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살아 있다는 것
뭍에 잡혀 올라온 물고기가
온몸을 던져
바닥을 치듯이
그렇게 절망이 온몸으로
바닥을 친 적 있는지
그물에 걸린 새가
부리가 부러지도록
그물눈을 찢듯이
그렇게 슬픔이 온 존재의
눈금을 찢은 적은 있는지
살아 있다는 것은
그렇게 온 생애를 거는 일이다
실패해도 온몸을 내던져
실패하는 일이다
그렇게 되돌릴 겨를도 없이
두렵게 절실한 일이다
(16)
당신을 알기 전에는 시 없이도 잘 지냈습니다
밤늦게까지 시를 읽었습니다
당신이 그 이유인 것 같아요
고독의 최소 단위는 혼자가 아니라
둘이라는 것을
이제야 깨닫습니다
사랑을 만난 후의 그리움에 비하면
이전의 감정들은 아무것도 아니었다는 말도
시 아니면 당신에 대해 얘기할 곳이 없어
내 안에서 당신은 은유가 되고
한 번도 밑줄 긋지 않았던 문장이 되고
불면의 행바꿈이 됩니다
당신을 알기 전에는
시 없이도 잘 지냈습니다
당신을 알기 전에는
당신 없이도 잘 지냈습니다
(22-23)
희망은 가볍게 잡아야 한다
희망은 가볍게 잡아야 한다
새처럼 날아가 버릴지 몰라 힘껏 움켜쥐면
손 안에서 숨 막혀 죽는다
이제 막 날갯짓 배운 어린 새를 감싸듯이
손의 오목한 곳에 올려놓아야 한다
아니면 공중을 나는 깃털처럼
무게도 중력도 없이
머리 위에 내려앉게 해야 한다
다른 머리 위에도 날아갈 수 있도록
너무 세게 붙잡아 모서리가 부서지거나
매달리며 애원해선 안 된다
절박할수록 가만히 희망을 품는 법을 배워야 한다
희망은 숨을 쉬어야 하고
나무 위의 새처럼 스스로 노래해야 한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희망은 가볍게 붙들어야 한다
부서지기 쉬운 껍질 안에 절망이 웅크리고 있으므로
희망이 날아갔다가 언제든 다시 날아올 수 있도록
사방의 벽을 없애야 한다
그렇게 무한히 열려 있어야 한다
내가 희망을 잃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희망이 나를 잃어버리지 않도록
(50-51)
나의 전기 작가에게
불안한 생이 아니라 단지
불안한 날들이 몇 날 있었다고 적어 주기를
허무의 계절이 아니라 계절마다
허무한 감정이 두세 번 찾아왔을 뿐이라고
실수 많은 세월이 아니라
선택의 세월이었다고
발 헛디뎌 자주 넘어진 게 아니라
나만의 춤을 춘 것이었다고 써 주기를
우울한 시간이 아니라 다만
혼자 더듬어 나간 시간이었다고
고뇌의 날들이 아니라
희망의 불씨 뒤적인 날들이었다고
사랑이 아니라 집착이었다지만
집착이 아니라 소망이었다고 써 주기를
허약한 몸이 아니라 껴안다가 조금
부러졌을 뿐이라고
검은색 옷을 편애한 것이 아니라
마음의 격렬 감추기 위함이었다고
달처럼 이따금 혼자였을 뿐
어두웠던 것은 아니라고 적어 주기를
(66-67)
시가 써지지 않을 때면
시가 써지지 않을 때면
낯선 고장에서 혼자 산 두 해 동안
불타는 밀밭과 삼나무와 소용돌이치는 구름과
고독한 얼굴을 2천 점 넘게 그린
고흐를 생각한다
자신의 심장 안으로 태양을 훔치려다 미쳐 버린 사람
정신병원의 작은 창으로 보이는
별이 빛나는 밤을
그 창 크기의 화폭에 담은 사람
우리는 별에 다다르기 위해 죽는다고 말한 사람을
불안한 예감에 기쁨이 반으로 줄어들 때면
백내장으로 시력을 잃어 가면서도
매분 매초마다 빛의 변화를 감지하며
수련과 연못을 250점이나 완성한
모네를 기억한다
빛 번짐을 막기 위해 고독한 밀짚모자 눌러 쓰고
팔레트에 가득한 초록색 물감 섞고 또 섞어
수련과 연못의 경계를 지운 사람
날마다 전에 보지 못했던 것을 발견한다고 말한 사람을
내 운명이 내 운명인 것이 무거울 때면
중력의 법칙을 어기고
자유롭게 하늘을 나는 연인을 그린
샤갈을 떠올린다
닭과 염소와 꽃다발도 따라서 날고
한 여인을 사랑해 그녀가 죽어서도 창문으로 들어와
자신의 그림을 인도하며
푸른 캔버스 위를 날아다녔다고 말한 사람
삶이 언젠가 끝나는 것이라면
사랑과 혁명의 색으로 칠해야 한다고 말한 사람을
(92)
그것은 사랑이 아니었는지도 모르다
내가 당신을 사랑한 것은 어쩌면
사랑이 아니었는지도 모른다
내가 당신을 사랑한 것은
당신을 발견한 내 눈을 사랑한 것이고
당신의 목소리를 알아듣는 내 귀를 사랑한 것이고
당신과 함께 있을 때의
나를 사랑한 것인지도 모른다 어쩌면
당신에게 다가간 내 목숨을 사랑한 것이고
당신 곁에서 웃는 나의 아픔까지 사랑한 것이고
당신의 폐에 들어갔던 공기를 숨 쉬는
나의 폐를 사랑한 것인지도 모른다
지지대가 꽃나무가 사랑하듯이
슬픔의 무게로 기쁨의 가벼움을 사랑하듯이
아무도 모르게
당신을 사랑하는 나를 사랑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어쩌면 그것이 사랑이었는지도 모른다
(96-97)
곤충의 임종을 지키다
초록 여치 한 마리, 한 시간 넘게
가느다란 다리를 떨고 있다
작은 곤충에게도
죽는 일이 사는 일보다 더 어렵다는 듯
지금까지 겪은 어떤 일도
이 일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이제 끝인가 하고 보면
또다시 이어지는 경련
한 치의 벌레에게도 닷 푼의 혼이 있다는데
손가락 두 마디 길이의 존재를 잃는 전율
누구의 도움도 없이
혼자서 통과해야만 하는 영역
한 생을 얻는 일보다 한 생을 내려놓는 일이
몸서리치게 벅차다는 듯,
내가 죽을 때
당신에게는 그것이 살아 있는 내 모습을 보는
마지막 순간이겠지만
내가 당신의 살아 있는 모습을 보는 마지막 순간도
그것이라는 듯,
존재하는 것과 존재하지 않는 것 둘 다 고통이니
오랴, 내 차례여
나를 생각해 망설이지 말아라
(110-111)
나의 마음
봄날처럼 다정했다가 뼈를 부수는 서리처럼 냉정하고
무한허공처럼 넓었다가 토끼굴처럼 속 좁고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자유롭다가 그물에 걸린 물고기처럼 부자유하고
꽃 피는 소리 들릴 만큼 고요했다가 벌집처럼 소란하고
목화솜처럼 부드러웠다가 호랑가시나무처럼 날카롭고
무슨 일에도 무심했다가 사소한 일에 감정 과잉이고
오체투지 수행자처럼 인내심 많았다가 극의 방향을 잃은 나침반처럼 초조하고
속수무책으로 매혹되었다가 속절없이 환멸에 젖고
민들레 풀씨처럼 놓아주었다가 도깨비바늘처럼 달라붙고
살아 있는 모든 것에 가슴 뭉클했다가 반나절 만에 안색을 바꾸고
거리의 상점처럼 열려 있다가 봉쇄수도원의 덧문처럼 닫히고
새로 핀 분꽃처럼 희망찼다가 구겨진 포장지처럼 근심으로 얼룩지고
시냇물처럼 재잘거리다가 무너진 흙처럼 시무룩하고
한 개의 기쁨이 천 개의 슬픔을 잊게 했다가
한 개의 슬픔이 천 개의 기쁨을 잊게 하고
반딧불이의 꼬리처럼 환했다가 반딧불이의 얼굴처럼 어둡고
모두가 나였다가 누구나 타인이고
그래서 무조건적인 사랑이었다가 무조건적인 마음이고
그래서 더 바랄 게 없는 천국이었다가 혼자만의 지옥이고
삶의 암호를 이해한 것 같았다가 때로는 암호 그 자체인
나의 마음
(130-131)
물음표
우리의 눈은 사랑하는 사람을 발명하는 법을 어떻게 배웠을까?
내 눈썹을 그릴 때 신은 어디서 검은 색을 얻었을까?
바다의 결정체인 소금은 왜 파란색이 아닐까?
숯은 불을 어디에 감추고 있을까?
바람은 자신을 손짓하는 나뭇잎을 어떻게 찾아갈까?
돌이 흘리는 눈물은 왜 냉정하지 않고 고단해 보일까?
무는 세상의 무엇이 보고 싶어서 흰 목을 빼고 있을까?
지빠귀처럼 사람도 자신의 얼굴을 정하고 태어날까? 그 얼굴은 어디서 고를까?
아득한 높이에서 뛰어내리는 동안 빗방울의 심장은 두려울까? 두근거릴까?
거리에서 혼잣말하는 여인은 누구와 이야기하는 걸까?
속으로 우는 울음만큼 절창이 없다는 걸 갈대 피리는 언제 알았을까?
모든 전등은 왜 약간은 떨면서 켜져 있을까? 자신이 돌아갈 어둠에 맞서기 때문일까?
내가 그리워한 첫 대상은 무엇이었을까?
금 간 사랑을 꿰매려면 얼마나 긴 인동초 꽃실 빌려야 할까?
왜 우리는 평생을 함께 지내는 자신과 향복하지 않을까? 더 큰 형벌이 있을까?
억새는 왜 지나가는 모든 상처 입은 사람들에게 손을 내밀까?
내일을 알려면 얼마나 많은 어제를 불러 모아야 할까?
수십 억 인구 중에 왜 둘만으로 부족함이 없는 걸까?
나는 언제부터 당신의 나이고
당신은 언제부터 나의 당신이기로 결정했을까?
누가 인간의 몸을 본떠 물음표를 만들었을까?
(158-159)
낮달맞이꽃 피어 있는 곳까지
안데스산에 사는 케추아족은
미래를 뒤쪽이라 부르고
과거를 앞쪽이라 부른다지
미래는 볼 수 없지만
과거는 볼 수 있기 때문이지
저 앞에서 걸어가는
수많은 나를 보네
시인이 될 줄 모르고 처음 시를 쓴 나
운명이 불안한 영혼을 건드리던 나
물집 같은 사랑이었던 나
아무리 물을 마셔도 목이 마르던 나
중고 책방들에 흩어져 있는 내 시집을 발견한
작년의 나
지구의 그림자 속을 걷던 지난겨울의 나
낯익은 것은 낯설음뿐인
언제나의 나
내일의 나를 희망한 어제의 나
수많은 내가
저만치 앞에서 걸어가네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는 채
낮달맞이꽃 피어 있는 곳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