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음보살상(觀音菩薩像)과 나
이계향(미동부한국문인협회 회장, 수필가, 뉴욕)
돌아가신 아버지가 기독교의 집사로 일 보셨기 때문에 이를테면 나는 하느님의 부름에 의해 세상에 태 어난 셈이다. 그래서 나는 어렸을 때부터 주일학교에 나갔고 크기까지 장로교회에 다녔다. 실상 그때 나는 장로교가 무엇인지 종교가 어떤 것 인지도 모르고 그저 부모님이 교회에 다녀야 한다고 해서 나가게 됐었다.
그러다가 성년이 되고 나서 교회를 그만두었다. 종교에 대한 신앙심이 부족한 탓으로 내 몸과 마음을속박하는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그래서 오랫동안 나는 종교가 없이 지내 왔다.
내가 불교를 택한 것은 되고 싶어서 택한 것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누구의 권유가 동기가 된 것도 아니었다. 어디까지나 우연한 동기에서였다. 그것은 35년 전의 일이다.
어떤 날, 남편은 내게 국보적인 미술품을 샀다고 하면서 저녁 때 실어다 줄 것이라고 했다. 하나는 중국 당나라 때의 불상이고 또 하나는 청나라 때의 원세개(袁世凱)가 앉았던 (龍床)이라고 했다. 그것들은 남편의 친구인 L씨의 소장품이었는데 그분이 사정에 몰리는 일이 있어 하루는 남편을 찾아와서 맡아 달라고 부탁하더라는 것이었다. 그때는 내가 아직 골동품에 미치기 전이었으므로 별반 흥미가 없었다. 그리고 불상을 집에 갖다놓는것도 찬성하지 않았다. 어쩌다 친구를 따라 절에 가서 울긋불긋한 법당 안의 여러 불상을 보고 오면 그날 밤 꿈자리가 뒤숭숭하여 잠 못 이루던 일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남편이 샀다는 불상이 얼마나 고귀한 것인 지는 몰라도 불상을 집에까지 끌어들인다는 것은 아 무리 생각해도 불안스러운 일이었다. 그러나 예정대로 불상과 용상은 우리 집에 운반돼 왔다.
용상은 그다지 무겁지 않아 운반하기가 쉬웠으나 불상은 하나의 커다란 돌덩이에 조각한 것이어서 일꾼 여덟 명이 동원됐는데도 힘이 들었다. 불상은 흰 빛의 차돌로 만든 관세음보살의 상(像) 이었고, 서 있는 키가 거의 내 키와 비슷할 만큼 한 길이나 됐다.
다른 불상에 비해 그 불상은 매우 깨끗했고, 손에 든 염주며 머리에 쓴 관(冠)이며 하나하나가 정묘(精妙)한 조각의 화려한 불상이었다. 그러나 간혹 박물관에 가서 관상(觀像) 한다거나 절에 갔을 때 보게 되는 정도가 아니고, 집에다 두고 매일 보게 된다는 것이 나로서는 괴로운 일이 아닐수 없었다.
남편은 내 눈치를 알고 아예 불상이라는 생각을 버리고 고귀한 미술품으로 아끼고 좋아하라고 권했다. 그러나 응접실 한구석에 자리잡고 있는 그 불상은 아무리 뜯어봐도 내 눈에는 불상이 아닌 미술품으로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그날밤부터 나는 그 불상에대해 신경을 쓰기 시작했다. 밤이면 자다가도 그 불상이 환상같이 떠올라 소스라쳐 잠을 깼고, 또 깨고 나면 자꾸만 무서운 생각이 들어 이불을 뒤집어쓰면, 무엇이 잡아당기는 것 같아 오싹 소름이 끼쳤다.
이렇게 힘든 밤을 보내고 나서 아침이 되면 그 불상이 이 구석 저 모퉁이에서 나를 쏘아보는 것 같아 도무지 집에도 있기가 싫었다. 그래서 남편이 출근하기가 무섭게 뒤쫓아 나가서 친구 집을 돌아다니며 하루 해를 보내곤 했다. 그러다가 다시 집에 돌아올 일을 생각하면 끔찍끔찍 했고, 그 지겨운 밤을 보내야 할 일이 암담하기만 했다.
드디어 나는 어느날 남편에게 그 불상을 도로 돌려보내 달라고 사정하기에 이르렀다. 노이로제에 걸려그대로 가다가는 내가 말라 죽겠다고 했다. 국보가 아니라 국보의 할아버지라도 무서워서 배길 수가 없는 것을 어쩌면 좋으냐고 진정했다. 그렇게 조르기를 근 2주일, 남편은 어느 날 L씨에게 전화를 걸어 주었고, 며칠 뒤에 그 불상은 도로 L씨 집으로 운반돼 갔다. 불상을 보내고 나서 나는 그날 밤부터 다리를 펴고 단잠을 잘 수가 있었다. 날마다 친구 집에서 지루한 하루 해를 보내던 일도 모면할 수 있었다.
더구나 손님이 오면 불안한 생각으로 응접실에 들어가 앉아 불상의 시선을 힘들게 피해야 하던 일도 잊을 수가 있었다.
석달 후였다. 그때부터 내 마음이 이상스럽게 변해 갔다. 그것은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스님이 꿈에 나타나서 서광이 비치는 곳에 나를 인도하기도 하고, 또 부처님이 나타나서 법문해 주는가 하면, 촛불을 밝히고 불공을 드리는그런 꿈들을 꾸었다.
뿐만 아니라 석달 전에 돌려보낸 불상도 자꾸만 눈앞에 떠올랐다. 그전에는 그렇게도 무섭던 불상이 이제는 한결 그립게 떠올랐다. 나는 점점 그 불상이 보고 싶어지는 것을 괴롭게 느꼈다.
아무리 지워 버리려고 해도 보고 싶은 마음은 나날이 더하기만 했다. 나는 그 불상을 되돌려보낸 일을 한없이 후회하면서 날마다 무거운 생각에 맥이 풀려 있었다.
나는 그때 그 불상에는 필경 영혼이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어제까지 무서워 잠 못 이루던 내가 지금에 와서 이다지 그리워할 수 있겠는가 하는 것이었다. 그러던 어느날, 나는 견디다 못해 남편에게 그 불상을 도로 갖다 달라고 사정사정 했다. 남편은 단박 눈을 흘기며 나를 나무랐다. 한번 움직이려면 7-8명의 사람이 동원되어야 가까스로 운반되는 것을 경솔하게 이래 달라, 저래 달라 한다고 꾸짖었다.
나는 다시 조르기 시작했다. 그때부터 내 마음은 늘 어둡게 침울한 채 말이 없었다. 남편은 그런 네 꼴을 눈치 챈 것 같았다.
마침내 어느날 남편이 L씨에게 전화를 걸어주었다. 퍽 거북한 모양이었으나 그런대로 좋도록 말해주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L씨가 거절했다. 다시는 불상을내놓지 않겠다는 대답이었다. 그 뒤에도 여러 번 1씨에게 사정해 봤으나 그는 끝내 응해 주지 않았다. 그런 뒤로 한 달이 지났다. 그동안 나는 그 불상에 대해 체념하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고, 없었던 일과 같이 잊어버리기로 마음먹었다. 그리고 불교의 경전들을 구해다가 보기 시작했다. 이번 일을 계기로 부처님이 진정 어떤 것을 설법 했는가를 알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한문이 많고 범어를 음역(音譯)한 불교 용어가 많아서 대단히 난해했다. 불교 사전을 펼쳐놓고 침식을 잊다시피해 가며 파고들어도 불교의 길은 까마득하게 멀었다. 이 경전은 모두가 부처님의 교화(敎化) 설법을 유창하고 화려한 문장의 극치를 다한 불교문학으로서 불교 최고의 이상인 불타(佛陀)의 경지(境地)와 법신상주(法身常住)의 사상을 중심으로 수록한 경전들이었다.
일체 중생(一切衆生)은 불성(佛性)을 소유하고 있으므로 다 성불(成佛) 할 수 있다는 것.
불교는 어떤 신을 대상으로 믿는 것이 아니라 철저한 무신론에 입각하여 인간적인 심본주의(心本主義)를 근본적인 이념으로 하는 사상이기 때문에 마음 하나로 인해 중생도 되고 부처도 된다는것. 인간의 아들 석가모니도 고행 수도하여 나(我)를 깨쳤으며 부처가 됐다는 것.
그리고 우주 만유를 누가 창조했던지간에 오직 인간의 자성(自性)에 의해 그 있고 없는 것을 밝힘으로써 심조만유(心造萬有)를 스스로 자인하는 정신주의 사상이라는 것 등등이었다. 나는 한 가지 한 가지를 해득(解得)해 나갈 때마다그 오묘한 불도에 매인(魅引)되어 어떤 숙연 (宿緣)과 같은 것을 느꼈다.
어느날이었다.
나는 불교를 믿는 어느 친구를 따라 흥국사라는 절에 가봤다. 처음 가 본 절이었고 처음 만나본 주지스님이었으나 퍽 친근한 감이 들었다.
스님은 회색 법복위에 밤색 가사를 걸치고 호두 만큼이나 큰 단주를 손에 들고 쉴 새없이 하나씩 헤이고 있었다. 얼굴에는 웃는 빛이 전혀 없었고, 그렇다고 쓸쓸한 기색도 없었다. 다만 태연하고 원만해 보였다. 짤막한 대화에서 스님은 내내 우리의 눈을 떠나 먼 산과 먼 하늘을 바라보며 말을 옮겼다.
나는 그날 그 스님의 인도로 법당에 들어가 조용히 무릎 꿇어 앉았다. 그리고 처음으로 부처님 앞에 합장하고 염원 했다
제일 먼저 떠오르는 소원은 몇 달 전에 내쫓은 불상의 일이었다. 그래서 그 불상에 대한 일을 사죄하고, 하루 속히 다시 모셔오게 해달라고 염원했다. 이것이 부처님 전에 올린 나의 첫 염원이었다.
그러던 어느날 아침이었다.L씨의 부인이 아무런 예고도 없이 나를 찾아왔었다. 부인은 새삼스럽게 그 불상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요즘 곤란한 사정이 있어서 아무래도 그 불상을 도로 가져다 두어 주어야 하겠다는 것이 아닌가.
나는 뛰고 싶도록 반갑고 기뻤다. 마치 3천년 전의 부처님을 대하듯 가슴이 벅찼다. 그 부인이 원하는 값을 급작히 주선해 주고 그 다음날로 불상을 다시 모셔왔다. 그 관음보살의 불상을 모셔오던 날은 내 생애에 가장 행복하다고 느껴진 날 중의 소중한 하루였다. 나는 그날 그 불상을 안고 죄스러웠던 지난 날을 깊이깊이 사죄했다.
그 후, 나는 우리 나라에서 가장 고명한 스님 중의 한 분인 이효봉 스님한테서 여래성(如來性) 이라는 불명을 받았다.
스님이 <여래>의 대법(大法)을 소상히 풀이해 주시고, 열심히 선근공덕(善根公德)을 닦아나가는 불자가 되라고 간곡히 당부하셨다. 그날부터 나 는 그 스님의 제자가 됐고 스님은 내 스승이 되셨다.
지금 그 불상은 내 침실 옆 방, 아무도 드나들지 않 는 곳에 조용히 모셔놓고 있다. 그 앞에 향로와 목탁과 그리고 여러 개의 염주며 단주 등의 불구를 갖추어 놓았다.
슬플 때마다 나는 언제나 그 불상 앞에 가서 선다. 잠 못 이루는 밤에도 그 불상 앞으로 간다. 가서 염주나 단주를 손에 쥐고 한참 불상과 마주 서 있으면 슬품이나 괴로움이 가셔진다. 어느 때는 평생토록 못다 할 하소가 나를 잃고 마주서서 오래오래 바라보기만 하다가 되돌아설 때도 있다. 외람되지만 때로는 중생의 운명을 또는 조국을 자비로써 보살펴 주기를 염원하기도 한다.
나는 불심과 관음보살의 불상과...이렇게 생각할 적마다 나는 희위(喜慰)를 느낀다.
1992년 9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