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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갈라디아서 5장 22-23절 성령이 맺게 하시는 열매들7-충성의 열매
전에 어떤 사람이 직장에서 많은 알바생들이 특별한 시간 동안에 일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일하는 모습이 영 시원찮습니다. 그러다가 오늘 잔업이 없다는 말에 실망이 가득한 모습을 보였었는데 조금 후에 잔업을 한다고 하니까 갑자기 얼굴이 확펴지면서 생기가 도는 모습을 보면서 ”돈 몇푼에 축 처졌다가 생기가 돌았다가 하는 그 모습이 왠지 불쌍하게 느껴졌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잔업을 하면 시간당 10,000원을 주던 것을 15,000원을 주니까 그 돈 때문에 그렇게 좋아하는 것입니다. 얼아 안되는 돈에 왔다갔다 하는 그 마음을 여러분들은 가지지 않으셨습니까? 하나님은 이런 돈 몇만원에 흔들리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 원하시는 뜻대로 충성된 사람을 찾고 계십니다.
여러분! 주변에서 충성스러운 사람을 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충성스러운 사람하면 금방 떠오르는 사람이 있습니까? 우리 나라 대표적인 위인 가운데 충성스러운 사람하면 거의 대부분 이순신장군을 꼽을 것이라고 봅니다. 열심히 싸워서 승리한 자신을 간신들의 모함을 받아 감옥에 가게 만든 왕과 나라에 대한 충성심을 결코 버리지 않았던 사람이 바로 이순신장군입니다. 그것도 죽기 까지 싸우다가 일본군의 총탄을 맞아 죽으면서까지 ”나의 죽음을 적들에게 알리지 말라“고 하면서 끝까지 싸워 승리하게 만들었던 감동스러움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이런 이순신 장군에 관한 영화가 명량, 한산, 노량이라는 제목으로 얼마전에 나와서 상영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그것은 역사 속의 인물이고 지금 살고 있는 이 시대에 여러분 주변에나 아니면 이 나라 전체를 볼 때 충성스러운 사람이 있다면 누구일까요? 여러분 생각나는 사람이 있습니까? 저는 안납니다. 아마도 아는 사람이 별로 없어서 그럴지도 모릅니다.
충성된 사람들의 특징은 자기의 이익을 구하지 않고 자기 위에 있는 주인의 이익과 영광을 구한다는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충성된 사람을 매우 기뻐하십니다. 그래서 충성된 사람에게는 더 많은 일과 생명의 면류관을 선물로 주십니다. 요한계시록 2장 10절을 보면 ”너는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하지 말라 볼지어다 마귀가 장차 너희 가운데에서 몇 사람을 옥에 던져 시험을 받게 하리니 너희가 십 일 동안 환난을 받으리라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관을 네게 주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충성된 사람은 어려움이 심하면 심할수록 더 빛납니다. 하나님은 그런 총성된 사람에게 더 많은 일과 생명의 면류관을 주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성령을 통하여 자신의 자녀요 백성된 그리스도인들이 충성의 열매를 맺게 하십니다. 우리 오늘 본문인 갈라디아서 5장 22-23절을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할렐루야! 이것이 성령받은 사람에게서 나타나는 자연스러운 삶의 열매입니다. 이를 통해 자신이 성령을 받았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물론 성령받은 증거가 이 아홉가지에만 머무는 것은 아닙니다. 거듭남으로 인해서 갖게된 변화된 마음이 하나님의 아름다움과 영광을 드러내는 사람으로 변하고 있습니다. 생각부터 바뀌어져 행동으로 나타나는 변화 외에도 하나님 아버지에 대한 고백, 예수님과의 관계성이 지속됩니다. 그로인해 예수님으로부터 베우게 되고 그 말씀에 순종함으로 인해 열매맺는 삶이 계속되는 것입니다. 그 가운데 신약 성경에서 충성스러운 증인으로 살았던 사도 바울을 보면 그의 변화는 놀랍고 획기적인 면이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이 그리스도를 대적하여 교회를 박해하고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잡아다 가두는 일에 앞장 섰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자신을 부르시고 쓰신 이유를 충성되이 여기셨기 때문이라고 전하고 있습니다. 디모데전서 1장 12절을 보면 ”나를 능하게 하신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 내가 감사함은 나를 충성되이 여겨 내게 직분을 맡기심이니“하면서 자신이 전에 어떤 일을 했는지를 설명합니다. 13절입니다. ”내가 전에는 비방자요 박해자요 폭행자였으나 도리어 긍휼을 입은 것은 내가 믿지 아니할 때에 알지 못하고 행하였음이라“
이 두 말씀을 유심히 살펴보면 사도 바울은 첫째로는 예수님과 예수님의 몸인 교회를 과격할 정도로 공격했던 사람입니다. 그는 비방자였고 박해자였고 폭행자였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그를 긍휼히 여기셨습니다. 왜냐하면 알지 못하고 행하는 행동이었기 이었기 때문입니다.
둘째로 사도 바울은 충성스러운 사람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님을 믿기 전에도 충성스러운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충성스러움의 방향이 잘못되어 있었습니다. 때때로 충성스러움이 올바로 가지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런 분별없고 맹목적인 충성은 엄청난 악한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자신은 시키는 대로 했기 때문에 죄가 없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자신은 자신의 윗사람이나 나라에 충성한다고 하는 행동이 누군가를 힘들게 하고 억압하는 행동이 될수도 있습니다, 어떤 경우가 그러냐하면 자신의 행동을 주관하는 상관이나 명령하는 윗 사람이 불의한 사람인 경우가 그것입니다.
여러분 부모가 불의한 일을 시키면 아이가 따라야 할까요? 대통령이 불의한 일을 시키면 그 아래 사람이 따라야 할까요? 직장에서 상관이 옳지 못한 일을 시켰을 때 직장에 더 다니거나 진급을 위해서 시키는대로 해야할까요? 더 조심스럽고 위험한 것은 전쟁터에서 발생합니다. 전쟁중인데 중대장이나 대대장이 한 동네를 모두몰살시키라고 명령합니다. 민간인인데 말입니다. 베트남전에서 한국군대가 그런 일을 한 적이 있습니다. 이런 일은 세계 전쟁사에 너무 많아서 다 열거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여러분들이 군인으로써 그런 명령을 받았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만약 명령을 어기면 여러분들이 명령불복종으로 즉결처형이 될 수도 있습니다. 어려운 문제 아닙니까? 이 때 충성스러운 사람들은 많은 고민을 하게 됩니다. 명령을 따르지 않고 죽을 것인가 아니면 명령대로 죄없는 사람들을 다 죽여야 하는가? 이 세상은 이런 악을 위하여 충성을 강요하며 그것을 미덕으로 삼습니다. 그렇다면 어떤 사람이 충성스러운 사람일까요?
사도 바울은 자기의 지식과 신념을 따라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했습니다. 그의 지식과 신념에 의해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감옥에 갇히거나 죽임을 당했습니다. 그는 율법에 능통한 사람이었습니다. 다시 말해 성경에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유대인들이 믿는 종교에 열심이었습니다. 그는 유대에 충성된 사람이었고 또한 자신이 믿는 유대교에 충성스러운 사람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새롭게 등장한 예수를 믿는 그리스도인들을 보면서 광분했습니다. 그들이 부활하지도 않은 예수를 부활했다고 거짓말을 하면서 유대교를 믿는 사람들을 미혹해 유대교를 떠나 사망의 길을 가게 만든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가 볼 때 기독교는 마치 전염병처럼 보였습니다. 빨리 단속하지 않으면 유대교 전체가 큰 해를 입을 것을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목숨걸고 기독교를 막아야 한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그리스도를 따르는 무리들을 어리석은 자들이요 거짓말쟁이라고 비방한 비방자요, 기독교를 말살시키기 위해 박해를 가하는 박해자요, 또한 무력으로 기독교인들에게 폭행을 하는 폭행자였습니다. 적어도 예수님께서 그를 찾아가셔서 만나주시기 전까지는 그랬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런 그를 찾아가셔서 자신의 부활이 거짓이 아니라는 사실을 밝히 보여주셨습니다. 그때부터 잘못된 열심을 가지고 행했던 충성스러움이 하나님의 뜻하신 바대로 충성하는 삶으로 바뀌게 된 것입니다. 충성의 대상과 충성의 목적이 바뀌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이 충성된 사람을 좋아하신다는 또 다른 증거는 구약성경에서 모세를 보면 알수 있습니다. 모세가 구스여자를 취하였을 때 모세의 형 아론과 누나인 미리암이 그것을 걸고 넘어지면서 ”너만 하나님과 대화하냐? 우리도 하지 않느냐?“하면서 영적인 부분까지 공격을 하였습니다. 평소에 가지고 있던 마음이 밖으로 표출된 것입니다. 그때 모세는 형과 누이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하나님께 무릎을 꿇었습니다. 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승했기 때문입니다.
아론과 미리암의 행동은 단순히 옳고 그름의 문제를 넘어 이스라엘 전 백성들의 마음을 흔들어 놓는 결과를 가지고 오게 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전달하는 모세를 약화시킴으로 인해 오는 대 혼란이 야기되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보지 못하고 옳고 그름 문제를 통해 영적인 것까지 뒤집어 놓으려고 하는 두 사람에게 하나님은 화가 나셨습니다. 그래서 세 사람이 같이 있을 때 하나님께서 자신의 영광을 보이시면서 세 사람을 불러 말씀하셨습니다. 민수기 12장 4-9절에 이 모습이 나와있는데 제가 읽어드리겠습니다.
”여호와께서 갑자기 모세와 아론과 미리암에게 이르시되 너희 세 사람은 회막으로 나아오라 하시니 그 세 사람이 나아가매 여호와께서 구름 기둥 가운데로부터 강림하사 장막 문에 서시고 아론과 미리암을 부르시는지라 그 두 사람이 나아가매 이르시되 내 말을 들으라 너희 중에 선지자가 있으면 나 여호와가 환상으로 나를 그에게 알리기도 하고 꿈으로 그와 말하기도 하거니와 내 종 모세와는 그렇지 아니하니 그는 내 온 집에 충성함이라 그와는 내가 대면하여 명백히 말하고 은밀한 말로 하지 아니하며 그는 또 여호와의 형상을 보거늘 너희가 어찌하여 내 종 모세 비방하기를 두려워하지 아니하느냐 여호와께서 그들을 향하여 진노하시고 떠나시매“
세사람을 장막 안으로 부르신 하나님께서는 두 사람의 이름을 부르시면서 앞으로 나오라고 하셨습니다. 두 사람이 앞으로 가자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은 이것입니다. ”내 말을 들으라 너희 중에 선지자가 있으면 나 여호와가 환상으로 나를 그에게 알리기도 하고 꿈으로 그와 말하기도 하거니와 내 종 모세와는 그렇지 아니하니 그는 내 온 집에 충성함이라 그와는 내가 대면하여 명백히 말하고 은밀한 말로 하지 아니하며 그는 또 여호와의 형상을 보거늘 너희가 어찌하여 내 종 모세 비방하기를 두려워하지 아니하느냐“
이는 “내가 그를 얼마나 사랑하는데 너희가 감히 내가 사랑하는 나의 종을 함부로 정죄하면서 공격하느냐?”하시면서 화를 내면서 그 자리를 떠나신 것입니다. 그것을 장막 밖에서 바라보던 백성들은 과연 하나님께서 누구를 옳다고 하실까 궁금해 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장막에 임해있던 구름이 걷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후에 장막에서 세 사람이 나오는데 모세의 누이 미리암이 나병이 걸려 하얗게 되어서 되어서 나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모세의 편을 들어주신 것을 보면서 하나님이 누구를 더 소중히 여기시는 지 알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하나님께서 모세를 그렇게 소중하게 생각하신 이유가 나옵니다. 그섯은 ”그는 내 온 집에 충성함이라“는 말씀으로 증거하셨습니다. 모세는 자기 개인의 안녕과 복만을 생각하지 않고 하나님과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을 위해 자신의 전부를 드린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하나님의 온 집에 충성하였던 것입니다. 하지만 아론과 미리암은 백성들로부터 인정을 받는 개인의 명예를 더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백성들이 보는 앞에서 ”너만 하나님과 대화하느냐? 우리도 대화하지 않느냐?“고 물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내가 모세와 대화하는 것과 너희와 대화하는 것은 차원이 다르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무엇이 다릅니까? 다른 사람이나 선지자들에게는 환상이나 꿈으로 말씀하시지만 모세와는 대면하여 명백히 말씀하신 것입니다. 또한 앞으로 하나님의 형상도 보게 될 사람으로 세움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모세가 땅에 살아가는 동안의 복만을 받은 것이 아니라 육체를 벗어난 후에도 하나님의 형상을 보는 복까지 볼 사람으로 택하심을 받았다는 말씀입니다. 실제로 모세는 엘리야와 함께 예수님이 변화산에 오르셨을 때 함께 하나님의 형상으로 오신 예수님을 만나는 영광을 누립니다.
하나님은 자신에게 충성하며 하나님의 집에 온전히 충성하는 사람들을 각별히 여기셔서 늘 가까이 두고 말씀하십니다. 다윗 역시 하나님께 충성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사울왕에게 발탁되어 궁궐로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골리앗과의 싸움에서의 승리로 인해 다윗은 본격적인 고난의 길이 시작되었습니다. 사울왕은 다윗을 견재했고 지방으로 파견했습니다. 그런데 가는 곳마다 충성스럽게 일함으로 인해 백성들의 지지와 칭송을 받았습니다. 다윗이 충성한 것이 사울왕에게일까요? 아니면 하나님에게 일까요? 먼저는 하나님에게요, 그 다음은 사울왕에게 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충성은 항상 하나님에게 충성함으로써 육신의 주인이나 상전된 사람들에게 충성하게 됩니다.
미국의 유명한 교육학자인 하워드 헨드릭스라는 분이 있습니다. 하워드 헨드릭스는 자신의 책에서 언젠가 만났던 비행기 승무원에 대한 이야기를 전하고 있습니다.
그가 탑승한 비행기는 사람들로 붐볐고, 그래서 사람들은 모두 신경이 곤두 서 있었습니다. 아기들도 여럿 탑승하여 연신 칭얼대며 큰소리로 울어대는 바람에 분위기가 더욱 어수선하였습니다. 게다가 때때로 비행기가 돌발적인 난기류를 만나 승무원들이 기내식을 제공하기도 어려운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형편에도 불구하고 잠시도 멈추지 않고 계속하여 서비스를 제공하는 한 승무원이 있었습니다. 간혹 무례한 승객이 버릇없이 굴더라도 그녀는 변함없이 친절을 잊지 않았습니다. 승객들이 덜컹덜컹 흔들리는 비행에 대해 불만을 터뜨려도 그녀는 최선을 다해서 상냥하게 안내를 했습니다. 심지어 신경질을 부리는 아기들을 웃기려고 여러 가지 새로운 장난감을 들고 나타나기도 했습니다. 그 승무원은 탑승 내내 환하고 명랑한 미소를 잃지 않았습니다.
비행기가 목적지에 다다를 즈음, 하워드는 그 승무원과 이야기를 나눌 기회를 잡았습니다.
“당신과 같은 사람이 일하고 있어서 이 항공사는 무척 운이 좋은 것 같군요!”
그러자 그녀는 하워드에게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저는 항공사를 위해 일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혹시 독립 승무원 연맹에서 일하시나요?” “아닙니다. 선생님!”
그녀가 가볍게 미소를 지으며 또 대답했습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누구를 위해 일한단 말입니까?” 하워드가 의아하다는 듯이 질문했습니다. 그녀는 웃으며 단호하게 말했습니다.
“저는 예수님을 위해 일한답니다. 이 항공사는 단지 제게 월급을 줄 뿐이죠.”
이 승무원의 충성스러움은 자신이 탄 비행기의 승객들에게 최선을 다하는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충성은 하나님께 하지만 봉사는 바로 하나님이 섬기라고 만나게 하시는 사람들에게 하는 것입니다. 이런 면에서 볼 때 다니엘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메대와 바사의 왕이었던 다리오는 나라를 통치할 때 고관 120명을 세워 전국을 통치했습니다. 그 고관 120명을 세명의 총리들이 관리하게 했습니다. 이쯤되면 세명의 총리의 권한이 엄청난 것입니다. 그엄청난 권한에 들어가서 신임을 얻기 위해 많은 고관들이 총리에게 뇌물을 바치게 됩니다. 그러면 공의가 사라지고 고관들의 억압과 약탈로 인해 백성들의 원성이 높아지게 되며 나라가 약해지게 됩니다. 왕은 자기의 통치에서 손해가 없도록 하려고 하였으나 정직하지 못한 총리들은 왕의 뜻에 어긋난 행동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다니엘은 달랐습니다. 왕은 다니엘의 충성심을 보고 다른 총리들 위에 세워서 나라를 다스리게 하고자 하였습니다. 다니엘 6장 3절은 총리가 된 다니엘에 대하여 이렇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다니엘은 마음이 민첩하여 총리들과 고관들 위에 뛰어나므로 왕이 그를 세워 전국을 다스리게 하고자 한지라” 마음이 민첩하여 다른 총리들은 물론 다른 고관들보다 훨씬 뛰어났습니다. 그래서 왕은 두 명의 총리 위에 다니엘을 세워 나라를 다스리길 원했습니다.
충성스러운 사람에게 임하는 은혜는 하나님에게서, 그리고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는 사람들을 통하여 높임을 받게 됩니다. 하나님이 누구를 사용하셔서 충성된 여러분들을 높이십니까? 바로 여러분들이 매일 만나는 직장 상사들, 주변의 사람들을 통해서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이 땅에서 살아갈 때 하나님께 충성하다보면 땅의 지도자들의 눈에도 띠게 됩니다. 하나님이 그 지도자들의 눈을 열어 충성된 자들을 보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들에 의해 높임을 받을 때 그 충성된 사람들을 하나님의 영과 진리로 세상을 비추게 됩니다.
그러면 하나님 나라에서의 충성스러움은 어떻게 나타날까요? 우선 적은 일에도 충성합니다. 사람들은 하찮은 일이라고 무시하면서 가볍게 여기고 소홀히 여길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성령은 여러분 안에서 하찮아 보이는 것도 최선을 다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그 일이 하찮아 보일지라도 하나님께서는 뜻하신 바가 있으셔서 여러분들에게 그 일을 맡기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25장 21절을 보면 “그 주인이 이르되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 하고” 많은 사람들이 적은 것과 작은 것을 하찮게 여기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여러분들에게 맡기신 적은 일에 충성할 때 여러분들에게 많은 것을 맡기시면서 여러분의 주인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즐거움에 참여하게 하십니다. 누가복음 16장 10절에서도 역시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된 자는 큰 것에도 충성되고 지극히 작은 것에 불의한 자는 큰 것에도 불의하니라”하고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여러분들에게 맡기신 것은 작은 것이라도 최선을 다해 충성하시기 바랍니다. 어떤 씨앗이든지 간에 씨앗들은 다 작지만 그 씨앗에서 나물도 나오고 나무도 나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크기를 가늠할 수가 없습니다. 겨자씨만한 씨앗도 산을 옮길 것이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까? 지난 번 양선의 열매를 여러분들에게 맺게 하신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에게 더 많은 것들을 행할 수 있도록 복을 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들은 주님이 여러분과 함께 하심으로 인해 기쁠 것입니다.
다음으로 하나님 나라의 충성은 자신이 어느 때에 무엇을 해야하는 지를 알고 행합니다. 마태복음 24장 45절을 보면 “충성되고 지혜 있는 종이 되어 주인에게 그 집 사람들을 맡아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눠 줄 자가 누구냐”고 물으십니다. 여러분의 입에서 “제가 할께요. 주님!”하는 고백이 있기를 원합니다.
종의 본문은 주인에게 충성하는 것입니다. 그럴려면 주님의 마음과 뜻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면 자신이 어느 때에 무엇을 해야하는 지를 알게 됩니다. 종이 주인의 집사람들에게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눠주듯이 여러분들 역시 때를 따라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주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디모데후서 2장 2절을 보면 “또 네가 많은 증인 앞에서 내게 들은 바를 충성된 사람들에게 부탁하라 그들이 또 다른 사람들을 가르칠 수 있으리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까? 여러분들이 주님의 말씀을 전해서 양육할 제자들을 찾아 그들을 말씀으로 양육한 후에 다른 사람들에게 전해주도록 하십시오. 하나님 나라가 그들의 충성스러운 사역으로 인해 확장될 것입니다.
여러분 주님이 여러분들에게 무엇을 맡기셨습니까? 맡겨진 일과 맡겨진 직분은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목사나 장로나, 권사나, 집사나, 교사나, 사모나, 성가대나, 음식을 만들고 설거지를 하는 성도나, 청소를 하거나 갖가지 궂은 일을 하는 교회의 일꾼들은 모두가 충성스러워야 합니다. 그런 성도들에게 하나님은 더 많은 것들을 맡기십니다. 그들이 맡겨진 모든 일에 충성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성령의 열매인 충성의 열매를 맺으시면서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일들을 기쁨과 감사로 행하면서 사시길 축복합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의 앞 길을 열어가실 것입니다. 이 축복이 하나님 앞에 예배드리시면서 온전히 충성하시는 여러분들 모두에게 있기를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