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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사시간에 졸지 않았다면 한번 쯤은 "마한, 진한, 변한" 그리고 "연맹왕국" 등등에 대해서 들어보셨을 겁니다.
지금이야 저 삼한 중 "마한"이 경기 충청 호남에 걸쳐 있는 소국들의 "연맹왕국" 이었으며, 그 중에 백제가 있었고, 훗날 백제가 그 마한을 정복하였다는게 기본적인 상식으로 잘 알려져있죠.
하지만 최치원을 시작으로 저 삼한(三韓)을 고구려 백제 신라 삼국에 일치시키는 인식이 출현하였고 김부식은 이를 삼국사기에 적용시켜 한동안 "마한" = "고구려" or "변한= 백제" 라는 인식이 주류가 되어 버렸습니다.
엎드려 듣건대 동해 밖에 삼국이 있었으니 그 이름은 마한·변한·진한이었습니다. 마한은 곧 고〔구〕려, 변한은 곧 백제, 진한은 곧 신라입니다.
삼국사기 열전 최치원
신라의 최치원(崔致遠)은 “마한(馬韓)은 즉 고려(高麗), 변한(卞韓)은 즉 백제(百濟), 진한(辰韓)은 즉 신라(新羅)”라고 말하였다. 이와 같은 여러 설들이 사실에 가깝다고 할 만하다.
삼국사기 지리 신라
위에서 처럼 김부식은 삼국사기를 편찬하며 최치원의 마한 = 고구려라는 인식을 철저히 반영하였고, 이를 강조하기 위해 최치원전에서 뿐만이 아니라 신라의 강역을 나타내는 부분에서도 다시한번 최치원을 활용하였죠.
또한 김부식은 그를 위해 중국 사서를 인용하는데 있어서 매우 치밀한 '기교'를 보여줍니다.
백제. 《후한서(後漢書)》에서 말하기를 “삼한(三韓)은 모두 78국인데 백제(百濟)는 그 한 나라이다.”하였다.
(百濟. 後漢書云, “三韓凢七十八國, 百濟是其一國焉.”)
삼국사기 지리 백제
별로 이상할 것이 없다고 생각하시는 분들을 위해서 《후한서》의 원문을 올려보도록 하죠.
韓 은 세 종족이 있으니, 하나는 馬韓, 둘째는 辰韓, 셋째는 弁辰이다. 馬韓은 서쪽에 있는데, 54國이 있으며, 그 북쪽은 樂浪, 남쪽은 倭와 接하여 있다. 진한은 동쪽에 있는데, 12國이 있으며, 그 북쪽은 濊貊과 接하여 있다. 弁辰은 辰韓의 남쪽에 있는데, 역시 12國이 있으며, 그 남쪽은 倭와 接해 있다. 모두 78개 나라인데 백제(伯濟)는 그 중의 한 나라이다.
(韓有三種:一曰馬韓,二曰辰韓,三曰弁辰。馬韓在西,有五十四國,其北與樂浪,南與倭接。辰韓在東,十有二國,其北與濊貊接。弁辰在辰韓之南,亦十有二國,其南亦與倭接。凡七十八國,伯濟是其一國焉。)
《후한서》《동이》
예 삼국사기가 후한서에서 인용했다는 구절과, 진짜 후한서에 기록된 대한 글자가 "百濟"와 "伯濟"로 서로 다르다는 것을 확인 할 수 있습니다.
단순히 우리시절 까지 남아있는 후한서의 판본과, 그 시절 김부식이 보았던 판본이 달라서 발생한 일이었을까요? 아니면 단순히 글자를 잘 못 쓴 것 일 수도?
여기서 한 가지 더 생각해 보아야 할 점이 있습니다. "김부식이 왜 하필이면 《후한서》를 택했을까."
김부식이 삼국사기를 편찬할때 많은 중국문헌들을 참고 하였습니다. 그 중에는 진수의 《삼국지》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삼국지》에도 관련 구절이 당연히 있습니다.
馬韓은 서쪽에 위치하였다....爰襄國·牟水國·桑外國·小石索國·大石索國·優休牟涿國·臣濆沽國·伯濟國......등 모두 5십여國이 있다. 큰 나라는 萬餘家이고, 작은 나라는 數千家로서 總10餘萬戶이다.
《삼국지》《동이》
후한서는 "삼한중 하나에 백제(伯濟)가 있다"고 한 반면에 삼국지는 명확히 "마한의 50여국중에 백제(伯濟)가 있다"고 했죠. 백제(伯濟)의 성격을 더 구체적으로 나타내는 사료는 분명히 《삼국지》인데 김부식은 후한서를 택했습니다.
그리고 다른 중국 사서에는 아예 대놓고 백제(百濟)가 마한 속국이라고 명시하고 있기도 합니다.
百濟國은 대체로 馬韓의 족속이며
百濟之國, 蓋馬韓之屬也。
《북사》《백제》
百濟는 그 先代가 대체로 馬韓의 속국이며....
百濟者,其先蓋馬韓之屬國。
《주서》《백제》
김부식이 이 사서들을 과연 몰랐을까요? 아니면 알았는데 저 구절들을 확인을 못했을까요?
글쎄요 타임머신 타고 김부식한테 자백을 받아내지 않는이상 명확히 확인 할 수 없겠죠. 하지만 매우 공교롭게도 김부식은 삼국사기에 "마한과 백제의 관계를 명시하지 않은 《후한서》의 구절"을 택해서, "글자까지 변형 해가며" 《삼국사기》 저렇게 기록을 했다는 겁니다. 그리고 그를 통해서 《삼국사기》에 서술한 최치원의 "고구려 = 마한" "백제 = 변한" 설이 모순되지 않음을 잘 나타낼 수 있었죠.
물론 "견훤전"에서 견훤이 백제 = 마한이라고 주장한 구절을 넣어서 발생한 삼국사기내(內)의 모순은 뭐냐고 하실 수도 있겠지만,
견훤이 인심을 얻은 것을 기뻐하여 좌우에게 말하기를, “내가 삼국의 시초를 찾아보니, 마한이 먼저 일어나고 후에 혁거세가 일어났다. 그러므로 진한과 변한은 그를 뒤따라 일어난 것이다. 이에 백제는 금마산(金馬山)에서 개국하여 6백여 년이 되었는데....
근데 과연 "고려사람들이" 삼국사기의 위 구절을 보았을때 견훤이 잘못 생각했다고 했을까요? 아니면 최치원이나 김부식이 잘못 생각했다고 했을까요? 당연히 전자였을 것이고(ex 저렇게 역사적 식견도 없으니 나중에 아들한테 왕좌나 빼앗기지 ㅉㅉ), 김부식은 이 기록이 아무문제 없을 것이라 판단해서 위 기록을 삽입 한 것일 겁니다.
아무튼
최치원 부터 시작해서 김부식의 마한 = 고구려, 변한 = 백제 인식은 주류가 되어 계~속 이어집니다. 하지만 조선초기에 이르러 여기에 제동을 건 학자가 나타납니다. 바로 양촌권근.
권근은 이렇게 적었다...
조선왕(朝鮮王) 준(準)이 위만의 난을 피하여 배를 타고 남쪽으로 가서 나라를 세워 국호를 마한이라 하였는데, 백제 온조가 서게 되자 그를 병합하였다. 지금 익주(益州 익산(益山))에 옛 성(城)이 있는데 지금 사람들도 그것을 기준성(箕準城)이라고 일컬으니, 마한이 백제가 된 것은 의심할 나위가 없다.....
최치원이 ‘마한은 고구려요, 변한은 백제이다.’ 한 것은 잘못이다.
안정복 《동사강목》《삼한고》
그래도 권근 정도되는 학자니까, 지금껏 내내 동방의 대문호라 추앙받는 최치원의 사관(史觀)에 맞서기도 하는 것이겠죠.
하지만 결국 권근의 사관도 당시의 한계를 넘지는 못했습니다.
《신당서(新唐書)》에 ‘변한이 낙랑 땅에 있었다.’ 하고 또 ‘평양(平壤)은 옛 한(漢)의 낙랑군이다.’ 하였으니, 진한이 신라가 되고 변한이 고구려가 되었다는 것 또한 의심할 여지가 없다. 《후한서》에 ‘변한은 남쪽에 있고 진한은 동쪽에 있고 마한은 서쪽에 있다.' 하였는데 ‘변한이 남쪽에 있다.’ 한 것은, 대개 한(漢)의 지경인 요동 지방을 기준으로 해서 말한 것이지 변한이 진한과 마한의 남쪽에 있다고 말한 것은 아니리라.
즉 권근의 주장은 단지 마한 = 백제, 변한 = 고구려라고 변경을 했을 뿐 큰 틀에서는 최치원과 일치하는 모습을 보입니다. 그리고 당연하겠지만 그의 인식은 바로 후대인 사가 서거정이 《여지승람》을 편찬하면서부터 이후 16C중반에 이행이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까지 내내 비판의 대상이 됩니다.
신이 살펴보건대 마한이 고구려가 되고, 진한(辰韓)이 신라가 되고, 변한(卞韓)이 백제가 됨은, 최치원(崔致遠)이 이미 정론(定論)하였습니다. 이것은 최치원이 처음으로 이 말을 한 것이 아니라, 삼국(三國) 초기부터 서로 전해 오던 말입니다. 고려 김부식(金富軾)의 지리지에도 또한 최치원의 논을 옳은 것이라 하였습니다......
본조(本朝)에 이르러 길창군(吉昌君) 권근(權近)과 이첨(李詹) 등이 《동국사략(東國史略)》을 편수할 때에, 당연한 것처럼 마한을 백제라 하고 변한을 고구려라 하였습니다. 권근은 바로 근세의 대유(大儒)로서 동국 사람이 시채(蓍蔡)에 비기는데, 또한 이런 논을 주장함으로써 오래전부터 이미 정해진 설(說)을 착란시켰으니, 웬 말인지 알지 못하겠습니다.
"신은 그런 까닭으로 삼가 최치원의 옛 설에 의하여, ”경기ㆍ충청ㆍ황해 등의 도를 마한 구역(舊域)에 소속시키고, 전라도를 변한 구역에 소속시켰습니다.”하였다."
- 신증동국여지승람 경기 -
경기지역을 설명하기에 앞서 연혁을 설명하고 있는데, 경기도지역도 원래 마한의 영역이었다 주장하면서, 최치원과 김부식을 언급하며 "권근의 주장"을 철저히 비판하고 있습니다.
즉 권근이 최초로 최치원에 대항하여 마한 = 백제 설을 주장하기는 했지만 비주류에 속했고, 바로 최치원의 정론을 망친사람이라 비판의 대상이 되었으며, 그러한 기조가 16C 중반까지 이어졌다는 것 입니다.
하지만 양란이후 최치원을 제대로 비판하는 목소리가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바로 한백겸과 유형원.
한백겸은 《동국지리지》와 《동사찬요후서》를 저술하였고, 유형원은 《동국여지지》를 편찬하였습니다.
먼저 한백겸의 《동사찬요후서》에서는
“우리 동방은 옛날에 남과 북으로 구분되어 있었다.
그 북쪽은 본래 세 조선(朝鮮)의 땅이니, 단군(檀君)이 요(堯)와 같은 때 세워 기자(箕子)를 거쳐 위만(衛滿)에 이르렀는데 사군(四郡)으로 나뉘고 이부(二府)로 합쳐졌다가, 한 원제(漢元帝) 건소(建昭) 2년(기원전 37)에 고주몽(高朱蒙)이 일어나 고구려가 되었다.
그 남쪽은 곧 삼한(三韓)의 땅이니, 한(韓)이 한(韓)이 된 것이 언제부터인지는 모르나, 한나라 초에 기준(箕準)이 위만에게 쫓겨나 바다를 건너 남쪽으로 왔는데 한(韓) 땅의 금마군(金馬郡)에 이르러 칭하여 왕(王)이 되었으니 이것이 마한이다.....
그렇다면 남쪽은 어디까지나 남쪽이고, 북쪽은 어디까지나 북쪽으로, 본래 서로 뒤섞이지 않았던 것이니, 비록 그 경계선이 정확히 어디였는지는 알지 못하나 아마도 한수(漢水) 일대가 남과 북을 가로막은 천연의 해자가 되었던 듯하다.
한백겸은 고대에 한수 즉 한강을 경계로 남북의 강역이 나뉘어 있었고, 이북지역은 고조선-고구려, 남쪽에 삼한이 성립해있었다 보았습니다. 즉 최치원이래 이어진 삼한 = 삼국설을 정면으로 반박한 것이죠.
그러고서는
최치원이 처음 ‘마한이 고구려이고, 변한이 백제이다.’라고 하였으니 이것이 첫 번째 잘못이고, 권근은 비록 마한이 백제인 줄은 알았으나 역시 고구려가 변한이 아닌 줄은 모르고 혼동하여 설명하였으니 이것이 두 번째 잘못이다. 이 이후에 역사가들이 잘못을 이어받아 그 땅에 대하여 실상을 다시 조사해 보지 않고서 한 구역인 삼한의 땅에다가 좌로 붙였다 우로 붙였다 하여 어지러이 뒤섞어 놓아 지금까지 수천 년 동안 정설이 없었으니, 얼마나 안타까운가.
고구려가 일어난 이래로 그 땅을 차지하여 남쪽으로 한강에 이르고 북쪽으로 요하(遼河)에 이르기까지 모두
그 소유였는데, 또 어느 때에 변한이나 마한이 되었겠는가....
호서(湖西)와 호남(湖南) 지역을 합하여 마한이 되었고, 영남(嶺南) 한 도(道)를 나누어 진한과 변한이 되었음을 또 어찌 의심하겠는가. 마한은 사군과 이부 시절을 거쳐 신나라 왕망 때에 이르러 백제가 되었고, 진한은 사군과 이부 시절을 거쳐 선제 때에 이르러 신라가 되었으며, 변한은 진한에 대하여 처음에는 부용이었으나 결국 합병되었다.
최치원은 당 소종(唐昭宗) 때 사람으로 삼한 때는 거의 천여 년이나 거슬러 올라가야 하니, 전하여 들은 것일 뿐 눈과 귀로 보고 들은 것이 아니라면 권근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권근 또한 지금 사람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하물며 최치원은 총명과 재기가 동방에서 제일인 사람임에 분명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역대의 흥망에 대해서는 반드시 보고 들은 바에 의거하여 알았을 것이다......
그런데 최치원이 당나라에 들어가 유학한 때는 12세였고 나라로 돌아왔을 때는 겨우 28세였으니, 지금 《당서(唐書)》에 기재된 내용은 모두 최치원이 유학 중일 때 말한 것이다. 비록 태어난 나라라고는 하나, 12세의 동자가 천년의 연혁을 꿰뚫으면서 오류가 하나도 없었으리라고 장담할 수는 없을 것이다.
권근은 또한 근세의 대유인데, 금마군에 오랫동안 살면서 이른바 기준성(箕準城)을 직접 보고 마침내 마한을 백제라고 정하였으니, 또한 어느 정도 식견이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끝내 큰 시각으로 원대히 살피지 못하고, ‘변한이 남쪽에 있다.’를 해석하면서 ‘한나라의 경계인 요동 땅을 기준으로 말한 것일 뿐이다.’라고 하였고, ‘변한의 묘예가 낙랑에 있다.’를 인용하면서 ‘묘예’ 두 글자는 빼고 다만 ‘변한이 낙랑에 있다.’라고 하였으니, 어찌 천착(穿鑿)함이 이리도 심한가.
한백겸 《구암유고》 《동사찬요후서》
유학자가 옛 선현에 대해 이렇게까지 한 사례가 있었나 있었나 싶을 정도로 최치원과 권근의 인식을 매우 혹독히 비판하고 있죠.
유형원은 《동국여지지》에서 앞서 편찬된 《신증동국여지승람》과 《동사찬요후서》 두 서적의 내용을 먼저 서술하고서, 두우의 《통전》을 인용하며 이렇게 이야기 하였습니다
"조선과 삼한의 남북 지계(地界)를 가리켜 보이고 조선이 고구려가 되며 삼한이 신라와 백제가 됨이 이미 분명하다."
"또 《삼국사기》에 의거하건대..... 온조가 마한을 습격하여 멸망시키고 그 나라를 병합하였다. 그렇다면 마한이 백제에 병합되어 지금의 충청도와 전라도 땅이 되었다는 것 또한 의심할 바가 없다."
유형원 《동국여지지》《경도》
그리고 한백겸의 설에 대해서는
변한과 마한은 앞사람들의 설이 서로 어긋나 맞지 않았는데 오직 근세의 한백겸의 변론은 천년간 정해지지 않았던 논의를 아주 잘 정리하였다. 삼가 그의 설에 의거하여 정하건대 지금의 경기 좌도, 충청도, 전라도를 마한의 옛 강역에 속하게 하고, 경상도를 진한과 변한의 강역에 속하게 하며, 한강 이북을 조선의 옛 강역에 속하게 하였다.
유형원 《동국여지지》《경도》
즉 유형원도 한백겸의 설에 동의하고서 삼한 = 삼국설에서 벗어나있음을 확인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유형원의 영향을 짙게 받은 정약용이 똑같은 주장을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겠죠.
마한(馬韓)은 열수(洌水) 이남의 땅으로 지금의 경기(京畿)ㆍ호서(湖西)ㆍ호남(湖南)의 지역이고, 진한(辰韓)은 지금의 경상좌도(慶尙左道)의 지역이고, 변한(弁韓)은 지금의 경상우도(慶尙右道)의 지역인데, 최치원(崔致遠) 이하 삼한(三韓)의 강계(疆界)를 논한 것은 한결같이 잘못된 점이 많다.
다산시문집 강역고(疆域考)의 권단(卷耑)에 제함
우리가 여기서 한가지 짚어봐야 할 점은 조선시대 유학자들은 당연히 김부식의 《삼국사기》말고 중국의 사서들을 매우 많이 섭렵한 사람들이고, 당연히 제가 위에서 제시한 일부 사서들 외에도 백제가 마한에 속했다는 중국사서의 구절들을 더 많이 보고 접했을 겁니다. 그러한데도 불구하고 17C초 한백겸이 비판하기 이전까지 약 200여년동안 최치원이 시작하고 김부식이 정립한 마한 = 고구려 인식 그리고 삼한 = 삼국 인식에 대해 그 누구도 제동을 걸지 못했습니다. 그 권근 조차 마한 = 고구려 인식은 비판했을 망정 최치원-김부식의 삼한 = 삼국 인식에서는 벗어나지 못했죠.
대체 왜 그랬을까? 한백겸은 최치원의 설을 비판하면서 조선 학자들을 이렇게 비판했습니다.
후대에 글을 보는 자들이 매양 옛사람을 지금 사람이 미칠 수 없다고 여겨 반드시 받들어 믿고자 하고 감히 의심하지 않으니, 그 또한 잘못이다.
《동사찬요후서》
조선 전기 학자들 중 그 누구도 최치원의 의견에 감히 반박을 할 엄두를 내지 못했던 겁니다. 실제로 그 안정복조차 최치원의 삼한 = 삼국인식이 이상했다는 것을 누구보다도 더 정확히 알면서도 최치원 입장에서 철저히 "변호"하는 모습을 보입니다.
고운(孤雲 최치원의 호)이 ‘마한은 고구려요 변한은 백제이다.’ 한 것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하므로 답하기를,
그 설 또한 옳다.
고운이 당시 사람인데, 마한이 고구려가 아니라는 것을 어찌 몰랐겠는가? 그가 말한 마한이 고구려라 한 것은 고구려가 일어난 땅을 가지고 말한 것이 아니라 뒤에 고구려가 마한 동북쪽 땅을 병합한 것을 가지고 말한 것이다.(스승(성호(星湖) 이익(李瀷)을 가리킨다)의 말에 “최치원이 마한을 고구려라고 한 것은, 기준(箕準)이 비록 도망하여 남쪽으로 갔지만 고구려를 가리켜 마한의 옛땅이라 하므로 아마 그랬을 것 같다.” 하였다.)그가 말한, 변한이 백제라고 한 것은 마한이 백제의 땅이 아님을 말한 것이 아니라, 변한의 반면(半面)이 또한 백제에 흡수되었기 때문에 그렇게 말한 것이다.
그의 생각에는, 삼한을 삼국에 분배하려고 했기 때문에 그 설이 이와 같은 것이니, 착오라고 할 수 없다. 후인이 그 의의를 궁구하지 않고 망령되이 비방을 가한 것은 무엇 때문인가? 고운의 문장은 박아(博雅)하여 가장 고고함에 가까우니, 무사(誣辭)가 아닐 것이다. 대개 이같은 유는 마땅히 시대가 가장 오래된 것으로 근거를 삼아야 하니, 나는 고운의 설로 정설을 삼는다.”
동사강목 삼한고
저 꼬장꼬장한 안정복 같은 인물이 고운 최치원에 대해서 이렇게까지 변호하는게 이상하다 싶을 정도죠. 어쨌든 조선후기의 안정복 조차 이럴진데, 하물며 조선전기의 학자들은 말할 필요도 없겠죠.
즉 조선의 학자들은 자국의 고대역사를 보는 시각에 있어서 중국의 사서(史書)들 보다도 최치원 이라는 고대 자국 성현의 사관(史觀)이 먼저 였다는 이야기죠. 물론 그 사관이 실제 역사의 모습과는 괴리가 있었고, 조선전기까지 학자들이 그 사관을 무비판적으로 추종한 덕택에 실제의 모습으로 재정립 되기까지 수백년이라는 시간이 걸릴 수 밖에 없었다는 한계가 있지만, 그를 통해서 조선전기의 유학자들이 자국에 대한 역사관을 정립하는데 있어서 어떤 것을 더 우선시 했는지는 명확히 알수 있다 하겠습니다.
아 근데 아까 유형원은 《동국여지지》에서 서로 배치되는 《신증동국여지승람》과 한백겸의《동사찬요후서》를 같이 써놓고도, 결국 관찬지리지인 동국여지승람보다 한백겸의 설을 지지했는데 괜찮은 거냐고요? 더 나아가 아예 대놓고 권근보다도 더 못했다고 대놓고 비판했습니다. 그에게는 전혀 문제되는 일이 아니었겠죠.
권근은 변한을 고구려라고 하였으니 확실하게 잘못한 것이므로 《동국여지승람》에서 그를 비판한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근거 없이 추측하고 끌어다 붙여 변한과 마한을 뒤바꾸어 놓은 잘못은 또 권근보다 더 심하다.
《동국여지지》《경도》
첫댓글 조선의 학자들이 자국우선주의자였다는 증거중 하나이죠. 최소한 기록으로 남은 자국의 역사로 여기는 국가의 사관을 받아들인거여서요
단적인 예로 우리나라만 봐도 철저히 미국의 영향력 하에 있으나, 사람들이 자신의 신념이나 혹은 정파간 이익에 따라 미국에 반대하기도 하니까요(그래서 지난 정권에서는 "보수가 미국에 반대" 하는 진풍경이 펼쳐지기도 ㅋㅋㅋ). 그게 자연스러운 현상인 것 이죠 ㅎㅎ
뭐 "조선은 무조건 중국만 바라봤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에게는 저런 사례들이 안보이겠지만요 ^^;;
잘 읽었습니다. ㅎㅎ 유형원의 반계수록은 열심히 읽었는데 아직 읽지못했던 동국여지지도 꽤 빼어난 저작같네요.
조선후기 실학자들의 지리지나 역사서들을 읽다 보면, 우리가 지금 생각했던 담론들을 이때 사람들도 다 생각하고 있었구나를 너무 잘 알 수 있어서 재미있습니다 ㅎㅎ("하늘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 는 말도 있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