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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례 개혁 초석 다진 성 비오 10세 교황
근대주의 맞서 교회 쇄신 추구하며 영성체 중요성 강조
전 세계에서 대유행하고 있는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코로나19)로 교회 안에서는 성체성사의 중요성이 더욱 절실하게 다가오고 있다. 성 비오 10세 교황(재임 1903~1914)은 매일 영성체할 것을 강조하는 등 신자들의 영성 생활에 지속적인 자극을 주고자 했다. 교황은 교회 개혁과 신앙쇄신을 위해 전력을 다해 제2차 바티칸공의회 전례 쇄신의 길을 닦은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8월 21일 성 비오 10세 교황 기념일을 맞아 교황이 강조했던 전례와 영성체의 중요성을 다시금 되새겨 본다.
만물을 그리스도 안에서
1903년 8월 4일 레오 13세 교황의 선종 이후 교황으로 선출된 베네치아 총대주교 주세페 멜키오레 사르토 추기경. 그는 박해에 용감하게 저항했던 ‘비오’라는 이름의 전임 교황들에 대한 존경심에서 자신을 비오 10세로 칭했다.
베네치아에서도 사목자로 봉사하기 위해 교구 개혁을 추진했던 성인은 ‘만물을 그리스도 안에서’(에페 1,10)를 사목 표어로 택하고 정치적인 교황보다 종교적인 교황이 되겠다는 사목 지침을 명확히 했다.
그런 만큼 교회 내 쇄신을 주요 과제로 삼았다. 전임 레오 13세 교황이 추구했던 사회 개혁 문제에는 관심이 적었고 전적으로 영성적인 사명에 헌신하는 것에 주목했다. 또 신자들의 충만한 기도 생활과 자주 성사에 참여하도록 유도하는 방식으로 전례와 교회 음악의 혁신을 시도했다.
교회 내 개혁
교황은 개혁 작업을 교회 음악에서부터 시작했다. 자의 교서 「Tra le sollecitudini」(1903)를 통해 교회 음악의 규범을 제시하며 그레고리오 성가를 성음악의 최고 전형으로 삼았다.
그레고리오 성가와 특히 팔레스트리나에 의해 완성된 로마악파의 다성 음악을 모델로 하여 교회 음악에 획기적인 방향을 제시한 문헌은 낭만주의 음악 영향으로 전례와 전례음악 사이에 큰 갈등이 초래되고 성음악 복고 운동이 생겨나는 혼돈 속에서 교회 입장을 잡아주는 지침서가 됐다.
문헌은 “거룩한 신비들에 능동적 참여와 교회의 공적이고 거룩한 기도에 참여할 권리는 참된 그리스도교 정신의 첫째요 불가결한 원천”이라고 강조한다. 여기서 교황은 “적어도 주요 성당에는 성가대를 조직하는 것이 좋다”며 성가대에 대한 인식도 새롭게 했다.
이 교서는 전례 운동을 위한 개혁적인 프로그램 제창으로 전례 운동사의 고전 시기를 시작했다고 평가된다.
1905년 반포된 회칙 「Acerbo nimis」에서는 종교 교육과 교리서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같은 해 교령 「Sacra Tridentina Synodus」의 발표는 그의 특기할 만한 업적이라 할 수 있다. 교회는 신자들의 신앙생활을 위해 더욱 적극적인 자세로 주일마다 혹은 매일 영성체 할 것을 권한다. 이런 잦은 영성체와 매일 영성체는 매일의 음식으로 성찬의 빵을 모심으로써 힘을 얻을 필요가 있다는 데 근거를 둔다. 초기 교회에서는 매일 영성체를 실천하는 것이 통상적인 일이었지만 이단이 성행하면서 점차 사라진 기록을 찾을 수 있다. 이를 복구하고 발전시킨 이가 성 비오 10세 교황이었다.
교황은 교령을 통해 영성체를 자주 할 것과 가능하면 매일 영성체 할 것을 권장했으며, 신자들의 공동 기도와 미사를 중요시하여 “미사 때 기도를 하는 것이 아니라 미사로써 기도하는 것”이라고 역설했다.
또 1910년의 교령 「Quam singulari」는 첫영성체의 연령을 7세로 앞당기며 첫영성체에 적합한 나이를 규정하는데 새로운 발전을 가져왔다. 어린이들도 전례에 완전히 참여할 수 있게 한 것이다.
고대교회에서는 어린이를 포함해 세례성사 마지막 부분에 그 절정으로 첫영성체가 이뤄졌는데, 중세 중기 서방교회에서 성체성사에 참여하는 사람들의 인격적인 측면이 강화되며 나이가 늦춰졌다. 1215년 제4차 라테라노공의회에서 사리 분별을 할 수 있는 나이에 영성체를 할 수 있도록 규정했다. 그 결과 본래 7세부터 하던 첫영성체가 13~14세로 고정됐다.
“성체는 천국으로 가는 가장 쉽고 빠른 길”이라 했던 성 비오 10세 교황은 이런 영성체의 강조로 ‘성체의 교황’, ‘영성체를 자주 하는 교황’으로도 불린다.
1911년의 헌장 「Divino afflatu」 공표는 성무일도 기도와 미사 거행을 위한 규정의 개편을 가져왔다. 이를 통해 성인은 시편들을 다시 배열하고 달력을 개정하여 성인들의 축일보다 주일이 우선순위를 차지하게 했다. 또 「로마전례성가집」의 첫 공식 판도 발행했다. 이런 움직임들은 교회 안에 매우 큰 영향을 발휘했고 이로써 그는 현대 전례 운동의 개척자로 인정받게 됐다.
이외 교황청을 11개 성과 3개의 법원, 5개 사무처로 개편했으며 「교회법전」을 발표했다. 성직자 양성을 위한 신학교 생활과 학습의 새로운 과정을 신학교에 도입시켰고, 그리스도교 정신을 강화하는 학문 발전을 위해 1909년 교황청 성서 연구소도 설립했다.
단순한 삶과 겸손한 마음
성인은 ‘가톨릭운동’이란 말을 처음으로 사용한 인물로 꼽힌다. 그리고 교계제도 아래에서 교회의 사도적 과제에 대해 평신도들과 협력함으로써 가톨릭 운동의 선구자가 됐다는 평가를 듣는다.
모더니즘에 대항해 직선적이면서도 강력하고 단호하게 맞섰던 그는 근대주의를 ‘모든 이단의 종합’으로 낙인찍기도 했다. 1910년 9월 1일부터 모든 서품 후보자와 사목자들은 반근대주의 서약을 이행해야 했다.
그의 재임 마지막 기간은 제1차 세계대전의 발발 위협으로 뒤덮인 기간이었다. 한 서한에서 “만일 유럽의 평화를 보장받을 수 있다면 나의 온 목숨도 기꺼이 내놓겠다”고 기록할 만큼 당시 정세에 대한 고뇌가 깊었다.
여러 면에서 보수적이었지만 건설적인 개혁 교황이었던 성 비오 10세 교황. 생애 동안 성인으로 존경받았던 그는 결단력과 조직력이 뛰어났고 선량하고 겸손했다. 또 단순성과 오직 한결같은 선한 마음과 가난한 정신의 소유자였다. “가난하게 태어났고, 가난하게 살았으며, 가난하게 죽고 싶다”고 말할 정도로 가난한 삶을 사랑했다.
교회를 위해 행한 개혁 활동의 긍정적인 면은 제2차 바티칸공의회를 통해 시도된 변화와 많은 부분 유사하다는 게 전문가들 의견이다.
그는 1914년 선종했으며 1954년 시성됐다.
[미사의 모든 것] (5) 십자성호와 성호경
자신을 축복하고 삶을 성화시키는 거룩한 표시
나처음: 미사가 기도의 으뜸이라고 하셨는데 누구에게 바치는 의식인가요?
라파엘 신부: 미사는 사람들이 성자 그리스도를 통하여 성령 안에서 아버지 하느님을 흠숭하고 그분께 바치는 공적 예배를 말한단다. 그러니 당연히 미사는 아버지 하느님 즉 천주 성부께 바치는 것이지.
나처음: 가톨릭은 유일신을 믿는 걸로 알고 있는데 성부 성자 성령은 뭐예요? 지금까지 여러 신을 섬겨온 건가요.
조언해: 아이고! 넌 ‘삼위일체’라는 말도 못 들었니. 참하느님이신 성부, 성자, 성령께서는 한 분이시며 삼위이시나 하나의 본질, 하나의 실체, 하나의 본성을 지니신 분이심을 우리는 확고하게 믿으며 명백하게 고백한다. 이게 그리스도교 신앙의 핵심 아니니.
나처음: 아니! 어떻게 세 위격이 하나가 될 수 있느냐고, 넌 그게 머리로 이해가 되니?
조언해: 그러니 ‘신앙의 신비’라고 하지. 하느님 안에 감추어져 있어 하느님께서 계시하시지 않으면 알 수 없는 신비. 지극히 거룩한 이 삼위일체 신비는 믿음 안에서 오직 하느님께서만 성부, 성자, 성령의 삼위로 당신을 계시해 주심으로써 깨닫게 해 주실 수 있어.
라파엘 신부: 아직 가톨릭 교리에 관해 모르는 처음이에게는 많이 어려울 수 있어. 본질, 실체, 본성이라는 말은 하느님의 ‘단일성’을 표현할 때 사용하는 단어란다. 또 ‘위격’이라는 말은 성부, 성자, 성령을 실제로 구분할 때 가리키는 단어란다. 가톨릭교회는 “한 분이신 하느님을 삼위로, 삼위를 한 분의 하느님으로 흠숭하되 각 위격을 혼동하지 않으며, 그 실체를 분리하지 않는다. 성부의 위격이 다르고 성자의 위격이 다르고 성령의 위격이 다르다. 그러나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천주성은 하나이고, 그 영광은 동일하고, 그 위엄은 다 같이 영원하다”(「가톨릭교회 교리서」 266항)고 고백한단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마태 28,19) 세례를 받아요. 그들은 세례를 받기 전에 먼저 창조주 성부와 구세주 성자, 보호자 성령에 대한 자신의 신앙을 “믿습니다”라고 고백해야 하지. 그래서 모든 그리스도인의 신앙은 삼위일체이신 하느님께 뿌리를 두고 있단다.
조언해: 신부님 그래서 우리가 기도할 때 항상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하지 않나요.
라파엘 신부: 그렇지. 미사도 이 성호경으로 시작하지.
나처음: 아! 가톨릭 신자들이 손으로 십자가를 그으면서 뭐라고 하는 그 기도 말이죠.
조언해: 그래! 그걸 십자성호라고 해. 신부님, 오늘은 십자성호와 성호경에 관해 알려주세요.
라파엘 신부: 그리스도인들은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거룩한 십자성호를 그음으로써 자신을 축복하고 매일의 삶을 성화시킨단다. 종교 개혁을 일으킨 마르틴 루터조차 아침에 침대에서 나오자마자 십자성호로 자신을 축복했다고 하지.
십자성호는 사도시대 때부터 신자들이 한 동작이야. 세례 때에 십자성호로 인호가 새겨졌다고 바오로 사도는 고백하고 있지.(에페 1,13; 갈라 6,17 참조) 초대 교회에서는 신자들이 엄지나 집게손가락으로 이마에 작은 십자가를 그으며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의 이름으로 자신을 축복하였단다. 이 전통은 미사 중에 복음 말씀을 낭독할 때 책과 이마와 입술과 가슴에 십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계승되고 있지.
처음에는 동ㆍ서방 교회 모두 십자성호를 그을 때 이마에서 가슴으로, 오른쪽 어깨에서 왼쪽 어깨 순으로 그었지. 그러다 중세 후기인 14세기부터 서방 교회는 성 베네딕도 수도회의 영향을 받아 손을 펴서 위에서 아래로,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성호를 크게 그는 것이 보편화 되었단다.
십자성호를 그을 때 이마에서 가슴으로 긋는 것은 예수님께서 육화하여 하늘에서 땅으로 강생하셨고, 왼쪽 어깨에서 오른쪽 어깨로 긋는 것은 주님께서 돌아가시어 묻히셨다가 죽은 이들 가운데 부활하시어 다시 하늘로 올라 성부 오른편에 앉으셨고, 우리를 보호하고 성화시킬 성령을 보내셨음을 믿음으로 고백한다는 뜻이란다. 요즘 TV를 보면 운동선수들이 십자성호를 긋고 손에 입을 맞추고 하늘로 치켜세우는 것은 라틴아메리카 가톨릭 신자들 사이에 행해지는 일반적인 십자성호 모습이지.
초대 교회 때에는 십자성호를 그으면서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성삼위의 이름으로”, “나자렛 예수님의 이름으로”, “살아계신 하느님의 인호”라고 외쳤단다. 십자성호를 그으면서 이렇게 기도하는 것은 “너희가 내 이름으로 청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내가 다 이루어주겠다. 그리하여 아버지께서 아들을 통하여 영광스럽게 되시도록 하겠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청하면 내가 다 이루어주겠다”(요한 14,13-14)고 하신 주님의 약속 때문이야.
그래서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 교부는 “성호를 그을 때 십자가에 담겨 있는 모든 신비를 생각하라. 손으로 긋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믿음과 선의를 가지고 그어야 한다. 자신의 가슴과 눈, 그리고 신자들에게 십자성호를 그을 때, 기뻐하며 자신을 하느님께 제물로 바쳐라”고 권고하셨지.
성인의 말씀처럼 우리가 성호경을 외우며 거룩하게 십자성호를 그을 때 하느님께 대한 체험도 깊어질 수 있단다. 주님의 약속처럼 삼위일체이신 하느님께서 당신 현존 속으로 우리를 인도해 주신단다. 하느님의 이름은 그분의 본성과 실체와 관련돼 있단다. 따라서 우리가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의 이름으로 기도하고 십자성호를 그을 때 하느님의 신성한 본성과 실체와 함께 기도하게 되는 것이지. 이때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기도를 고양시켜 단순한 인간의 힘이 아닌 하느님의 권능으로 기도하게 해 주신단다. 즉 우리의 자연적인 기도가 초자연적인 기도로 바뀌는 것이지.
조언해: 십자성호와 성호경에 엄청난 의미가 담겨 있군요. 그래서 미사뿐 아니라 기도를 시작하거나 마칠 때 십자성호를 긋고 성호경을 외우는군요.
라파엘 신부: 바로 그렇지.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의 이름으로 기도를 하면 주님이신 예수님께서 반드시 우리의 기도를 응답해 주셔. 오늘은 십자성호를 어떻게 그어야 하는지 로마노 과르디니 신부님의 글을 소개하는 것으로 마무리할게.
“십자가의 표시인 성호를 그을 바에야 제대로 옳게 긋자. 그저 아무렇게나 서둘러 남이 보아도 무언지 알아볼 수조차 없이 해서야 쓰겠는가. 아니다. 올바른 십자성호를 긋도록 하자. 천천히, 시원하게, 이마에서 가슴으로, 이 어깨에서 저 어깨로, 이렇게 하다 보면 온몸이 십자가의 표시와 하나가 됨을 느끼게 된다. 이마에서 가슴으로 그리고 다시 어깨에서 어깨로 그어나가는 성호에 모든 생각과 정성을 쏟으면 십자성호가 몸과 마음을 감싸주면서 나를 거두고 축복하고 거룩하게 함을 절로 느끼게 된다.
왜 그럴까! 그것은 십자가의 표시가 우주의 표시이고 구원의 표시인 까닭이다. 우리 주님께서는 십자가에 달려 모든 사람을 구원하셨다. 사람을 그 골수에 이르기까지 성화하시는 일 또한 이 십자가를 통해서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기도를 올리기에 앞서 십자성호부터 긋는 것이다. 기도를 드리고 나서 성호를 긋는 것은 하느님이 베푸신 바가 우리 안에 머물게 하기 위해서이다. 유혹을 당할 때면 우리를 굳세게 해주도록. 위기에 처할 때면 우리를 감싸주도록, 축문을 외울 때면 하느님 생명의 풍만함이 우리 영혼도 온갖 결식과 강복으로 채워주시도록 성호를 긋는 것이다.” (로마노 과르디니, 장익 옮김, 「거룩한 표징」 13~14쪽, 분도출판사)
전례 탐구 생활 (21) 자비송에서 대영광송으로
대영광송을 부르는 날 시작 예식은 기쁨과 축제의 색깔이 더 질어집니다. 그래서 절제와 기다림의 시기인 대림과 사순 시기에는 대영광송을 부르지 않고, 간혹 위령의 날이 주일과 겹쳤을 때도 생략합니다. 주로 전례력상 대축일과 축일에 부르는 찬미가이지만 서품, 혼인, 견진 예식 같이 성대하게 지내는 특별한 전례 거행 때도 부를 수 있습니다.
기쁨의 핵심은 예기치 못한 선물처럼 다가온다는 데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이는 스스로 찾아 얻는 쾌락이 오히려 삶의 진정한 기쁨을 반감시켜 버린다고까지 말했습니다. 대영광송이 표현하는 기쁨도 우리의 청원을 하느님께서 들어주셨다는 놀라움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어떤 것을 부탁할 때 그 사람은 우리의 부탁을 들어줄 의무가 없습니다. 그것은 전적으로 그 사람의 자유에 맡겨져 있습니다. 하느님도 그렇습니다. 그분은 우리에게 빚진 것이 아무것도 없고, 우리의 기도를 들어줄 의무도 없습니다. 오히려 우리가 늘 그분께 빚을 지며 삶아가지요. 그런데도 하느님은 또다시 우리의 기도에 귀를 기울이십니다. 기쁨은 바로 이 사실을 새삼 깨달을 때 우리 안에서 터져 나오는 응답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미사에 올 때 두 가지 사실을 마음속에 간직하면 좋겠습니다. 하나는 우리에게 절대적으로 구원이 필요하다는 사실이고, 다른 하나는 우리가 실제로 구원받았다는 사실입니다. 첫 번째 사실을 생각할 때 나는 나의 보잘것없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나는 내가 얼마나 나약한 존재인지, 내가 가신 것이 얼마나 허무한 것인지를 깨닫습니다. 하지만 두 번째 사실을 생각할 때 나는 나의 강함을 알아챕니다. 나는 내 안에 있는 품위와 힘을 느낍니다. 우리는 기도하듯 자비송을 바치며 구원을 갈망하는 우리의 외침을 내어놓고, 대영광송의 환희를 통해 우리의 구원을 위풍당당하게 노래합니다.
이 점을 생각해 보면 우리는 모든 미사에서 대림과 성탄을 거행하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참회와 청원의 노래인 자비송은 우리를 대림의 신비로 들어가게 합니다. 자비송을 통해 우리는 우리에게 하느님의 구원과 자비가 필요하다고 외칩니다. 대영광송은 말씀이 사람이 되신 신비, 우리가 기다리던 구원이 드디어 이 땅에 나타났다는 성탄의 기쁨을 드러냅니다. 우리에게 당신 아들을 보내시어 우리를 구원해 주신 하느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그래서 대영광송을 일컬어 ‘자비송의 청원에 대한 기쁨 가득한 응답’이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대 알베르토 성인도 대영광송이 자비송에 대한 응답이라는 점을 다음과 같이 지적했습니다. “마치 [하느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나는 분명 너희의 부르짖음에 응답하리라. 성사를 통해 나는 너희 조상들에게 보냈던 그를 너희에게 보내어, 너희가 그 안에 참여하고, 너희를 악에서 끌어올려 모든 선으로 채워 주리라.’”
이렇듯 자비송에서 대영광송으로 이어지는 전례 기도의 흐름을 통해 하느님께서 우리와 친교를 나누시는 방식을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기를 바랍니다.
[미사의 모든 것] (4) 주님의 가르침과 미사의 사회적 의미
미사 통해 받은 은총, 형제에게 사랑으로 베풀어야
나처음: 언해가 선물한 성경을 요즘 읽고 있어요. 그런데 성경을 읽을수록 헷갈려요. 예수님께서 ‘서로 사랑하라’ 하셨다가 ‘나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 하시는 등 어떤 때는 이렇게 말씀하셨다가 또 어떤 때는 저렇게 말씀하시는 것 같아요.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무엇을 가르치셨나요?
조언해: 교리교사인 내가 정리해 줄게. 복음서에 잘 나와 있지. “첫째는 이것이다. 이스라엘아 들어라. 주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신 주님이시다. 그러므로 너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 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둘째는 이것이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이보다 더 큰 계명은 없다.”(마르 12,29-31) 따라서 예수님의 가르침을 한 문장으로 정리하면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고 할 수 있지. 맞죠. 신부님!
라파엘 신부: 그래. 언해가 예수님 말씀을 인용해 아주 잘 정리해 주었구나. 좀더 설명하면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하느님이 어떤 분이신가에 관해 늘 가르침을 주셨단다. 예수님의 생각과 마음속에는 항상 하느님의 일로 가득 차 있었어요. 그래서 우리에게 하느님이 계시다는 것, 그리고 하느님이 어떤 분이시라는 것, 하느님께서 얼마나 사랑 깊게 인간과 만물을 보살피시는가를 말씀하셨지.
예수님께서는 언제나 ‘하느님은 자비로우신 분’이시라고 가르치셨단다.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약한 이, 자신의 초라함을 슬퍼하고 죄스러움을 아파하는 이에게는 참으로 아버지가 되어 주시는 분이심을 일깨워주셨지. 그러면서 예수님께서는 우리도 당신처럼 하느님을 생각하며 살기를 바라셨단다. 그래서 예수님은 오직 한 분이신 아버지의 자비 안에 살고 있는 우리는 모두가 한 형제라고 말씀하셨어. 그러니 서로 용서하고 사랑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가르치셨지.
그리고 반드시 잊어서는 안 될 예수님의 가르침이 있단다. 바로 ‘하느님의 나라가 우리 가운데 있다’(루카 17,21 참조)는 말씀이야.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는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필요함을 아신다.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아라. 그러면 이 모든 것도 곁들여 받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내일을 걱정하지 마라. 내일 걱정은 내일이 할 것이다. 그날 고생은 그날로 충분하다.”(마태 6,32-34) 그러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마르 1,15)는 이 말씀이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가르침, 곧 기쁜 소식이란다.
나처음: 그러면 신부님, 예수님께서 늘 하느님을 염두에 두시고 사셨다는 것을 어떻게 증명할 수 있나요?
라파엘 신부: 바로 ‘기도’이지. 예수님께서는 늘 기도하셨단다. 예수님께서는 기도 중에 아버지 하느님과 친밀하고 깊은 대화를 나누셨지. 그리고 때로는 지금 알려주는 기도처럼 하느님을 큰 소리로 부르며 기도하기도 하셨단다.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 그렇습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이렇게 이루어졌습니다.”(마태 11,25-26)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하느님의 자비에 힘입어 감사하는 마음으로 날마다 살 수만 있다면 어떤 생활을 하고 있든 삶의 의미를 반드시 찾게 될 것이라고 당신의 기도 모습을 통해 알려주시고 있지.
조언해: 그래서 기도가 신앙생활의 토대가 되는 것이군요.
라파엘 신부: 그렇지. 예수님에 의해 아버지 하느님을 알고 신앙의 길을 가게 되면서 기도 생활도 아울러 시작되는 것이지. 기도는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하느님을 생각하는 것으로부터 비롯돼요. 하느님의 자비를 생각하다 보면 예수님처럼 “아버지, 제 말씀을 들어 주셨으니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 아버지께서 언제나 제 말씀을 들어 주신다는 것을 저는 알고 있습니다”(요한 11,41-42)라고 고백하게 되지. 교회가 이처럼 공적으로 하느님께 감사 기도를 드리는 것이 바로 ‘미사’란다.
나처음: 헉! 그럼, 미사가 기도의 으뜸이겠네요.
라파엘 신부: 바로 그거야! 미사는 우리 안에 살아 계신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하느님께 감사의 표시로 바치는 기도이니 기도 중의 으뜸이라고 할 수 있지. 신앙생활의 중심은 바로 예수님이야. 예수님께서 바로 우리를 구원하신 주님이시기 때문이야. 따라서 주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은 그리스도인은 자기 삶의 중심이 예수님이라는 것을 결코 잊어서는 안 돼.
조언해: 그럼 미사의 중심도 당연히 예수님이겠네요.
라파엘 신부: 빙고!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이 미사에도 그대로 적용된단다. 미사에 대한 이해가 깊을수록 미사에 담긴 영적 보화를 더 잘 알아보고 얻을 수 있고, 그럼으로써 신앙이 성장하고 신앙생활도 풍요로워지지. 미사의 정신이 일상의 삶으로 이어질 때 살아 있는 신앙이 되고, 그 신앙이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지. 이것이 미사의 힘이야.
조금 어려운 말이지만 교회는 미사의 중요성에 관해 공적으로 이렇게 설명하고 있단다. “미사에서 마치 샘에서처럼, 은총이 우리에게 흘러들고, 또한 교회의 다른 모든 활동이 그 목적으로 추구하는 인간 성화와 하느님 찬양이 가장 커다란 효과로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제2차 바티칸 공의회 「전례 헌장」 10항) 한마디로 미사를 통해 그리스도 안에서 인간 성화와 하느님 찬양이 실현된다는 뜻이지.
나처음: 그런데 기도하고 미사에 참여한다고 해서 세상이 바뀌는 건 아니잖아요. 요즘 흐름을 보면 종교가 세상의 빛과 소금 역할을 하는 게 아니라 사회가 종교를 걱정하는 것 같은데요.
라파엘 신부: 좋은 질문이구나. 미사의 사회적 의미에 관해 설명해야겠구나. 예수님은 미사를 통해 우리뿐 아니라 모든 사람과 일치를 이루신단다. 예수님께서 마지막 만찬 때 제정하신 성체성사 곧 미사는 유다인과 다른 민족을 하나로 만드시고 이 둘을 가르는 장벽인 적개심을 허물고(에페 2,14 참조) 그리스도 안에서 서로 화해하신 ‘친교의 성사’이지. 화해로 이끄는 이 지속적인 힘만이 우리를 그리스도의 몸과 피에 참여하기에 합당하게 만들어요.(마태 5,23-24 참조) 이 말은 2006년 교황청 세계주교대의원회의 참가자들이 “성찬례 거행 덕분에, 분쟁을 겪고 있는 민족들이 하느님 말씀을 중심으로 모이고, 무조건 용서함으로써 화해하는 그분의 예언적 메시지를 들으며, 이 똑같은 빵과 잔을 나눌 수 있는 회개의 은총을 받아 올 수 있었다”고 고백한 감동적인 증언을 통해 다시금 확인할 수 있었지.
이처럼 교회는 “성찬례(미사)에 참여하는 모든 사람은 폭력과 전쟁, 그리고 오늘날 특히 테러리즘, 경제적 부패, 성적 착취로 얼룩진 이 세상에 평화를 이룩하고자 노력하여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단다.(베네딕토 16세 교황 권고 「사랑의 성사」 89항) 교회가 이러한 상황을 피상적으로 대처할 수 없는 것은 주님이신 예수님께서 모든 사람을 위해 피를 흘리시며 각 개인의 드높은 가치를 확언해 주셨기 때문이야. 따라서 그리스도인은 미사를 통해 받은 은총을 주님의 가르침대로 형제에게 사랑으로 베풀어야 할 의무가 있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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