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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진도 8.9의 지진 - a magnitude 8.9 earthquakeㆍ쓰나미, 지진 해일 - tsunamiㆍ대피령을 내리다 - issue evacuation orders |
Japan was struck by a magnitude 8.9 earthquake. [진도 8.9의 지진 - a magnitude 8.9 earthquake]일본에 진도 8.9의 지진이 강타했다.
It was the strongest ever recorded in Japan.이번 지진은 일본 역사상 가장 강한 지진이었다.
A 10-meter tsunami devastated Japan. [쓰나미, 지진 해일 - tsunami]10미터 높이의 쓰나미가 일본을 황폐화시켰다.
The tsunami washed over coastal cities. [물이 휩쓸다 - wash over] 그 쓰나미는 해안 도시들을 휩쓸어 버렸다.
Some radioactive material leaked from the nuclear power plant. [방사성 물질 - radioactive material]방사성 물질이 원자력발전소에서 유출되었다.
The officials issued evacuation orders for people living near the nuclear power plant. [대피령을 내리다 - issue evacuation orders]관리들은 원자력발전소 주변에 사는 주민들에게 대피령을 내렸다.tsumami는 지진과 지진 해일이 많이 발생하는 일본어에서 유래한 말이다. tsu는 항구(harbor)를 의미하고, nami는 파도(wave)를 의미한다. 즉, tsumami는 항구로 밀려오는 파도를 의미하는 것이다. 우리가 표기할 때는 '쓰나미'로 표기하지만, 영어 발음은 '츠나미'에 가깝다.
acquit ▶ …을 무죄로 하다, …에게 무죄를 선고하다; …을 석방[사면]하다. 영문정의 ▶ said of a court or jury, etc: to declare a person accused of a crime to be innocent.예문 ▶ * …을 무죄로 하다, …에게 무죄를 선고하다; …을 석방[사면]하다.A prominent Dallas pastor, who suffered a fall from grace that seemed complete when he was charged with trying to choke his wife to death, was acquitted of all charges in the 6-year-old case.아내를 목 졸라 죽이려 한 혐의로 기소되어 명예가 완전히 실추된 듯했던 달라스의 한 유명한 목사는 6년을 끈 이 사건에서 모든 혐의에 대해 무죄 선고를 받았다.
vindicate ▶ 〔의혹 따위〕를 씻다; …의 정당성[결백, 진정]을 입증하다; …을 정당화하다; …을 변호[변명, 지지]하다. 영문정의 ▶ to clear someone of blame or criticism.예문 ▶ * 〔의혹 따위〕를 씻다; …의 정당성[결백, 진정]을 입증하다; …을 정당화하다; …을 변호[변명, 지지]하다.The witness tried very hard to vindicate three police officers accused of beating a woman coed.그 증인은 한 여대생을 때린 혐의를 받고 있는 3명의 경찰관을 변호하려고 매우 애썼다.
★ In a morning meeting I recently attended, the person who opened the gathering began by praying, “Lord, thanks for today. It is the beginning of a new day we have never seen before.” Although the idea seemed obvious, that prayer got me thinking about a couple of different things. First, because each day is a new opportunity, it will be filled with things we cannot anticipate or even prepare for. Therefore, it’s important that we recognize our limitations and lean heavily on God—intentionally choosing to live in His grace and strength rather than relying on our own resources.
최근에 참석했던 아침모임에서 사회를 보시는 분이 모임을 시작하기 전에 다음과 같이 기도를 했습니다. “주님, 오늘을 허락해주심을 감사합니다. 이 아침은 아무도 경험해보지 못한 새 하루의 시작입니다.” 그 기도의 뜻하는 바는 분명했지만, 그 기도는 나로 하여금 두 가지 다른 생각을 떠오르게 했습니다. 그 첫 번째는, 매일 매일은 새로운 기회이기 때문에 기대하지 못하거나 미처 준비하지 못한 일로 채워질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한계를 인정하여 자신의 힘에만 의존하지 말고, 의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와 그분의 능력 안에서 살기를 선택 하고 하나님께 모든 것을 의지하며 사는 것이 중요합니다.
★ The second thing that occurred to me is that the newness of each day is a gift worth celebrating. Perhaps this concept was what prompted the psalmist to declare, “This is the day the Lord has made; we will rejoice and be glad in it” (Ps. 118: 24).
두 번째로 생각난 것은 매일의 새로움은 축하할 만한 가치가 있는 선물이라는 것입니다. 아마도 이런 생각이 시편기자로 하여금 다음과 같이 선포하도록 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날은 여호와의 정하신 것이라 이 날에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리로다”(시편 118:24).
★ Of course, we face many unknowns today—and some could be difficult. But the treasure of each brand-new day is so special that Moses was led to write, “Teach us to number our days, that we may gain a heart of wisdom” (90:12). Every new day is a precious gift. May we thankfully embrace each one with confident trust and humble celebration.
물론 오늘도 우리는 알지 못하는 많은 일들을 접하게 되며, 경우에 따라서는 어려워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각 새 날이 갖는 소중함이 너무도 특별하기에 모세는 “우리에게 우리 날 계수함을 가르치사 지혜의 마음을 얻게 하소서”(90:12)라고 기록하였습니다. 새로운 하루하루가 귀중한 선물입니다. 매 하루를 굳건한 믿음과 겸손히 축하하는 마음으로 감사히 받아드립시다.
★ He whose heart is kind beyond all measure
Gives unto each day what He deems best—
Lovingly, its part of pain and pleasure,
Mingling toil with peace and rest.
한량없이 친절한 마음을 가지신 하나님은
매일 우리에게 최선을 베풀어 주시네
고생 속에 평강과 안식을 섞어
나날의 아픔과 즐거움을 사랑으로 주시네
★ This is the day the Lord has made; we will rejoice and be glad in it. —Psalm 118:24
이 날은 여호와의 정하신 것이라 이 날에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리로다 — 시편 118:24
★ An immigrant farmer terribly injures his arm, which needs to be amputated. Carol watches with admiration as her husband speaks comforting words to the injured man and his distraught wife. The physician’s warmth and servant attitude challenges Carol’s prideful mindset.
이민자 농부가 팔을 심하게 다쳐 팔을 절단해야만 했을 때, 남편이 부상당한 남자와 괴로워하는 그의 아내에게 따뜻한 위로의 말을 해주는 것을 캐럴은 감동하며 지켜봅니다. 의사의 따뜻함과 섬기는 태도가 캐럴의 교만한 마음에 도전을 준 것입니다.
★ In all of our relationships as Jesus’ followers, we can choose to think we’re superior or we can humbly serve the interests of others. Paul, the apostle, tells us, “Let nothing be done through selfish ambition or conceit, but in lowliness of mind let each esteem others better than himself. Let each of you look out not only for his own interests, but also for the interests of others” (Phil. 2:3-4).
예수님을 따르는 자로서 우리는 모든 관계 속에서 자신이 우월하다고 생각하거나, 아니면 다른 사람들의 관심을 겸손히 존중하거나 할 수 있습니다. 바울사도는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각각 자기 일을 돌아볼 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아보라”(빌립보서 2:3-4)고 우리에게 말하고 있습니다.
★ We can learn to consider others’ needs more important than our own as we focus on Jesus’ example. He took “the form of a bondservant,” and gave Himself up for us (vv.5-8). When we fail in valuing others, His sacrifice for us shows us the humble, better way.
우리가 예수님이 보여주신 모범에 초점을 맞추면 우리 자신보다는 다른 사람들의 필요가 더 중요함을 배우게 됩니다. 예수님은 “종의 형체”를 취하시고 우리를 위해 자신을 내어주셨습니다(5-8절). 우리가 다른 사람들을 존중하지 못하고 있다면, 우리는 우리를 위한 주님의 희생을 생각하며 겸손하면서도 더 나은 방법을 찾아야 합니다.
★ [주님의 성도로서 우리는 하나님께 우리가 어려움이나 슬픔을 만나지 안도록 해 달라고 기도해서는 안 되고, 슬픔과 어려움 속에서 우리가 하나님의 뜻한 바대로 잘 견뎌내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스도 예수님께서도 한없는 슬픔 속에서도 자신에게 맡겨진 소임과 자신이 처한 위치를 깨달으시고 자기 자신을 받아들이셨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하나님이 예정하신 시간을 만나지 않도록 기도하지 말고 이러한 시간 속에서 이 시간을 잘 이겨내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As a saint of God, my attitude toward sorrow and difficulty should not be to ask that they be prevented, but to ask that God protect me so that I may remain what He created me to be, in spite of all my fires of sorrow. Our Lord received Himself, accepting His position and realizing His purpose, in the midst of the fire of sorrow. He was saved not from the hour, but out of the hour.
★ [단신은 “어둠의 권세와 그 시간”에 대해서 인정하고 있습니까 또는 당신은 죄에 대해서 전혀 모르고 있습니까? 당신의 인간관계나 친구 사이의 관계에서 죄의 문제를 다 해결하였습니까? ] We say that there ought to be no sorrow, but there is sorrow, and we have to accept and recive ourselves in its fires. If we try to evade sorrow, refusing to deal with it, we are foolish. Sorrow is one of the biggest facts in life, and there is no use in saying it should not be. Sin, sorrow, and suffering are, and it is not for us to say that God has made a mistake in allowing therm.
★ [슬픔은 사람에게서 경박함을 제거합니다. 그러나 슬픔은 항상 좋은 결과를 가져오는 것은 아니어서, 나 자신을 세워갈 수 있게 하거나 나를 파멸에 이르게 할 수도 있습니다. 성공은 자만심으로 인해 진정한 자신의 모습을 볼 수 없게 만들고 일상의 단조로움 속에서 당신 자신을 받아들이는 것이 아닙니다. 진정한 자신을 찾게되는 것은 슬품을 통해서입니다. 그러한 사실은 성경에도 또 인간의 경험을 보아서도 알 수 있습니다.] Sorrow removes a great deal of a person’s shallowness, but it does not always make that person better. Suffering either gives me to myself or it destroys me. You cannot find or receive yourself through success, because you lose your head over pride. And you cannot receive yourself through the monotony of your daily life, because you give in to complaining. The only way to find yourself is in the fires of sorrow. Why it should be this way is immaterial. The fact is that it is true in the Scriptures and in human experience.
★ [당신은 주변의 어느 누가 심한 슬픔을 격정을 통과했는지 알 수 있고 당신이 어려울 때에 당신과 시간을 나눌 수 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깊은 슬픔을 맛보지 않은 사람은 당신과 함께할 시간을 내지도 못하고 당신을 존경하지도 않으며 남들을 경멸하기 쉽습니다. 당신이 슬픔의 심연을 거치고 나서 당신 자신을 바로 세웠다면 당신은 남들을 위한 영양공급을 해 줄수 있습니다.] You can always recognize who has been through the fires of sorrow and received himself, and you know that you can go to him in our moment of trouble and find that he has plenty of time for you. But if a person has not been through the fires of sorrow, he is apt to be contemptuous, having no respect or time for you, only turning you away. If you will recive yourself in the fires of sorrow, God will make you nourishment for other people.
(오늘의 idiom)
❀ you could hear a pin drop = absolute silence. “It’s so quiet in the room you could hear a pin drop.”
★ 몽고의 역대 왕들은 건국 초기부터 서양에 자기 나라를 소개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는데, 중국을 찾았던 서양인 중에 <동방견문록>을 저술한 마르코 폴로(Marco Polo)도 있었다. 동방견문록에는 몽고의 수도였던 상도(上都)에 대한 언급이 있다. 이곳은 칭기즈 칸(Kublai Khan)이 몽골 제국을 세우면서 여름철 수도로 삼았던 곳이었다. 몽고 내륙 지방에 있는 이 도시는 도시 전체를 감싸는 외부 도시, 그 안에 다시 2차 성벽을 쌓아 만든 내부 도시, 그리고 그 중심에 3차 성벽이 쌓아진 궁궐로 구성되어 있었다. 외부 도시의 성벽 길이는 2.2킬로, 내부 도시는 1.4킬로, 칭기즈 칸이 여름철을 지내던 궁궐의 길이는 사방 550미터에 달했다. 1275년 <동방견문록>에서 Xanadu라고 소개된 이 도시의 모습은 신비로움 그 자체였다.
동방견문록에 소개된 상도에 관한 내용은 후대 서양 작가들의 영감을 불러일으키기 충분했고, 19세기 영국의 대표적인 낭만파 시인인 콜리지(Samuel Taylor Coleridge)는 대표적인 작품 Kublai Khan에서 Xanadu를 일반인이 쉽게 접근할 수 없는 신비하고 행복한 이상향으로 묘사했다. 이 시를 통해, Xanadu는 서양인에게 마치 유토피아(utopia)와 같은 존재로 인식된 것이다.
[예문 1] He has some wild-eyed scheme to build a utopia in the twenty-first century. 그는 21세기에 이상향을 건설하겠다는 엉뚱한 계획을 갖고 있다.
[예문 2] She left home and traveled across the sea in search of Xanadu, but she never found it. 그녀는 집을 떠나 Xanadu를 찾아 바다를 건너 돌아다녔지만, 그곳을 결코 찾지 못했다.
서양 시인에게는 Xanadu가 이상향 또는 무릉도원으로 보였겠지만, Xanadu에 실제로 살았던 도잠이라는 중국 시인이 생각한 무릉도원은 다른 곳이었다. 시인 도잠이 묘사한 복숭아꽃 피는 아름다운 이상향은 다음과 같다.
배를 타고 강에서 고기를 잡던 한 어부가 강을 따라 올라가다 보니 향기를 품은 복숭아 꽃잎들이 많이 떠내려왔다. 그는 꽃잎이 어디에서 나오는지 궁금하여 한참을 올라가다 보니, 복숭아 꽃이 만발한 곳을 발견하게 되었다. 꽃향기에 취해 내린 그곳 계곡 밑에 한 사람이 겨우 들어갈 만한 작은 동굴 하나를 발견한다. 동굴을 지나자마자 탁 트인 새로운 세상을 만날 수 있었다. 이 세상 어느 곳에서도 볼 수 없는 기름진 땅에 풍성하게 자라는 곡식들, 무성한 나무들과 미소 지으며 여유롭게 사는 사람들 등 말로 형언할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다운 곳이었다. 융숭한 대접을 받은 어부는 이곳에 다시 올 것을 결심하고 집으로 돌아오며 표시를 해 두었다. 그러나 표시를 따라 다시 그곳을 찾았지만, 동굴도 복숭아 꽃도 없어져 버린 상태였다. 많은 사람이 이 이야기를 듣고 찾으려 노력을 했지만, 이곳을 다시 보았다는 사람은 없었다고 한다.
★ You shall not add to the word which I command you, nor take from it, that you may keep the commandments of the Lord your God. —Deuteronomy 4:2
내가 너희에게 명하는 말을 너희는 가감하지
말고 내가 너희에게 명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지키라 —신명기 4:2
★ Words matter. But especially when they are the very words of God. Moses warned Israel, “You shall not add to the word which I command you, nor take from it, that you may keep the commandments of the Lord your God” (Deut. 4:2). Moses often reminded Israel of God’s mercy and faithfulness to them in the past.
말은 중요합니다. 특히 그 말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라면 더 그렇습니다. 모세는 이스라엘백성에게 “내가 너희에게 명하는 말을 너희는 가감하지 말고 내가 너희에게 명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지키라”(신명기 4:2)고 경고했습니다. 모세는 종종 이스라엘백성에게 하나님께서 과거에 베푸신 자비와 한결같으심을 상기시키곤 했습니다.
★ But he also stressed the importance of obedience to God’s commands as they prepared to enter the Promised Land. He told them that obedience would result in blessings of life and a rich inheritance (vv.39-40). Every command and regulation mattered to God. The value His people placed on God’s Word showed their view of Him.
또 그들이 약속의 땅에 들어가려고 준비할 때, 하나님의 명령을 순종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습니다. 그는 그들이 순종하면 복을 받고 후손들이 거기서 한없이 오래 살 것이라고 말했습니다(39-40절). 하나님께 있어 모든 명령과 규정은 중요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의 말씀을 얼마나 중요하게 여기는가 하는 것은 곧 그들이 하나님을 어떻게 생각하는가를 보여주는 것이었습니다.
★ Today, when we value God’s Word, handle it with great care, and obey what it says, we give God the reverence He truly deserves.
오늘날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중시하고, 매우 조심스럽게 취급하며, 그 말씀에 순종할 때, 우리는 하나님이 마땅히 받으셔야 할 경의를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 God’s Word needs no additions or subtractions.
하나님의 말씀은 덧붙이거나 뺄 것이 없다.
(아래 내용은 다음에서 인용함) http://bethelpress.org/dailybread.php
We have been delivered from the law, . . . so that we should serve in the newness of the Spirit. —Romans 7:6 이제는 우리가......율법에서 벗어났으니 이러므로 우리의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길 것이요 — 로마서 7:6
Here in Michigan we joke that we have two seasons: winter and road construction. Harsh winters damage road surfaces, so repair crews begin their work as soon as the ice melts and the ground thaws. 이곳 미시간에는 계절이 둘 밖에 없다고 농담들을 합니다. 하나는 겨울이고 다른 하나는 도로공사입니다. 혹독한 겨울이 도로면을 손상시키면, 얼음이 녹고 땅이 풀리자마자 복구대원들이 작업을 시작합니다.
Although we call this work “construction,” much of what they do looks like “destruction.” In some cases, simply patching holes is not an option. Workers have to replace the old road with a new one. 우리는 이 작업을 “건설공사”라고 하지만, 사실 그들이 하는 작업의 대부분은 “파괴”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어떤 경우에는 단순히 구멍을 메꾸는 것으로는 되지 않아서 이전 도로를 새 도로로 바꾸어야 합니다.
That’s what it can feel like when God is at work in our lives. Throughout the Old Testament, God told His people to expect some major renovation on the road between Him and them (Isa. 62:10- 11; Jer. 31:31). When God sent Jesus, it seemed to the Jews as if their way to God was being destroyed. But Jesus wasn’t destroying anything. He was completing it (Matt. 5:17). The old way paved with laws became a new way paved with the sacrificial love of Jesus. 하나님이 우리 삶에 역사하실 때에도 바로 그렇게 느껴집니다. 구약 전체를 통해 하나님은 그의 백성들에게 하나님과 그들 사이에 중대한 복구공사가 이루어질 것을 기대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이사야 62:10-11; 예레미야 31:31). 하나님이 예수님을 보내셨을 때, 유대인들에게는 마치 하나님께 가는 길이 파괴되는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아무것도 파괴하지 않으시고, 그 길을 완성하고 계셨습니다(마태복음 5:17). 율법으로 포장된 옛 도로가 예수님의 희생적인 사랑으로 포장된 새 길이 되었습니다.
God is still at work replacing old ways of sin and legalism with the way of love that Jesus completed. When He removes our old ways of thinking and behaving, it may feel as if everything familiar is being destroyed. But God is not destroying anything; He is building a better way. And we can be confident that the end result will be smoother relationships with others and a closer relationship with Him. 하나님은 죄악과 율법주의의 옛길을 예수님이 완성하신 사랑의 길로 바꿔가는 작업을 아직도 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생각과 행동의 옛 방식을 제거하실 때, 우리에게는 익숙한 모든 것이 파괴되는 것처럼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어느 것도 파괴하지 않고, 오히려 더 좋은 길을 만들고 계십니다. 그 결과로 우리는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가 더 원만해지고 하나님과 더 가까운 교제를 가지게 될 것을 확신할 수 있습니다.
Free from the law—O happy condition! Jesus has bled, and there is remission; Cursed by the law and bruised by the fall, Grace has redeemed us once for all. 율법에서 벗어났으니 얼마나 기쁜 일인가! 예수님이 흘리신 피, 죄 사함이 되었네 율법으로 저주 받고 타락으로 상처 입은 우리 그 은혜로 말미암아 단번에 구속되었네
Upheaval often precedes spiritual progress. 격변이 있은 후에는 보통 영적성장이 뒤따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