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034
2월12일 [연중 제5주간 토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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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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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m.youtube.com/watch?v=7pLI2D-2uPY
(이현섭 요셉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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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결국 우리 인간의 결핍이 하느님의 측은지심을 불러일으킵니다!>
어린 시절 동네 마을 잔치 풍경이 아스라이 떠오릅니다. 잔칫날에 되면 동네 사람들은 물론이고 조무래기들, 지나가던 행인들, 걸인들조차 너 나 할 것 없이 와서 뜨끈한 국밥이며 떡이며 한 상씩 받습니다.
없이 살던 시절, 깡통 들고 다니며 구걸하던 사람들이 많았는데, 당시 걸인들에게는 이 동네 저 동네 잔칫날이 초미의 관심사였습니다. 그 누구라도 와서 원 없이 주린 배를 채우던 동네잔치를 떠올리며 하느님 나라를 생각합니다.
하느님 나라, 과연 어떤 곳인가 묵상해봅니다. 흥겹고 정겹던 동네잔치 분위기 같지 않을까요? 하느님 나라의 우세한 특징 중에 하나를 꼽으라면 아무래도 풍요로움일 것입니다.
육적인 먹거리뿐만 아니라 영적인 먹거리도 흘러넘치는 곳, 지상에서의 모든 결핍과 제한이 원 없이 충족되는 곳, 기쁨도 감사도 흘러넘치는 그런 곳이 하느님 나라가 아닐까요?
더 이상 차별도 없고, 더 이상 그 누구도 풍요로움에서 제외되지 않는 곳, 모두가 하느님 은총을 흘러넘치게 받고 또 받는 곳이 하느님 나라일 것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했던 군중들은 빵과 물고기를 많게 하신 기적을 통해 잠시나마 풍요로운 하느님 나라를 앞당겨서 체험했습니다. 예수님의 그 너그럽고 넉넉한 마음에 군중들은 마음이 따뜻해졌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빵과 물고기를 많게 하시는 기적, 그 기적의 원동력이 무엇인가 생각해봅니다. 하느님의 전지전능하심을 드러내심, 하느님 나라 도래의 선포, 예수 그리스도의 메시아성 확증...
생각해보니 또 다른 이유도 있었습니다. 우리 인간들을 향한 하느님 아버지의 측은지심이 아닐까요? 그렇다면 그 측은지심의 발로는 또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다름 아닌 우리 인간이 지니고 있는 어쩔 수 없는 부족함과 나약함입니다.인간인 이상 항상 끼고 사는 죄와 결핍입니다.
하느님께서 왜 우리 인간을 당신 눈동자처럼 애지중지 여기시고 영원한 생명과 구원에로 인도하시는가, 생각해봅니다.
우리가 이 세상 살아가면서 쌓아온 선행 때문이기도 할 것입니다. 우리가 당신 마음에 딱 드는 예쁜 행동 때문이기도 할 것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말씀을 거역하지 않고 당신 계명에 고분고분 따랐기 때문이기도 할 것입니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보니 그게 다가 아니더군요. 우리의 한계, 우리의 죄, 우리의 눈물, 우리의 고통... 이런 우리 인간의 결핍이 하느님의 측은지심을 불러일으키며, 그 결과가 결국 구원이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결국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이 모든 결핍은 곧 있을 하느님 축복의 한 표현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지금 우리가 견디고 있는 이 모든 불행 역시 오래 가지 않아 변화될 하느님 위로의 손길이라 저는 믿습니다.
지금 우리의 상황이 최악이라면 머지않아 하느님 도움의 손길이 다가오리라 저는 확신합니다. 지금 우리가 생의 가장 밑바닥에 서 있다면, 올라갈 순간이 멀지 않았다는 표시입니다.
지금 눈물 흘리고 있다면, 지금 깊은 슬픔에 잠겨있다면, 사랑의 하느님께서 천천히 나를 향해 다가오심이 확실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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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복음묵상 동영상)
https://youtu.be/Q0TIVlXq5C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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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우리 학교는?>
하느님의 아들이며 말씀이신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4천 명을 먹이시는 기적’입니다. 이는 ‘5천 명을 먹이신 기적’과 무엇이 다를까요? 전반적인 내용은 같습니다. 그러나 마르코 복음에서는 분명 5천 명을 먹이신 기적과 4천 명을 먹이신 기적, 두 개를 별개의 기적으로 여깁니다.
예수님께서 바리사이들의 누룩을 조심하라고 하실 때 제자들은 빵이 없다고 걱정합니다. 그때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어찌하여 빵이 없다고 수군거리느냐? 아직도 이해하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느냐? 너희 마음이 그렇게도 완고하냐? 너희는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느냐? 너희는 기억하지 못하느냐? 내가 빵 다섯 개를 오천 명에게 떼어 주었을 때, 빵 조각을 몇 광주리나 가득 거두었느냐?’ 그들이 ‘열둘입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빵 일곱 개를 사천 명에게 떼어 주었을 때에는, 빵 조각을 몇 바구니나 가득 거두었느냐?’ 그들이 ‘일곱입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너희는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 하고 말씀하셨다.”(마르 8,17-21)
분명 5천 명을 먹이신 기적이나 4천 명을 먹이신 기적은 ‘빵에 대한 걱정을 없애라’라는 뜻이 들어있습니다. ‘생존 욕구’에 치중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당신이 책임져주겠다는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5천 명을 먹이신 기적과 4천 명을 먹이신 기적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5천 명을 먹이신 기적은 ‘탈출기의 광야 생활’을 상징하고, 4천 명을 먹이신 기적은 ‘에덴 동산의 삶’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나오는 숫자들의 상징이 그렇습니다. 5천 명을 먹이실 때 빵 5개 물고기 2마리를 사용하였습니다. 숫자 ‘5’는 우리 몸에 오감이 있는 것처럼, 인간의 몸, 혹은 사람을 상징합니다. 물고기 두 마리는 몸으로 오신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베풀어주시는 ‘은총과 진리’입니다. 모세가 사람이 되신 그리스도를 상징한다면 주님께서 그를 통해 주시는 만나와 물이 진리와 은총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남은 빵이 ‘열두’ 광주리에 가득 찼다고 하는 것은 12지파, 곧 이스라엘 백성을 상징합니다.
그런데 4천 명을 먹이실 때, 숫자 ‘4’는 ‘땅’을 상징합니다. 에덴동산에서 물이 한줄기 흘렀는데 모든 땅을 적셨다고 할 때 그 하나의 물줄기는 ‘네’ 개로 갈라집니다. 동서남북의 네 방향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 땅은 7일 동안 창조되었습니다. 그래서 물고기 숫자보다는 빵의 숫자가 중요합니다. 일곱 광주리에 가득 찼다고 하는 것은 먹을 것이 풍부한 에덴동산을 말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은 먹을 것이 없다고 하느님께 원망하였습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는 물과 만나를 주시며 그들이 가진 것들을 감사히 봉헌하여 성막을 짓게 하셨습니다. 거기에 당신이 머무실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에게 무언가 요구하는 하느님보다는 자신들에게 무언가 해 줄 수 있는 소를 섬기는 것으로 선택하였습니다. 또 에덴동산에서 하느님은 선악과를 봉헌하라 하셨지만, 그들은 자신들에게 더 많은 소유를 줄 것 같은 뱀을 섬겼습니다. 그리고 3천 명이 죽고 아담과 하와는 에덴동산에서 쫓겨납니다.
이 모든 것은 ‘생존 문제를 주님께 맡기지 못한 이유 때문’입니다. 우리 안의 자아는 오로지 육체의 생존밖에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육체가 죽으면 자신도 필요 없어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하느님께서는 당신이 생존을 다 책임져 줄 테니까 그것을 믿는 증거로 십일조를 봉헌하라고 하십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이 하느님을 충분히 믿지는 못합니다. 교회는 생존의 문제를 주님께 맡기는 연습을 하는 학교와 같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에덴동산에서처럼 또 쫓겨날 것이기 때문입니다.
넷플릭스 좀비 드라마 ‘지금 우리 학교는’이 인기입니다. 우리 세상이 이 학교와 같습니다. 여기서 사람은 정확히 ‘네’ 부류로 나뉩니다.
첫 번째 부류는 이미 좀비가 된 인간입니다. 그들은 항상 배가 고픕니다. 자신의 생존을 위해 남을 해치면서도 생존을 위해 어쩔 수 없다며 그냥 좀비가 되어버린 인간을 상징합니다.
두 번째는 그 좀비로부터 자신들을 보호하기 위해 살아가는 아직 좀비가 되지 않은 인간입니다. 하지만 그들 역시 살아가는 목적은 죽지 않기 위함입니다. 남을 해치지는 못하지만, 여전히 좀비가 될 가능성이 있는 존재입니다.
세 번째 부류는 좀비가 되었는데 의식이 있는 좀비가 된 존재입니다. 그들은 분노에 차서 누군가를 지독히 미워합니다. 이제 죽을 걱정이 없어서 다만 자신의 미움과 분노를 표출하기 위해 살아갑니다. 귀남과 같은 존재입니다.
네 번째 부류는 역시 좀비가 되었지만 사랑 때문에 좀비가 되어서도 의식을 가진 존재입니다. 이 좀비들은 인간을 보호하기 위해 죽음도 불사합니다. 왜냐하면, 이들도 세 번째 부류처럼 죽음에 대한 걱정이 별로 없습니다. 반장의 경우입니다.
2차 세계 대전을 생각해 볼까요? 독일 군인들은 유대인들을 학살하는 일을 하는 첫 번째 좀비와 같은 부류입니다. 이들은 생존을 위해 누군가를 죽이지 않으면 안 되는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아이히만도 자신은 살아야 했기에 나라에서 시키는 일을 했을 뿐이라고 말합니다. 모기가 피를 빨아먹는 게 무슨 죄가 있겠습니까? 다만 자신이 모기인 줄 모르고 평생을 산 어리석음이 죄인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살 가능성도 있고 죽을 가능성도 있는 두 번째 부류라 할 수 있습니다. 이들은 생존을 위해 좀비와 같은 독일 군인들을 피해 다닙니다. 그러다가 잡히기라도 하면 이들도 똑같은 신세가 됩니다. 여전히 죽음에 대해 걱정하며 살아가는 우리 대부분의 모습입니다. 두 번째 부류입니다.
그런데 별로 죽을 것 같지 않아서 자신의 꿈을 펼치는데 그 꿈이 누군가의 생명을 앗아가게 만드는 부류입니다. 히틀러의 경우입니다. 그는 굶어 죽을 걱정은 없습니다. 하지만 좀비들을 이용해 자신의 분노를 표출할 수는 있습니다. 보통 사람을 어쩔 수 없이 그들의 지시에 좀비가 되어버리게 만드는 좀비 우두머리라 할 수 있습니다. 이들이 세 번째 부류입니다.
마지막 네 번째 부류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약한 이들을 보호하기 위해 좀비들과 좀비 마왕들에 맞서는 이들입니다. 죽음을 두려워하는 이를 위해 대신 죽음을 선택한 막시밀리아노 콜베 신부님과 같은 분들입니다. 또 유대인들을 대피시키기 위해 목숨을 걸었던 수많은 의인들입니다.
우리는 어느 세상에 속해있건 이 네 부류에 반드시 속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죽으려고 하는 자는 살 것이고 살려는 자는 죽을 것이라 말씀하셨습니다. 이 심판의 기준에 따르면 영원한 생명을 얻는 사람들은 네 번째 부류밖에 없습니다. 그리스도를 가장 닮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5천 명을 먹이시고 4천 명을 먹이시며 우리에게 가르치시고 싶은 것은 무엇일까요? 생존을 걱정하지 말고 네 번째 부류의 사람이 되라는 것이 아닐까요? 살기를 원한다면 절대 네 번째 부류의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유대인 어린 고아들이 무서워하자 자신은 유대인이 아니면서도 192명 아이의 손을 잡고 함께 가스실로 들어간 야노쉬 코르착을 생각해 보십시오.
이런 사람들을 만드는 학교가 바로 세상입니다. 우리는 이 학교에서 어느 부류가 될 것인지 결정해야 합니다. 네 번째 부류의 특징은 예수님처럼 작은 것으로 ‘감사의 기도와 봉헌’을 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 주님께서 나의 생존을 책임져주신다는 증거로 감사의 십일조를 하는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 그 모범을 보여주신 것이 오늘 기적의 핵심 내용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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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르 8,1-10 : 사천 명을 먹이시다
“저 군중이 가엾구나.”(2절) 광야에서 허기지셨던 적이 있는 주님께서 지금은 생명의 빵으로 인간을 먹이시고 계시다. 군중들은 사흘 째 주님을 따라 다니고 있다. 주님께서는 그들이 길에서 쓰러질까 염려하셔서 굶겨 보내시기를 원하지 않으신다. 제자들도 난감하였다. 그리고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 많은 군중들을 먹이려 하니 빵을 한 덩어리씩 나누어준다고 하더라도 돈이나 그 부피가 만만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4절).
“더구나 저들 가운데에는 먼데서 온 사람들도 있다.”(3절) 인간의 능력으로는 도저히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기 때문에 제자들은 난색을 표하는 것이다. 아직은 주님을 잘 몰랐기 때문에 그럴 수밖에 없지만 어떤 면에서는 우리도 인간의 상식으로는 불가능하다고 생각할 때에 그 문제를 빨리 잊어버리고 외면하고 싶은 그 마음을 대변하고 있는 것 같다. 예수님은 제자들과 상의를 하고 계시며 희생을 요구하신다.
그 요구는 다른 것이 아니라, 지금 자기가 가지고 있는 빵이 얼마나 되는지 내어놓는 것이었다. 제자들은 “일곱 개 있습니다.”(5절)하고 대답하면서 그것을 예수님 앞에 내어놓았다. 빵 일곱 개는 그 많은 군중 앞에 아무 것도 아닌 양이었다. 그러나 기적을 이룰 수 있었던 것은 그 빵을 주님 앞에 내어놓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는 것이다.
그 빵을 다른 사람과 나누려는 마음이 없어서 내어놓지 못했다면 기적은 이루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예수님은 빵 일곱 개를 손에 들고 감사를 드리신 다음 제자들에게 나누어 주셨으며 제자들로 하여금 군중들에게 나누어주게 하셨다. 제자들의 나눔과 주님의 축복이 그 큰 기적을 이룰 수 있었음을 우리는 알아야 할 것이다. 이것은 바로 내가 가진 것을 나눌 수 있을 때, 주님의 축복도 함께 따라올 수 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내가 나누지 못할 때 절대로 기적은 일어날 수 없다.
본당에 있을 때, 나는 초등학교 어린이들을 통하여 이러한 기적이 이루어지는 것을 본다. 매월 자신의 용돈을 아껴 1000원을 가난한 사람들을 위하여 희생하는 것을 통해, 그리고 설날 받은 세뱃돈의 많은 양을 가난한 사람들을 위하여 희생하는 것을 통해, 그리고 우리 모든 신자들이 어려운 가운데서도 기쁘게 하느님께 바쳐 가난한 사람들을 돕고, 어려운 본당이나 단체를 도와주는 거기에서 빵의 기적을 보며 하느님께 감사드린다.
우리 라자로 마을에서 하는 사업이 바로 이 빵의 기적을 체험하는 사업이다. 후원회원들의 일곱 개의 빵이 우리 마을을 위해 기적을 일으키고, “그대 있음에” 음악회의 빵 일곱 개가 해외의 한센인들에게 기적을 보여주고 있음을 우리는 체험하고 있다.
많이 가졌기 때문에 나눌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빵 일곱 개밖에 되지 않는 적은 것을 가지고 있지만 그것을 나누려고 내어놓을 수 있기 때문에 이러한 기적이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지금도 하느님께서는 당신 혼자 일하시기보다 우리의 협조를 원하신다. 우리가 가진 것을 가지고 하느님의 뜻에 어떻게 협조하는가에 따라 하느님께서는 보다 큰일을 우리에게 이루어주신다는 사실을 믿음 안에서 체험하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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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예전에 ‘건강한 남자와 부실한 남자의 하루’를 텔레비전에서 보았습니다. 건강남과 부실남은 하루의 시작이 달랐습니다. 먹는 것도 달랐고, 일하는 것도 달랐습니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니 건강남은 더욱 건강하게 되었고, 부실남은 더욱 부실하게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둘 모두 건강한 모습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가진 사람은 더 갖게 되고, 못 가진 사람은 더 빼앗길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건강남은 일정표를 3곳에 정리하였습니다. 스마트폰, 사무실 책상, 집의 거실에 일정표를 표시하였습니다. 그러기에 주어진 업무를 효율적으로 처리하였습니다. 아침 일찍 일어나서 운동을 하고 밥을 먹습니다. 담배는 끊었고, 술도 적당히 마십니다. 주어진 일은 기쁘게 하고, 동료들의 일도 도와줍니다. 가끔씩 명상도 하고, 책도 읽습니다. 모든 것이 잘 될 것이라는 긍정적인 사고를 지니고 있으며, 월급은 잘 관리해서 적금도 들어 놓았습니다. 앞으로의 진로를 위해서 자격증을 따 놓았고, 외국어 학원도 등록했습니다. 시민단체에 가입을 했으며 정기적으로 후원금도 보냈습니다. 얼굴 표정은 늘 밝았고, 또래 젊은이들보다 젊어 보였습니다. 행운보다는 행복을 추구하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아갑니다. 친구들과 우정을 나누고, 신앙생활을 통해서 영적인 위안을 받습니다.
부실남의 하루는 이렇습니다. 아침은 먹지 않습니다. 전날 술을 많이 먹었기 때문입니다. 낮은 층수도 엘리베이터를 이용합니다. 입에 좋은 컵라면을 즐겨 먹습니다. 운동보다는 컴퓨터의 게임에 몰두합니다. 회식자리에서는 빈속에 먹어야 좋다며, 안주를 거의 먹지 않습니다. 2차는 기본이고, 기분이 좋으면 3차, 4차까지 가서 술을 마십니다. 집에 돌아와서도 속이 쓰리니, 또 라면을 먹고, 컴퓨터 게임을 합니다. 부실남은 점점 건강이 나빠지고, 허리도 아프고, 얼굴에 윤기가 없어집니다. 아직은 젊기 때문에 몸이 버티지만 둑이 무너지듯이 언제 건강이 나빠질지 모르는 상태가 됩니다. 주변으로부터도 좋은 이야기를 듣지 못하니, 어른들을 만나고 싶은 마음도 없습니다. 부모님께 용돈을 타려니 미안하기는 한데, 달리 돈을 구할 방도도 찾지 못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되겠지’라는 마음으로 하루하루 지내고 있습니다. 불평과 불만을 입에 달고 삽니다. 일정관리를 못해서 늘 분주하지만 실속이 없습니다. 건강남과 부실남은 원래 정해진 것이 아닙니다. 지금 나의 선택이 나를 건강하게 할 수도 있고, 부실하게 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몸의 지배를 받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몸은 우리의 마음에 의해 변화되기 때문입니다.
오늘 제1독서는 우상 숭배를 강요하는 ‘왕’의 이야기입니다. 준비 안 된 사제를 임명하여 이스라엘 백성을 그릇된 길로 이끄는 왕입니다. 하느님과 멀어지는 삶의 방식을 전하고 있습니다. 예로보암은 하느님과 멀어지는 삶의 방식을 선택하였습니다. 하느님께서 다윗과 솔로몬에게 베풀어 주었던 은총과 자비를 망각하였습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자리에 이방의 신을 세웠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방의 신을 섬기도록 강요하였습니다. 예로보암 집안은 이런 일로 죄를 지어, 마침내 멸망하여 땅에서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반면에 복음은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헌신하는 예수님의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준비된 제자들의 이야기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께 가까이 가는 삶의 방식을 보여 주셨습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그 마음으로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마음이 있기에 배고픈 사람들의 사정을 헤아리게 됩니다. 가지고 있던 빵과 물고기를 모아 하느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리고 이웃들에게 나누어주었습니다. 사랑하는 마음으로 하느님께 기도하며 가진 것을 기꺼이 나누면 하느님께서는 축복을 주셨습니다. “사람들은 배불리 먹었다. 그리고 남은 조각을 모았더니 일곱 바구니나 되었다. 사람들은 사천 명가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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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인천교구 정천 사도요한 신부님]
예수님께서 군중에게 빵을 먹이시는 이야기는 마르코 복음서에 두 번 등장합니다. 한 번은 마르코 복음 6장 30-44절에, 다른 한 번은 오늘 복음인 마르코 복음 8장 1-10절에 나옵니다. 거의 동일한 구성의 이야기지만 차이가 있다면, 첫 번째 이야기에서 빵을 먹은 군중은 유다인들이고, 두 번째 이야기의 군중은 이방인들이라는 것입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베푸셨던 은혜로운 기적을 이방인들에게도 똑같이 베푸셨음을 의미합니다.
또한 예수님의 자비는 어느 특정한 이들이 독차지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이에게 열려 있다는 마르코 복음사가의 신학 사상을 담고 있는 것이기도 합니다. “저 군중이 가엾구나. 벌써 사흘 동안이나 내 곁에 머물렀는데 먹을 것이 없으니 말이다. 내가 저들을 굶겨서 집으로 돌려보내면 길에서 쓰러질 것이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기적을 일으키신 이유입니다. 보통은 누군가의 요청으로 기적을 베푸시지만, 오늘 복음에서는 당신 스스로 먼저 무엇인가를 해 주시고자 하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늘 우리를 지켜보시며 우리의 안위를 걱정하고 계십니다. 특히 우리의 험난한 신앙 여정에 대한 염려가 가장 크십니다. 예수님처럼 십자가를 지고 걷는 길에서 겪게 될 유혹들 때문에 지치지는 않을까, 혹여나 그 길에서 쓰러지지는 않을까, 늘 노심초사 우리를 바라보십니다.
나아가 예수님께서는 그런 우리를 위하여 영적 음식을 마련하시는데 그것은 놀랍게도 당신 자신입니다. 스스로 빵이 되시어 이를 먹는 모든 이의 여정에 함께 하시며 힘이 되어 주시기로 작정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미사를 통하여 받아 모시는 성체는 그분의 한없는 자비와 동정, 사랑의 마음에서 비롯된 최고의 선물이자 가장 풍요로운 양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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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송용민 사도 요한 신부님]
굶주림은 예나 지금이나 인류가 넘고 싶은 가장 큰 과제입니다. 현대 사회가 비약적인 농업 혁명과 과학 혁명으로 굶주림을 해결해 냈지만, 여전히 지구촌 곳곳에는 굶주리는 이들이 많습니다.
최근 성인품에 오르신 콜카타의 마더 데레사 성녀는, 지구상에 가난한 이들이 이토록 많은 이유를 사람들이 나누지 않기 때문이라고 지적한 바 있습니다. 나눔이 얼마나 소중한 가치인지는 모두 압니다.
문제는 나눔의 범위를 인맥과 민족, 이념과 체제의 굴레에 가두어 온 천박한 자본주의 사회의 병폐입니다. 예수님께서 사천 명을 먹이신 기적은 분명히 기적입니다.
복음은 예수님께서 군중을 가엾이 여기셨다는 말과, 제자들이 가진 일곱 개의 빵과 작은 물고기 몇 마리를 축복하시고 나누어 주신 행위 이외에, 구체적으로 이 기적이 어떻게 일어났는지 설명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점은 군중이 모두 배불리 먹었고, 빵이 남기까지 했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의 기적은 에덴 동산에서 하느님 명을 어긴 아담이 하와에게, 하와는 뱀에게 그 책임을 전가하는 모습과 대조됩니다.
기적을 일으키신 예수님의 측은한 마음은, 자기 책임을 그럴듯하게 남에게 뒤집어씌우고 합리화하는 아담과 하와의 이기적인 마음과 대비되기 때문입니다.
결국 그들에게는 에덴 동산에서 쫓겨나 땀을 흘리고 땅을 일구어야만 먹고 살 수 있는 고달픈 운명이 주어지지만,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말씀에 목마른 군중에게 나누어 주는 사랑을 통해 새로운 생명을 불어넣어 주십니다.
“너 어디 있느냐?”는 물음을, 이기심과 탐욕에 물들어 가난한 이들을 외면하며 자신만의 세계에 갇힌 나에게 던지시는 하느님의 물음으로 되새겨 볼 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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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곽용승 요셉 신부님]
<가엾음을 느낍니까?>
오늘 복음에서 만나게 되는 예수님의 모습에서 우리는 어떻게 아파하고, 힘들어하고, 배고파하는 이들에게 사랑을 나누어야 하는가를 잘 보게 됩니다.
복음의 내용을 살펴보면, 삼일 전부터 예수님을 따라 다니던 군중들이 모여 있는데 먹을 것이 없습니다. 이를 예수님께서 보시고 “저 군중이 가엾구나” 하십니다. 이 가엾음이란 말은 어원적으로 볼 때 함께 고통에 참여하고 그 고통 속에 뛰어 들어 간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때문에 “저 군중이 가엾구나, 벌써 사흘 동안이나 내 곁에 머물렀는데 먹을 것이 없으니 말이다. 내가 저들을 굶겨서 집으로 돌려보내면 길에서 쓰러질 것이다.”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예수님 스스로 군중이 먹을 것이 없어 배고파하는 그 고통을 함께 느끼고 그 고통에 직접적으로 뛰어 들어가심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관심과 사랑에 의해 가능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배고픔에 있는 군중들의 상태를 아셨습니다. 곧 그들과의 친밀감을 가지고 계셨다는 것입니다.
이 친밀감이 그들에 대한 관심과 애정을 촉발시키고 이 관심과 애정이 가엾음을 느끼게 하는 것입니다. 이 가엾음이 그들의 고통과 힘듦을 나누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힘듦과 고통을 풀 수 있는 것을 행하게 합니다.
그렇습니다. 이처럼 아파하는 이, 힘들어하는 이, 그리고 가난으로 고통 받는 이들의 고통에 함께 하고 그 고통을 나의 고통으로 껴안으며 그 고통의 현장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그들을 사랑하고 그들에게 다가가는 것임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이를 위해 우리는 지속적인 관심과 애정을 그네들에게 표현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의 내장에서부터 그네들에 대한 가엾음이 용솟음칠 것이고 이 마음이 우리를 그네들과 하나 되게 할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는 그네들의 아픔을 기쁨으로 나눌 수 있도록 행동할 것입니다.
예수님처럼 말입니다. 우리는 아파하는 이들, 힘들어하는 이들, 배고파하는 가난한 이들에게 관심과 애정을 가지고 있습니까? 그리고 가엾음을 느낍니까? 그리고 그들을 위한 행동을 하고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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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박기흠 토마스 신부님]
<예수님의 이름으로 나눔에 앞장서자>
마르코 복음서에는 예수님께서 군중을 먹이시는 두 가지 빵의 기적 이야기가 있다. 하나는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6,30~44)이고, 다른 하나는 사천 명을 먹이신 기적(8,1~9) 이야기이다.
여러 가지 정황으로 볼 때 기적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제자들에 대한 교육과 연관되어 있다고 본다. 앞서 오천 명을 먹이신 첫 번째 빵의 기적 사건은(6, 34~44) 이제 이방인에게도 주어진다.
두 이야기의 구조와 주제가 비슷한 것으로 보아 (군중을 가엾이 여기심, 제자들과의 대화, 외딴 곳에서 빵과 물고기로 하는 식사, 배불리 먹고 남음, 많은 군중 등), 서로 다른 두 가지 사건이 있었다기보다는 하나의 사건이 유다인과 이방인, 곧 서로 다른 공동체 안에서 전승되었다.
그러나 두 번째 빵의 기적사화에서는 나누어준 빵의 숫자가 다섯 개가 아니라 일곱 개-7이라는 숫자는 가나안 땅 이방의 일곱 민족(신명 7, 1)이나 예루살렘의 헬라계 그리스도인 공동체를 책임 맡은 일곱 명의 보조자들(사도 6, 1~7), 곧 이방계 그리스도인과 관련된 것으로 짐작-이고, 남은 빵조각이 열두 광주리가 아니라 일곱 바구니로, 빵을 먹은 사람의 숫자가 오천 명이 아니라 사천 명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4천 명의 군중의 상황은 악조건 그 자체이다. 이런 상황이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 알 수 있는데, “저 군중이 가엾구나. 벌써 사흘 동안이나 내 곁에 머물렀는데 먹을 것이 없으니 말이다. 내가 저들을 굶겨서 집으로 돌려보내면 길에서 쓰러질 것이다. 더구나 저들 가운데에는 먼 데서 온 사람들도 있다.”(8, 2-3)라고 밝혀진다.
불의한 시장경제의 논리를 따르면 돈 있는 사람들은 갖가지 음식과 향락을 누릴 수 있지만 돈 없는 사람들은 굶어서 죽기까지 한다.
지상의 자연재화와 생명을 지탱해 주는 재화는 ‘하느님의 선물’로서, 모든 사람이 그 선물을 받을 권리가 있다. 정의롭게 짜인 시장경제에 따라 그것을 공평하게 나누게 된다면 어느 누구도 부족함이 없이 오히려 넘칠 것이다. 복음 구절은 위의 내용을 증명한다.
“사람들은 배불리 먹었다. 그리고 남은 조각을 모았더니 일곱 바구니나 되었다. 사람들은 사천 명가량이었다.”(8,8)
이런 행위 안에는 또 다른 가르침이 있는데, 사람들이 먹을 것을 사고 기본적인 생계를 유지하는 데는 많은 금전의 보유가 아니라 서로 나누어야 함을 보여준다. 이런 모양으로 예수님은 새로운 사회를 계획하셨다.
당신이 계획하신 그 사회 안에는 약자를 보호하고, 서로 가진 것을 따뜻하게 나누며 소유가 나눔으로 바뀌게 되는 세상이다. 그런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자발적인 나눔을 실현하는 사람들의 모임이 필요하며, 개인과 집단은 독점하려는 불의한 사고방식에서 재화를 ‘하느님의 선물’로 보려는 사고방식이 무엇보다 필요하다.
예수님과 함께 도래하는 하느님 나라에서 하느님의 선물은 풍성하기 때문에 나누기만 하면 모든 사람이 만족하고 넘치기 된다.
예수님께서 축성하신 빵 일곱과 작은 물고기 몇 마리로 군중들은 배불리 먹었다. 예수님의 행위는 기적을 설명하기보다는 제자들이 마음에 새겨 교회에서 실행하도록 가르치는 것 같다.
오늘도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의 제자로서 그분의 권능에 의지하여 세상 사람들에게 필요한 양식을 나누어 주라는 부르심을 받는다.
그 어느 시대보다 물질적으로 풍요로워졌지만 여전히 기아와 빈곤, 전쟁과 폭력, 생태계 파괴와 살상무기로 지구촌이 고통을 당한다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오늘날 교회는 세상의 영적, 물질적 필요에 귀 기울이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나눔에 앞장서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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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양주분회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너희에게는 빵이 몇 개 있느냐?">
군중이 모여 있었는데, 먹을 것이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가까이 불러 말씀하셨습니다.
“저 군중이 가엽구나. ~내가 저들을 굶겨서 집으로 돌려보내면 길에서 쓰러질 것이다.”(마르 8,2-3)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을 굶겨서 돌려보내고 싶지 않으셨습니다. 그들을 소중히 여기시고 사랑하셨습니다. 그들이 청하지도 않는데도 이미 먹이셨고, 미처 바라지도 않는데도 이미 용서하셨고, 가엷게 여기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물으십니다.
“‘너희에게는 빵이 몇 개 있느냐?’ 그러자 그들이 ‘일곱 개 있습니다.’ 하고 대답하였습니다.”(마르 7,5)
그렇습니다. 빵은 이미 ‘우리’에게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그것을 일깨워주시고 확인시켜 주십니다. 사실, 그들에게는 빵이 이미 “일곱 개”나 있었습니다. ‘일곱’은 완전함의 숫자입니다. 곧 이미 차고 넘치게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들은 “빵”이 없거나 부족해서가 아니라, 단지 그것을 모르고 있거나 인정하지 않고 있을 뿐이었습니다. 그러니 ‘있는 것’을 없다고 여기는 것이 무지요, ‘있는 것’의 가치를 모르는 것이 어리석음일 것입니다. 만약, 오늘 우리가 이미 가지고 있는 하느님의 말씀과 사랑을 보지 못하고 또한 찾지 않는다면, 그것이 바로 무지요 어리석음일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에게는 이미 그 “빵”이 있습니다. “말씀의 빵”이 있습니다. 그것은 이미 은총입니다. 이 ‘있는 것’을 보는 눈이 곧 감사의 눈이요, 관상의 눈입니다. 우리가 이 빵의 가치를 진정으로 안다면, 벅찬 감격에 까무러칠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이미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이 “빵”을 찾아야 할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다름 아닌 ‘우리에게 있는 바로 그 빵’으로 감사드리셨고, 제자들은 그 빵을 군중들에게 나누어 주었습니다.
사실, 우리는 이미 이 “빵”을 먹었습니다. 성찬의 전례를 통해 ‘그리스도의 몸’을 먹을 뿐만 아니라, 말씀의 전례를 통해서 그리스도를 먹었습니다. 그래서 나지안즈의 그레고리오는 말씀을 듣는 것을 일컬어 “파스카의 어린 양을 먹는 것”이라 하였고, 오리게네스는 “성경 독서 중에 그리스도의 살을 먹고 피를 마신다.”고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사람” 에제키엘처럼 ‘말씀의 두루마리’를 먹었습니다(에제 3,3). 그런데 우리가 먹고도 먹은 줄을 모른다면 참으로 어리석은 일일 것입니다. 이제는 우리가 먹은 그리스도의 생명을 살아야 할 일입니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말씀을 나누는 일, 곧 복음 선포가 될 것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말합니다.
“성경을 풀이해 주는 것은 빵을 떼어 주는 것과 같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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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저 군중이 가엽구나.”(마르 8,2)
주님!
속 깊은 곳을 환히 보시고 깊이 숨겨진 말도 다 들으시니,
제 마음 안에 당신의 빛을 비추소서.
약한 이들을 소중히 여기고 사랑하게 하소서.
제 가슴 속에 가엾이 보는 눈과 마음을 주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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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저 군중이 가엾구나. 벌써 사흘 동안이나 내 곁에 머물렀는데 먹을 것이 없으니 말이다."(마르8,2)
<공정과 정의!>
먹을 것이 없어 배고픔에 지쳐있는 당신의 군중을 보시고, 예수님께서 '가엾은 마음'을 드러내십니다.
제자들이 갖고 있었던 '빵 일곱 개와 작은 물고기 몇 마리로 사천 명가량이 배불리 먹고도 일곱 바구니가 남는 기적'을 일으키십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을 통해서 드러난 '하느님의 뜻'입니다.
한 쪽으로 치우쳐있는 모습이 아니라, 모두가 함께 잘 사는 하느님의 나라인 '고루 살이의 세상'을 만들어 내는 것, 이것이 바로 하느님의 뜻인, '진정한 의미의 공정과 정의'입니다.
요즘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좋은 말들이 난무하고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공정과 정의'를 모든 후보들이 말하고 있습니다.
이는 모두가 함께 잘 사는 대한민국을 만들겠다는 다짐입니다. 이 다짐을 단순히 구호로만 외치는 후보가 아니라, 이 공정과 정의를 보다 더 잘 실현해 낼 수 있는 후보가 대통령으로 뽑혔으면 좋겠습니다.
성경과 복음이 우리에게 재촉하고 있는 바는, 우리 주변에 있는 '가난하고 배고픈 이들, 사회적 약자들을 우선적으로 선택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물으십니다.
"너희에게 빵이 몇 개나 있느냐?"(마르8,5)
우리는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내가 땀 흘려 얻게 된 내 것을 가지고 내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없단 말인가?'
'내 것을 가지고 내 마음 대로 할 수 있다.'는 말은 모든 것의 원주인이신 하느님께만 유보되어 있는 말입니다.
때문에 우리는 하느님의 것을 내 이웃을 통해 하느님께 내 드려야 합니다.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마태25,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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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밥>
마르코 8,1-10 (사천 명을 먹이시다)
그 무렵 많은 군중이 모여 있었는데 먹을 것이 없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가까이 불러 말씀하셨다. “저 군중이 가엾구나. 벌써 사흘 동안이나 내 곁에 머물렀는데 먹을 것이 없으니 말이다. 내가 저들을 굶겨서 집으로 돌려보내면 길에서 쓰러질 것이다. 더구나 저들 가운데에는 먼 데서 온 사람들도 있다.” 그러자 제자들이 “이 광야에서 누가 어디서 빵을 구해 저 사람들을 배불릴 수 있겠습니까?” 하고 대답하였다. 예수님께서 “너희에게 빵이 몇 개나 있느냐?” 하고 물으시자, 그들이 “일곱 개 있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예수님께서는 군중에게 땅에 앉으라고 분부하셨다. 그리고 빵 일곱 개를 손에 들고 감사를 드리신 다음, 떼어서 제자들에게 주시며 나누어 주라고 하시니, 그들이 군중에게 나누어 주었다. 또 제자들이 작은 물고기 몇 마리를 가지고 있었는데, 예수님께서는 그것도 축복하신 다음에 나누어 주라고 이르셨다. 사람들은 배불리 먹었다. 그리고 남은 조각을 모았더니 일곱 바구니나 되었다. 사람들은 사천 명가량이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돌려보내시고 나서, 곧바로 제자들과 함께 배에 올라 달마누타 지방으로 가셨다.
<밥>
혼자만
먹으면
밥인가
다함께
먹어야
밥이지
배불리
먹으면
밥인가
나누어
먹어야
밥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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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하느님을 믿지 않는 것은 물론이고, 일하는 것을 싫어하고 단지 놀면서 먹고 마시기에만 관심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리고 또 다른 사람은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고 있으며, 삶 안에서 하느님의 뜻을 새기고 열심히 실천하는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이 둘 중에서 누가 로또복권에 당첨될 확률이 높을까요? 많은 이가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의 당첨 확률이 더 높으리라 생각할 것입니다. 하지만 반대로 노는 것만 좋아하는 사람이 로또복권에 당첨될 확률이 훨씬 높습니다. 왜냐하면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은 요행을 바라는 복권을 절대 사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놀기 좋아하는 사람은 일확천금을 노리는 경우가 많아 복권을 살 확률도 높아집니다. 놀기 좋아하면서 복권만을 열심히 사라는 것이 아닙니다. 당첨된다고 행복으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점은 생각해 보았으면 합니다. 복권을 사야 당첨된 확률이 조금이라도 생기는 것처럼, 우리 삶 안에서도 스스로 시도해야 하는 노력이 꼭 필요합니다. 그런데 본인은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으면 하느님께만 해결해달라고 청하기만 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너무나 큰 억지입니다.(복권을 사서 무조건 당첨시켜 달라는 것도 억지입니다.하느님은 요행을 좋아하지 않으십니다.)
프랑스 후기 낭만주의 작곡가인 엑토르 베를리오스는 “재능을 타고났다는 정도의 운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운이 따르는 재능도 있어야 한다.”라고 말했습니다. 재능을 만드는 것이 우리의 노력이며 정성입니다. 무조건 하느님께 해달라는 억지는 이제 그만해야 합니다. 사천 명을 배불리 먹이시는 빵의 기적을 행하십니다. 군중이 예수님과 사흘 동안 함께 있으면서 먹을 것이 떨어져 난처한 상황입니다.
먼 곳에서 온 사람이 집으로 돌아가다가 길에서 쓰러질 것이라는 말씀을 하시자, 제자들은 눈치를 채고 “이 광야에서 누가 어디서 빵을 구해 저 사람들을 배 불릴 수 있겠습니까?”라고 답합니다. 그들 모두를 배불리 먹을 수 없다는 불가능의 이유를 말하는 것이지요.
그때 예수님께서는 “너희에게 빵이 몇 개나 있느냐?”라고 하셨고, 제자들은 빵 일곱 개와 작은 물고기 몇 마리를 가져옵니다. 아무것이 없음에도 그들 모두를 배불리 먹일 수 있는 주님이십니다. 그러나 제자들의 노력을 요구하십니다. 그리고 그 노력은 모두 배불리 먹고도 일곱 바구니가 남는 기적을 가져왔습니다.
무조건 하느님께 해달라는 억지보다 우리가 할 수 있는 노력을 먼저 기울일 수 있어야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작은 노력도 아주 크게 쓰시는 분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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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하느님의 참 좋은 최고의 선물>
- 성체성사의 가르침 -
“그리스도교 생활 전체의 원천이며 정점이다. 교회의 모든 교역이나 사도적 활동과 마찬가지로 다른 여러 성사들은 성찬례와 연결되어 있고 성찬례를 지향하고 있다. 실제로 지극히 거룩한 성체성사 안에 교회의 모든 영적 선이 내포되어 있다. 곧 우리의 파스카이신 그리스도께서 그 안에 계신다.”(교리서1324)
성체성사를 요약한 위 가톨릭 교회 교리서의 말씀에 가톨릭 교회의 모든 사제들은 전적으로 공감할 것입니다. 제가 33년 수도사제로서 봉직해오는 동안 미사시 강론 때는 늘 성체성사의 은총으로 결론지었음이 생각납니다. 강론을 할 때 마다 얼마나 미사전례가 결정적 도움이 되는지 깨달았습니다. 앞으로도 그러할 것입니다.
제 영성생활의 0순위는 성체성사, 미사전례입니다. 하루가 시작되는 한밤중 우선 일어나 전날부터 준비했던 일이 강론준비입니다. 저에게 강론 준비는 그대로 미사준비가 됩니다. 참으로 헤아릴수 없이 많은 분들의 애환과 소망을 듣다보면 미사는 간절한 기도가 됩니다.
정말 하느님을, 그리스도 예수님을, 교회를 사랑하는 이들은 미사를 사랑합니다. 제가 늘 강조하는 바 하느님의 참 좋은 선물 셋은 성서, 예수님, 미사입니다. 교회의 미사중 살아 계신 그리스도 예수님을 통해 하느님을 만나기 때문입니다. 주님과의 살아 있는 만남을 통한 치유의 구원을 이뤄주는 미사은총입니다.
예전 두 사제의 고백이 생각납니다.
“노인들에게 낙이라곤 미사 하나뿐이데, 내가 이 양노원의 노인들을 두고 어찌 휴가갈 수 있겠는가?”
“아침 미사 안하면 수녀님들 아침도 안 먹기에 미사 안할 수가 없습니다.”
세월 흘러 나이 들어갈수록 믿는 이들의 미사에 대한 애착은 더해 가는 것 같습니다.
바로 오늘 복음을 통해 성체성사의 은혜가 얼마나 우리의 인생 광야 순례 여정중 결정적인지 새삼 크게 배웁니다. “사천명을 먹이시다”(마르8,1-10) 오늘 복음과, “오천명을 먹이시다”(마르6,30-44)가 참 좋은 대조를 이루며 상호보완합니다. 오늘 복음은 그리스계 교회의 성체성사를, 앞서 복음은 유다계 교회의 성체성사를 반영합니다. 오늘 복음에서의 성체성사는 유대계 교회를 넘어 온 인류의 성체성사로 향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두 복음이 외딴곳의 광야를 배경하고 있습니다. 참으로 광야 인생 순례 여정중의 신자들 삶의 중심에 자리잡고 있는 하느님의 참 좋은 선물인 사막의 오아시스, 사막의 쉼터이자 샘터요, 배움터 역할의 미사임을 깨닫습니다. 바로 오늘 복음에서 미사를 통해 참으로 중요한 가르침을 배웁니다.
오늘 제1독서 열왕기상권의 예로보암의 우상 숭배의 악행을 보면서 순간 악순환의 역사를 생각했습니다. 참으로 벗어나기 힘든 우상 숭배의 악순환입니다. 이런 우상숭배의 악순환과는 결을 달리 하지만 조선시대 500년 당쟁사를 통해 또 지금까지 반복되는 유사한 악순환의 현실을 보면서 아프게 깨닫는 진리입니다. 20권으로 된 조선시대 실록의 만화를 보면서도 한권이면 충분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끊임없는 악순환의 반복같은 역사였고 오늘까지 계속되고 있는 참 답답한 현실입니다.
통합보다는 분열을 조장하는 혐오, 차별, 배제가 주류를 이루는 현실입니다. 바로 이에 대한 통합의 모범을 보여줘야 할 가톨릭 교회요, 이에 결정적 역할이 미사은혜입니다. 바로 오늘 제1독서 반복되는 우상숭배의 악순환을 단! 끊을 수 있는 결정적 답이 오늘 복음을 통해 배우는 성체성사의 은총뿐임을 깨닫습니다.
‘예로보암은 그의 악한 길에서 돌아서지 않고, 또 다시 일반 백성 가운데에서 산당의 사제들을 임명하였다. 그는 원하는 사람은 누구에게나 직무를 맡겨 산당의 사제가 될 수 있게 하였다. 예로보암 집안은 이런 일로 죄를 지어, 마침내 멸망하여 땅에서 사라지게 되었다.’(1열왕13,33-34)
하느님에게서 떠난 우상숭배에 따른 자업자득의 업보입니다. 참으로 이런 우상숭배의 유혹에서 벗어나 바른 삶을 위해 성체성사의 생활화가 성체성사적 삶이 얼마나 우리 삶에 결정적 도움을 주는 지 깨닫습니다.
첫째, 예수님의 측은지심惻隱之心의 마음을 배웁니다.
예수님을 통해 대자대비大慈大悲의 하느님 마음을, 연민의 사랑을 배웁니다. 불쌍히 여기는 마음, 가엾이 여기는 마음, 측은히 여기는 마음, 바로 이런 한없이 깊은 연민의 사랑을 배워야 합니다. 문득 한암 대종사에 관한 책 서문에서 도올 김용옥의 고백이 생각납니다.
“나는 ‘각覺’자 앞에 ‘비悲’자를 하나 더 써주었다. 모든 깨달음은 슬픈 것이다. 각하고 나면 보이는 것이 다 슬픈 것이다. 나 혼자 욕망을 벗어던질수는 있다해도, 중생의 욕망은 무슨 수로 다스리랴!”
이래서 깊디 깊은 “자비慈悲”의 사랑입니다. 슬플 비는 바로 가엾이 여기는 마음이요 오늘 광야의 굶주린 중생을 바라보는 예수님이 그러하며 우리는 이런 가엾이 여기는 비의 마음을 배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역설적으로 참 “기쁨 (喜)”도 이런 하느님 “비(悲)”의 마음을 체험할 때 솟아나는 것입니다.
“저 군중이 가엾구나, 벌써 사흘 동안이나 내 곁에 머물렀는데 먹을 것이 없으니 말이다. 내가 저들을 굶겨서 집으로 보내면 길에서 쓰러질 것입니다.”
둘째, 예수님의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의 삶과 믿음을 배웁니다.
사랑의 기적이요, ‘진인사 대천명’ 믿음의 삶에 따른 기적입니다. 참으로 예수님의 하느님께 대한 철석같은 신뢰의 믿음이 상상을 초월합니다. 바로 다음 대목이 이를 입증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군중에게 땅에 앉으라고 분부하셨다. 그리고 빵 일곱 개를 손에 들고 감사를 드리는 다음, 떼어서 제자들에게 나누어 주라고 하시니, 그들이 군중에 나누어 주었다.’
그대로 광야에서 온갖 정성을 다해 진인사대천명의 절실한 자세로 미사를 봉헌하시는 예수님이십니다. 바로 이런 믿음의 자세를 배우자는 것이며 이런 절실한 자세로 미사에 참례하자는 것입니다.
셋째, 예수님의 미사로부터 감동과 나눔을 배웁니다.
하느님을 감동시킴과 동시에 군중을 감동시킨 예수님 자비의 사랑이요 진인사대천명의 믿음입니다. 감동이 빠진 우리의 삶은 아닌지 반성해야 합니다. 정말 사람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것은 감동입니다. 감동을 통한 마음의 정화요 성화입니다. 참으로 감사, 감동, 감탄의 삼감의 순수한 마음이 절실한 시대입니다.
‘사람들은 배불리 먹었다. 그리고 남은 조각을 모았더니 일곱 바구니나 되었다. 사람들은 사천명 가량 되었다.’
예수님의 사랑과 믿음에 회개한, 감동한 군중들이 갖고 있던 것을 다 나누니 이런 풍부한 기적입니다. 극심한 빈부의 격차로, 정의와 공정의 결핍으로 굶주림입니다. 정말 가진 자들이 이웃과 가진 것을 나눈다면 차고 넘치도록 풍부한, 온 세상이 번영하여 화평하게 되는 “대동大同” 세상일 것입니다. 참으로 예수님의 미사로부터 배울 바는 이런 감동과 나눔입니다.
넷째, 예수님의 홀가분한 떠남의 마음을 배웁니다.
예수님의 미련없는 떠남이 참 멋지고 매력적입니다. 애당초 군중들이 광신이나 인기에 휩싸일 소지를 없앱니다. 참으로 홀가분한 집착없는 이탈의 초연한 떠남입니다. 노자의 “공성이불거(功成而弗居)”란 말씀처럼 공을 이루면 거기 머물지 않고 곧 떠나는 그런 삶의 모범을 보여줍니다, 참으로 지혜롭고 겸손한, 정말 자기를 완전히 비운 그런 사랑입니다. 다음 대목이 이를 입증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돌려보내시고 나서, 곧바로 제자들과 함께 배에 올라 달마누터 지방으로 가셨다.’
예수님의 지체없는 떠남은 얼마나 멋진지요! 진짜 불가 스님 이상으로 진짜 “사랑의 운수행각雲水行脚”의 여정에 오른 예수님과 제자들 일행같습니다. 사랑의 기적이요 기적은 끝이 아니라, 떠남은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임을 깨닫습니다. 늘 새로운 시작의 삶을 살게 하는 미사은총을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참으로 오늘 복음의 예수님 미사로부터 참 귀한 가르침을 배웠습니다. 인류가 존속하는 한 영원히 계속될 “늘 옛스러우면서도 늘 새로운(ever old, ever new)”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광야 인생 순례 여정을 성공리에 마치도록 도와 주실 것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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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말씀 기도♡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
대선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참으로 백성들을 위하는 좋은 지도자가
대통령으로 선출될 수 있도록
백성들의 마음을 열어주소서.
이스라엘 북왕국의 왕이었던
예로보암은 유다땅 예루살렘 성전을 대신하여
백성들을 위한답시고 베텔과 단에
두 개의 성전을 만들고
일반인 중에서 사제들을 만들어
그럴싸하게 포장하여
하느님과 백성을 섬기는 듯 만들었으나
사실은 자기 권력을 유지하기 위한 수단으로
그리하였지요.
반면 오천명의 유대인들을
이미 측은지심으로 배불리 먹이신 예수님은
오늘 이방인들에게도 똑같이
그들도 똑같은 하느님의 자녀들이기에
측은지심으로 배불리 먹이십니다.
오 주님!
백성을 위한답시고
그럴싸한 공약들을 내세우지만
진정 백성들을 위하기보단
자기 권력과 부를 유지하기 위해
술수를 쓰는 예로보암 같은
그런 지도자가 아니라,
예수님처럼
진정으로 가난하지만 착하고 성실한
다수 서민들의 어려움과 고통을
측은지심으로 보살피는
따뜻한 마음을 지닌 그런 지도자를
저희 나라의 새 대통령으로 선출할 수 있도록
우리 백성들의 마음을 활짝 열어주소서.
오 나의 하느님, 나의 전부시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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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SNrqo75S1a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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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사람들은 배불리 먹었다."(마르 8, 8)
모든 것이
감사이다.
이런 광야에서도
감사를 드릴 수
있다.
감사에서
사랑이
자란다.
사랑하지
않고서는 빵이
될 수 없다.
사랑으로
가는 길은
성체성사를
닮았다.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결합체가 바로
성체성사이다.
사랑과
동행하는
우리들 삶이다.
붙잡는 것이
사랑이 아니라
나누는 것이
사랑이다.
나눔을
잊어버린
우리들이다.
삶의
허기짐을
채우는 것은
분명
나눔이다.
나눌수록
더 깊어지는
사랑이다.
나눔은
생명의
신비이며
하늘 나라의
신비이다.
나누는 곳이
하늘 나라이다.
당신의
나눔으로
감사를 버린
우리들에게
감사를 되찾아
주시는
주님이시다.
오늘도
사랑을
내미시는
주님께
감사를 올려
드린다.
모든 것이
나눔이다.
나누니
너가
배 부르고
나또한
배 부르다.
우리모두
배 부르게
하시는
광야의
성체성사이다.
성체성사의
사랑을 믿는다.
사람들을
살리는 것이
사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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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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