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수필
'리진시벌' 아파트
▲ 백봉기
이른 아침, 시골 사는 친척 형님한테서 전화가 왔다. 전주에 리진시벌이라는 아파트가 어디에 있느냐는 것이다. 들어본 이름 같기도 하고 많이 듣던 욕설 같기도 하고, “형님, 그런 아파트가 어디 있어요. 왜 그러시는데요?” 딸네가 그곳으로 이사를 했다는 것이다. 알고 보니 리젠시빌 아파트였다. 무슨 뜻인지는 몰라도 아파트 이름이 참 어렵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고 보니 내가 아는 분도 오투그란데 아파트에 살고 있다. 가끔 그 아파트 이름을 말할 때는 헷갈려서 여러 번 중얼거리다가 겨우 이름을 생각하곤 한다.
아무리 글로벌시대라고는 하지만 요즘 외래어·외국어 아파트가 너무 많다. 어느 나라 말인지도 모르는 이름들이 수두룩하다. 유명 건설사 브랜드만 보더라도 ‘자이’, ‘아이파크’, ‘더샆’, ‘힐스테이트’ ‘캐슬’ 등 외래어 일색이고, 아파트 단지로 눈을 돌리면 더 심각하다. 코아루, 베르디움, 아이린, 센트럴카운티, 스타시티, 에코르, 위브 등 도무지 전화로는 받아 적기도 힘든 이름들이다. 더 걱정스러운 것은 신축건물들의 이름이 거의 외래어나 외국어로 쓰고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가다가는 모든 아파트가 외국어로 바뀌고, 시골 시부모님이 도시 사는 아들네 집을 찾지 못하게 하려고 이름을 어렵게 지었다는 우스갯소리가 현실이 될지 모르겠다.
이렇듯 가게나 아파트단지 이름을 외국어로 짓는 속내는 무엇일까. 한마디로 외국어를 쓰면 덧보이고 고급스러워 보인다는 것, 즉 ‘평범하지 않은 그들만의 것’이라는 이미지를 준다는 것이다. 외국어로 불러야 ‘고급’으로 통한다고 생각하는 일부 업자들의 행태가 참으로 개탄스럽다. 외래어의 만연은 비단 아파트만이 아니다. 이미 자동차나 전자제품들이 외국어로 사용된 지 오래다. 문제는 국민들에게 모범을 보여야할 방송프로그램에 외래어가 너무 많다. 2013년 방송통신심의위원회가 지적한 지상파방송 TV프로그램 제목에 KBS 2TV와 MBC가 37.5%, SBS는 31.3%, 새로 시작한 예능프로그램 13편 가운데 8편이 외국어 제목을 사용했다는 것이다.
반면에 우리말을 소중히 여기는 사람들도 많다. 아파트만 해도 ‘햇빛찬, ‘어울림’, ‘하늘채’, ‘참누리’, ‘아침도시’, ‘뜨란채’… 등, 우리말 이름을 쓰거나 ‘푸르지오’나 ‘e-편한 세상’처럼 합성어를 쓰는 사람들이 있다. 얼마나 아름다운가! 기억하기 어렵고 발음하기 힘든 외국어보다 부르기 좋고 친근감 있는 우리말 이름들이 더 다정하지 않는가. 다행스러운 것은 2013년부터 한글날이 공휴일로 지정됐다는 것이다. 우리 스스로가 소중한 우리글과 아름다운 우리말을 상품화하고 브랜드화 하는 노력이 필요한 때라고 본다. 문득 풀꽃집과 천년누리봄, 비빔소리와 속편한 내과 등 멋지고 아름다운 우리말 이름들이 머릿속을 스쳐간다.
△ 수필가 백봉기씨는 2010년 '한국산문'으로 등단. 수필집 〈여자가 밥을 살 때까지〉〈탁류의 혼을 불러〉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