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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2018. 2. 21. 수요일.
오늘은 지인의 졸업식이 있기에 아내와 함께 송파구 올림픽공원 하단에 경기장으로 택시 타고 갔다.
방송통신대학교 졸업식은 올림픽홀에서 거행.
나와 아내로서는 처음 보는 졸업식. 정말로 많은 사람들이 득실벅실거렸고, 사각모를 쓰고, 검은 가운을 입고, 꽃다발을 든 채 포즈를 잡고, 사진기 셔터를 누르는 사람들이 많았다. 나이 듦직한 사람들이다.
아내와 나는 홀 2층 뒷자리에 앉았다.
시끄러운 연주, 눈부신 불빛, 귀가 멍멍하도록 아팠다. 손가락으로 귓구멍을 막고, 눈을 감았다.
식이 시작되었다.
애국가, 태극기, 선열에 대한 묵념식...
학과 경과보고를 하는데 '방송통신대학교 졸업자는 670여 만 명'이라고 말했다.
670여 만 명?
상식 이하의 숫자에 나는 눈을 똥그랗게 떴더니만 이내 정정하는 마이크 소리가 들렸다.
'67만 여 명...'이라고 고쳐 말한 뒤 얼른 자리를 비켜나는 실수도 저질렀다.
내 입에는 '저런 저런. 사전에 한번 연습해 둘 일이지.' 중얼거렸다.
더 이상 들을 가치가 없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식이 진행 중인데도 빠져 나왔다.
1972년에 개설하여 첫 졸업생을 배출했을 터.
해마다 15,000명씩 42 ~43회를 곱하면 얼추 67만 명이라는 숫자가 나온다.
그런데 어떻게 670만 명이라고 숫자를 잘못 인식했냐? 교무처장의 실수치고는 이해불능이다.
나도 문득 공부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흔한 살인 내가 공부한다면? 아마도 한국사일 게다.
수십 년 전, 나는 국사 공부가 정말로 재미있었다. 초등학교 5학년시절부터...
하지만 다른 학과를 공부했다.
지금도 이따금 국사 연대표가 외우고...
방통대 학부에는 한국사 학과가 없다.
귀가하면서 송파구 잠실 석촌호수을 따라서 걸었다.
태극기가 많이 걸렸다.
일주일 뒤에는 3.1절?
날씨가 제법 많이 풀렸다.
날씨가 풀렸으니 나도 시골 내려가야 한다는 생각이 더 짙어졌다.
오랫동안 비워 둔 시골집이 어찌 되었을까? 몇 개월째이다.
2.
귀가한 뒤에 인터넷으로 1919년 3.1절에 관한 자료를 인터넷으로 검색했다.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33인. 독립선언서를 기초한 육담 최남선...
3.1절에 만세 부른 결과에 대한 일제의 보복은?
박은식 '한국독립운동 지혈사' 책에는 시위참가자 200만 명. 7,509명 사망, 15, 850명 부상, 45,306명 체포, 불에 탄 민가 715호, 교회 47개소, 학교 2개소.
이에 대하여 일본측은 '과장 되었다. 106만 명 참가. 사망자 553명, 12,000명 체포'라고 했다.
이를 감안해도 엄청난 숫자다.
한국인이 7,500명 죽었는데 비하여 일본인은 32명쯤이라고 한다.
33인 가운데 훗날 변절자가 3명, 4명의 이름이 나오고, 선언서를 기초한 육당 최남선도 나온다.
33민족대표에 참가하라고 손병희 선생이 1905년 을사늑약 5인인 이완용한테 권유했으나 이완용이 거절했다는 내용도 나온다. 믿거나 말거나 설이다.
※천도측은 관료인 윤용구, 한규설, 윤치호, 김윤식 등과 접촉, 대표자로 내세우고자 했으나 이들은 거부.
33인을 분석하면 천도교 16명, 기독교 15명, 불교 2명.
천주교, 유교는 단 한 명도 없다.
조선시대 권력의 핵심에서 많은 것을 누렸던 양반 사대부 사람은 단 한 명도 없다고?
사대부는 무엇일까 하는 의문이 꼬리를 문다.
33인은 종교인들이지 유교를 숭상했던 양반 사대부는 없다고?
친일 변절자로서 최남선(33인은 아닏다), 최린, 박희도, 정춘수 등이 언급된다.
※ 이갑성은 변절 의심으로... 뒷날 아닌 것으로 밝혀졌다 함.
'기미선언서를 오래 파고 들면서 공부하면 안 되겠구나'하는 아쉬움도 남는다.
조선시대는 조상귀신을 숭상했다.
교육과 문묘를 위해 각 고을마다 세운 교육기관인 향교는 234개소.
왕권 통치를 위하여 충효사상을 강요하고, 제례문화를 그토록 위하여 나라를 위해서 충성할 것처럼 서당, 항교에서 가르쳤던 나라이다.
그런데 모순이 생긴다. 친일파가 엄청나게 많았고, 독립선언서 명단에는 전무한 사실은 무엇을 말하는가?
조선시대 서원은 1,00개 (또는 600개 소?).
서원은 지방교육을 담당했다.
대원군이 1868년에 47개 소를 남기고 나머지는 모두 철폐한다.
서원의 토지세 면제, 노비 균역 면제는 조선 왕조의 재정을 갉아먹기에 대원군이 이를 철폐하였다.
위 기미년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분들의 성향을 분석하면 씁쓸하다.
모두 종교인이고 사대부는 없기에.
조선시대 충효 윤리관이 웃기는 수준이라는 뜻이다.
분당 파당하면서 끼리끼리의 이익을 도모했지 정작 구한말, 일본제국시대에는 어떤 구국행위를 했나에 대해서는 의문스럽다.
1919년 상해임시정부 성립과정과 우남 이승만의 초대 국무총리와 초대 대통령에 대한 자료도 나온다.
초대 대통령 이승만이 탄핵되고...
리승만은 하와이에서 상해임정을 헐뜯었다는 내용이 나온다.
1948년 정부수립 후에도 귀국한 상해임시 정부요인과 대통령이 된 이승만의 갈등이 여실히 들어나고.
김구 선생은 1949년 6월 26일 경교장(집무실)에서 안두희 소위한테 암살당하했다.
살인자 안두희는 1년 복역 뒤 육군에 들어가 장교로 근무했다.
세상에나..
살인자가 풀려나서, 영관장교로 근무하다가 예편했다고?
세상에 이런 일이...
나는 한국정치사를 조금 공부했기에 역사에는 늘 다르게 해석한다.
1910년 8월 29일 한일합방 이후 일본 정부로부터 작위 등을 수여받은 76명의 명단...
76명의 성격을 분석하면 퇴계 이황 게열의 동인, 율곡 이이의 서인
동인 계열은 남인 북인으로 갈리고. 서인 계열은 노론 소론으로 갈리고.
일본으로부터 작위를 받은 76명 가운데 신분을 가를 수 있는 64명, 미확 12명.
이 가운데 송시열 계열 노론은 56명, 소론은 6명, 남인은 2명, 북인은 없고...
송시열 계열 중 노론은 경기도 대전권, 송시열 계열 중 소로인 충남 논산지역.
네티즌이 본 견해로는 친일파가 대부분 기호학파에 있다는 사실에 다물지 못하겠다.
을사오적 한 사람인 송병준은 송시열의 9대손이라고 한다.
대전 회덕에 노론영수인 송시열 사당, 동춘당이 있고.
인터넷 역사관에는 조선시대의 왕족, 사대부에 대해서 많은 회의를 보여주고 있었다.
고개를 가우뚱하게 하는 역사관이다.
'김창숙이 없었더라면 한국의 유교는 역사 앞에 고개를 들 수 없다'는 말이 있다.
입을 벌어질 지경이다. 위 통계는 네티즌의 사견에 불과하다. 미확인이지만 시사하는 바는 무척이나 크다. 나중에 확인해야겠다.
구한말 사대부였던 윤웅열/갑신정변, 윤치호, 윤치소, 윤치영, 윤보선(4대 대통령) 가계도를 분석하면 고개를 흔들고 싶다.
친일에 동조했던 성씨인가 싶기도 하고...
초대 내무부장관을 역임했던 윤치영은 최근에 공훈이 삭제되었다.
1388년 위화도 회군하여 1392년에 조선을 개국하고 한양으로 천도한 이성계(전주 이씨).
1750년대 이후 특히 1800년의 무능한 쪼다왕국의 왕들이 보여준 못난 행태, 특정 가문에 의한 농락과 민란.
1800년대의 서양종교 탄압.
1801년 신유박해에는 정약용 가문이 작살이 났다.
정약용(1762 ~1836년).
맏형 정약현의 처남 이벽이 죽었고, 사위 황사영이 죽었고,. 딸 명희는 관노가 되어 제주도로 끌려갔다.
둘째형 정약전은 흑산도로 유배되어 그곳에서 죽었다(1760 ~ 1816년).
유배 중에 우리나라 최고의 해양 책자인 '자산어보'를 지었다.
본인인 다산 정약용은 두번째로 전남 강진으로 유배되었고.
매형 이승훈도 죽고.
정약종은 세례받은 천주교인이란 이유로 한양 서소문 밖에서 참수되었다.
정약용 본가는 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마현마을) 태생이고, 생가 묘소가 있다.
생가는 훗날 재건되었고, 재산 소유권은 글쎄다... 아쉽게도...
특히 대원군 시절인 1866년 신유박해에는 8,000명을 처형했다.
유교사상이 아닌 천주교를 믿는다는 이유로.
조선왕조는 철저한 불평등 신분사회이고, 천주교는 평등사회였기에 왕조윤리와 전혀 다르기에...
백성의 목을 잘라야 했다.
충남 해미읍성 안에는 천주교 신자를 숱하게 때려죽인 흔적이 현재에도 남아 있다.
충남 보령 오천면 영보리 갈매못 성지에는 천주교 박해 사실이 남아 있다.
오천항 바로 인근 지역이다.
천주교 탄압에 관한 한 1863년에 둘째아들 이명복(고종, 12살에 왕이 됨)의 아버지인 대원군 흥선 이하응은 '끝내주는 사람'이 되었다.
세계 열강국가의 침범과 1863년 흥선 이하응의 집권(26대 고종) 등장과 민비(1851 ~1895년) 세력의 암투.
여흥 민치록의 딸인 민비는 1866년(16살)에 왕후가 되었다가 1895년 을미사변 때 살해당했다. 일본 낭인이라고 하나 실제는 일본 군부 고문관들 이하 수십 명의 낭인과 한국 군인이 궁궐에 침입하여 왕후의 가슴을 밟고, 칼로 도륙하고, 살아 있는데도 후원에서 석유 부어 불 태워서 죽였다.
한 나라의 왕후를 도육한 일본인과 조선인이라...
조선군 훈련대 제2대대장인 우범석(우장춘 농업박사의 아버지)가 참여했다.
조선군 이두황(1858 ~1916년, 본관 인천 이씨)은 조선 무관으로써 참여했다.
이하 일본의 조선국 병탐과 이에 동조하는 친일세력이 빚은 역사에는 나는 고개를 마구 흔든다.
1910년 일본 식민시대. 1945년 8월 해방과 미군정정의 극도한 혼란 1950년 6월의 한국전쟁. 190년 4.19, 1961년 5.16군사구테타... 가 줄줄이 이어진다.
우리나라 남한 성씨는 수백 개.
이 가운데 숫자가 가장 많은 성씨 순위이다.2000년 통계)
1위 김해김씨 4.125천 명
2위 밀양박씨 3,031천 명
3위 전주이씨 2,610천 명
4위 경주김씨 1,737천 명
5위 경주이씨 1.425천 명
6위 경주최씨 977천 명
7위 진주강씨 967천 명
8위 광산김씨 837천 명
9위 파평윤씨 714천 명
10위 청주한씨 643천 명
이하 생략
2015년 이래 통계
김씨 9,925,949 : 21.5%
이씨 6,794, 637 : 14.7%
박씨 3,895,121 : 8.4%
최씨 2,169,704 : 4.7%
정씨 2,010,117 : 4.3%
강씨 1,044,386 : 2.4%
합계 25,840,000명...
6개 성씨 인구가 우리나라 남한 인구 반.
2015년 남한의 성씨 숫자는 5,582개.
성씨 숫자별 순위이다
경남이 압도적으로 많고, 그다음에 경북...
충남, 강원도, 전남 등을 본관으로 둔 성씨는 얼마 안 된다. 인구 숫자도 얼마 안 되고...
왜 이런 현상이 나타날까?
※ 경남인 경주, 김해지역이 많은 이유는 과거 통일신라 지역이라서 그럴까?
재미나는 통계이다.
조선시대 문과, 무과 급제자, 상신(영의정 좌의정 우의정)과 대제학, 왕비 배출 등의 숫자가 나온다.
이 가운데 경주최씨 통계가 웃긴다.
인구 순위 6위인데도 문관 급제자 순위는? 73 ~75순위이다. 아니 왜?
조선조 문과 급제자는 145,607명(과거시험 739회
전주이씨 870명, 안동권씨 368명, 파평윤씨 347명, 남양홍씨 334명, 안동김씨 318명, 청주한씨 290명, 밀양박씨 267명, 광산김씨 265명, 연안이씨 254명, 여흥민씨 242명, 진주강씨 228명, 김해김씨 211명.... 경주이씨 178명.
이하 생략*(위 통계는 인터넷에서 검색 /부정확함을 인정해야 한다. 참고사항에 불과).
문과 급제자를 비교하면 아래 통계....
인구 순위 1위 김해김씨는 12번째
순위 2위 밀양박씨는 7번째
순위 3위인 전주이씨는 1번째
순위 4위인 경주김씨 11번째
순위 5위인 경주이씨 순위 20번째
순위 6위인 경주최씨는 급제자 45명으로써 73 ~75번째로 크게 밀려났다.
타성은 문관 급제자 몇 백 명씩 배출하는데 경주최씨는 인구숫자 6위인데도 문과 급제는 고작 45명이다.
왜? 이렇게 저조한 이유는 무엇일까?
고려조에서는 제법 위대받는 성씨였는데 조선조에 와서는 몰락한 이유는 무엇일까?
아부할 줄 모르는 성격때문이었을까?
예컨대 1960년 동학을 창시한 최제우(1824 ~1964년)는 경주최씨.
2대 교주인 최시형(1827 ~1898년)은 경주최씨. 두 사람 모두 처형당했다.
1870년대 초 대원군의 횡포에 반기를 들었던 최익현도 경주최씨. 나중에 잡혀서 일본 대마도에 굶어죽었다.
최씨네는 고작 이러한가..
한 사람이 생각난다. 조선조 12대 만석집안이었던 경주부자. 경주최씨. 12대는 최준.
백리 안에 굶어죽는 사람이 없도록 늘 쌀독을 개방했다던 최부자(경주 교동에 있음).
12대 마지막 부자인 최준은 독립자금은 냈고,
나중에 대구대학(영남대한교의 전신)을 운영하다가 박정희한테 넘기고.. 지금은 빈털이가 되었다.
나는 1960년대 말에 위 12대 마지막 부자였던 '최준'을 한 번 뵈었다. 1960년대 말에 돌아가셨고.
지금은 그의 손자인 최염이 재산을 되찾으려고 노력하나.. 이미 기울어진 가세였다.
이처럼 경주최씨 가문은 조선조, 최근 한국정치사에서는 두각이 거의 없었다.
왜? 하는 의문이 생긴다.
최씨네 본관은 56개. 엄청나게 많은 숫자이다.
본관이 해주, 동주, 강릉, 삭주 등은 나름대로 조선조에서는 출세하는데 비하여 인구 숫자가 압도적으로 많은 경주최씨는 관직, 정치에는 두각을 나타내지 못했다.
고려조의 최영장군은 창원최씨
고려말 무신 정권의 최충헌 등은 우봉최씨
육당 최남선은 동주최씨
최규하 대통령은 강릉최씨
조선조 왕비 배출가문이다.
4명 : 여흥민씨, 파평윤씨, 청주한씨
3명 : 안동김씨, 청주심씨, 경주김씨
2명 : 청풍김씨, 거창신씨, 반남박씨
1명 : 안변한씨, 곡산강씨, 안동권씨, 문화유씨, 여산송씨, 양주조씨, 덕수장씨, 함종어씨, 달성서씨, 연안김씨. 남양홍씨, 광산김씨, 해평윤씨.
※ 우리나라 인구 1위 김해김씨, 2위 밀양박씨, 3위 전주이씨, 4위 경주김씨, 5위 경주이씨, 6위 경주최씨, 7위 진주강씨이다.
이들 가문 가운데 경주김씨만 3인이 있고, 김해김씨, 밀양박씨, 경주이씨, 경주최씨, 진주강씨는 한 명도 없다.
조선왕들은 부인을 엄청나게 많이 거느렸다.
왕후 이외에 빈궁 들을 잔뜩 거느렸으니... 여인네들이 득세한 세상이었다.
서로 암투하고, 질시하고... 왕들이 단명한 이유이기도 하겠지.
고종의 경우이다.
왕비는 여흥민씨 45살 때 1895년에 일본군인들이 죽였다.
고종 나이는 44살. 한창 젊은 나이에 부인(왕후)를 잃었다.
그도 원기왕성한 사내이기에 정실이 아닌 귀인들을 맞았다.
부인이 7명(민비, 귀인이씨, 귀비엄씨, 귀인장씨, 소의이씨, 귀인정씨, 귀인양씨).
조선조 왕들의 부인 숫자
태조 6, 정조 10, 태종 10, 세종 6, 문종 3, 단종 1, 세조 2, 예종 2, 성종 12, 연산군 4, 중종 12, 인종 3, 명종 7, 선조 8, 광해군 10, 인조 5, 효종 4, 현종 1, 숙종 9, 경종 6, 정조 5, 순조 2, 헌종 4, 철종 8, 고종 7, 순종 2.
고려, 조선 1 ~5위
고려 : 태조 29명, 헌종 13, 우왕 9, 충선왕 8, 공민왕 6
조선 : 성종 12명, 중종 12, 정종 12, 태종 10, 광해군 10
힘 들었겠지.
낮에는 政事, 밤에는 情事 하느냐고.
지난 1월 19일.
나는 '1987' 영화를 보고는 한국사를 다시 공부한다.
1987년 6월 항쟁에 대한 영화.
영화는 영화에 불과하지만 조금은 역사에 근거를 두었다.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는 영화였기에 나는 국사 공부를 혼자서 시작했다.
'역사는 강자가 늘 고쳐 쓴다'는 내 잘못된 인식이 아직도 고쳐지지 않는다.
1980년 5,18, 1987년 6월항쟁에 관한 느낌은 분명히 있다.
서울 용산구 삼각지에서 근무했던 나로서는...
내가 보는 견지는 고개를 썰썰 흔들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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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역사 공부가 재미있었던 적이 있는데
요즘은 집중이 힘들어서
못하고 있지요
창작 하기도 너무 힘들거든요
힘내세요
초안 수준도 안 되는데 댓글 달아주심에 고맙습니다.
소설 창작이라...
많이 돌아다녀서 발로 써야겠지요. 머릿속보다는 눈으로요.... 제 경우에는요.
요즘 날씨 많이 풀렸네요.
조 선생님의 작품 또 기다립니다.
국사와 역사를 다시 생각하게 해줍니다.
한국사. 왕들에 관한 이야기이지요.
왕족, 사대부들의 이야기이지 백성(서민) 이야기는 별로 없지요.
수십 년만에 한국사를 조금 인터넷으로 검색하자니... 정말로 욕 나올려고 합니다.
예전 학교 다닐 때에야 두루뭉술하게 전체적인 윤곽만 배웠을 뿐. 깊은 속까지 파고 들 능력을 없었지요.
늙어가는 지금, 한국사를 생각해 보니 날림공사, 허위가 수두룩하네요.
'너무 깊이 알려고 하지 마라, 다친다'라는 말이 맞겠지요.
기미 3.1절에 보여준 왕족, 사대부, 천주교, 불교의 양태가 무척이나 그렇습니다.
대한민국의 역사를 읽으며
한편으론 슬프고
한편으론 아파오네요.
굴곡진 질곡의 역사이기에......
'역사란 깊이 알려고 하면 다친다'라는 말이 귀에서 맴도네요.
3.1절에 대해서 조금 파고 들어가면... 아쉬움이 많이 남네요.
그때나 지금이나 자기보신에 영특한 사람은 살아남아서 출세하는 것이고...
댓글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