한으로 돌아간 일부 포로들은 처음엔 북한의 환대를 받았지만.
그 후엔 가족들 품에 안기긴 커녕 오히려 먼 곳으로 유배되고 2-3프로 빼고는 대부분
숙청을 당했다고 전해집니다.
대한민국에서 풀려난 반공 포로들은 20-30프로 정도는 남쪽에서
피란온 가족이나 친지들을 찾아 민간인으로 정착을 하였고,
나머지는 오갈 곳 이 없는 대부분 반공포로들은 다들 국군에 편입되었다가
일정 기간 복무를 마치고는 하나 둘 씩 일가를 이루고 이땅에 뿌리를 내리고
정착을 하게 되었답니다.
공산당에 빠진 사람들은 그 사상을 위해선 뭔 짖이든 한답니다.
90년대 고난의 행군때 북한주민 다 굶어 죽고, 평양시민하고
인민군대만 있으면 정권을 유지 할 수 있다고 큰소리치면서 군량미를
풀지 않은 김정일 정권입니다.
나라가 힘이 강해야 합니다.
부동항을 노린 스탈린이 사주를 하고
에치스라인에서 대한민국을 제외하여 남침을 유도했던 미군
중공군의 인해전술, 육이오는 강대국들의 대리전이란 주장은 잘못입니다.
남 탓 하면 안됩니다.
첫째 이승만 정권과 우리들이 충분히 전쟁에 대비하지 못한 책임이 가장 큽니다.
사람도 몸이 건강해야 몸속의 경찰과 군인인 적혈구와 백혈구가
병균들을 모조리 소탕하고 건강한 몸을 지탱시켜 줍니다.
나라도 마찬가지 입니다.
국가 안보와 국방이 튼튼해야 북한의 김정일이나. 러시아. 중국
일본, 미국도 대한민국을 함부로 하지 못합니니다.
그래서 신체도 건강할수록 좋고
나라도 강한 국방이 있어야 좋습니다.
이번 제주해군기지 건설 참으로 좋습니다.
울릉도에 해군기지 건설도 참으로 좋습니다.
한국의 독자적인 스텔스기 개발도 참으로 좋습니다.
잔인한 육이오로 부터 목숨을 걸고, 자유진영인 대한민국을 지켜내고,
처절한 전쟁의 잿더미 속에서 세계적인 경제성장과 함께, 이렇게
젊은 세대들을 키워준 우리 부모들을 향해서 수구꼴통 하는 젊은이들이 없길 바랍니다.
지난번 남한을 방문한 수많은 북한 미녀응원단들이 있습니다.
남측에선 그 미소를 보고 즐거워 하였지만.
북한으로 돌아간 미녀응원단들이 남측의 사정을 이웃 친구들에게 전하다가
대부분 밀고를 당하여 인민재판을 받고 정치범 수용소로 가게 되었다고 합니다.
한때 그 미녀응원단이 상주 예천 쪽으로 버스를 타고 가다가
지역민들이 김대중 대통령과 정상회담하는 김정일 사진의 플랭카드를
걸었는데 마침 비가 와서 그 현수막이 비를 맞더랍니다.
미녀응원단이 재빨리 버스를 세워서 달려가서 김정일 사진을 이렇게 비를 맞추면
어쩌느냐고? 화를 내고 울부짖은 모습이 참 이국적이라서 보는 사람들이 어리둥절 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진짜 공산당의 실체힙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어느 순간에 반동으로 고발을 당하여 숙청을 당하고 인민재판대 위에 섭니다.
지금 이 순간도 북한 전역이 그런 공포정치속에서, 서로가 불신하고 고발하고 생존을 위해
처참한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육이오땐 수만명의 반공 포로들이 밤마다 골수좌익과 살육전을 벌이면서도
자유민주주의의 뜻을 굽히지 않았습니다.
반세기가 훌쩎 넘은 지금 이 현실도, 북한에선 수많은 정치범 수용자들이
아비규환과 같은 곳에서 하루 하루 죽지 못해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빨갱이들이 그렇게 무서운 것입니다.
목선을 타고 탈북한 사람들을 북한은 끝까지 되 돌려 달라고 합니다.
그런 배신자는 끝까지 찾아서 처단을 해야 직성이 풀리는 자들입니다.
지금도 중국 등 해외를 목숨걸고 떠 도는 수많은 탈북자들이 있습니다.
호랑이 담배 피우던 육이오때 이야기가 아닙니다.
우리가 외면하고 있는 현실입니다.
북한, 중국, 러시아. 미국 등 강대국의 눈치를 보지 말고
대한민국은 무조건 자유대한민국을 원하는 모든 탈북자들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자료출처:
인민군1 북풍
인민군2(삼성도의문화저작상 당선작) 훈풍
인민군3(MBC육이오문학상수상작) 중립지대 김태영저
송효순저 대석방
홍광표저 중립지대 반공 포로들의 삶과 죽음
반공청년회보
대한공론사간, 판문점13년
리지웨이저 한국전쟁
마크 글라크저 다뉴브강에서 압록강까지
각종 신문사의 '민족의 증언'
등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