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과 꽃을 함께 실어 나르는 세계의 장사꾼 빅토르 바우트
러시아 기업가 빅토르 바우트(Viktor Bout)는 모든 종류의 화물, 특히 불법 무기를 세계 어느 곳이든 배달해 주는, 세계에서 가장 능력 있는 집배원으로 떼돈을 번 인물이다. 그는 이 복잡하기 그지없는 지하조직을 어떻게 구축했을까? 정신없는 세계화의 틈바구니를 교묘히 이용했을까.
여러 면에서 빅토르 바우트는 현 시대의 가장 전형적인 다국적 기업인이다. 똑똑하고, 재치 있으며, 야망으로 가득하다. 숫자에 밝고, 여러 나라 말을 쓰며, 기회가 왔을 때 붙잡는 방법을 알고 있다. 그를 만난 사람들에 의하면 그는 예의 바르고 프로이며 겸손하다고 한다. 그에게 정치는 중요 관심사가 아니다. 가족을 사랑하며, 가난한 사람을 돕는다. 일을 열심히 한 대가로 엄청난 부자이며, 지난 10년 동안 뛰어난 사업 통찰력으로 수억달러를 벌어 들였다. 그가 하는 일은 정확히 무엇인가? 전 동료들은 그를 집배원이라고 표현한다. 말 그대로 어떤 화물이든, 세계 어느 곳에건 배달할 능력을 갖춘….
아직 40살이 채 안 된 러시아 국적의 이 남자는 또한 세계에서 가장 악명 높은 무기 거래상이기도 하다. 어느 누구보다 그는 세계화의 무질서를 활용해서 시장에 상품-보통 불법 상품-을 공급하는 데 성공한 사람이다. 그는 병기창이 작았으면 하고 바라는 사람들에 의해 현상수배되어 있으며, 그를 감옥에 넣으려는 사법 당국의 추적을 받고 있다. 세계가 뒤를 쫓는 이 무기 상인은 오랜 세월 제 3세계를 AK-47 소총, 로켓탄, 수많은 탄약과 지뢰로 넘치게 했다. 하지만 작은 지역을 개척해 나가는 다른 경쟁자들과는 달리 바우트의 항공기는 콩고의 정글 속 좁다란 활주로에서부터 아프가니스탄의 황량한 벌판에 이르기까지 풍향계가 달린 카키색 상자를 공수한다. 그는 불법이건 합법이건 상관없이 수많은 중개인, 운송회사, 전주, 무기 생산업자들을 조종하여 싱싱한 꽃, 냉동 육류, 유엔 평화유지군에서부터 보병용 소총과 지대공 미사일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을 세계 4대륙으로 실어 나를 수 있는 국제적 병참 네트워크를 만들어 운용하고 있다.
그의 무기 거래 고객 목록은 길다. 1990년대 바우트는 아프가니스탄 북부 동맹의 지도자인 전설적 인물 아흐마드 샤 마수드(Ahmed Shah Massoud)의 친구이자 무기 공급자이면서, 동시에 마수드의 적인 탈레반에도 무기와 항공기를 팔고 다녔다. 그의 비행대는 앙골라 정부를 위해 날아갔고, 동시에 그 정부를 전복시키기 위해 싸우는 앙골라 완전 독립 민족 동맹(UNITA) 반군과도 거래했다. 자이레의 병들고 부패한 지도자 모부투 세세 세코(Mobutu Sese Seko)를 권좌에서 끌어내린 반군에게 무기를 공급했으면서 동시에 모부투가 피신하도록 비행기를 보내기도 했다. 라이베리아 찰스 테일러와 콜롬비아 혁명군, 리비아의 무아마르 엘-카다피 대령과도 거래를 했다.
바우트의 고객은 부패한 제 3세계 지도자들만이 아니다. 그는 합법적인 화물 운송으로도 많은 돈을 벌었다. 자신이 무기를 공급함으로써 인도적 위기를 불러일으킨 지역에 유엔 사람들을 수도 없이 실어 날랐으며, 미국을 포함해 서방세계 정부와도 사업을 함께 했다. 지난 몇 년에 걸쳐 미국 재무부는 바우트의 자산을 동결하고 관련 기업가 및 그의 기업체에 많은 제재를 가하여 그를 밀어내려 애썼다. 그러나 펜타곤 및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에 있는 펜타곤 계약자들은 두 나라의 전후 재건에 필요한 수백 건의 물자 운송 대가로 수백만달러를 그에게 지불했다. 미국 대통령이 세계를 미국과 함께 하는 부류와 반대하는 부류로 양분한 시대에 바우트는 양쪽 모두에 다리를 걸치고 있다.
세계 각국의 관리들은 바우트가 적정가를 제시하는 사람을 구별하기를 거부하기 때문에 그의 사업 의뢰인들은 사실상 모두 불법이라고 믿는다. 2000년 당시 영국 외무부 아프리카 담당관이었던 피터 헤인(Peter Hain)은 의회에서 유엔의 무기 제재를 위반하는 사례를 비난했다. 그는 바우트를 거론하며 그를 아프리카의 ‘죽음의 상인’이라고 불렀다. 바우트의 거래를 금지시키려 했으나 그의 상행위는 국제법에 어긋나지 않는 합법적 회색 지대에서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았다. 기소하지 않아 그런 것이 아니다. 세계 각지를 돌아다니는 그의 항공기들은 라이베리아, 콩고민주공화국, 앙골라, 시에라리온 등지에 대한 유엔의 무기 금수 위반 보고서에 올라오지만 그 보고서를 아무도 눈여겨보지 않는다. 미국 첩보 위성은 아프리카 오지 활주로에서 무기 상자를 싣는 그의 항공기를 촬영하고 미국과 영국 정보 관리들은 그의 전화를 도청한다. 인터폴은 벨기에 무기 밀수와 자금 세탁 혐의로 바우트에게 ‘적색 수배’를 내려놓았다.
하지만 바우트는 아직도 교묘하게 기관의 손길을 피하고 있으며 법은 바우트 같은 초국적, 비국적 활동가에게 말조차 걸지 못하고 있다. 그의 터무니없는 불법 행각은 제재 받지도, 견제 받지도 않으며 유엔 무기 금수 조치를 거듭 침해하는 범죄를 저지르고 있다. 현재 바우트는 자신과 자신의 제국을 둘러싼 세계의 비난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러시아 정부의 보호 아래 모스크바에서 드러내놓고 살고 있다.
육류
바우트의 모든 화물이 불법은 아니다.그는 가끔 냉동 닭고기도 실어 나른다
로켓과 탱크
바우트의 항공기는 탱크와 미사일을앙골라,콩고민주공화국,라이베리아등 아프리카 몇몇 나라로 실어 나른다.
국제 원조
바우트도 심장이 있다. 그는 2004년 쓰나미로 재난을당한 사람들에게 구호물자를 실어 날랐다.
총기
바우트이 수송망은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를 폼함한 분쟁지역에 AK-47 소총 수천 정을 공급한다.
꽃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2달러에 사들인 글라디올로스는 합볍적으로 운송되어 UAE에서 100달러에 팔린다.
1.비밀에 싸인 국제 사업가
빅토르 바우트의 과거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없거나 스스로 조작한 것이 대부분이다. 결혼했고, 적어도 딸이 하나 있다. 이 정도가 알려진 사실이다. 형 세르게이는 그와 같이 일한다. 그밖에 개인 신상에 관한 것은 신비의 구름에 싸여 있다. 심지어 출생지조차 확실하지 않다.
그가 가진 공식 러시아 여권에 따르면 바우트는 1967년 1월13일 쇠락한 소비에트 변경 타지키스탄 두샨베에서 태어났다. 그러나 2002년 모스크바 라디오 인터뷰에서 그는 자신이 투르크메니스탄 수도 아쉬하바드의 카스피해 근방에서 태어났다고 했다. 2001년 남아프리카공화국 정보 보고서에는 우크라이나 태생이라고 되어 있다. 그는 여러 장의 여권을 가지고 다니며 바딤 S. 아미노프, 빅토르 아나톨리예비치 바우트, 빅토르 S. 불라친, 그리고 자신을 추적하는 미국인을 비꼬는 뜻에서 빅토르 버트(Victor Butt) 등 여러 이름을 쓴다고 알려져 있다.
바우트는 이렇게 혼란스럽게 만들어 자신과 자신의 파트너, 사업체들을 추적으로부터 보호하고 있다. 그는 자신이 공군 장교로 근무했으며 1980년대 말 모스크바에 있는 유명한 소비에트 외국어 군사 학교를 수료했다고 말했다. 그는 영어, 프랑스어, 포르투갈어, 우즈벡어, 몇몇 아프리카 언어를 유창하게 한다고 알려져 있다. 유엔 관리들은 그가 1980년대 말 앙골라에서 평화유지군 통역사로 일한 적이 있다고 말한다. 몇몇 보고서는 그가 러시아 범죄 조직과 연관이 있다고 본다. 영국과 남아프리카공화국 정보기관 보고서에는 바우트가 1985년부터 1989년까지 KGB 요원으로 로마에서 근무했다고 되어 있지만 그는 어떠한 정보기관 근무 경력도 없다고 단호히 부인하고 있다. 하지만 외국어 군사 학교는 GRU(Main Intelligence Directorate, 소련군 참모본부 정보총국)의 훈련 캠프로 알려져 있다. GRU는 광대하고 비밀스러운 소비에트 군사 정보망으로서 냉전시대 혁명운동 및 제 3세계 공산주의 속국으로 흘러 들어가는 러시아제 무기 흐름을 감독하던 기관이다. 그가 비밀 요원이었든 아니었든 냉전이 끝날 무렵 바우트는 자신의 모든 기록을 삭제하고 소비에트 제국의 파편을 이용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소비에트 공군은 연료와 현상 유지에 드는 돈을 구하는 데 모든 걸 다 바쳐야 했다. 몇 천 명의 조종사와 정비사들이 어느 날 해고당했다. 상트페테르부르크부터 블라디보스토크에 이르기까지 털털거리는 구식 안토노프와 일류신 수송기 수백 대가 공항과 군 기지에 방치되었다. 타이어는 너덜거리고, 본체는 낡아 철판과 테이프로 기워진 상태였다.
바우트는 재빨리 움직여 고물상으로 갈 수송기들을 손에 넣었다. 당시 25살이었던 바우트는 혼자만의 계산으로 구식 안토노프 3대를 12만달러에 구입한 다음 승무원을 고용해 덴마크로 첫 수송을 했고 곧 아프리카와 중동으로 장거리 항로를 열었다. 하지만 당시 사업적 재정적 동료들은 다른 증언을 한다. “GRU가 사업을 할 수 있도록 그에게 수송기 세 대를 주었다.” 러시아에서 바우트를 만나 아프리카에서 사업을 같이한 유럽인 동료의 말이다. “그는 외국어 군사 학교를 마치고 비행 교육을 받았다. 수많은 항공기가 아무 일도 하지 않고 그냥 서 있었다. 그들은 그걸 상업용으로 쓰자고 결정한 뒤 빅토르에게 항공기를 넘기고 대여 금액의 일부를 챙겼다.”
바우트의 첫 거래 상품은 옛 소비에트 연방국가들의 병기창에 버려진 총기와 탄약이었다. 많은 병기창들이 자체 활주로를 갖추고 있어 상품을 싣기도 편했다. 경비에도 돈을 지불하지 않은 적이 많았고, 병기창 부대장들은 시장 가격보다 훨씬 싼 값에 기꺼이 무기를 넘겼다. 이렇게 무기 수급이 쉽게 되자 아프리카, 아시아, 라틴 아메리카 등지의 옛 소비에트 고객, 불안정한 정부, 독재자, 군벌, 게릴라 등 안정적인 무기 공급에 목맨 단골손님들이 곧 생겨났다. “그는 세계에서 가장 훌륭한 군수 보급망을 가졌다.” 1990년대 말 바우트를 추적하기 위한 미국 정보기관들의 모임을 이끌었던 국가안전보장회의(National Security Council) 전 멤버 리 S. 올로스키(Lee S. Wolosky)의 말이다. “아프리카나 아프가니스탄에 무기를 운반해 줄 수 있는 사람은 많지만 주요 무기 시스템을 신속하게 갖다 줄 수 있는 사람은 손에 꼽는다. 빅토르 바우트는 첫 손가락이다.”
1990년대 말까지 바우트는 항공기의 발목을 잡으려는 각국 정부의 노력을 무력화시키는 자신만의 수송 체계를 완성시켰다. 국제적인 수송 허가를 얻기 위해 항공기는 유지 관리 기록과 내공성(耐空性)이 공인되는 나라에 등록되어야 했다. 세계 각국은 할당된 호출 부호를 가지고 있으며 따라서 어느 항공기든 소속 국적이 항공기 꼬리에 있는 호출 부호와 일치되어 즉각 식별 가능해야 했다. 바우트는 항공기들을 모두 여러 나라에 등록시킴으로써 지역별 비행 규칙, 검사, 감독을 피할 수 있었다. 2000년 12월 유엔 조사에 따르면 바우트는 라이베리아에 항공기 등록을 자주 했는데, 이 나라는 바우트가 무기 거래에 사용하는 항로 및 회사를 설립하는 데 도움을 준 사업 파트너에게 항공기 등록권을 팔았다. 영국 켄트에 있는 라이베리아의 ‘항공기 등록청’은 항공기를 검사하지도 않고 모든 서비스를 제공하는데, ‘회사 이름 짓기, 조종사 면허(무제한), 항공기·회사 면허, 승강장 및 승무원 확인’ 등의 서비스가 포함된다고 유엔 보고서는 적고 있다.
적도기니의 등록 관청 역시 마찬가지여서, 바우트의 항공기 인증을 취소하라는 국제 압력이 라이베리아에 가해졌을 때 바우트의 항공기는 간단한 컴퓨터 자료와 전화 몇 통화로 단 몇 시간 만에 적도기니에 등록이 완료되었다. 바우트의 항공기가 세계 깊숙한 변방 여기저기에 등록되어 있지만 대부분의 항공기들은 옛 소비에트 국가, 중동, 중앙아시아, 아프리카를 오가는 항공편의 중앙 기지 역할을 하는 유나이티드 아랍 에미리트(United Arab Emirates)의 조그마한 사막 한가운데 영지인 샤르자(Sharjah)에서 운용된다. 바우트는 그곳에서 자신의 회사 편제를 뒤섞어 놓는다. 적도기니에 등록된 항공기는 Air Cess라는 회사에서 운용되며 중앙아프리카공화국에 등록된 항공기는 Central African Airlines라는 이름으로 운용된다. 두 항공사가 다른 이름을 갖고 있긴 하지만 전화번호는 똑같은 샤르자 번호다.
바우트의 첫 무기 수송은 1992년 아프가니스탄 북부 동맹으로 간 것이라 알려졌다. 3년 뒤 탈레반이 띄운 미그 전투기가 수백만 발의 탄약을 싣고 카불 정부로 향하던 바우트의 덩치 큰 임대 수송기를 가로막았다. 탈레반 병사들은 항공기의 화물을 탈취하고 승무원들을 억류했다. 바우트는 몇 달에 걸쳐 탈레반 물라와 협상을 벌였고 마침내 1년 뒤 승무원들은 기적처럼 탈레반의 허를 찔러 칸다하르에서 일류신을 몰고 도망쳐 나왔다. 하지만 의심 많은 서방 정보기관 관리와 바우트의 라이벌들은 바우트가 물라를 위해 비밀 활동을 했기 때문에 승무원이 석방되었다고 생각했다. 결국 1995년 샤르자에 자유무역지대가 설립되어 느슨한 감시와 이슬람 급진주의와의 밀착으로 곧 유명세를 탔다. UAE는 아프가니스탄 탈레반 정부를 승인한 세 나라 가운데 한 나라였기 때문에(나머지는 파키스탄과 사우디아라비아) 샤르자는 UAE에게 무기, 위성전화부터 냉장고, 발전기까지 모든 걸 살 수 있는 주요 쇼핑센터가 되었다.
탈레반과 바우트의 조직 사이에도 곧 은밀한 사업 관계가 성립되었다. 바우트의 항공 전자 공학과 유지 관리를 담당한 요원들이 물라 통제 하에 있는 국영 운송 회사 아리아나 아프간 에어웨이(Ariana Afghan Airway)의 항공기들을 손보게 되었다. 아프가니스탄 관리들이 카불에서 찾아낸 항공기 등록 서류에 따르면 1998년부터 시작해서 바우트와 샤르자에 기반을 둔 동맹 항공 회사들은 탈레반 군부에 여러 대의 수송기를 판매했는데 그 수송기는 다량의 무기와 군수품을 아프가니스탄으로 실어 날랐다. 미국 관리들은 그 수송기가 군 정보 요원, 마약, 현금 따위도 실어 날랐다고 결론지었다. 그건 정말 수지맞는 벤처 사업이었다. 서방 관리들은 탈레반이 아프가니스탄을 장악한 이래 바우트에게 5000만달러 이상 지불했을 것으로 추산한다.
2.폭탄과 쌀을 동시에 실어 나르다
탈레반과 유대를 강화하면서 바우트는 남쪽에 대한 제재 회피 전략을 완성시켰다. 1990년대를 통해 그의 낡은 항공기들은 아프리카 대륙을 종횡무진하며 대륙에서 벌어지는 처절한 싸움의 모든 당사자에게 무기를 실어 날랐다. “시에라리온과 라이베리아는 서아프리카에서 피를 철철 흘리는 곳이었다.” 당시 NSC 아프리카 문제 선임 담당관이었던 게일 스미스(Gayle Smith)의 회고다. “콩고와 앙골라 문제도 해결되지 않은 상황이었다. 수단도 들끓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 모든 분쟁이 한꺼번에 일어났다. 공통분모는 바우트였다.”
유엔 조사관들은 앙골라에서 바우트의 흔적을 찾아냈다. 1997년 7월부터 1998년 10월까지 바우트의 항공기는 불가리아 부르가스에서 토고 로메까지 앙골라 UNITA 반군을 위해 37회나 무기를 수송했다. 그 화물에는 82mm 모르타르 폭탄 2만 개, 대전차 로켓 6300대, AK-47 소총 790정, 로켓 발사기 1000대, 탄약 1500만 발 등이 들어 있었다. 화물 가격은 1400만달러로 추산되었다.
무기 수송 뒤 돌아오는 항공편에 실리는 상업 화물이 진짜 수지맞는다는 사실을 바우트가 깨달은 뒤 본격적인 돈벌이가 시작되었다. 가장 수지맞는 장사는 요하네스버그에서 단돈 2달러에 사들인 글라디올러스를 두바이에서 100달러에 파는 것이었다
일찍이 없던 기막힌 사업 기회를 맞아 바우트는 심지어 인도주의 사업에도 참여한다. 1993년 ‘희망 회복 작전(Operation Restore Hope)’에 참가해 소말리아에 파견되는 벨기에 평화유지군은 바우트의 사업체인 트랜스아비아 엑스포트 카고 컴퍼니(TransAvia Export Cargo Company)를 이용했다. 1년 뒤 르완다 인종 학살을 막기 위해 가는 프랑스군 2500명도 그의 항공기 신세를 졌다. 2000년 테러 집단 아부 사야프(Abu Sayyaf)에 억류된 유럽 관광객 협상단을 필리핀으로 실어 나른 것도 바우트였다. 그는 아프리카 기근 지역에 세계식량기구에서 보내는 원조 물자도 여러 번 실어 날랐다. 2004년 인도양 쓰나미 사태가 일어나자 스리랑카에 인도적 지원 인력과 물자를 나르기도 했다.
3.빅토르 바우트를 잡아라
묘하게도 바우트의 불법 행위가 당국의 주목을 끌게 된 건 유럽의 인도적 원조 물자를 실어 나르면서부터였다. 바우트는 1995년 사업을 북쪽으로 확장하기로 결정하고 벨기에 오스텐드에서 항공 수송 작업을 시작했는데, 벨기에 정보기관은 혹시 모를 무기 밀수입 가능성 때문에 그를 내사하기 시작했다. 한편 CIA도 동아프리카 대호수(Great Lake) 지역에서의 바우트 행적을 조사한 첫 번째 보고서를 만들었다. 시에라리온에 주재하는 영국 정보 관리 역시 평화유지군이 많아질수록 유통되는 무기의 양도 많아진다는 점을 걱정하며 바우트를 조용히 주시하기 시작했다. “바우트와 다른 무기 거래상의 차이점은 바우트가 통합된 조직을 갖추었다는 것이다.” 유엔이 바우트를 조사하기 위해 고용한 벨기에 조사관 요한 펠레만(Johan Peleman)의 말이다. “그는 무기 구매선이 있고, 수송을 책임지며, 자금도 끌어들일 수 있다.” 바우트의 강점은 병기창부터 구매자까지 완벽한 배달 능력을 갖춘 데 있다.
1990년대 말에 이르러 바우트는 세계적 기동성을 가진, 국제표준을 무시하고 대륙을 넘나들며 능수능란하게 움직이는, 어느 한 나라에 기울지 않고 돈벌이 기술만 뛰어난 새로운 초국적 위협의 대명사로 부각되었다. 특히 미국 정부가 먼저 국제법의 한계를 깨달았다. 무엇보다도 국내법으로는 바우트의 외국 무기 운송을 제재할 방법이 없었다. 압박을 가하기 위해 바우트의 항공기 기지 가운데 하나인 남아프리카공화국으로, 또 그의 회사가 돈 세탁 혐의로 경찰의 주목을 받는 벨기에로 미국 관리가 파견되었다. 하지만 이러한 열망에도 남아프리카공화국 관리들은 증거 불충분으로 바우트를 기소하지 않았고, 벨기에와 미국 역시 그를 재판정에 세우지 못했다.
결국 2002년 2월 벨기에 정부는 1994년에서 2001년 사이 3억2500만달러를 세탁한 혐의로 바우트에 대한 국제 체포 영장을 발부했다. 하지만 그는 이미 모스크바에 피신한 뒤였다. 체포 영장이 발부되고 바우트가 국내에 있느냐는 확인을 요청받았을 때 러시아 외무장관은 그가 모스크바 시내 라디오 스튜디오에서 생방송 인터뷰를 하고 있었음에도 그의 존재를 부인했다. 다음 날 정부 관리들은 어쩔 수 없이 바우트가 러시아에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긴 했지만 그가 어떤 범죄를 저질렀다는 증거가 전혀 없다며 끝내 아무 행동도 취하지 않았다.
4.레이더 아래로 날다
바우트 제국을 무너뜨리려는 모든 시도는 9·11 테러 공격과 함께 날아가 버렸다. 부시 행정부는 즉각 아프가니스탄 침공 및 테러와의 전쟁에 모든 정신을 빼앗겨 버렸다. 2003년 4월 미국의 이라크 침공 직후 미국 관리들은 대량 상업 운송로를 확보하기 시작했다. 미군 및 이라크의 파괴된 인프라를 복구하기 위해 고용된 수천의 민간 계약자들은 공급선을 필요로 했다. 그 해 여름 안토노프가 폭격으로 구멍이 숭숭 뚫린 바그다드 공항에 굉음을 울리기 시작했고, 천막, 비디오 플레이어, 장갑차, 러시아 칼라쉬니코프 경기관총 등 모든 것을 실어 날랐다.
하지만 미국 관리들은 곤란하게도 많은 러시아 항공기가 빅토르 바우트 회사 소속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 항공기들은 미 페덱스(FedEx)화물을, 미 육군에 천막을, 핼리버튼 자회사인 KBR에게는 유전 장비와 개인 물품을 수송해 주었다. 그 뒤 몇 달 동안 바우트 편대는 바그다드를 수백 번 드나들며 미국 납세자로부터 수백만달러를 벌어들였다.
바우트 제국이 어떻게 미국과 비밀 계약을 맺었는지는 확실치 않다. 미국 정보기관 및 군 장교들이 믿는 것처럼 바우트가 선견지명으로 그 지역에 미리 항공기를 배치해 놓았다는 간단한 이유 때문인지도 모른다. 수송 계약을 따내기 위해 경쟁이 치열해지면 어느 누구도 자격을 따지고 말고 할 시간이 없다는 혼란스러운 상황을 바우트는 이용한 것이다.
바우트와의 계약이 공개적으로 드러나고 미 재무성이 그와 합법적인 거래가 계속될 수 있다는 점을 설명하자 군부는 대응책 마련에 나섰다. 미 공군 관리들의 대응은 빨랐다. 연료 할당량을 철회하고 페덱스에 계약을 취소하도록 종용했다. 그러나 미 육군과 다른 방위 기관들은 하청업체까지 조사할 책임은 없다는 점을 강조했다. KBR을 위한 바우트의 수송은 2005년 말까지 별 탈 없이 계속되었고 심지어 아프가니스탄 바그람 비행장까지 연장되었다. 이름이 널리 알려진 몇몇 바우트 회사는 결국 군 관리들에 의해 올해 초 이라크에서 추방령을 받았다. 하지만 바우트가 새 회사를 만들었다는 소문이 돌자 미국과의 노다지 계약을 그 회사들이 가져갈까봐 미국 관리들은 걱정하고 있다.
2005년 4월26일, 당시 테러 자금 담당 재무 부보좌관이었던 후안 사라테(Juan Zarate)는 바우트의 재정 범위 내 30개 회사에 대한 미국의 새로운 경제 제재를 발표했다. 비록 바우트 자신은 대외적으로 테러리스트가 아니지만 탈레반이 아프가니스탄을 통치할 때 군 장비를 공급해 돈을 벌었으며 마찬가지로 오사마 빈 라덴 및 알카에다와 최소한 간접적으로라도 연관이 있다고 사라테는 언급했다. 따라서 미국 기업들은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바우트의 회사와는 어떤 거래도 하지 못하도록 금지되었다. 8개월 뒤 미국이 작성한 이 목록은 유엔 안보리의 라이베리아 위원회 모든 회원국에 채택되었으며 이에 대해 러시아 대표단도 이의를 달지 않았다. 이론적으로 바우트의 무기 거래는 국제 제재로 종말을 고하게 되었다.
하지만 조사관들은 바우트가 새로 만든 업체들이 아직도 에어세스(Air Cess) 및 다른 이름으로 항공기를 등록해 활동하고 있음을 발견했다. 인권 감시 단체들은 바우트의 항공기가 올해 콩고민주공화국 북부를 날아다녔다는 소식을 접했다. 1월에는 바우트의 수송 업체 가운데 하나인 이르비스 에어 컴퍼니(Irbis Air Company)가 이라크에서 핼리버튼과의 계약에 응찰했다. UAE도 바우트가 발을 붙이지 못하도록 했다고 하지만 바우트는 샤르자에서 이라크로 들어오는 항공기를 통제하는 미군 항공 관제관이 매 6개월마다 교대하는 사실을 이용했다. 몰도바 및 동유럽에 등록된 위장 기업을 포함한 바우트의 업체들은 새로 온 관제관이 어느 업체가 지명되고 무엇을 감시해야 하는지 충분한 시간을 가지기 전에 계약을 따낸다. “그건 끊이지 않는 투쟁이다. 군은 계속 수송해야 하고, 새 관리는 압박을 받는 상황에서 항공기가 어디 소속인지 추적하는 건, 솔직히 급한 일이 아니다.” 바우트를 추적하는 일에 관계된 어느 미국 관리의 말이다.
솔직히 어려움을 시인하면서 미국 관리는 제재 조치로 인해 바우트의 항공기가 줄어들었거나 활동이 뜸해졌다는 명확한 증거가 없음을 인정했다. “그가 100% 물러났다는 확신은 절대 없다.” 현재 NSC의 대 테러 대리대표인 사라테의 말이다. “그는 정말, 정말 사업 수완이 뛰어나다.” 유럽 사람들도 똑같은 생각이다. “그는 사라지지 않는다. 자신을 따라다니는 사업이 지속되기를 바라면서 항공기를 바꾸고 등록을 바꾸고 있다.” 유럽 군 정보기관 관계자의 말이다. “지금까지는 잘되고 있다.”
5.세계화의 구멍
현재 바우트를 기소하려는 국제적 노력은 거의 포기 단계다. CIA에는 그의 행적을 뒤쫓는 전담 요원이 없다. 벨기에의 돈 세탁 수사 역시 내부 문제와 정부의 관심 부족으로 중단된 상태다. 오직 영국 정보기관만이 그를 뒤쫓고 있지만 그것도 크게 위축되어 있다.
한편 바우트는 모스크바의 한 호화 아파트에 살면서 가끔 식도락으로 일식집에 가곤 한다. 바우트의 미국인 사업 파트너 리처드 치차클리(Richard Chichakli)는 2005년 4월 바우트의 미국 내 사업을 운영했다는 혐의로 미 당국에 의해 자산이 동결된 뒤 텍사스에서 항공 마일리지를 이용해 러시아로 옮겨갔다. 이론적으로는 두 사람 모두 유엔의 여행 금지 조치로 해외여행이 불가능하다. 그러나 바우트 기소에 관련된 미국 관리들에 따르면 올해 초 베이루트에서 바우트가 목격되었다고 한다.
한편 러시아 정부는 모스크바 정부 관리 및 군 고위층과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는 바우트에 대한 어떠한 질문에도 대답하기를 거부했다. 바우트 본인은 자신이 분쟁 지역으로 실어 나른 긴 녹색 상자의 내용물이 무엇인지 모르며 그에 대해 알아야 할 아무런 법적 도덕적 의무도 없다고 말해 왔다. 이데올로기를 따지지 않는 오로지 경제적 숫자 계산만이 바우트 사업의 길잡이 노릇을 해 왔다. 도대체 바우트를 이토록 아무 거리낌 없이 만든 것은 무엇인가. 돈을 벌기 위해서? 위급한 상황에서 쏟아지는 아드레날린 덕분에? 세계에서 가장 힘 있는 사람들이 자신에게 의지한다는 인식 때문에? “아무도 그렇게 일괄 운송은 하지 못한다.” 바우트의 남아프리카공화국 파트너 한 사람이 말한다. “따라서 아무도 집배원을 쏠 수가 없다.”
아마 죽음의 상인이라는 존재는 그 사람 자체보다 현재 세계에 대해 훨씬 더 많은 걸 말해 줄 것이다. 그의 활동을 중단시키려는 불완전한 노력이 여러 나라의 실패를 압축해서 들려준다.
사실상 빅토르 바우트는 역사와 기회가 한 데 모여 만들어진 산물이며, 빠르게 변화하는 세계에서 놀라운 이익을 만들어 낼 기회를 포착한 기업가다. 냉전중인 양 진영은 모든 것의 수요와 공급을 통제함으로써 사상적 권위에 대한 충성을 강요할 수 있었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졌을 때 통제가 같이 무너지고 시장은 그 순간을 움켜쥘 수 있는 사람에게 활짝 열렸다. 바우트는 자신이 제공할 수 있는 무기를 필사적으로 구하는, 자신의 서비스가 필요한 집단을 아무 구별 없이 움켜쥐었다. 비싸지도 않고 쉽게 구할 수 있는 무기에 목을 매고 망한, 망해 가는 나라들이 점점 많아지면서 바우트는 시장에 맞추어 세계적인 수송망을 구축할 수 있었다. “바우트가 했던 짓거리를 다 볼 수만 있다면 그에게 무기 수송이, 최종 소비자 증명을 얻기가, 항공기 등록 변경이 얼마나 쉬운 일인지 알 수 있다.” 탈레반 및 알카에다 유엔 조사단을 이끌었던 영국 퇴역 대령 마이클 챈들러(Michael Chandler)의 말이다. “세계 곳곳이 얼마나 썩어 있는지 놀랄 만한 구경거리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낡은 이데올로기는 사라지고 미국 홀로 슈퍼파워인 현재 새로운 세계 질서 속에서도 초국적 범죄 집단의 출현을 각국 정부는 통제하지 못하고 있다. 국적 없는 이 무장 세력들은 국경을 무시하고, 탈레반 및 미군 그리고 다른 적대 세력과 냉정하게 거래하며, 이데올로기가 아닌 사적인 이익을 위해 불안정과 폭력을 부추긴다. 바우트 같은 무기 거래상은 자신들만의 새로운 규칙을 만들어냈다. 무기 금수 조치는 무기의 흐름에 방해가 되는 것이 아니라 단순히 가격을 올리는 수단일 뿐이다. 강제력 없이 국제적으로 ‘이름을 알려 망신 주는’ 방법은 그들의 장사를 홍보해 줄 뿐이다.
많은 무기 통제 전문가들은 만일 바우트 제국이 끝내 무릎을 꿇으면 세계 무기 거래 사업은 잘게 쪼개질 것이라고 말한다. 마치 1990년대 콜롬비아 칼리(Cali)와 메델린(Medellin) 코카인 카르텔이 그 지도자들이 살해된 뒤 해체되었던 것처럼…. 하지만 그들이 놓친 건 코카인 생산량은 전혀 줄지 않았다는 점, 쪼그라들긴 했지만 촘촘히 짜인 카르텔은 여전히 깨기 힘들다는 점이다. 사실상 현 세계에서 불법 행위를-빅토르 바우트의 무기 거래든 어느 다른 누구든-근절시키려는 노력은 헤라클레스의 두 번째 임무와 같다고 여겨진다. 히드라의 머리를 잘라 내면, 그 자리에서 새 머리가 두 개 솟아오르는….
더글러스 파라는 <워싱턴 포스트> 해외 특파원을 지냈고, 현재는 테러 자금 컨설턴트로 일하며 <묘비에서 솟는 피:테러조직의 비밀자금(Blood from Stones:The Secret Financial Network of Terror)>(New York:Broadway Books, 2004)의 저자다. 스티븐 브라운은 기자다. 두 사람은 2007년 출간 예정으로 빅토르 바우트 관련 책을 쓰고 있다.
참고문헌
언론인 피터 랜즈만(Peter Landesman)은 빅토르 바우트와 인터뷰하는데 성공해 ‘무기, 그리고 그 사람(Arms and the Man)’ <뉴욕타임즈 매거진(New York Times Magazine, 2003년 8월17일자)>에 악명 높은 무기 상인의 모습을 그려 놓았다.
무기 상인 및 그들의 활동에 대해 알고 싶으면 무기 밀매 전문가인 브라이언 우드(Brian Wood)와 요한 펠레만(Johan Peleman)이 쓴 보고서 <무기 밀매자들 : 중개인과 해운업자를 지배하기(The Arms Fixers: Controlling the Brokers and Shipping Agents)>(Washington : basic Publications, 1999)를 보라.
국제 연구 언론 컨소시엄(The International Consortium of Investigative Journalists)은 정보 보고서, 정부 문서, 판결 기록, 기타 공공 문서들을 수년에 걸쳐 발굴해 냉전 이후 불법 경제에 관한 책 <한탕하기 : 전쟁기업(Making a Killing : The Business of War)>(Washington : Center for Public Integrity, 2002)을 펴냈다.
포린 폴리시(Foreign Policy)의 편집장 모이세스 나임(Moiss Nam)은 <불법 거래 : 밀수업자, 불법 거래자, 불법 복제자들이 세계 경제에 끼치는 영향(Illicit : How Smugglers, Traffickers and Copycats Are Hijacking the Global Economy)>(New York : Doubleday, 2005)에서 세계경제에서 불법 무역이 차지하는 비중을 조사해 놓았다.
2002년 5월 PBS는 총기 밀매의 생생한 현장을 그린 <총기 밀수자들(Gunrunners)>이라는 다큐멘터리 필름을 제작했다. 빅토르 바우트를 포함한 몇몇 무기 밀수자를 취재한 이 필름은 PBS 웹사이트에서 볼 수 있다. 무기 밀매 세계를 그린 할리우드의 2005년 작 <로드 오브 워(Lord of War)>에서 니콜라스 케이지가 맡은 주인공은 부분적으로 바우트의 삶을 참조했다고 한다.
첫댓글 http://blog.daum.net/alexanderpopo/5487879?srchid=BR1http%3A%2F%2Fblog.daum.net%2Falexanderpopo%2F5487879 입니다 ^^;;;;;
"정의"는 강자만이 논할 수 있는 특권이다, 라고 옛 그리스 철학자가 말했다죠. 세계 평화를 좌지우지 하는 하는 나라는 둘, 그 안에서 국제 "정의"를 논하는 나라도 둘..
로드오브워의 주인공은 역사상 죽음의 상인 10명을 토대로 만들었기때문에 빅토르라고 할수는 없죠 다만 현제 가장 위험한 죽음의 상인이니 로드오브워 실사판이라는게 더 알맞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