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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분 한국사 이야기
우리들을 분노케 하는 삼정의 문란 마지막 시간
환곡(還穀)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다른 말로 환정(還政)이라고도 합니다. 전정과 군정 이야기를 이미 했으나 삼정의 문란 중 그 폐해가 가장 막심했던 것은 단연코 환곡이라 할 수 있습니다.
농사기술이 발달하지 않았던 전근대 시절 배불리 먹고 살 수 있던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습니다. 벼를 추수하는 가을 정도에나 사치를 부릴 수 있었지요. 근데 기근이라도 덮친다면 1년 내내 굶주리기 십상입니다.
조선 후기 이앙법이 도입된 이후에는 겨울에 보리를 심어서 어느 정도 나아지기는 했는데, 이보리도 여름에나 추수할 수 있습니다. 추수 직전인 봄철, 그러니까 4~5월 정도에는 먹을 게 동이 나는 일이 다반사였지요. 그래서 나온 단어가 보릿고개입니다.
때문에 국가에서는 먹을 게 부족한 봄(춘궁기)에 곡식을 빌려주고 먹을 게 풍족한 가을(수확기)에 갚게 하는 일종의 사회보장제도를 시행하였습니다. 이를 환곡이라 합니다.
환곡이란 게 우리 역사에서 처음 시행된 것은 고구려 때로 알려져 있습니다. 고구려의 명재상인 을파소가 진대법을 시행한 것이 최초지요.
다만 을파소가 직접 진대법을 시행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는 건 아니고 을파소 집권기 즈음에 진대법이 시작되었다는 기록에 미루어 추정하는 것뿐입니다. 뭐 을파소는 직접 농사도 짓는 등 농민들의 고충을 잘 알고 있었기에 시행했을 개연성은 충분하지만요.
훗날 고려에서도 성종이 의창을 설치하여 환곡제도를 운용하였습니다. 조선 또한 이를 활용하여 지속적으로 환곡제도를 운용했지요. 뭐 여기까지만 보면 아시겠지만 원래는 가난한 농민들을 위한 매우 바람직한 제도였습니다.
그런데 나라에서 대규모로 보관하는 쌀은 필연적으로 손실분이 발생하게 됩니다. 쌀이 썩든지 쥐가 파먹든지 해서요. 게다가 빌려놓고 갚지 않는 사람들도 나타납니다. 악의적으로 먹고 튄다든지, 아니면 흉작으로 어쩔 수 없이 못 갚는다든지요.
그래서 곡식을 빌려주면서 이자를 조금씩 받게 됩니다. 한 10~20% 정도지요. 당시 기준으로 엄청난 고이율이라 볼 수는 없겠지만 이것도 다 상대적인지라 가난한 사람들이 감당하기에는 부담스러운 것도 사실입니다.
더군다나 영조 대 균역법 시행 이후 지방재정에 손실이 생기니 관아는 환곡제도를 단순한 구휼제도가 아닌 부세제도로 적극 활용하게 됩니다. 이게 극대화된 것이 바로 세도정치 시대지요. 국민연금공단이 산X머니나 러X 앤 X시처럼 변질되었다고 보면 될 듯하군요. 엄밀히 따지면 세금이 아닌 환곡을 전정, 군정과 한 묶음에 놓는 것에는 이런 연유가 있습니다.
당시 모양새를 보면 치졸할 정도입니다. 일단 쌀을 빌려줄 때 모래나 겨를 섞는 건 기본이고, 물에 불려서 부피를 늘리는 경우도 다반사였지요. 물론 백성들이 갚을 때 똑같이 행동하면 장을 맞습니다.
여기에 그치지 않고 빌려줄 때의 통 사이즈는 작은 걸로 하고 되갚을 때의 통 사이즈는 크게 해서 차익을 남겨 먹기도 했습니다. 또 시세차익을 이용해서 쌀값이 비쌀 때는 쌀 대신 돈으로 빌려주고 쌀값이 저렴할 때는 쌀로 돌려받는 짓까지도 했지요. 여기에 이자까지 계산하면 골치가 아파집니다.
물론 환곡은 기본적으로 농민이 관아에 신청하는 것이고 이런 폐단이 존재한다면 안 빌리면 그만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뭐냐면... 이놈들이 굳이 안 빌리겠다는 사람한테까지 강제로 빌려줍니다. 이를 늑대(勒貸)라 하지요. 여기서의 늑은 을사늑약 할 때의 그 늑입니다. 이처럼 탐관오리들이 강제로 쌀을 밀어 넣으니 힘없는 농민들은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엄한 이자를 갚아야만 했습니다.
그래도 이렇게 일단 빌려주는 건 차라리 양호한 편입니다. 심하게는 아예 빌려주지도 않았으면서 장부를 허위로 작성해 쌀 갚으라고 우기는 경우까지 존재했습니다. 이를 번작(反作)이라 하지요.
한 가지 예로 경상도 단성(현 경상남도 산청군 단성면)은 수천 호 정도가 사는 고을이었는데, 이 수천 호가 부담해야 할 환곡의 양이 장부상 9만 9천석이었던 때가 있습니다. 쌀 1석=144kg으로 잡으면 대략 14,000톤입니다. 단성 사람들이 단체로 코끼리라도 키우는 게 아니라면 이런 수치가 나오는 건 불가능합니다.
이처럼 환곡은 전정이나 군정에 비해 장난질을 칠 수 있는 방법이 무궁무진했습니다. 때문에 다른 것들보다 훨씬 더 폐해가 심각했고 국가 기관의 불법 사채질은 대한제국 멸망 직전까지도 해결할 수 없었지요.
삼정의 문란1에서 언급한 바 있지만 전정, 군정, 환곡의 문제는 꼭 세도정치기에만 존재했던 건 아닙니다. 그 이전에도 암암리에 존재했고 상당한 문제가 된 것도 맞습니다.
그러나 적어도 이전에는 이 폐단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말할 수 있었고, 충분하지는 못하나 시정하려는 노력도 있었습니다. 때문에 이전의 문제는 어디까지나 ‘개인의 부패’에 지나지 않습니다.
세도정치기에는 언로가 완전히 막혀버리고 잘못된 걸 잘못되었다 말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했습니다. 오히려 부정부패를 저지르지 않은 게 멍청한 것으로 여겨질 정도였지요. 이런 상황이 바로 ‘정치의 부패’입니다.
어떤 게 더 큰 문제인지는 명확하지 않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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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박문국.
첫댓글 엇그제 올린 정약용 어른의
용산리(용산아전) 시가 떠오르네요 !
감사합니다.^^*
즐감
감사합니다.^^*
환곡제도를 단순한 구휼제도가 아닌 부세제도로 적극 활용하게 됩니다.
안 빌리겠다는 사람한테까지 강제로 빌려줍니다. 이를 늑대(勒貸)라 하지요.
심하게는 아예 빌려주지도 않았으면서 장부를 허위로 작성해
쌀 갚으라고 우기는 경우까지 존재했습니다. 이를 번작(反作)이라 하지요.
삼정의 문란을 잘 감상하였습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인간이기를 포기하는 안타까움의 치유방법은 뭐있을까요? 잘읽고맘상했네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