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경천도 운동" 혹은 "서경반란 사건"이라 불리는 사건에 대해서는 국사시간이나, 역사에 관심을 가지고 계신 분들이라면 한번쯤 들어 보았을 겁니다.
근데 한가지 생각해 볼 점이 있는게, 당대 저 서경천도 운동이 일어났을때 "반란을 일으키기 이전까지는" 일부 서경파 뿐만이 아니라 당시 대다수 고려 신료들이 그에 동조했다는 겁니다(볼셰비키?????).
“묘청(妙淸)은 성인(聖人)이요, 백수한(白壽翰)도 그 다음이니 국가의 일을 모두 물은 다음에 행하고 그들이 건의하는 것을 무엇이든지 받아들인다면 정치가 이루어지고 일이 잘 되어 국가를 보전할 수 있습니다." 하고, 이에 차례로 모든 관원에게 서명을 청하니 평장사 김부식(金富軾), 참지정사 임원애(任元敱), 승선 이지저(李之氐)만은 서명하지 않았다. 글이 올라가니 왕이 비록 의심을 가졌으나 여러 사람이 강력하게 말하므로 믿지 않을 수 없었다.
고려사 절요 인종 6년 8월
묘청의 주장은
"저희들이 보기에 서경(西京) 임원역(林原驛)의 지세(地勢)는 음양가(陰陽家)들이 말하는 대화세(大華勢)에 해당합니다. 만약 궁궐을 세워 그곳으로 거처를 옮기신다면 천하를 아우를 수 있어 금나라가 예물을 가지고 스스로 항복해올 것이며 36국(國)이 모두 신하가 되어 굴복할 것입니다."
였죠. 물론 서경천도 운동을 지지 하는 사람들 중에는 저 말을 믿지 않아도 찬성을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우리들이 주상을 모시고 서도로 옮겨가 그곳을 상경(上京)으로 삼는다면 틀림없이 중흥공신(中興功臣)이 될 것이니 우리 한몸이 부귀하게 될 뿐 아니라 자손도 무궁한 복을 누릴 것이다.”
고 모의한 후 서경 천도를 입이 닳도록 함께 떠벌렸다. 근신(近臣)인 홍이서(洪彝敍)·이중부(李仲孚)와 대신(大臣) 문공인(文公仁)·임경청(林景淸)도 부화뇌동하였다.....
즉 서경천도 운동에 동조하는 사람들은 여러이유로 동조했는데 그중에는 도참에 현혹 된 사람들도 있고, 이를 틈타 출세할 수도 있다는 출세욕에 불타는 사람들도 있었다는 이야기죠.
그런데
이런 주장만을 한다고 해서 대다수의 신료들이 찬성을 한다는게 이상하지 않나요? 일부 사람들은 분명히 이렇게 주장을 할 수 있고, 충분히 납득이 가능하지만 왜 김부식과 같은 소수의 신하들을 제외하고서 대다수의 신료들이 묘청에 혹했을까요?
사료에 적힌대로 "음양가의 비술(秘術)을 들먹이며 뭇 사람을 현혹" 시켰기 때문에? 물론 도참사상이 당대 사람들에게 의미있던 사상이었음에는 틀림 없지만, 고려 신하들이나 그것만을 가지고 정치하던 집단도 아니고(물론 현 21C 한국 대통령만 보면 그것만믿고 정치한다고 생각되기도.....), 그와는 다른 이유가 있지 않았을까.
우선 당대 국제정세를 살펴보아야겠죠.
당시가 금나라가 요나를 멸망시키고 심지어 정강의 변으로 송나라를 화북으로 밀어낸 상황이었다는 것은 기본적 상식일 것 입니다.
고려는 "인면수심론적" 여진관을 지니고 있었고, 그 "여진족에 대한 사대"는 매우 부정적이었습니다. 정강의 변 이전에 이자겸 - 척준경을 제외하고 금에 사대한다는 의견에 모든 신료들이 반대한 것도 그것때문이었겠죠.
하지만 정강의 변(1126)이 일어난 걸 알고 나서 본격적으로 서경천도 운동이 일어나는데, 대체 사람들은 왜 그 시점에 더 극단적으로 나갔을까요? 요에 대한 사대보다 훨씬 더 강압적인 관계를 요구(ex 서표문제)하는 금에 대한 반발심때문에? 여진도 했으니까 우리도 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서(ex 최봉심: 천명만 주믄 내래 금황제 모가지 따러가겠수다)????
한가지 더 생각해 봐야 할 것이 있습니다. 바로 이전의 여 - 요관계.
일반적으로 민족주의가 유입된 현 대한민국에서는 귀주대첩이후 여-요 관계가 비록 사대를 하고는 있지만 고려는 자주적인 상태였으며, 송-요와 함께 동아시아의 균형추를 이루었다는 부분을 강조합니다.
물론 위의 관점은 명백한 사실입니다만, 당대 고려신하들 상당수는 - 현실적으로 어쩔 수 없는일이기는 한데 - 요에 대한 사대를 굴욕적으로 느꼈던 것 같습니다.
우선 현종이 귀주대첩 직후 요에 적극적으로 외교를 하려는 움직에 되려 고려 신하들이 말리는 현상이 나타납니다.
2월 이달에 이작인(李作仁)을 시켜 표문을 휴대하고 거란에 가서 번국(藩國)을 칭하면서 옛처럼 공물을 받아줄 것을 청하게 했다. 또 거란 사람 지자리(只刺里)를 돌려보내었는데, 그는 여섯 해 동안 우리에게 억류되어 있었다.
4월 예부상서(禮部尙書) 양진(梁稹)과 형부시랑(刑部侍郞) 한거화(韓去華)를 거란으로 보내 왕자의 책봉을 알리려 하자, 재신(宰臣) 유방(庾方) 등이 간언해 말렸지만, 받아들이지 않았다.
고려사 현종11년(1020)
바로 앞에 이작인을 사신으로 파견에 외교를 하는 것까지는 그렇다 치더라도, 현종은 귀주대첩으로 이겨놓고도 거란에 왕자의 책봉까지 알려 확실히 사대를 하려 합니다만 오히려 신하들이 말리고 있죠. 고려는 "어쨌든 외왕내제"를 천명한 국가였고, 현종의 저러한 사대 모습은 전례도 없었던 만큼 고려 신하들이 되려 굴욕적이라 느꼈던 거겠죠.
(과연 이번 드라마에서 이 부분은 어떻게 묘사할지 궁금하네요. 아예 묘사를 안하는 건 하수들이나 할 짓이고, 티저영상에서 강감찬이 강조한테 "니가 거란에게 기회를 줬다"고 한 점을 활용해서, "거란에게 기회를 주지 않는" 현종의 외교적 감각으로 묘사하지 않을까 싶네요).
근데 "사대한지 이미 100년이나 지났고 거란문화도 고려에 상당수 유입된 시점인데 여-요사대와 서경천도 운동이 무슨상관?" 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서경천도 운동에 대해 적극적 지지까지는 아니어도 소극적이나마 동조를 한 윤언이는 이렇게 이야기 한 바 있습니다.
"제가 연호를 제정하자고 건의한 것은 임금을 높이려는 순수한 마음에서 나온 것으로 이미 본조에서는 태조와 광종의 전례가 있습니다"
예 윤언이 같은 사람들은 요-금 교체가 이루어 지고 있는 상황에서 금과 전쟁까지는 가지 않더라도 고려가 요에 사대하던 이전의 태조와 광종 시절로 복귀할 수는 있지 않았을까 하는 마음에서 서경천도 운동을 지지 한 겁니다.
윤언이는 윤관의 아들로 자기 아버지가 가서 몇번이나 현 함경도지역에 갔다가 죽을 고생하다가 살아났기 때문에 여진군의 강성함을 어느정도 알고 있었을 겁니다(ex 왜 척준경이 금에 대한 사대를 처음부터 찬성했을까. 단순히 이자겸의 당여여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나라의 멸망이라는 상황을 만나자, 독립 연호를 제정하는 등 대요사대 이전의 시절로 돌아가자고 주장했다는 건데, 그 이야기는 고려내부에서 지금까지의 요에 대한 사대를 긍정적으로만 보지 않았다는 것이고, 당시 고려사람들이 바라는 궁극적인 이상향은 누구에게도 사대하지 않았던 태조나 광종 시절의 모습이었다는 이야기이죠(태조대의 거란 금수론이 과연 사라졌을까?). 그리고 저런 사람들 상당수가 묘청을 적극적까지는 아니더라도 소극적으로 지지한 것이고요. 물론 그게 현실과는 맞지 않았고, 김부식등의 소수파들의 대금사대 결정이 받아들여져 고려는 다행히 평화와 영토확보(보주)라는 두가지 실리를 얻어낼 수 있었지요(그러고서는 내부에서 금나라를 두고 내내 오랑캐라 욕합니다. 인종 : 야 적당히들 해).
사실 이러한 모습은 조선에서도 보입니다. 청-일전쟁에서 청나라가 패하고 세운 "독립문"이 "청나라로 부터의 독립"을 의미하며 "이완용" 글을 썼다는 것도 이제는 기본상식이죠? 근데 그 이전에 조선이 아직까지 청나라에게 사대를 하고 있을때 외국기자들이 고종의 사대의례를 촬영하려고 하자 고종이 기피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습니다. 즉 현실적으로 대청사대가 어쩔 수 없었다는 건 다들 인지하고 있었습니다만 (조선사대부들은 말 할 것도 없고) 왕실사람들도 굴욕적으로 느끼기는 마찬가지였다는 이야기죠. 그리고 청-일전쟁의 패배로 청나라의 대조선 영향력이 확실히 사라지자 그게 독립문 이라는 형태로 나타난 것이겠죠.
즉 고려나 조선이나 북방민족에 대한 사대는 "현실적으로 어쩔 수 없었던 일로서 받아들여지기는 했지만" 그 질서를 받아들였다는 것이 곧 북방민족에 대한 배타적의식이 완전히 없어지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첫댓글 고려인과 조선인도 국뽕을 따르고 나름대로 애국심이 있었다는 증거죠(물론 그게 비현실적인 방향으로 가더라도)
그런데 누구들은 고려인과 조선인도 가졌던 '당연한 것'도 안가지고 있고...
그래서 내내 "당태종은 고구려 쳐들어왔다가 화살에 눈만맞고 돌아갔더래요" 같은 야사를 주장 ㅋㅋㅋㅋㅋ
@배달의 민족 중국(명나라):아무리 사료를 찾아도 그런 기록은 없는데?
고려,조선:안시성주 양만춘한테 화살을 맞아서 애꾸눈이 된건 진실이야!(빈약한 증거 제시)
국뽕은 언제 어느시대나 옳...
본문에 나온 시대보다 못한 현재이죠...매국노가 판쳐서 자국을 비하하기만 해서요
@노스아스터 현재가 저정도로 돌아가려면 천공의 북진통일론과 중국공격론에 전방사단이 반란을 일으키는 수준이어야 할 듯
잘 보고 갑니다 흥미롭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