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샘편지 44신]‘미나리minari 무침’의 감칠맛
‘미나리’영화를 카톡으로 보내준 인형仁兄에게.
‘자유로운 영혼’은 딱 형에게 어울리는 듯합니다.
중앙 일간지 사진부장으로 정년퇴직한 후 사이클에 몰입,
섬진강 벚꽃길을 달리는가 하면
제주의 올레길들도 모두 섭렵했다지요.
한라산 오르기를 동네 뒷산처럼 1년에도 수십 차례를 한다구요.
남원 운봉에서 정령치까지 MTB로 올랐다는 말을 듣고
놀라 자빠질 뻔 했습니다. 어떻게 그럴 수가? 믿기지 않은 일입니다.
게다가 클래식을 수십 년 전부터 심취하여
형의 이름 석 자를 대면, 그 계통 사람들은 모르는 사람이 없다면서요.
성품만 맑은 게 아니고, 귀까지 그지없이 맑군요.
고상한 취미가 특기가 되고,
그 특기로 관련잡지에 칼럼 연재도 수십년 했다구요.
어쩜 그럴 수가? 참 대단합니다.
클래식 음악 스피커 전문가라는 말도 처음 들었습니다.
허허, 재야在野에는 참으로 고수高手들이 많은 것같습니다.
엊그제 모악산 자락 밑에 너무나 고급진 전원주택을 짓고 사는
지인의 삶과 일상도 그러하더군요.
형은 나보다 그 분을 더 잘 알지요?
‘꿈의 저택’의 앰프 등 오디오 세트를 설치해 주었다면서요.
요즘 갈수록 부러운 삶을 사는 지인들이 왜 이렇게 나의 눈에 띄는지 모르겠습니다.
나 자신 ‘제법 산다고 하는 축’에 든다고 생각했었지만,
아닌 것같습니다. 흐흐.
서설序說이 길었습니다.
아무튼, 어제 보내준 미국에서 최근 화제가 됐다
(골든 글로브 최우수외국어영화상 수상)는 ‘미나리’를
스마트폰으로 115분 동안 혼자서 잘 보았습니다.
‘계춘할매’의 윤여정이 나온다기에 꼭 보고 싶었거든요.
‘한국의 메릴 스트립’이라 불리는 윤여정 배우는
내가 좋아하는 배우입니다. ‘윤스테이’도 즐겨볼 정도니까요.
‘영혼이 자유롭다’고 떠벌리는 바보같은 조영남을
평소‘진국’을 놓친 ‘나쁜 넘’으로 생각한 편이거든요.
‘미나리’는 미국이라는 나라에 뿌리를 내리려는 한국 이민가족의 일상을 그린 영화더군요.
그 와중에 친정어머니인 윤여정을 모셔오고,
그 할머니는 “어디서든 잘 자란다”며 미나리 씨를 가져다 농장 개울가에 심었지요.
하루종일, 아니 10년 동안 병아리 똥구멍만 쳐다보며
‘암, 수’를 가리는 감별사 일을 하다 지쳐
한국채소 전용농장을 꾸미겠다는 남편과 하루하루 다투며
아들과 딸을 키우는 아내의 심정도 십분 이해되더군요.
물론 남편의 절실한 꿈을 피부로 실감할 수는 없어도
가족을 위해 성공하고픈 가장家長의 심리를 왜 모르겠습니까?
하지만 치매끼 할머니의 실수로 창고가 불탄 후에야,
날마다 찌그락짜그락 다투던 부부는 무성한 미나리를 뜯으며
절망 속에서도 또다른 희망을 꿈꾸더군요.
하지만 솔직히 영화는 너무 길다싶게 장황하고 별 재미는 못느꼈습니다.
어제는 하루종일 봄비가 촉촉이 내렸습니다.
영화를 보고난 후, 동네 뒷 개울가에 불미나리가 생각났습니다.
이른 봄, 딱 이때쯤 미나리무침이나 미나리전의 맛은
맛보지 않은 분들은 전혀 모를 것입니다.
형도 일미一味의 경험이 있는지요?
제철 음식은 이런 것입니다.
젓가락으로 한 입 가득 입에 몰아넣으면
물씬 풍기는 향긋한 냄새와 아삭아삭, 질깃질깃, 그 감칠 맛이라니요?
한마디로 ‘주깁니다’. 눈곱만큼 과장 아닙니다.
인근 면소재지 ‘여사친’이 하는 식당을 불쑥 들렀습니다.
반찬으로 나온 미나리무침,
어떻게 알고, 어찌 이렇게 ‘아다리(timeliness)’가 맞았을까,
그 친구가 너무 고마웠습니다.
금세 밥 한 공기가 뚝딱이었습니다.
봄은 이렇게 봄비와 함께, 미나리무침과 함께 오고야 말았습니다.
이제 곧 쑥들도 우우우 솟아나겠지요.
충무로의 ‘도다리쑥국’집 기억나시나요?
도다리쑥국은 멍게비빔밥과 함께 먹어야 제격입니다.
서울이 가끔 그리운 것은
‘입에 들어붙은 별미’식당들이 생각날 때입니다.
형과도 같이 먹은 적 있나요?
인사동 ‘오수별채’의 민어구이와 양념꼬막. 별미 중의 별미이었지요.
인터넷 검색을 해보았습니다.
미나리의 효능이 제법 장황합디다.
맛도 맛이지만, 피를 맑게 해주고 고혈압 등 사람의 몸에 아주 좋다고 하더군요.
수 년 전 전남 화순군청을 방문한 적이 있습니다.
그 지역 특산품을 고급 기념품으로 만들었다며
입지전적인 인물인 군수가 작은 용기의 ‘불미나리 환丸’을 한 병 주더군요.
몇 개 들어있는 것같지도 않은데,
25만원이라며 VIP한테만 준다는데 “뇌물 아니냐”며 웃었지요.
그 지자체장은 지금 잘 살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흐흐.
영화 보내줘 잘 봤다는 댓글을 쓰려다
이왕이면 처음이지만 편지로 쓰자고 한 게 길어졌습니다.
지난 겨울, 드론을 가져와 내 사는 옛살라비(고향의 순우리말. 백기완선생의 일상어)의
전경을 찍어준 것도 고마웠습니다. 크게 확대해 마을회관에 걸어놓았지요.
“안중근 의사가 나의 영웅”이라는 말을 듣고,
안의사 관련 책을 몇 권 보내드렸지요.
나 역시 불과 서른의 나이에 ‘동양평화론’을 옥중에서 저술한
안의사의 사상가思想家 측면에 감탄, 감동한 적이 많았습니다.
부족하지만 ‘안중근숭모회’의 이사理事로 명함을 올린 적도 있었으니 말입니다.
https://cafe.daum.net/jrsix/h8dk/884
https://cafe.daum.net/jrsix/h8dk/887
안의사를 테러리스트라며 비난하는 어느 덜떨어진 언론인을 보며
백범이 민비 살해범이라고 생각한 일본인 군인을 죽이듯
순간 살의殺意를 느꼈던 기억도 납니다.
형의 그런 생각과 올곧은 신념도 흔치 않은 일입니다.
언제 세월이 좋으면, 하얼삔에도 한번 같이 가보면 좋겠습니다.
섬진강 하동길 벚꽃 퍼레이드를 펼칠 날도 얼마 남지 않았군요.
그때 또 여느 해처럼 여지없이 사이클을 타겠지요.
불쑥 들러 임실 우거寓居에서 하루밤 유留하고 갈 날을
고대하겠습니다. 영화 보내줘 고마웠습니다.
줄입니다.
5일 경칩날
'구경재’에서 우천 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