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계순은 인천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호탕한 기질에 천하장사였고 노래도 잘해 친구가 많았던 호걸이요 유명한 싸움꾼이었다. 그는 당시 가장 험악한 집단이었던 광산의 일군들을 부리는 십장을 거쳐 십장들을 거느리는 광산 도(道) 십장이 되어, 곡괭이와 삽으로 광산권을 폭력으로 뺏고 광산을 지켜주는 전문 도십장으로 전국 광산의 제왕이 되었다.
한번은 황해도에 광산 도십장으로 일을 할 때 황해도 감사가 초청하여 갔더니, 버선발로 달려 나와 맞으며 환대하고 제발 큰 사건만 일으키지 말아 달라고 간곡히 부탁하였다고 한다. 송계순은 자연히 술, 노름, 마약에 취해 살았고 팔에는 아편을 너무 맞아 혈관이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송계순은 40세를 바라보던 나이에 야망을 갖고 광산 생활을 청산하고 여러 사업에 손을 대었는데 잘되지 않았다. 인생에 대한 심각한 회의에 빠지게 된 그는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다가 실패한다. 그날 밤 잠이 들려고 하는 순간 꿈인지 환상인지 경험하게 되는데 심판의 자리로 가면서 천국과 지옥을 보게 된다. 이상한 꿈이라고 여겨 다시 잠이 들려 하는데 동일한 경험을 다시 하게 되고, 그는 회개하고 예수님을 영접하게 된다. 다음날 송현성결교회에 가서 등록하고 그때부터 전도에 미쳐 전도자의 길을 걷게 되고 ‘예수 도깨비’라는 별명를 얻게 된다.
▲아들 송태헌목사가 안성교회에서 장로들과
그 후 많은 사람을 전도하는데 수많은 병자가 치유되고, 미친 사람들이 온전케 되며, 또한 교회에서도 열심히 봉사하여 장로가 된다. 그리고 서울에 경성신학원(현재, 서울신학대학교)을 졸업하고 황해도 재령군 북률면 동신흥리 마을에 ‘재령중앙성결교회’를 설립한 후 단독목회를 하여 100여 명 출석 교회로 성장시켰다.
일제 말기에는 신사참배를 거부하고 타협하지 않는 목회로 일본 경찰서에 구속되어 11개월을 구금 생활하며 많은 고초를 겪었다. 구금에서 풀려난 후 집에 돌아오자 송 장로는 집 처마에 카나리아를 키우면서 아름다운 새소리를 좋아하였었는데, “네가 몹시 답답했겠구나!” 하며 새장 문을 열어 카나리아를 날려 보냈다고 한다. 송 장로는 목회와 노방전도에만 전념하여 집안 살림은 전혀 돌보지 않았으나, 하나님께서 그 가정의 살림을 직접 책임져주셨다. 가정에 꼭 돈이 필요할 때면 주님이, 포목장사를 하는 권사님에게 친히 말씀하셔서, 필요를 채울 수 있었다고 한다. 6.25가 발발하자 송 장로 부부는 아들 송태헌을 남으로 내려가라 명하고 본인은 교회와 성도들을 두고 피난하기를 거부하다가 공산군에게 집에서 총칼로 무참히 순교 당했다.
▲순교자 송계순의 손자 송창원 목사
월남한 아들 송태헌은 곧 황해도로 돌아갈 줄 알았으나 상황이 여의치 않은 것을 안타깝게 여겨 북으로 찾아갈 길을 찾는 일환으로 당시 적진을 드나들기에 가장 유리한 HID 부대에 자원하였고, 송요찬 장군의 지휘하에 수도 고지 탈환 작전에도 참여하여 혁혁한 공로를 세우기도 하였으나, 황해도에 가지는 못하고 부모의 순교 소식만 전해 듣게 되었다. 송태헌은 부친의 사역을 이어가기 위해 서울신학교에서 수학하고, 안성성결교회에서 큰 부흥의 사역을 이루고 은퇴하였으며, 중국 하얼빈에 신학교를 세우고 활발한 선교를 하고 열매를 얻었다.
송태헌 목사의 장남 송창원 목사는 미국 에모리와 드류대학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고 소망세광성결교회를 담임하며 대학에서 강의하며 거룩한 사역을 계승해 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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