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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약의 말씀, 언약의 삶(1)
본문: 시편 119편
설교자: 최종혁
시편 119편은 성경에서 가장 긴 시편(장으로 본다면 가장 긴 장)이다. 총 22연으로 구성되어 있고 이는 히브리어 알파벳의 숫자와 동일하다. 히브리어 알파벳 22개를 따라 22개의 연이 기록되었고, 각 연은 해당 알파벳으로 시작되는 8개의 절로 구성되어 있다(답관체, 이합체 시). 그래서 도합 22*8=176절이 된 것이다. 이와 가장 유사한 형식의 말씀은 예레미야 애가 3장인데, 애가 3장은 각 연이 3절로 되어 있어서 총 66절이다.
시편 119편이 이런 형식으로 기록된 목적은 ‘기억을 돕기 위해서’였을 수도 있고, ‘아이들에게 히브리어 알파벳을 가르치기 위해서’였을 수도 있다. 혹은 애초에 그런 목적으로 기록된 것이 아니었어도 그렇게 사용되었을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시편 119편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내용인 것을 고려해 보면, 저자는 하나님의 말씀, 특히 글로 기록된 말씀에 대한 특별한 관심과 애정을 이렇게 특별한 방식으로 표현했다고 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마치 내가 가진 모든 ‘말’을 동원해서 하나님의 ‘말씀’이 나에게 어떤 의미이며 내가 얼마나 그 말씀을 사랑하고 소중히 여기는지를 표현하겠다는 의지를 이런 형식을 통해서 보여주는 듯하다. 또한 성령님의 감동하심의 측면에서 본다면, 하나님의 말씀이 처음부터 끝까지(A-Z) 모든 것을 포괄하는 완전한 진리임을 이런 형식을 통해서 드러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시편 119편의 저자는 전통적으로 다윗이라고 많이 생각하지만 확실히 알 수는 없다. 다윗이라고 생각하는 이유는 다윗이 기록한 시편 19편의 하반부와의 유사성, 그리고 다윗의 시편에서 볼 수 있는 표현들과의 유사성 때문이다. 시편 119편에서 좀 의외로 자주 등장하는 것이 ‘비방’, ‘고난’에 대한 것인데, 이런 주제는 시편에서 주로 다윗의 시편에서 등장한다. 하지만 이런 것들이 모두 다윗에게만 해당된다고 볼 수는 없기 때문에 저자를 다윗이라고 확언할 수는 없다. 사실 경건한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고 고난 중에 더욱 하나님의 말씀을 찾는 것은 당연하기 때문에, 다윗과 같이 하나님의 마음을 따르는 사람이라면 (그리고 이런 시를 써서 사람들에게 인정 받을 만한 위치에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든 저자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다니엘이나 에스라를 저자로 생각하는 학자들도 있다.
시편 119편의 저자를 특정하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저자의 말씀에 대한 태도다. 시편 119편을 “말씀에 대한 말씀”이라고 주로 지칭하기는 하지만, 사실 시편 19편처럼 말씀의 특징에 대해서(“여호와의 율법은 완전하여… 여호와의 증거는 확실하여…”) 직접적으로 서술하거나 선포하는 내용이 주는 아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찬양하거나 말씀에 대한 교훈을 주는 것이 이 시편의 주된 의도가 아니기 때문이다. 한 구절씩 떼어 놓고 보면 그런 구절들이 있지만, 전체적으로는 그렇지 않다는 말이다.
시편 119편은 기도다.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다. 우리말 번역에는 “주”라고 되어 있는 2인칭 대명사(You)가 211번이나 사용되었다. 즉, 이 시편은 하나님 앞에 나아가서 하나님께 말한다. 이 시편을 읽을 때, 머릿 속에 그려져야 할 장면은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어떻다라고 말하는 장면이 아니라, 어떤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께 말하고 있는 장면이어야 한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이 자신에게 얼마나 귀한지, 그래서 자신이 얼마나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는지 말한다. 얼마나 그 말씀을 더 알고 싶고 배우고 싶고 마음에 두고 있는지를 말한다. 그렇기 하기 위해 자신이 어떤 노력을 하는지를 말한다. 그리고 자신이 더욱 그렇게 할 수 있도록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고 또한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이 자신의 삶 속에서 이루어지기를 구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고 말씀에 따라 살고 싶어하는 사람이 하나님 앞에 나아가서 자신의 마음을 이야기하는 것이 시편 119편이다. 시편 119편이 긴 이유는 저자가 그만큼 자신의 마음을 표현하고 싶었기 때문일 것이다.
사실 시편 119편에서 가장 놀라운 것은 이 부분이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저자의 태도가 가장 놀랍다. 이 사람은 정말로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한다. 즐거워 한다. 그래서 간절히 찾는다. 그의 표현에 따르면, 그는 “많은 재물” 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즐거워하고(14절), “천천 금은” 보다 하나님의 말씀이 좋다고 고백한다(72절). “순금보다” 더 사랑한다(127절). 그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노래”가 되었다(54절). 그의 입에 “꿀보다” 더 달았고(103절), 갈증이 날 때 물을 원하듯 입을 열고 헐떡였다(131절). 하나님의 말씀을 그 인생의 “충고자”로 생각했고(24절), 그 발의 빛으로 생각했다(105절). 그래서 심지어 “고난”을 당하는 것조차도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게 되기 때문에 유익이라고 말한다(71절).
이런 표현들을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다른 것에 사용하고 다르게 사용한다. 우리가 즐거워하는 것은 많은 재물 같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그냥 많은 재물이다. 순금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노래가 되는 것이 아니라, 그냥 노래가 좋다. 그냥 꿀이 달고 맛있는 음식이 좋다. 요즘 ‘맛있다’라는 표현을 아무데나 사용하는데,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그렇게 사용하는 것을 거의 들어본 적이 없다. 말씀이 내 삶의 인도자가 되어 주는 것보다, 실제로 어떤 인도자가 내 삶에 있는 것이 좋다. 그게 어떤 사람이 되었든, 가치관이 되었든, 책이 되었든, 차라리 그게 더 낫다. 고난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는 것보다 그냥 고난을 당하지 않는 것이 더 좋다.
그렇다 보니, 시편 119편을 읽을 때마다 갖게 되는 근본적은 물음이 있다. 왜 시편 119편의 저자는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할까? 왜 이런 간절함이 있을까? 그가 말하는 “여호와의 율법”, “증거”, “법도”, “판단”, “계명”, “율례”, “말씀”, “약속”은 주로 모세오경일텐데, 그 딱딱한 말씀들에 대해서 어떻게 이런 표현들을 사용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이다.
이런 의문이 생기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우리의 이해가 근본적으로 잘못되어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율법적”으로 이해한다. 즉, 해야할 것과 하지 말하야할 것에 대한 명령 목록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특히 구약의 율법에 대해서 그렇게 생각하고 신약의 많은 명령들에 대해서도 그렇게 생각한다.
사실 이것이 다름아닌 “율법주의”다. 싱클레어 퍼거슨은 “율법주의란 그저 하나님의 인격에서 하나님의 율법을 분리한 것”이라고 말했다.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이다. 그런데 말씀하신 하나님은 생각하지 않고 하신 말씀만을 생각하면 그것이 곧 율법주의라는 말이다. 그리고 그런 측면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보면 당연히 그 말씀을 사랑할 수 없다. 어떤 압박감은 느끼고 책임감은 느낄지 모르지만 사랑할 수는 없다. 하나님의 말씀은 그저 내가 좋아하고 하고 싶은 것을 하지 못하게 하고, 반대로 하고 싶지 않은 것은 하게 하는 괴로운 짐일 뿐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정확히 그렇게 대했던 것을 볼 수 있다. 특히 포로기 이후의 모습이 그렇다. 그들은 이제 다른 신(우상)을 섬기지는 않았지만, 하나님을 섬기는 데 있어 진실한 마음이 없었다. 예수님께서 책망하셨던 것처럼, 그들이 입술로는 하나님을 공경했지만 마음은 멀었다. 그래서 하나님께 드리는 것들은 좋은 것이 아니라 나쁜 것이었다. 병든 것을 드렸다. 안식일은 온갖 불필요한 규례들로 가득했다. 그래서 병자를 치료할 수도 없게 만들었다. “고르반”이라고 하기만 하면 부모님에 대한 부양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있게 만들었다.
하나님께서 정말로 무엇을 원하시는지에는 관심이 없고, 그저 규례를 어떻게 지켜야하는지에만 관심이 있었기 때문에 생겨난 결과였다. 예수님은 그들이 자기 전통으로 오히려 하나님의 계명을 어기고 있다고 책망하셨다. 바울은 그들이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지 않았다고 표현했다(롬 10:3).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율법)은 본래부터 그렇게 이해해야할 것이 아니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와는 아무런 관계 없는 어떤 힘 센 존재가 자기 마음대로 이렇게 하지 않으면 큰 일 날 것이다라는 식으로 주어진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서 이해해야 했다. 이스라엘에게 있어 그것을 가장 잘 설명해주는 책이 바로 신명기다. 율법의 전수자라 불리는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이 시간이 지나고나서 율법의 의미를 오해하지 않도록 잘 설명해 준 책이 바로 신명기다. 사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신명기만 제대로 이해하고 붙들었더라도, 율법주의에 빠지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신명기는 그 구성에서부터 언약의 형식을 차용했다. 내용을 보면 모세의 설교 3편인데, 전체 형식을 당시의 왕과 백성 사이에 맺었던 종주권 조약의 형식을 빌린 것이다.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이 언약의 관계임을 강조하려고 그런 형식을 사용했다고 볼 수 있다. 신명기에는 지켜야할 계명들이 기록되어 있지만, 그것이 단순히 일방적인 것이 아니라 언약에 기초한 것임을 백성들은 알아야 했던 것이다.
이 언약은 다름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되시고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 관계에서 핵심은 “사랑의 선택”이다.
먼저는 하나님의 사랑의 선택이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다른 민족보다 뛰어나거나 더 의로워서 그들을 선택하신 것이 아니었다. 하나님은 조건없이 은혜로 그들을 선택하셨다. 그리고 그들을 애굽에서 구원하셔서 그 사실을 증명하신 후에 시내산에서 그들과 언약을 맺으셨다. 그리고 계속해서 그 언약을 지키심을 그들에게 보여주셨다. 광야 40년 동안 하나님은 “사람이 자기의 아들을 안는 것 같이” 그들을 안고 약속의 땅까지 인도하셨던 것이다(신 1:31).
이런 언약의 관계 속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사랑의 선택을 요구하셨다. 그것이 율법의 계명들, 규례들, 법도들 등으로 불리는 것들이다. 율법은 이런 하나님의 요구에 따르는 것을 순종이나 명령을 지키는 것으로 표현하기도 했지만, 하나님을 섬기는 것, 하나님의 길을 걷는 것,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 등으로 표현하기도 했다.
단순히 하나님께서 하라고 하신 어떤 일을 기계적으로 하기만 하면 언약을 지키는 것이 아닌 것이다. 언약의 관계는 기본적으로 “마음”에서 시작된다. 그래서 신명기는 ‘마음의 할례’를 받아야 할 것을 말하고, ‘마음과 뜻’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할 것을 말한다. 그렇기 때문에 당연히 삶의 전부가 요구된다. 하나님은 평소에는 마음대로 살아도 상관 없지만 나를 예배할 때는 이렇게 해야한다는 요구를 하지 않으셨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이 곧 삶이 될 것을 요구하셨다.
하나님의 참된 백성이라면 이것이 전혀 이상하게 여겨지거나 무리하게 여겨질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사랑에 나의 사랑으로 화답하는 것이 마땅하게 여겨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참된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라면, 이 모든 것들이 이상하고 무리한 요구로 여겨진다.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기 때문에 그렇게까지 할 필요를 못느끼는 것이다. 그래서 많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율법주의에 빠졌다. 민족적으로 그들은 하나님의 언약의 백성이었지만, 개인적으로는 아니었다. 개인적으로는 하나님과의 언약의 관계 안에 있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모든 것들은 그들에게 짐이었고 무거운 책임이었던 것이다.
정리해 보면 이렇다. 하나님은 언약의 백성들에게 언약의 말씀을 주셔서 그들로 하여금 언약의 삶을 살게 하셨다. 이를 잘 요약한 말씀이 신명기의 이 말씀들이다.
신 10:12–13 이스라엘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이냐 곧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여 그의 모든 도를 행하고 그를 사랑하며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고 13내가 오늘 네 행복을 위하여 네게 명하는 여호와의 명령과 규례를 지킬 것이 아니냐
신 30:19–20 내가 오늘 하늘과 땅을 불러 너희에게 증거를 삼노라 내가 생명과 사망과 복과 저주를 네 앞에 두었은즉 너와 네 자손이 살기 위하여 생명을 택하고 20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의 말씀을 청종하며 또 그를 의지하라 그는 네 생명이시요 네 장수이시니 여호와께서 네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주리라고 맹세하신 땅에 네가 거주하리라
언약의 말씀에 따라 사는 것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일 뿐 아니라 유일하게 내가 행복할 수 있는 길이고 살 수 있는 길이다. 이 원리가 시편 1편에서도 강조되어 있다.
시 1:1–3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2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 3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가 하는 모든 일이 다 형통하리로다
시편 119편의 저자가 바로 이런 사람이다. 그는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않으려고 하고 죄인의 길에 서지 않으려고 하고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않으려고 한다. 반대로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한다. 여호와의 율법이 바로 내가 사랑하고 나를 사랑하는 하나님께서 나의 생명을 위해, 나의 행복을 위해 주신 말씀이기 때문이다.
시편 119편의 저자는 이에 대한 강한 확신이 있다. 이 시편을 기록할 당시 그에게는 고난이 있었다. 사람들의 비방과 멸시가 있었다(22-23절). 사람들이 조롱했다(51절). 그의 영혼이 진토에 붙었다(25절). 눌려서 녹았다(28절). 특히 81-87절은 이런 고난의 상황을 길게 묘사하기도 했다.
우리는 이런 상황에 있으면 하나님의 말씀을 멀리하는 경우가 더 많다. 내 마음이 이런데 말씀이 들어오겠냐고 반문한다. 하지만 시편 기자는 전혀 달랐다. 그는 오히려 더 말씀에 매달렸다. 말씀이 그를 “살게 한다”는 약속에 대한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그로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이 그의 삶을 풍요롭게 할 것을 믿었기 때문이다.
시편 119편은 이런 사람의 말씀에 대한 묵상이다. 하나님을 사랑하여 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싶은 사람의 기도다. 하나님의 말씀은 그에게 전혀 짐이 되지 않는다. 오히려 더 듣고 싶고 더 알고 싶다. 그것이 그를 살게 한다. 사랑하는 사람과는 더 함께하고 싶고 좋은 대화를 나누면서 그 사람을 더 알고 싶은 것처럼, 하나님에 대해서 그렇게 하는 것이다. 하나님과의 더 깊고 친밀한 관계를 원하는 사람의 기도다. 그것이 자신에게도 최고의 삶이 될 것을 확신하는 사람의 기도다. 이제 그 기도를 함께 드려보자.
구원 받은 우리는 새언약의 백성이다. 하나님은 이 성경을 새언약의 백성인 우리를 위해서도 주셨다. 우리가 언약의 삶을 살 수 있게 하시려고 그렇게 하셨다. 그러니 우리도 하나님의 말씀을 여기 시편 기자와 같이 더욱 사랑하고 간절히 바래야 할 것이다. 우리의 행복, 우리의 생명도 바로 이 하나님의 말씀에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나와 상관 없는 것처럼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은 나에게 말씀하셨다. 나에게 들으라고 말씀하셨다. 그 말씀을 듣고 그 말씀에 따라 살아 복을 누리라고 말씀하셨다. 이제 확신을 가지고 더욱 그 말씀을 듣기 원하고 알기 원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