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인'과 '북인'의 탄생 경위
동인과 서인의 싸움에서 초반 주도권을 잡은 쪽은 동인이었다. 신진세력이다 보니 주로 ‘입 바른 소리’만 골라 했고 이이가 사망한 이후 심의겸 마저 파직되는 등 중심인물이 사라지면서 서인이 흔들리자 자연히 권력의 추가 동인 측으로 기울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때문에 선조 연간 중기로 넘어가면서 동인은 서인을 낡은 정치세력으로 몰아붙이면서 기세를 드높였고 이후 한동안 전성기를 구가할 수 있었다.
하지만 과유불급(過猶不及)이라고 했던가, 모든 건 지나치게 팽창하면 분열되는 게 세상의 이치이듯이 세력이 비대해지다 보니 내부에서 분열의 조짐이 서서히 나타나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이황과 조식이라는 당대 유림 최고의 석학들이 갖고 있던 사상과 철학이 달랐던 터이라 이들의 학풍이 공존하고 있던 동인에 있어서 분열은 어쩌면 예고된 것이었을 수도 있었다. 그 결정적인 단초가 되었던 사건이 선조 22년에 있었던 조선 최대의 비극 ‘정여립 모반사건’이었다.
그러나 그 이전에도 이황과 조식의 지지자들 사이에서는 갈등이 끊임없이 생겨났고 분열의 기운은 곳곳에서 감지되기 시작하였다.(역시 80년대 YS와 DJ가 만들었던 통합민주당이 상도동계와 동교동계로 나뉘어 싸움질만 일삼았던 대목과 매우 유사한 부분이다) 여기서도 어김없이 등장하는 것이 동인 몇몇 거두들의 사감(私感)에서 비롯된 반목과 갈등이었다. 그 중 가장 유치찬란한 것(?) 한 가지만 소개하면 이런 것이 있다.
이황의 문하생이자 후일 남인의 거두가 된 우성전(1542~1593)이 평양에 갔다가 기생과 정을 통하였는데, 우성전의 부친 우언인이 병으로 서울로 돌아와 있을 때 당시 평양감사가 우성전이 사랑한 기생을 우성전의 집으로 보내 주었다.
마침내 우언인이 죽자 많은 조문객이 왔는데, 그때 원래 우성전과 사이가 좋지 않던 동인의 영수 이발이 우성전의 집에 그 기생이 있는 것을 보고는 부친이 병으로 벼슬을 버리고 왔는데, 아들은 무슨 마음으로 기생을 싣고 왔느냐며 비아냥 거렸다. 이것이 우성전과 이발의 경쟁을 불러일으킨 원인이 되었다. 우성전은 남산 밑에 살아서 우성전은 남인, 이발은 북악 밑에 살아서 이발은 북인으로 불렸다.
그러나 동인이 남인과 북인으로 확실히 쪼개지는 단초로 작용한 사건은 앞에서도 언급하였듯이 저 유명한 ‘정여립 모반사건’이었으며, 그 중심에는 서인의 거두 정철이 있었다.
정여립 모반사건이란, 평소 '천하는 일정한 주인이 따로 없다'는 천하공물설(天下公物說)과 '누구라도 임금으로 섬길 수 있다'는 하사비군론(何事非君論) 등 왕권 체제하에서 용납될 수 없는 혁신적인 사상을 품었던 동인의 실력자 정여립이 모반을 도모한다는 상소가 선조에게 올라와 동인(특히 호남출신)의 선비들이 1천여명이나 옥사 또는 귀양을 갔던 비극적 사건을 말한다.
『…전주 출신의 정여립은 1570년(선조 3)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한 뒤 1583년(선조 16) 예조좌랑을 거쳐 이듬해 수찬(修撰)이 되었다.
처음에는 이이와 성혼의 문하에 있으면서 서인(西人)에 속하였으나, 이이가 죽은 뒤 동인(東人)에 가담하여 이이를 비롯하여 서인의 영수인 박순·성혼을 비판하였다. 이로 인하여 왕의 미움을 사자 관직에서 물러났으나, 인망이 높아 낙향한 뒤에도 찾아오는 사람이 많았다. 이후 진안군의 죽도(竹島)에 서실(書室)을 세워 활쏘기 모임[射會]을 여는 등 사람들을 규합하여 대동계를 조직하고 무력을 길렀다. 이때 죽도와의 인연으로 죽도선생이라고도 불렀다.
1587년(선조 20)에는 전주부윤 남언경의 요청으로 대동계를 이끌고 손죽도에 침입한 왜구를 물리쳤다. 이후 황해도 안악(安岳)의 변승복, 해주(海州)의 지함두(池涵斗), 운봉의 승려 의연(義衍) 등의 세력을 끌어모아 대동계의 조직을 전국적으로 확대하였다.
1589년(선조 22) 황해도 관찰사 한준과 안악군수 이축, 재령군수 박충간 등이 연명하여 정여립 일당이 한강이 얼 때를 틈타 한양으로 진격하여 반란을 일으키려 한다고 고발하였다. 관련자들이 차례로 잡혀가자 정여립은 아들 옥남(玉男)과 함께 죽도로 도망하였다가 관군에 포위되자 자살하였다. 이 사건을 계기로 전라도는 반역향(叛逆鄕)이라 불리게 되었고, 이후 호남인들의 등용이 제한되었다.….』(이상 네이버 검색)
한데, 동인세력이 비대해져 가는 것을 우려하고 있던 선조는 이 사건을 동인세력 견제에 이용하면서 ‘수사책임자’(위관)로 서인의 거두이던 정철을 임명하였다.
다음은 KBS-TV 「한국사 傳」에서 방영하였던 ’시인은 왜 당쟁의 투사가 되었나?‘ 편을 발췌한 내용이다.
『…1589년 10월. 역모가 고발된다. 조정 대신들 중에는 역모자였던 정여립과 친분이 있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리고 그들은 공교롭게도 모두 동인. 선조는 당시 서인의 영수였던 정철에게 기축옥사의 수사를 맡기게 된다. 그로부터 1000명의 넘는 선비가 죽임을 당한 기축옥사가 시작된다. “혼인을 안 하고 한방에 안질 않아요. 정철이 손하고 우리 손하고는 한방에 앉질 않아. 방에 갔다가 정철이 손이 있으면 그 방에 앉덜 않고 나와버려.”<광산 이씨 후손 인터뷰 中>
"정철이 항상 불평불만을 품고 있었는데, 역적의 변이 신하들 사이에서 일어났다는 말을 듣고는 스스로 오늘이야말로 내 뜻을 이룰 수 있는 날이라 여겨 자신이 신문하는 관원이 되어 일망타진 할 계책을 세웠습니다."<선조실록 84권 中>
정철을 위관으로 등용하여 옥사를 다스린 선조. 기축옥사는 선조의 지시로 이루어진 대규모 참사였다. 정철을 이용해 동인의 힘을 눌렀던 선조. 그러나 선조는 기축옥사가 얼마 지나지 않아 정철을 파직 한다….』
당시 정철이 파직 당했던 이유는 건저문제(建儲問題-세자책봉)를 제기하였다가 선조의 노여움을 샀기 때문이었다. 당시 세자로는 공빈 김씨의 둘째아들인 광해군이 가장 유력하였는데, 문제는 광해군이 적자가 아닌 서자(왕비가 아닌 빈의 아들)란 것이었다. 이를테면 정통성에 문제가 있었다는 얘기다.
때문에 선조는 늙은 나이에 얻은 인빈 김씨의 자식들 중에서 세자를 책봉하려고 하였다. 그래서 그 의사를 영의정인 이산해에게 물어보려 하였는데, 선조의 의중을 꿰뚫어본 이산해는 ‘와병’을 이유로 궁궐에 나가지 않고 말았다. (요즘 말로 하면 아프다는 이유로 ‘땡땡이’를 쳐버렸다고나 할까)
당시 영의정은 동인인 이산해, 좌의정은 서인인 정철, 우의정은 동인인 유성룡이 맡고 있었는데, 이산해가 예고없이 ‘땡땡이’를 치자 선조는 다음 순번인 좌의정 정철에게 의중을 물어보게 되었다. 본시 동인과 서인이 광해군을 추천하기로 합의한 사실이 있었던 지라, 정철은 선조의 의중이 신성군(인빈 김씨의 둘째아들)에게 있음에도 불구하고 기꺼이 광해군을 추천하였다.
이에 선조는 격노하고 말았다. 때를 같이 하여 ‘정철이 주색(酒色)에 빠져 국사를 그르치고 있다’는 안덕인의 논척과 양사의 논계 또한 빗발쳤다. 결국 정철은 파직된 뒤 명천․진주․강계 등지를 떠돌며 귀양살이를 하게 되었다. 이후 유성룡은 좌의정으로 영전되었고 선조는 서인의 세력을 누르기 위해 다시 동인을 중용하였다.
그 후 조정에는 정철에 대한 처단 문제가 화두로 등장하게 되었다. 동인 내부에서도 의견이 팽팽히 갈리었다. 이산해 등은 정철을 죽여야 한다는 강경론을 폈고, 우성전․유성룡 등은 굳이 죽일 필요까지 있느냐는 온건론을 폈다. 요컨대, 정철을 죽이느냐 살리느냐 하는 문제로 동인은 결국 분열의 길로 들어서고 말았던 것이다.
이산해가 낙북(洛北)에서 살았기 때문에 그를 지지하는 강경파는 북인(北人), 우성전은 남산 밑에서 살았기 때문에 그를 지지하는 온건파는 남인(南人)이라고 하였다. 남북 분당은 또한 학통의 분기이기도 했는데, 북인은 이산해, 정인홍 등 주로 남명 조식의 문인이 주축을 이뤘고 남인은 우성전, 유성룡, 이덕형, 김성일 등 영남쪽 퇴계 이황의 문인이 주축을 이뤘다.
이것이 동인에서 남인과 북인으로 분기(1591년)된 경위인 것이다.
그리고 그 얼마 뒤 임진왜란이 발발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