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마비는 중국에서 기원되어 유학과 성리학의 보급으로 한반도에 정착되고
일본, 베트남에도 남아 있는 극동 고유의 국가유산이다.
대부분 하마비는 1413년이 최초라 하지만 하마비 전문가인 필자가 연구 한 결과는 고려시대에
성리학이 보급되면서 하마비를 세운 것으로 보인다.
즉 1413년 이전에도 하마비를 세운 기록이 보이고 있다.
하마평도 근대 개항기에 들어온 일본의 말인데 아직도 하마평, 하마평 시부리고 있다.
공부도 제대로 안하고 마음대로 말하는 수준을 보면 한심하다.....
서울의 하마비를 조사하려면 여러번 올라가야 하는 어려움이 있다.
필자가 서울의 하마비를 조사하는 과정에 서울을 몇번을 갔는지 모를 일이다.
경모궁 하마비는 자료를 조사 하는 과정에서 알아내 문화청에 문의 하였으나 수준 떨어지는 고함 소리만 들었고
, 민원인 물으면
정확한 답만 하면되지 고함에다 불친절에다 수준 떨어지지....한심하다못해 더 한심에다 수준 이하지
어디 있는지 모른다 하기에 종로구청에 문의 하여 알아 냈다.
뒷면을 보려다 손톱을 찍혀 피나는 손톱을 가지고 종로를 뛰어 다닌 기억이 아직도 난다.
서울 금암공원에 가기 위해서 지하철을 타고 가서 내려 걸어가면 몇 발되지 않지만 초행은 길을 몰라 택시를 타고가다가
중간에 내린 기억이 있다.
정조가 할아버지 인 영조를 기리면 세운 검암기적비 앞에 있는 하마비로서
아름다움과 멋진 글씨가 일품인 하마비이다.
원래 남묘는 서울 역 부근에 있었으나 허물어져 은평구로 이사 하고 난 뒤 찾아갔으며,
그 곳에는 위엄있는 얼굴을 한 분이 나를 보더니 관우의 형상에게 절을하라해서 절을하고 난뒤
이고저곳 보고 왔으며, 하마비는 중정에 있었다.
그리고 몇년이 지난후 남묘는 어디로 갔는지 행방불명이다/
덕수는 은퇴한 임금의 자리를 대부분 덕수궁이라 한다.
중국의 영향을 받아 명명한 곳으로 여기에 하마비는 중정에 있으며 원래 하마비는 삼문 밖에 있어야 하나
그렇지 못하다.
이 하마비를 촬영하고 나서 다시가야지 하면서 그냥 내려온 하마비이다.
이 하마비는 대부분 송시열과 관련 짓지만 필자의 생각은 북묘 하마비라 보는 것이 맞다고 생각한다.
하마비는 송시열 무덤에도 없고, 송시열과 관련된 하마비는 대전에만 있기에 생가지에 있는 경우는 더물기에 북묘 하마비로
보는 것이 맞다.
서울 엣돌박물관에 있으며,세중옛돌에 3좌의 하마비가 있었으나 사진 속의 하나만 남았다.
동묘 하마비는 중국의 장군 관우를 모시는 사당이며, 전국에 관우 사당이 많이 남아있으며
그 곳에 하마비도 남아 있다.
중정에 있었으나 지금은 외삼문과 내삼문 사이에 있는 하마비 이다.
현재 남아있는 하마비 중 제일 오래된 하마비 성균관 하마비이다.
불쌍한 비이다.
탕평비는 비각에 보존되고
하마비는 비를 맞고 있으니 가장 차별 받는 하마비이다.
우리나라에서 제일 오래된 하마비 이고 년대가 정확한 비가 천대 받고 있으니
국가유산이라 하지만 제대로 된 관심 보존이 시급하다...
이왕이면 비나 바람을 피하게 했으면 좋을텐데
풍문여고 있는 하마비로 원래자리는 안동별궁 하마비이다.
고종에 가례를 올렸던 자리라 하마비를 세운 것으로 보이며,현재는 풍문여고가 이사를 가
서울 강남으로 이전 되었다.
서울에는 향교가 없었으나 행정개편으로 경기도의 지역이 서울에 들어 오면서 양천향교가 서울 에 들어 왔다
원래 서울은 성균관과 사부학당이 있었기에 향교는 원래는 경기도 이다.
이곳 하마비는 새로이 만들어 세워서 하마의 예를 알리고 있으며, 도심에서 멀어서 가기 어려운곳이다.
이상길은 묘는 서울 북부 지역에 있으며, 택시를타고 가서 내리리 산 번지라 엉뚱한곳에 내려
다시 내려가 택시를 타니 15년 경력이 아니면 찾지 못한다는 이야기를 한다.
택시비만 날렸다.
이상길 묘의 하마비는 임실에 있는 정려와 같은 재질으 ㅣ돌로 만든것으로 생각된다.
이화여고 박물관하마비는 일본인들이 만든 것으로 명문이 우리와 같게 만들어 부근의 왕릉의 하마비로 착각하게 만들었다.
이조별서 하마비 임금의 어필과 흔적이있기에 세운 하마비 이걸 보려고 3번이나 갔다.
뒷면 촬영 못하여, 실측하려 가고 참 돈 시간 낭비다.
전주이씨 왕실의 사당의 하마비로 종묘하마비이다.
원래는 하마비는 임진왜란때 소실되어 다시 만들지만 스님들이 만들었다는 기록이 보이나.
잉여적 표현의 최초의 작례이다.
진관사 하마비 보기 드물게 전서체로 되어 있어 눈에 띄.며,근래에 만들어서
더욱 보기 좋은하마비 이다.
영조의 친모를 모시는 사당으로 지금은 개방하지만 필자가 갈때에는 청와대 관람후 보고 나온 것이다.
보기 어렵고 어려운 하마비였는데 다시가야지 하면서 안 가지네
한국은행 남문에 있는 하마비 세운시기를 알 수 있으나 년호가 없어 언제인지
정확 히 모르는 하마비
서울에는 18좌의 하마비가 있었으나 지금은 17좌이다.
삼성출판박물관 앞의 하마비는 원래의 자리인 경남 웅천으로 갔다.
서울하마비는 있어도 거리상 가기 어려우 곳이다.
최소한 성균관 하마비는 비라도 안 맞게 했으면....
옥산 이희득
하마비를 찾아서 저자